도미니크는 추리를 전개하는 동안 대단한 자신에 차 있었으나, 조지가 침묵에 잠기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모든 희망을 한꺼번에 건 뒤에 허전하고 불안한 바람이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용기를 북돋워 줄 만한 말을 기대하는 눈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으나, 아버지의 무표정한 침묵은 그의 용기를 깎아내릴 뿐이었다. 조지가 잠시 동안 마음속의 거울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참다못해 도미니크가 외쳤다. "아버지, 잠자코 계시지만 말고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 아버지는 키티가 유죄를 선고받아 한평생 형무소 생활을 해도 아무렇지 않으세요? 아버지는 그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로군요.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구경만 하겠다는 거예요!" 그 말에 놀라 생각에서 깨어난 조지는 아들의 가슴팍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저 해보는 시늉으로 심하게 흔들지는 않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미니크의 입에서 튀어나오던 외침이 뚝 끊어졌다. 그의 뜻하지 않은 역습이 앞서 조지가 받은 것보다 훨씬 큰 충격을 아들에게 주었다. "좀 지나치구나, 돔. 조심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언 반구 말씀이 없으니 너무하세요. 제가 그만큼 이야기를 했으면 무슨 말씀이 있으셔야지요." "그래, 나보고 실토를 하라는 거로구나. 그것도 좋겠지. 만일 네가 오늘 오후 그 숲에 가보았다면, 그 부근에 경찰이 쫙 깔려 있는 것을 보았을 거다. 장갑 수색작전을 펼친 거야. 지금까지 여러 곳을 그런 식으로 집중수색을 해봤지. 우리로서는 그곳이 논리적인 필연성을 갖는 장소인지는 너만큼 확신을 갖지 못한다고 해도, 그 장갑을 찾으려는 열의만은 너보다 못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에 묻은 피 얼룩이 정말로 상황에 들어맞는 것인지 아닌지도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너만이 아니란다, 돔. 그리고 그날 밤 키티가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지. 너도 그 방면으로 머리를 돌려 봐. 그리고 만일 어떤 해답을 얻거든 곧 알려주고." 그 뒤를 이은 침묵에 내포된 날카로움과 암시로 해서, 도미니크는 말이 적은 편이 오히려 쉽게 이해를 얻어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침착한 척하고 아버지를 지켜보며 앞자락을 매만지면서 점잔을 빼기로 했다. 한결 밝고 부드러워진 그의 눈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군요! 경찰들은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해 그 장갑을 찾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군요. 사건을 원점으로 돌리기 위해 그걸 찾고 있는 거였어요. 아버지도 그녀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죄송해요, 그런 소리를 해서. 아버지도 저도 결국은 같은 길에 다다른 거예요...... 도미니크는 자기의 신념을 관철하는 데 있어 더 이상 고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위안을 얻고 용기를 되찾았지만, 주근깨가 두드러진 아버지의 이마에 어린 신중을 가장한 고요의 그늘에는 다른 무엇인가가 -- 무엇인지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신경쓰이는 무엇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협력자가 나타난 것을 기뻐하고 용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 얼굴에는 환영의 빛과는 거리가 먼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너무나 꼼꼼이 그 협력자를 관찰한 것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써, 비상한 통찰력으로써 아버지의 얼굴에서 번민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협력자는 필요했으나, 경쟁자는 달갑지 않았다. "예, 나도 그쪽으로 신경쓰고 있어요. 아니, 신경을 쓰고 있다기보다는 해답을 거의 얻었다고 할 수 있지요." 도미니크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해답이라는 것을 아버지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조지는 지평선상에 또 하나의 깃발을 보았다. 그것은 미녀의 수호자로 자처할 경주가 벌어지는 경기장을 향해서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 제 12 장 월요일 아침, 앨프리드 아마이저의 유해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침울한 얼굴의 아들을 거느리고 묘지로 향하기 한 시간쯤 전에, 키티 노리스는 법정에 2분 가량 출두해서 일주일 간의 재구류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그 간단한 법정수속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은 채로 주위의 누구에게도 -- 그녀 때문에 출두한 레이몬드 셸레이에게조차 -- 미소는 고사하고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다. 낯선 장소에 혼자 떨어져서, 제멋대로고 위압적인 낯선 사람들의 중압에 눌린 소녀처럼 그녀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피고석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선고를 들었다. 이틀 전까지 계속된 눈물과 불면 때문에 움푹 들어간 그녀의 눈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천천히, 기죽은 기색도 없이 둘러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떠밀어 흘려 보내려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법정에 데리고 나온 조지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도미니크가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 것인가 생각했다. 그녀가 법정에서 머문 몇 분 동안에 뉴스는 삽시간에 퍼져, 상당한 인파가 재판소 앞으로 모여들어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지가 그녀를 감쌀 틈도 주지 않고 카메라맨 하나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플래시를 터뜨렸다. 