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약간 위로 젖혀진 얼굴의 웃음은 환희를 머금은 잔잔한 미소였다. 그 그림 속에는 그 여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세계에 오로지 혼자, 마치 그녀 자신이 이 세계 그 자체인 양 고고하게. 레슬리는 진이 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지 않고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놀라운 기분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입술을 축이고서 조급한 질문을 던졌다. 점잖지 못한 질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것을 묻지 않고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써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 그림을 내어준다면 얼마만한 금액이 될까요? 물론 그 그림이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그런 그림이라면 말입니다." "글쎄 -- 이런 일은 기회라는 것이 크게 좌우하지만, 그 화가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데다가, 또 이런 종류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도 거의 그리지 않아 거기에 견줄 만한 작품이 거의 없다네. 따라서 수집가의 관심도 고려에 넣어야 하겠지. 자네가 급하게 처분한다고 해도 최저 7~8천 파운드선은 밑돌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네." 그 순간 레슬리와 진은 장승처럼 우뚝 서서 한동안은 숨을 죽인 채 이야기된 금액의 숫자를 머릿속에서 다시 세어 보았다. "그렇다면 그 목사님이 그림을 인수해 줄까요? 그분이라면 그 그림에 대해서 잘 알겠고, 수도원 시대의 소장품을 수집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것만은 꼭 되찾고 싶으할 텐데." "물론 그분은 탐이 나겠지. 이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자나깨나 그 그림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는 낡은 교회의 복구비로 2만 파운드 가량 모금한 일이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그 성모 마리아 그림을 사들이기 위해 돈을 걷어들이기는 어려울 거야." "그 그림을 원래의 자리에 끼워넣는 것도 말입니까?" 레슬리는 그런 말을 하고서 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살짝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면하고서 그 작은 스케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진은 그림의 여인처럼 기도라도 드리는 모양으로 양손을 가슴 아래 모으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의 자세를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레슬리는 궁금했다. "아마도 그럴 걸세. 하지만 살 만한 사람이 달리 있을 거야. 더구나 그 그림의 출현이 널리 알려질 때까지 기다리면 내가 지금 말한 금액보다 두 배 이상으로 팔릴지도 모르지." 루카스 교수는 가방을 챙기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이 청년은 상당히 돈에 궁한 모양이다. 더 이상 그를 들뜨게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실은 저로서는 그 패널화를 제자리에 복원하는 데 필요한 비용조차도 감당할 처지가 못됩니다." 레슬리는 굳게 먹은 마음으로 해서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만일 그 그림을 채노크 교회에 돌려보낸다고 하면,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그 동안 드는 비용을 부담해 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루카스 교수는 어안이벙벙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을 제정신으로 하는 겐가?" 물론 레슬리는 본심이었다. 되도록 빨리 그렇게 말해서 다시는 거두어들일 수 없게 해야겠다고 조바심을 냈지만, 공포에 가까운 것이 목을 틀어막아 이치에 합당한 말을 철저하게 막으려고 했다. 이젠 진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지금 마음먹은 일이 그녀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또한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도 남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일 이 순간을 어물쩍 넘겼다가는 앞으로 살아갈 기력조차 잃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건 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그림이 겪어온 우여곡절 끝에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온 것뿐이지요.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있었던 자리에 되돌아가야 하며, 그곳이 교회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뜻밖의 말이 상대방을 의심케 한 것이 화가 나는 듯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비록 종교와 관계가 없더라도, 그렇게 내력이 있는 작품이라면 저는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그림은 어느 특정한 장소와 목적을 위해 그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곳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단지 제가 지금 그대로 그 교회 목사님에게 돌려보낸다 해도 돈이 없어 복원할 수 없다면 그것이 마음에 걸릴 뿐......" "잠깐, 자네가 본심으로 그런 말을 한다면 그 점은 걱정말게. 우리 작업실에서 복원해 줄 수도 있으니까. 실은 나 자신도 그것이 어느 특정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네. 아무튼 이번 주말까지 좀더 신중히 생각을 해보게." 교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쾌활하게 말했다.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자료는 놓고 갈 테니, 마음의 결정을 하기 전에 그 그림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가를 한번 검토해 보게나." "결심은 섰습니다만, 자료는 기꺼이 읽어 보겠습니다. 제가 그러한 제안을 한 것은 세상에 이름이라도 팔려는 심산에서가 아닙니다." 