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21편 (21/23)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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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21편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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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는 보이지 않던데요." 진은 그렇게 말하며 정신이 아찔해져서 계기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남편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것이다. "어머나, 레슬리, 왜 그래요!" 그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차를 돌리기 위해 바쁘게 핸들을 돌렸다. "왜 그래요? 무엇을 봤나요? 도미니크는 타고 있지 않았어요." "보이지 않았을 뿐이야." 레슬리는 일상생활에서 보기 드문 결연한 태도로 차를 돌렸다. "그 차가 누구의 것인지 몰라?" 그들의 차는 풀섶에서 세차게 길 위로 올라서며 멀리 가물거리는 앞 자동차의 밝은 후미등을 뒤쫓기 시작했다. "해밀턴 양의 차라고.
도저히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다행히 나는 그녀의 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저 차를 알아볼 수 있었지.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밴을 알아볼 리가 없어.
내가 여러 가지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 것은 알고 있겠지만, 이걸 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할 거야." 진은 그의 어깨에 떨리는 몸을 바짝 붙였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이봐요, 레슬리, 만일 저 여자가 범인이라면 -- 도미니크는 이미 저 차에 없을지도 몰라요.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해밀턴이 흉악한 범죄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 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는 '도저히'라는 말은 통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모든 예외가 빛을 잃고, 모든 규제가 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미니크를 어딘가에 버리고 오는 것이 아닐까요?" 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런 우려가 그의 마음을 몹시 애타게 했다.
저 육중한 라일리라면 어떤 살인자에게도 쓸 만한 흉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가물거리는 후미등에 뒤질세라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경찰차가 따라와야 할 텐데......" "하지만 길은 캄캄하고 목표가 막연해서......" "아, 그녀가 길에서 벗어났다!" 레슬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만일 그녀가 혼자서,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는 일로 야간 운전을 하고 있다면 무엇하러 이 도로의 오른쪽으로 구부러질 필요가 있을까? 그쪽은 연인들의 오솔길로도 가장 외진 곳이며, 그 앞은 강둑으로 길이 막혀 있는 곳이다.
아니, 길이라기보다는 숲과 풀밭을 누비는 마차길로, 그전에는 나무문으로 폐쇄되어 있었으나 최근에 와서 낡은 문이 길 옆으로 젖혀져 출입이 자유로워진 터이다.
레슬리는 전에 몇 번인가 이리로 피크닉을 온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 부근 지리에 밝았다.
강기슭은 널따란 풀밭이어서 차는 물가까지 갈 수가 있고, 차를 돌릴 공간도 넉넉하다.
하지만 10월의 이런 서리가 내리는 밤에 여자 혼자 무슨 볼일이 있어 거기에 가는 것일까 ? 그는 마차길 초입에서 차를 멈추고 진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서 경찰차를 기다려." "싫어요 -- " 그녀는 남편의 팔에 매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내리라니까! 당신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경찰에게 어떻게 알리지? 그들은 반드시 이리로 올 거야.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야, 진!" 그녀는 등을 떼밀리다시피 해서 차에서 내렸다.
숲속의 어두움을 향하여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레슬리는 파랗게 질린 아내 얼굴의 커다란 두 눈이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뒤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흉악범죄자와 추적자가 등장하는 검은 회오리바람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권총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서 헤어진 뒤, 다시는 살아 있는 남편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바퀴 자국으로 깊이 패인 길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멀어져 가는 남편의 밴을 떠나 보내고, 한번 몸을 부르르 떨고는 충실히 길을 지키기 시작했다.
레슬리로서는 그들 내외가 협조라든가 다툼 같은 것을 염두에 둘 겨를이 없는 상황에서 단호하게 내린 결단으로써 주도권을, 또한 우월성을 확보한 것이다.
경직되어 버린 일상생활에서는 도저히 먹혀 들어갈 독단이 아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그는 가장 통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 나 혼자의 힘으로 할 테니까 당신은 물러서 있어 -- 하고.