차에서부터 의상은 물론 데이트 상대까지 늘 지방신문에 오르내리던 키티 노리스는 예고도 없이 새로운 역할로 잠시 모습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톱기사감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거친 호기심을 무서운 악의로 받아들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조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다시피 해서 차에 태웠다. 차가 달리기 시작한 다음에도 군중의 눈과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마 동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수선을 피우지요? 도대체 내가 저 사람들에게 어쨌다는 거죠?" 키티가 몸을 떨며 물었다. 차에 함께 탄 여순경이 달래듯 말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악의가 있어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저 구경삼아서......신경쓸 거 없어요." 조지는 자기의 옷소매와 키티의 옷소매가 스치는 것과 아까 가슴을 파고들던 그녀의 체온의 짜릿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안정을 되찾게 해줄 적절한 말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여순경의 그 간단한 위로가 의외로 키티의 마음을 가라앉게 해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에게는 아무 말도 없었거니와 도중에 지친 머리를 기댄 것은 여순경의 어깨였다. "용기를 내요, 키티." 그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차에서 내리게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이름이 그의 의지를 거스르고 튀어나오려고 혀끝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네, 하지만 왜죠?" 키티는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 그리고 당신을 믿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서도 꿋꿋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경찰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감상적인 말을 입 밖에 내고 나서 그의 목 근육이 화를 내듯 굳어졌다. 잠시 뒤, 그는 그녀가 그 말을 오해한 것을 알고 씁쓸한 뒷맛을 십어 삼키며, 역시 나에게는 아내인 밴디가 알맞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키티는 갑자기 감동한 듯 거리를 좁히더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네, 알겠어요. 도미니크를 슬프게 해서는 안되지요. 저, 링의 공이 울리면 당당히 싸울 거라고 아드님에게 전해 주세요. 도미니크만 제 옆에 버티고 있어 주면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요." 하기야 그것이 나에게 알맞은 역할일지 모른다 -- 하고, 조지는 코마번 중심가 쪽으로 되돌아가며 생각했다. 나는 주춧돌과 같은 존재지. 어쩌면 인간이 아니라 관청의 창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결코 호의적이 아닌, 적의까지 품고 대하는 창구. 하지만 왜 가슴이 설레는 걸까......그는 내뱉듯 혼잣말을 해봤지만, 씁쓸한 뒷맛은 더할 뿐이었다. 질투란 언제나 굴욕적인 것이다. 특히 자신의 아들에 대한 질투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다. 마음의 아픔과 양심을 찌르는 죄책감이 밴디에게 좀더 사려깊고 짙은 애정으로 대하게 만들었다. 밴디는 여러 해에 걸쳐 자기를 알고 있고, 내색은 하지 않지만 현명한 여자이므로 그런 유별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하지만 오랫동안에 걸친 원만한 결혼생활은 그녀의 경계심을 말끔히 가시게 했고, 어쩌다가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러운 것이어서 뒤탈이 없었다. 어쨌거나 아내는 마음으로부터 그를 사랑했고, 아내로서의 위치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성과도 없는 며칠을 보낸 어느 날 밤, 조지는 얕은 잠에서 깨어나 아내를 더듬었다. 좌절로 마음이 무거울 때면 그것을 떨쳐 버리듯 아내의 품안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두 사람의 여성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두 팔을 벌려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조지가 원하는 -- 필요로 하는 -- 어떤 여성이라도 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대개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키티가 그날 밤 전화로 도움을 청한 사람이야말로 아마이저 살해범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확신에 가까운 가설을 밴디에게 들려준 것도 수요일 새벽이 가까운 한밤중이었다. "하지만 키티 자신은 조금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닐까요?" 밴디가 말했다. "만일 그녀가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휘발유를 조금 갖다 주었다고 해서 그 범인을 감싸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응, 그건 그럴 거야. 그녀는 친밀하고 절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을 테니까. 실생활에서는 책에 나오는 비인간적인 퍼즐 같은 수사방법을 취하거나, 동기나 기회가 있다고 해서 모두 의심하지는 않아. 즉, 각 대상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걸로 어느 정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는 거요. 쉽게 말하자면, 살인을 할 만한 사람과 어림도 없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지. 예를 들어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당연히 제외가 되지. 키티가 전화를 건 상대도 키티로서는 당연히 제외될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가령 당신이 도움이 필요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고, 내가 달려갔는데 그 부근에서 수수께끼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과연 당신 머리에 떠오를 것 같소?" "그런 생각은 백만 년이 지나도 내 머리에 떠오를 리가 없어요 -- 나에게는 둘도 없는 당신이니까요. 다른 사람을 의심할 게 뻔하지요." "그럼, 돔은 어떨까? 아니면 스티브 아저씨나?" 그녀는 잔소리가 심하기는 하지만 부모 대신에 자기를 키워준 인자한 외삼촌의 얼굴을 눈앞에 떠올리며 픽 웃었다. "못하는 말이 없네요! 그런 성자 같은 분을 끌어들이다니." "그럼, 데이켓 총경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아요.