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지꼈던 손가락이 갑자기 퉁기듯 갈라졌다. 그 손으로 자제력을 잃은 얼굴을 감싸며 그는 소리를 죽인 오열에 잠겨 어깨를 들먹였다. 그 흐느낌은 쉽게 멎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밀턴 양은 담배를 재떨이에 놓고 그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웠으나 차차 세차게 힘을 주어 흔들었다. "자, 그만 울고,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걸 어디서 발견했지? 경찰이 못 찾은 것을 넌 용케도 찾아냈구나."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깨를 들먹이며 간간이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우연히 발견했을 뿐입니다. 만일 제가 당신에게 자세한 것을 이야기해 버리면 당신까지 거짓말을 하게 될 겁니다." "애, 난 너의 힘이 되어주려는 거야. 네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정말로 그것이 얼마만큼 중대한 일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잖겠니? 네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는 일 아니야? 어쩌면 그것은 범행에 쓰인 것이 아니어서, 네가 조금도 괴로워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고." "아닙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범행에 쓰였던 겁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만일 경찰에서 안다면 -- 그녀는 이제 -- 모면할 길이 -- " 흐느낌이 심해져서 그의 몸에 경련이 일고, 그녀가 아무리 참을성 있게 질문을 해도 계속 울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반은 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단 단념을 하고 사무실과 이어진 욕실로 가서 컵에 냉수를 담아 왔다. 그녀는 위엄을 갖춘 태도로 말없이 컵을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그는 아직 띄엄띄엄 격하게 파도치는 경련으로 몸을 비틀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순순히 물을 받아마셨다. "그 장갑에는 피가 --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녀는 도미니크의 등뒤에 서서 착잡한 생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등으로 마구 눈물을 닦고 구겨진 손수건으로 흐느낌을 억눌렀다. "그래서 셸레이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구나?"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그녀의 대리인입니다. 사실대로 얘기하 면 그 장갑을 맡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분이 책임을 지시고......저는 아버지가 경찰관이어서 -- " 해밀턴 양이 의미심장한 투로 말했다.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아예 그 장갑을태워 없애버리고 모르는 척하지 그러니?" "예?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면 쓸데없는 걱정을 왜 하겠습니까. 제 입장을 모르시나요? 제 아버지는 -- 아아,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진심으로 저를 믿고 있답니다!" 그는 격하게 몸부림 쳤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시금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전, 저는 키티를 살려내고 싶다고요!" 16살의 비련은 보기에도 딱했다. 그의 심정에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했다. 해결책은 어찌되었든 문제의 소재는 명백해졌다. 그는 스스로 찾아낸 무거운 짐을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어깨 위에 얹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누가 그를 대신해서 그 시급한 짐을 져주어야 한다. "도미니크, 너는 진심으로 키티가 아마이저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구나?" 그녀가 물었다. 키티는 어디서 이 갸륵한 숭배자를 만나고, 어떻게 해서 서로 세례명으로 부를 만큼 친한 사이가 되었을까 -- 하고 해밀턴 양은 의아해 했다. 하긴, 키티는 원래 사교적이고 종잡기 어려운 여자였으니까.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용기를 내어 그 신념을 관철해야 해. 셸레이 씨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분은 법률 전문가니까. 그런 분에게 그런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잔혹하거든. 정 뭣하면 내가 맡아 주지. 나는 법률가가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뗄 수 있어." 도미니크의 긴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큰 눈이 당혹감과 희망으로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라 말했다.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나는 키티를 형무소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 비록 그녀가 정당방위나 어떤 이유로 그 거친 영감을 죽였더라도. 물론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키티가 한 짓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지만 말이야. 그러니 그 장갑을 발견한 것은 나라고 해두는 것이 어때?"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렇게 해주시면 전 살 것 같겠는데 -- " "내가 그걸 어떻게 처분하든 너는 신경쓸 거 없어. 너는 장갑을 내게 넘겨주고 그걸로 말끔히 잊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네가 그걸 발견한 일도, 나에게 준 일도 모두."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는 학교에서 곧장 이리로 왔기 때문에 그 장갑을 지금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런 재수없는 것을 하루 종일 갖고 다닐 순 없거든요. 잘못해서 흘리면 큰일이고, 또 교실에는 악의는 없다 하더라도 짓궂은 친구들도 있어서요 -- 만일 그 녀석들이 끄집어내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오늘 저녁 피아노 레슨 때문에 다시 한 번 코마번에 나와야 합니다. 그때 갖고 와서 당신에게 드렸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요?" "물론 상관없어. 