단단하게 언 바퀴자국의 흙이 뜻하지 않게 그의 손으로부터 핸들을 빼앗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숲속으로 밴을 메다꽂으려고 했다.
라일리의 후미등은 보이지 않았다.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핸들을 힘주어 잡고 평평한 강가의 풀밭을 향해 급히 차를 몰았다.
이윽고 주위의 나무 그늘이 듬성듬성해졌다.
그는 속도를 늦추고 헤드라이트를 껐다.
숲을 빠져 나와 목표를 명확히 볼 수 있을 때까지 상대방에게 눈치를 채이지 않기 위해서다.
그녀는 서리가 하얀 강가의 낮은 습지 가까이 차를 몰고 가, 곧 되돌아갈 수 있게끔 이미 차를 돌려놓고 있었다.
양쪽 문이 마치 막 날아오르려는 딱정벌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차와 강둑 끝 중간지점에서 무엇인가 축 늘어진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불구가 된 짐승처럼 옆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두 개의 그림자 저쪽으로는 도도한 강물이 별빛을 반사하며 바쁘게, 그러나 소리도 없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숲속 마차길에서 간신히 빠져 나오면서 레슬리는 스스로도 뜻밖일 만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했다.
우선 적의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
차를 옆으로 세워 길을 막으면 그녀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강기슭 가까이까지 이르러 있었으며, 그는 그 부근의 물의 흐름이 얼마나 빠른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도 짐작이 갔다.
이젠 생각할 틈이 없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우성을 치며, 헤드라이트를 확 켜고서 액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아 곧장 그녀를 향하여 돌진했다.
그녀가 차를 피해 도망간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놀라게 하여 도미니크를 놓치게 하는 것이 당장 급한 일이었다.
마차바퀴 자국에서 빠져 나온 차는 울퉁불퉁 기복이 심한 풀밭을 마치 성난 야수처럼 달렸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굉음과 불빛에 놀라 소년을 놓고는 목을 비틀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처럼 굳고 매끄러운 얼굴이, 숨이 차서 벌어진 입이, 무의미하게 번뜩이는 눈이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뚜렷이 떠올랐다.
그 눈에는 여전히 이지(理知)와 권위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미쳤다는 기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굽혀 소년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비틀거리며 강기슭을 향하여 급히 걸음을 옮겼다.
무겁게 축 늘어진 소년은 그녀의 허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곤 했지만, 그녀는 허둥지둥 낡은 문을 향하여 마구 끌고 갔다.
그 낡은 문 앞에서 레슬리의 차가 예리한 커브를 그렸다.
그녀에게서 겨우 몇 미터 앞에서 브레이크가 비명을 질렀을 때, 그녀는 마침내 단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소년을 내던지더니, 사냥개처럼 그녀의 차로 달려갔다.
달아나는 그녀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 손끝을 피했다.
그는 보다 급한 목적으로 그녀를 포기하고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거의 목적을 달성할 뻔했다.
불과 2~3초의 시간만 더 허용되었어도 소년을 물에 밀어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머리와 한쪽 팔이 풀밭 끝의 작은 벼랑에서 축 늘어진 채 힘이 빠진 손이 물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레슬리는 소년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안아 일으켜서는 풀 위에 반듯이 눕혔다.
밤색의 숱이 많은 머리카락 밑으로 도미니크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고 눈은 감겨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열린 입에서는 무겁고 짧은 고통스러운 리듬의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슬리는 바삐 그의 온몸을 살펴보고, 시체처럼 무거운 그를 팔 안에 안아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끝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고 했을 때, 라일리가 엔진 소리도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아직도 치명적인 흉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둘을 해치울 수단을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강기슭과 그의 차 사이에는 그녀가 맹렬한 속도로 차를 돌려 그들을 덮치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더구나 이미 한 사람을 죽이려 했던 그녀로서는 두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라일리의 헤드라이트는 베드퍼드 밴의 차체를 반쯤 돌아, 강줄기와 평행한 위치에 다다르자 눈부신 광선 속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향하여 곧장 달려들었다.