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서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악한 일은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인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눈 딱 감고 철저히 파헤쳐 보지 그래요. 키티에게 그런 방향으로 접근해 보셨나요?" "응,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 키티를 머리에 떠올린 순간, 흥분과 불안이 그의 숨결을 흐트러뜨렸다. 밴디의 머리에 입을 가까이 하고 목소리를 낮게 깔아보았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말이야, 그 전화에 관한 질문에는 전혀 대꾸를 하려고 들지를 않아. 그녀가 그날 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실토를 하지 않는 거라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거나 아예 외면해 버리고 마는 거야. 나는 물론, 데이켓 총경의 심문에도 꼼짝도 하지 않아. 도대체 입을 열지를 않는 거요. 물론 그녀가 전화를건 사람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말도 했지. 구슬러도 보고 얼러도 보고 부탁까지 해봤지만 입을 다물 뿐이라고." "도움을 청한 그 사람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걸 거예요, 아마." "틀림없어. 내색은 하지 않지만." "자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죄가 없는 그 사람에게 그녀 자신의 고통을 나누어 갖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겠죠." "바꾸어 말해서, 우리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 대해서도 유죄로 할 만한 증거를 잡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지." 조지는 투덜대듯 말했다. 그리고 어떠한 외부 압력에도, 무거운 짐을 진 그의 절망적인 혼란에서조차도 변함이 없는 밴디의 존재가, 그녀와 그의 동질성이 갑자기 고마워져서 그녀를 와락 껴안고는 아내의 목덜미의 따뜻한 살갗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남편을 좀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 살며시 몸을 돌려 그를 가슴에 안았다. "그럼, 데이켓 총경은 아직도 그녀의 범행으로 믿고 있나요?" 그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그렇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갑자기 피로가 느껴지면서 말조차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우물거리는 입모양이 마치 키스할 때의 그것과 흡사했다. 사실 그는 도중에서 그대로 키스로 바꿨다. "그렇다면 총경은 그녀를 유죄로 몰고 가려고 하고, 당신은 키티가 결백하다고 믿는 그 남자를 유죄로 믿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네요. 하기야 키티도 딱한 입장이군요. 잘못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가는 뜻하지 않은 폐를 끼치게 되니까. 그녀가 자기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을 단념하고 입을 다물려고 하는 것도 당연할지 몰라요." 조지는 한 순간 울컥해서 거기에 반박하려고 했다. 그는 그런 일에 죽자사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단죄를 위한 단죄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X의 행동을 신중히 논리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는 입안에서 그렇게 말했다. 동트기 전의 고요 속에서, 도미니크가 토요일 저녁에 조지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말을 그에게 선전포고로 내던졌을 때 이상으로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사이를 두고 밴디가 말을 이었다. "그런 상태라면 키티는 당신에게 입을 열 것 같지 않군요. 누군가 그녀가 그것을 털어놓을 만한 상대에게 부탁을 하면 어떨까요? 나는 당신만큼 키티를 모르지만 -- " 그녀의 손이 조지의 볼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의 굴욕적인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의 비밀을 알 까닭이 없으니까......하지만 그는 그녀가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공연한 망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혹시 레슬리 아마이저에게 부탁해서 그녀에게 진상을 물어보게 하면 그녀도 결심이 꺾여 모든 걸 고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생각이 틀렸는지 모르지만 - 20- " 밴디는 자기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두 젊은이는 거의 남매처럼 자란 사이고, 또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왜죠?" "레슬리가 바로 그 남자일 것 같아서 말이오! 아직 깨뜨릴 수 없는 벽이 하나 가로놓여 있기는 하지만, 레슬리가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해." 그는 그녀가 놀라움과 의아스러움으로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를 매만지던 아내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의 셋방에 전화가 없는 것은 사실이야. 그는 은연중에 그런 말을 비치기도 했지. 하지만 막대한 재산이 굴러들어갈 곳이라고는 그곳밖에 없거든." 그는 신체적으로는 그녀의 품에서 반은 잠들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괴로울 정도로 말똥말똥해서 아내의 숨소리를 피부로 느끼고, 그녀가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을 의미의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레슬리라는 건지 나는 모르겠네요." 밴디가 명백히 잘라 말했다. "그야, 나도 단언할 수는 없어요. 전화가 없으니 말이야 -- 아무래도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거든."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말이에요, 비록 레슬리에게 전화가 있었다 해도 키티는 그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당신이 왜 레슬리를 지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랍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그녀의 볼에 입을 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키스를 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정말 불쌍한 양반!"