레슬리는 침착함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가령 제가 그림을 최고의 값으로 팔아 넘겼는데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이 나라라고 해도 어느 부유한 개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저는 한평생 그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그 교회의 신자들이 그 그림을 살 돈을 마련할 수 없다면 그건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 그림이 어디로 가든, 그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전부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자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권하는 것은 아닐세. 단지,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서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뿐이야.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이라면 자네의 생각대로 한다고 해도 말릴 생각은 없네. 그러니 4~5일 뒤에 전화를 걸어 주게.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 문제로 다시 만나지. 그럼, 이만 가보겠네." 교수는 가방을 손에 들었다. "부인, 안녕히 계십시오. 커피 맛있게 마셨습니다." 진은 꿈에서라도 깨어나는 것처럼 황급히 레슬리의 작별인사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리고 레슬리가 손님을 문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테이블 곁에 그대로 서서 목사의 스케치를 바라보며, 창백하지만 해맑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레슬리는 등뒤로 문을 천천히 닫으며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를-- 아니 고개라도 들어 자기를 바라보기를 --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그는 어떻게 해야 침묵을 깨뜨릴 수 있을는지 잠시 망설였다. 비굴한 태도로 나가든가, 아니면 고자세로 나가든가 두 길밖에는 없었지만, 그 어느 쪽이나 심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긴장이 지나쳐 신경이 철사처럼 곤두서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젖어 있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는 내뱉듯 말했다. 변명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말에 흠칫 놀라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은 쇼크를 받은 여자의 눈처럼 그냥 크고 어둡게 열려 있을 뿐, 어떤 기색도 살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 그림이니까 내 마음대로 처분해도 상관없겠지?"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을 내뱉었다. "잘 알고 있어요." 그녀는 뜻밖에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없는 눈동자 깊은 저쪽에서 아련한 미소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당신을 실망시켜 안됐지만, 그걸 돈받고 팔았다가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무거운 짐을 질 것 같아서 -- " 갑자기 그녀가 뭔지 항의라도 하듯 묘한 몸짓을 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이제 그만! 바보 같은 양반! 마구 흔들어주고 싶어요!"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들며, 마치 협박을 실행에 옮기려는 듯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았으나, 그 손길은 곧 그의 양팔 겨드랑 밑으로 파고 들어가서 그의 몸을 힘차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남편의 가슴에 묻었다. "당신을 좋아해요! 좋아한다고요! 사랑해요!" 그녀는 감동어린 목소리로 그의 가슴에 대고 말했다.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멍해지고 말았다. 혼이 날 일을 저지르고 만 것 같은데, 어째서 그것이 갑자기 잘한 일이 되었을까? 여자라는 것은 극히 비논리적이며 또한 충동적이고, 주책없이 소유본능만 날카로워 남편의 약점을 거머쥐기만 하면 바가지를 긁어대는 것 -- 그런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여튼 이 순간에서는 아내의 말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요." 진이 같은 말을 거듭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녀의 등뒤로 팔을 감아 조심스럽게, 마치 손가락을 부러뜨릴까 봐 겁먹은 투로 어정쩡하게 그녀를 포옹했다. 하지만 밀고 들어오는 그녀의 몸의 무게와 따사로움과 감미로움이 그를 놀라게 하고 그의 온몸을 희망에 떨게 했다. "모처럼 생긴 큰 돈을 날려버려 미안해, 진." 그는 몸을 조여드는 듯한 환희와 사랑스러움과 불안의 소용돌이 속을 허우적거리며 헛소리를 하듯 소곤거렸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나가겠지. 무책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는걸 어떻게 해. 그 그림은 내것이라는 기분이 나지를 않아. 진, 울면 안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의 가슴에 볼을 대고, 어처구니가 없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기쁨으로 채워진 환한 웃음을. 그녀의 얼굴이 스케치 속의 여인처럼 보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 그녀는 멍청한 소리로 또 중얼거릴지 모르는 그의 말문을 막으려는 듯이, 그리고 사랑이 복받쳐 그의 입 위에 그녀의 입술을 눌러댔다. 그녀가 내적으로 체험한 계시를 -- 그와 그녀와 태어날 아기 세 사람이 문제로 삼기에 족한 모든 면에서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갑자기 깨달은 그런 심정을 말로 남편에게 전하기란 무리였던 것이다. 여하튼 그녀는 더 이상 사소한 어려움에 애를 태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은 풍족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막대한 부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동전 한 푼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없었던 앨프리드 아마이저에 대해서도 깊은 연민의 정 이외의 것은 느끼지 않았다. 하물며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이면서도 이렇듯 값진 것을 베풀어 줄 수 있는 남편에 대해서 불만이나 실망을 느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레슬리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확인했다. 