그런데 오늘밤 클럽에 나가기로 했는데......피아노 선생님 댁은 어디지?" 그는 차츰 기운을 차리고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되돌아갔다. 그 집은 교외의 브룩 가(街)에서 헤딩턴 골목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었다. "레슨은 9시에 끝나는데, 저는 대개 9시 20분 버스로 코마퍼드로 돌아갑니다." "오늘밤은 버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때쯤에는 클럽의 모임도 끝나니까, 내가 브룩 가까지 차를 몰고 가서 너를 태워 집에 데려다 줄께. 9시에 거기에서 만나기로 하자. 됐지?" "네, 됐습니다. 수고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재빠르게 눈을 닦고는, 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올렸다.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여 드려서 부끄럽습니다. 정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 " "이젠 괜찮아?" "네, 안심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기 세면장으로 가서 얼굴을 닦고 집에 돌아가도록 해. 이제 걱정 같은 건 그만하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면 안돼. 잘못되면 우리 둘 다 모두 난처해지니까." "네,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굳게 약속했다. 그녀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 쥐죽은 듯 고요한 홀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갔다. 조명을 끄고 현관에 자물쇠를 채우고 밖으로 나왔을 때, 소년은 힘을 되찾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어린애 같은 추태를 부렸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애써 어른스럽게 달려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그녀의 크고 낡은 라일리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까지 의젓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줄까? 어서 타." "아, 아닙니다. 자전거를 타고 왔거든요. 정문 곁 자전거 세워두는 곳에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자동차 문을 열어, 그녀가 운전석에 자리잡은 다음에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계기판 옆의 대시보드(자동차 운전석 앞에 붙어 있는, 물건을 넣어두는 곳)에서 검은 가죽장갑을 꺼내어 손에 끼고서 시동을 걸 때까지 차 곁에 꼿꼿이 서 있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뒤쪽으로 가서 그녀가 차를 돌릴 공간을 살펴준 뒤, 미소를 짓고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그는 차가운 바람에 문득 잠이 깬 것처럼 자전거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날렵하게 올라타고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가게 문이 여기저기 닫히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듬성듬성해진 거리의 불빛이 젖은 보도 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제 14 장 브랜던 루카스 교수가 어느 주말에 열리는 미술강습회에 가는 도중에, 큰맘먹고 길을 돌아 아마이저 내외를 방문한 것은 목요일 해질 무렵이었다.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강습회였지만, 경솔하게도 약속을 해놓았던 것이다. 앞서 큰맘먹고라고는 했지만, 방문 그 자체가 예정에 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수는 '즐거운 여자' 간판에 관한 조사자료를 갖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거로운 강습회 장소까지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고, 또 곧장 그곳으로 가는 데 대한 저항감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이번 방문은 뒤로 미룰 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뭣 때문에 저녁식사 때에 맞추어 강습회에 도착할 필요가 있지? 에란스우드 대학에서 지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번에도 형편없는 식사를 먹게 될 것이 뻔했다. 거기에 비해서 코마번에는 작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 식당이 있다. 하기야 엷은 안개가 늦게 도착한 핑계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이저 내외에 대한 방문과 그 용건은 훌륭한 핑곗거리도 되겠고, 또한 그것은 요즘 보기 드문 이야깃거리라서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변변치 못한 예술 논의를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상당한 근시에다가 그때는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아서 레슬리 전용의 초인종을 눈여겨 보지도 못했고, 또 그런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라 해크니스 부인의 노커를 마구 두들겨 대서 해질 무렵의 고요를 깨뜨리는 동시에 깜짝 놀란 부인 자신을 끌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루카스 교수는 해크니스 부인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했고, 그것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기에 이 신사의 방문은 레슬리에 대한 그녀의 평가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았다. 교수는 아마이저 내외를 내려오랄 것도 없이 직접 계단을 올라가, 열린 문 저쪽의 이름뿐인 싱크대에서 접시를 닦고 있는 셔츠 차림의 레슬리를 발견했다. 마침 주전자에서는 향기 짙은 커피 냄새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교수는 일부러 탄성을 올렸다. 이거 잘됐군! 플라잉 호스 호텔의 요리는 먹을 만했지만 커피만은 못 봐주겠었는데 -- 라고 임기응변식으로 말을 꾸며댔다. 그렇게 해서 아마이저 내외로 하여금 저녁식사 걱정을 덜게 하게끔 선수를 쳤던 것이다. "실은 주말 약속에 가는 도중이라 오래 머무를 수는 없지만, 잠시 들러 얘기해 줄 게 있어서 들렀네. 간단히 말해서 자네가 의뢰한 그것은 대단히 흥미진진한 것이었다네." 