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녀 역시 남편을 품에 안은 채 어느덧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새벽에 눈을 떠 문득 아내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벌떡 윗몸을 일으켰다. 사건 전체를 원점으로 돌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뭔가 서광이 비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이윽고 그는 밴디가 잠을 깨지 않도록 가만히 몸을 눕히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하여 수사를 개시했다. 그날 저녁 늦게, 노력에 비해서 별 소득이 없는 하루의 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그는 가방을 챙기고 모자를 벗어 거는 동안에 거실에서 달려나온 도미니크를 보고도 여느 때처럼 웃는 낯을 보일 기력이 없었다. 넥타이를 푸는 그의 앞에 걸린 거울 속에는 회갈색 머리가 이마 위에 몇 가닥 축 늘어지고, 피로에 지친 41세의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 곁에 별안간 신선한 우유처럼 싱싱한 16살난 소년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해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린 듯 짙은 눈썹, 풍성한 머리칼......삶의 어려움이나 걱정은 물론 얼룩이나 때 같은 것과는 인연이 먼 젊고 순진한 얼굴이었다. 그것과 대조를 이룬 자신의 몰골이 불쾌할 뿐만 아니라, 그의 기대가 배반당한 어떤 뉴스를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듯한 도미니크의 진지한 눈길조차도 사정없이 그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안됐다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조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미니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코트를 들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조지의 움직임을 불안한 눈이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문제의 장갑을 찾는 일을 오늘까지만 경찰에 맡기기로 했던 도미니크였다. 하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면 더 이상 경찰에 기대를 거는 일은 부질없는 일일 것 같았다. 더 기다린다고 해서 경찰에 요행이 있을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그 손목을 잡고 끌고 오기 전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이 뗏목으로 막히면 누군가가 돌파구를 만들어 흘러가게 해야 한다. 도미니크는 그 돌파구를 열 다이너마이트의 구실을 할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자부심과 용기가 필요했다. 더구나 도미니크의 가슴에 숨겨진 당돌한 작전에 경찰의 지원 같은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었기에 아버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자칫 한마디라도 누설했다가는 즉시 작전 전체가 산산조각날 것이다. 그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비록 도중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아버지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작전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완벽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미심쩍은 것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맺은 묵계도 있고 해서 그에게는 물어볼 수 없었고, 레슬리 아마이저에게 물어보면 말해 줄 것 같았다. 도미니크는 밴디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며, "저, 잠깐 나갔다 올께요, 어머니." 하고 말했다. 8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을 했으나, 행선지나 이유는 묻지않고 단지 이렇게민 말했을 뿐이다. "그러려무나. 너무 늦으면 안된다, 돔." 좋은 어머니다. 도미니크는 별안간 어머니를 꼭 껴안고 싶었지만, 그녀가 뜨거운 다리미를 들고 있어서 그만두었다. 그는 아직 숙제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으나 그녀는, "너는 학교 숙제가 남아 있지 않니?" 라고 아픈 곳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들이 며칠 동안이나 공부에 열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개의 어머니들은 잔소리를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그는 자전거를 몰아 코마번으로 가서, 해크니스 부인의 낮은 철대문을 들어섰다. 밖에 아마이저 부부의 셋방으로 통하는 벨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고장이 잦았으므로 현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뛰어올라, 직접 그들의 방을 노크하기로 마음먹었다. 셔츠 차림의 레슬리가 담배 연기가 자욱한 속에서 테이블에 수북히 쌓인 책 너머에 앉아 있었다. 학교 숙제에 손도 대지 않고 있는 도미니크에 비하여 레슬리는 공부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학위도 얻기 전에 나와 버렸다. 그의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행동했고, 돈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사교적으로는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학업은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만 꾸려 나갔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16편 →
17편부터
17편
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17편 (17/23)
늙은 지도교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교수의 보수적인 대학관에 보답하기 위해 교수를 만족시킬 만큼의 공부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혼과 책임이 그의 긴 청춘시대의 막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