하지만 그 답변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든 부부간의 절대적인 융화가 어떤 원인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캐보든 말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그녀를 되찾을 수 있었는지를 물어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그녀가 되돌아왔다는 현실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모든 마음의 장벽은 사라졌다. 그들은 감사의 마음에 휩싸여 말없이 포옹했다. 그때 뜻하지 않은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재촉하는 듯한 두 번의 잇달은 큰소리는 틀림없는 해크니스 부인의 것이었다 -- 그리고 대개는 뭔가 싫은 소리를 하게 마련이다. 레슬리는 마지못해 아내의 몸에서 팔을 풀면서 다시 한 번 잽싸게 키스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해크니스 부인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루카스 교수의 영향이 아직 무지개빛 구름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아까 어떤 남자아이가 이 편지를 갖고 왔습디다. 곧 전해 달라고 했지만 손님이 계셔서." "남자아이라고요? 누굴까." 그러나 그는 곧 도미니크를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도미니크가 편지를 전할 이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비록 전할 말이 있다고 해도 일부러 편지로 써서 직접 갖고 올 리가 없었다. "이 골목 저쪽의 무어 부인 집 아들이라고 하더군요. 곧 전해 줘야 한다고 했지만, 15분 가량 늦는다고 해서 별 탈은 없을 것 같아서." "아, 그렇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문을 닫고,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레슬리가 알기로는 무어 소년도 역시 그래머 스쿨에 다니는데, 도미니크와 같은 나이 또래로 보였다. 동급생인지도 모른다. 도미니크가 무어에게 편지를 부탁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상하네요." 진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알 수 없군. 아무튼 읽어 봅시다." 레슬리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팔에 매달린 그녀의 몸의 온기에 취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어떤 긴급한 일보다도 그녀가 그의 가슴속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이저 씨에게 저는 이 편지를 정확히 8시 반에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친구인 믹 무어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그 까닭은 오늘밤 9시에 당신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인데, 그 시각으로부터 30분 전까지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 아버지가 그보다 빨리 이 일을 아신다면 제 계획을 모두 망가뜨리시겠지만, 마침 알맞은 시간에 목격자로서 현장에 온다면 아마도 저를 말릴 수 없어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게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집에 전화를 걸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어머니가 달려오실지도 모르지요. 저는 어머니에게 위험스러운 장면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말이 날 때까지는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알려 드리고 싶지가 않기에,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내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부탁드릴 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9시에 브룩 가 헤딩턴 골목 모서리 쪽을 지켜보라고 말해 주십시오. 경찰관을 몇 명 동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장소에는 차 한 대가 와서 저를 코마퍼드의 집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어 있는데, 제가 그 차에 타거든 그 뒤를 미행하라고 하십시오. 놓치지 않고 미행을 해야 합니다 -- 그 점이 중요합니다. 저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록 손을 써두었는데, 경찰로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키티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부디 키티를 도와주십시오. 그녀만 무사해진다면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도미니크 펠스' "이게 뭐지? 장난도 아닐 테고." 레슬리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키티에 관한 일이라는데 그 애가 장난으로 이런 편지를 쓸 리가 없어요. 상당히 진지한 글이에요, 레슬리." 그녀는 남편의 팔을 꽉 쥐며 말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애한테 위험이 닥치고 있는 것 같아요. 손을 써두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일까?"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 엉뚱한 일에 발을 들여놓고는 -- 아, 큰일이군! 시간이 없는걸!" 레슬리는 손목시계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서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11분 전 9시였다. 문제의 시간까지 11분밖에 여유가 없다. 이젠 편지를 의심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진이 뒤따라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집에 남아 있으라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그가 길모퉁이의 전화 박스로 뛰어들면서 뒤를 흘끗 보니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코트 소매에 팔을 끼고 있었다. 조지 펠스의 전화번호를 찾는 시간이 1년쯤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다이얼을 돌려 상대방이 나오기까지도 몇 해가 흐른 느낌이었다. 더구나 전화를 받은 것은 밴디였다. 어머니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는 도미니크의 말이 레슬리의 입을 다물게 했다. 펠스 씨가 안 계시면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는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코마번 경찰서입니까? 나는 레슬리 아마이저입니다. 실은 아마이저 사건에 관한 시급한 용건으로 펠스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 " 진이 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내가 가서 버니의 차를 이리로 몰고 올께요." 