레슬리는 걷어올렸던 소매를 내리며 싱크대에서 돌아와 커트글라스를 꺼내어, 버니 윌슨이 여름 휴가중 프랑스 여행 선물로 갖다준 반쯤 남은 코냑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한편, 진은 레슬리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예쁜 유리 그릇에 초콜릿 비스킷을 수북히 담아 들고 왔다. 그런 것이 입맛이 까다로운 노교수에게는 달갑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비스킷은 자주, 그러면서도 두드러지지 않게 교수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진은 낡은 바지를 벗고 벌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이 그녀의 머리를 짙은 밤색으로 돋보이게 했고, 살갗을 밤이슬처럼 정갈하게 느끼게 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말다툼이 될까 봐 마치 남남처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일단 남편의 체면을 세워 주어야 할 일이 생기면 진은 돌변해서 이런저런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그것이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나요? 제가 직접 살펴보고도 싶었습니다만 섣불리 손댈 수가 없어서......" "그 그림에 대해서 뭐 짚이는 거라도 있나?" "아,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만 대충 짐작은 갔습니다 -- 제작 연대라든가 작가의 스타일 같은......" "그걸 누구 다른 사람에게도 보였었나?" "네, 이 근처의 화상에게 감정을 부탁한 적이 있었지요. 그 사람 말에 의하면 그 간판의 원화는 코츠워스라는, 18세기 무렵의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향토화가가 그린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거 지독하군!"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카이젤 수염 끝을 창처럼 천장을 향하게 하고는 크게 웃었다. "장삿속이 빠른 사람이라, 팔라고 하면서 600파운드까지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자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단 말이지? 그거 잘했군! 그렇다면 자네는 그 그림이 코츠워스 같은 엉터리 그림쟁이의 작품보다 월등하리라는 것을 꿰뚫어 본 거로군. 정말 용하네. 하기야 실제적인 시장 가격은 그렇게 높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런 뜻밖의 물건이 발견된 초기 단계에서 얼마만한 값이 매겨질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그림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고 충분한 검토가 끝나면 상당한 가치가 인정될 게 틀림없어." 레슬리는 놀라움과 흥분으로 손을 떨면서 교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내 쪽으로는 시선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교수의 이야기로 밝혀진 이상, 득의만면해진 것으로 오해받기 싫어서 그랬다. 그녀가 저번 기회를 붙잡고 늘어지려 했었던 것은 돈에 대한 욕심보다도 불안한 살림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어, 그녀 역시 자기처럼 흥분하고 있는지를 보고 싶었다. 이 올림퍼스의 신과도 같은 노교수를 믿기 어려울 만큼 감동시킨 것이 분명한 그 발견에 대한 얘기가 나올 참이다. 부부 사이에 불꽃처럼 오가는 무엇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제작 연대 말인데, 자네는 언제쯤으로 생각하나?" 루카스 교수가 이야기를 원점으로 끌고 갔다. 물론 그들을 놀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마치 먼저 현상금 액수를 알려주고 나서 퀴즈 문제를 내는 것 같은 그 방법은 희롱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진지하게 문제를 받아들이고, 당당히 소신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14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지나치게 건방진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고서 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입 밖에 나간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교만을 지우려고나 하듯, 멋적게 턱을 문질렀다. "그 포즈라든가 손의 묘사 -- 즉, 손가락의 관절을 무시한 매끄러운 묘사는 14세기 이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한 양 어깨나 머리를 뒤로 비스듬히 젖힌 포즈나, 드레스의 채색에 관해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혹시 덧칠한 물감을 잘만 벗겨낸다면, 아마도 15세기 이후로는 볼 수 없게 된 의상이 나타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스타일이라고 할까, 유파(流派)는? 자네는 그 점에서도 대략 짐작이 간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레슬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눈부신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완전한 그의 편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의 당돌함에 놀라서, 그가 마각을 드러내는 것이 언제쯤일까 하고 지켜보고 있는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그 그림이 이 지방과 연고가 있는 화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유는 그 그림이 여러 세기 동안 계속 이 지방에 머물러 있었기에 멀리까지 옮겨간 일은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원래 술집의 간판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당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서 다른 점은 그 웃음뿐입니다만 -- " "으음, 그걸 신경쓸 필요는 없네." 루카스 교수는 사려깊은 눈길을 젊은 상대에게 보내면서 말했다. "그 웃음은 어느 시대의 것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천재적인 무명작가가 그린 것을 후대의 유명작가들이 모방한 것일세. 그렇게 온당치 못한 일도 그들에게는 얻기 어려운 경험이 되었을 거야. 이야기를 계속하게. 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게 뭔가?" 레슬리는 자기의 상상이 비약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듯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에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 미친 것은 그 여인의 가슴을 장식한 브로치 같은 타원형의 장신구를 눈여겨보고 나서부터입니다. 