그리고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바쁘게 달가닥거리며 멀어져 갔다. " -- 아셨습니까? 브룩 가 헤딩턴 골목 모퉁이입니다. 9시에."레슬리가 시간과 장소를 강조했다. "나도 곧 그리로 갈 겁니다만 -- 아무튼 당신들은 거기에서 그 차를 미행해야 해요. 부탁합니다." 그는 수화기를 놓은 것은 2분 전 9시였다. 제 15 장 도미니크는 오늘밤 백 번째의 실수를 하고 나서, 정확한 위치에 손가락을 놓고서 부서져라 건반을 두드려 실수를 바로잡고는 한탄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쳇! 엉망진창이군! 이젠 그만할래요." "그야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지." 크레그혼 양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네 부모님은 한 시간분의 레슨비를 내시니까, 시간을 채우는 게 어떻겠니 -- 비록 날 끝끝내 미치게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미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래 된 박달나무 자를 찾아와서 네가 내 신경을 긁어댈 때마다 그걸로 네 손바닥을 때려 줘야겠다." 도미니크는 조소적인 한 소절을 딩동댕 치고는 흘끗 그녀를 노려보는 척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 이 노부인은 예순을 넘겼는데도 테리어(애완견의 일종)처럼 쾌활했고, 제자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도미니크의 입장으로서는 이렇게 목요일 밤마다 피아노 레슨을 그럭저럭 계속해 올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그녀의 그 후덕한 인품 탓이었다. 적어도 악기 하나쯤은 다룰 만한 재주는 익혀 두는 것이 젊은이에게 헤아리기 힘든 가치가 된다고 주장하여 싫어하는 그의 귀를 잡아당겨 피아노 앞에 앉힌 것은 어머니인 밴디였다. 물론 그렇게 쉽게 익힐 수 있는 재주는 아니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던 어머니의 말은 오늘밤의 일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고도 할 수 있다. "헤, 박달나무 자라니 겁나는데요!" 도미니크는 픽 웃었다. "선생님이 그런 흉기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로 사람을 때려 본 적이나 있으세요?" "조심해!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매질할 기운은 남았단다. 꼭 박달나무 자가 아니라도 말이야. 자, 허튼 소리로 나를 홀려 레슨을 흐지부지 해보려고 그래도 소용없어요. 다시 쳐봐. 정신을 집중해서!" 그는 제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저절로 오늘밤 감행하게 되는 계획으로 쏠렸다. 이 죄없는 목요일의 레슨은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단지 기회를 제공해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 보았지만, 그의 상념은 시간을 뛰어넘어, 이제부터 맞부딪치게 될 사태를 여러 측면에서 상상하고, 거기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하게 했다. 가장 근심스러운 것이 아무래도 광범위한 가상(假想) 에 기반을 두고 행동해야 했으므로, 예상이 빗나갈 여지가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때늦게 그러한 차질을 겁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젠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 화음으로 옮겨가다가 실수를 했을 때, 크레그혼 양은 단발머리를 호들갑스럽게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넌 지난주 목요일 이래 한 번도 피아노 앞에 앉아본 일이 없구나. 그렇지? 자백해!" 도미니크는 그렇다고 깨끗이 자백했다. 연습을 못한 것 자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그걸 숨기려는 심보야말로 비난받아도 마땅하다는 그녀의 지론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레슨이 그에게 다시금 중요성을 지닐 수 있게 되리라는 확신이 서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기에는 눈앞에 닥친 현실이 너무나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식사시간이나 피아노 레슨 같은 일이 중요성을 지닐 수 있는 평범하고 안락한 세계가, 지금의 그에게는 놀랄 만큼 매력적이고 부러운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거기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유도장치가 말을 듣지 않는 미사일에 올라탄 것처럼 그는 무턱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습도 하지 않고 잘 치겠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걸 모르니? 그런 식으로 두드려 날 속일 생각이란 집어치워. 저런! 내가 이야기를 할 때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잘 들으라고 했잖아." 그녀의 잔소리가 여간해서 끝날 것 같지 않아, 도미니크는 연습을 멈추고 예의바르게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그의 눈은 곧장 그녀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의 방심상태를 얼버무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사실 그녀의 잔소리는 거의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건전했고 평범하며 어두운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에게 공포심을 주기 시작한 창 밖의 어두움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노부인인 것이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수편직의 윗도리와 짧은 모직 스커트, 단정하게 빗은 잿빛 단발의 곧은 가리마, 잔소리를 할 때마다 움직이는 턱의 사마귀. 그런 것들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와 같은 차원에는 사악한 것이나 두려운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가까운 것이 우러나서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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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눈길을 돌리거나 눈을 감는 순간 순식간에 번거로운 것들이 자기를 둘러싼다는 것, 그것도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것, 더구나 거기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