그 원형은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통하는, 일종의 X선의 감광판과도 같은 부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허, 그런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그 여인이 뱃속에 갖고 있는 태아의 상징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는 수태고지(기독교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령에 의한 임신을 알린 것)를 받은 뒤에, 아니면 요한의 어머니를 방문한 -- 하여간 그리스도 탄생 전의 성모 마리아인 거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찬양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란 말이지? 어쨌거나 자네는 남의 도움없이 혼자서 그만한 것을 알아냈구먼. 실로 대견하네."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막연히 생각만 한 것이지, 아직 자신을 갖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레슬리는 멋적은 듯 피식 웃었다. "이런 엉터리 추측이 웬지 공상만은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실은 교수님이 힌트를 주셨기에 용기를 얻은 겁니다. 말하자면 교수님에게 휩쓸려 떠들어댄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히 입 밖에 내지도 못했겠지요. 하여튼 그런 그림이 14세기 이래 헛간에 방치되거나 술집 간판으로 내걸렸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요." "그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틀림없이 16세기 후반부터였을 걸세. 그 그림이 발견된 것은 원래 채노크 수도원의 헛간이었지, 아마? 그리고 그 수도원의 마지막 원장은 종교개혁으로 그 지위를 잃었고." "예, 제 친구가 건축학적 측면에서 그런 것을 조사한 끝에 제게 이야기를 해주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랬군. 하기야 나 자신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캐본 결과는 그런 것 같더구먼. 그래서 그걸 알고 나서 자네의 그림이 채노크 교구교회에 보존되어 있는 벽화의 단편 중 하나와 구성이나 화풍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게네. 자네는 그곳 목사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중세 미술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노학자라네. 유리공예 전문가이네만, 벽화와 패널화의 화가에 대해서도 상당한 연구를 쌓았다네. 그분은 특히 종교개혁 때에 흐트러진 채노크 수도원의 미술품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열중해 있는 중이지. 물론 현재의 그 교구교회는 옛날 수도원의 축소된 유적이지만, 그분은 수집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유품들을 모아 옛 모습을 재현하려고 애쓰고 있다네. 하지만 제단 뒤쪽의 비교적 큰 벽화 -- 아마도 '성모의 기도' 중 일부분으로 그분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여자의 초상화뿐이지." "그러면 우리가 발견한 것이 그 벽화의 주체인 성모 마리아란 말이군요?" 레슬리는 극도의 긴장을 견딜 수 없어 자기도 모르게 노골적인 질문을 했다. 노교수는 잠깐 나무라는 듯 시선을 가다듬었으나, 결코 비난의 빛은 띠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네. 나는 그 목사를 만나봤어. 그분은 채노크 수도원의 마지막 원장이 물러날 무렵에 내부의 장식품 중 일부가 유실된 것을 나타내는 기록이나 그밖의 흥미 있는 자료를 사방에서 모아들이고 있더군.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여자는 성모의 찬양에 등장하는 천사라는 것이 그분의 의견인데, 우연히도 그 그림의 전모를 추정할 만한 그 시대 이후의 문헌을 몇 가지 갖고 있더군. 그래서 나는 자네의 패널화가 그 제단 뒤쪽 벽화 속의 성모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걸세. 그것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같은 화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포함한 몇 작품이 발견되어 있다네. 그 중의 하나는 자네의 성모 마리아와 아주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지." "그 웃음의 표정도 말입니까?" 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젠 그 그림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갖추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게요. 그 교회의 목사도 같은 의견이고. 만일 내가 좀더 세밀힌 준비를 갖추어서 발표하기만 하면 이의를 내세울 사람은 없을 걸세. 그분은 분실된 성모 마리아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해서 원래의 그림을 재생했는데, 그것이 자네의 패널화와 대단히 흡사하다네. 그분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원화의 모양을 스케치해 주더구먼." 루카스 교수는 테이블 위에 놓았던 가방을 열어 자료를 꺼내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면서 그것을 늘어놓았다. "오늘 모임에 가는 도중에 시간이나면 자네에게 보여 주려고 참고문헌과 그분이 그려 준 스케치를 갖고 왔다네. 이것이 그 스케치인데, 원화는 이런 모양으로 그려져 있을 거라고 하더군." 그것은 작은 도화지에 그려져 있었기에 모두는 이마를 맞대다시피 해야 했다. 그 '즐거운 여자'는 모슬린 숄이나 소용돌이 모양의 앞머리, 소매 끝의 폭넓은 장식 등이 제거되고, 사프란(연보랏빛)색의 로브에 푸른 겉옷을 걸치고 머리는 흰 베일 아래 말끔히 빗어넘긴 모습이 완연한 영국 초기 연대의 단아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는 뱃속에 지닌 무거운 짐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상반신을 약간 뒤로 젖혔고, 백합꽃처럼 섬세한 손으로 아랫배에 겹친 손바닥 아래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리스도의 태동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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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19편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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