그는 소년의 무게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풀밭을 박차고 도망쳤다.
숲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그녀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거기까지 도달할 가망은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밴의 차체 밑으로 몸을 피할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녀는 밴과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도피수단을 못 쓰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신이 말짱하다.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인 것이다.
제정신을 갖춘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대개는 짐작이 갈 만하다.
강력한 불빛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
밴도, 지면도, 별빛아래 밤의 풍경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녀 차의 진로를 가로질러 반대쪽 어둠 속으로 몸을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더듬다시피 해서 밴의 뒷바퀴 밑에 소년을 밀어넣고 그 위에 엎드렸다.
그녀의 차는 차 밑으로 빠져 나온 그의 다리를 스치다시피 하며 지나쳤다.
그는 서릿발이 선 흙이 그의 발꿈치에 튀는 것을 느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과 라일리의 큰 차체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가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숨을 몰아쉬었다.
레슬리는 소년에게서 얼굴을 떼어 소매에 파묻었다.
까닭 모를 흐느낌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공포의 한 순간을 되십으며 그는 그 자리에 벌렁 누웠다.
루스 해밀턴의 라일리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진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멀어져 갔다.
레슬리는 허탈한 몸과 마음에 매질을 하다시피 하며 차 밑에서 기어나와 뒤쫓아 달렸다.
하지만 안간힘을 써서 뛰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분이 못 되어 라일리는 도로에 도달할 것이다.
그는 입가에 두 손을 갖다대고서 나뭇가지의 서리가 흐트러질 만큼 큰소리를 질렀다. "진, 조심해.
길 옆으로 비켜 서!" 아마도 진은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렇게는 생각해 보았지만, 보통 성질이 아닌 그녀이니만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몸을 사려 항복하기보다는 능히 죽음을 택할 여자다.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구부러진 코마번 쪽의 도로를 타고 두 대의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은 길 한복판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 마침 그때 마차길을 되돌아오는 라일리의 울부짖는 엔진 소리에 섞여 레슬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숲속의 마차길 쪽을 살펴보려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레슬리의 밴이 아니라 아까의 그 차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어쨌든 해밀턴이라는 그 여자를 그냥 달아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수상쩍은 그녀를 잠자코 놓아 보낸다는 것은 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은 달려가 낡아서 젖혀둔 통나무의 가장 위쪽 토막을 어깨에 매고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반대편 문기둥에 걸쳐 놓았다.
그 문기둥에는 큼직한 걸림쇠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마차길을 막아놓고는 급히 문을 덤불 속에 숨겼다.
그러는 사이에 라일리는 전속력으로 장애물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부딪치는 순간 가로지른 통나무가 부러져 나가며 그 여세에 문기둥까지 꺾여 쓰러졌다.
나무토막이 요란하게 튀며 차는 중심을 잃더니 길 옆 도랑으로 머리를 처박으며 정지했다.
앞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고, 한쪽 헤드라이트도 날아갔다.
진은 웅크리고 앉아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온몸이 떨려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막았던 귀에서 손을 떼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덤불 속에서 나왔다.
움직임을 멈춘 라일리 저쪽에서 밴의 차체가 춤추듯 흔들거리며 완만한 경사면을 굴러 내려왔다.
레슬리의 흐트러진 앞머리와, 핸들 위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옆좌석에 뉘어져 버니 윌슨의 낡은 모포를 어깨까지 걸치고, 고개는 떨군 채 흔들거리고 있는 것은 의식을 잃은 도미니크가 틀림없었다.
때마침 코마번 쪽에서 달려온 두 대의 차가 길가에 멈춰서더니 다섯 명의 사복형사가 달려나와 지체없이 활동을 개시했다.
두 사람은 도랑에 처박힌 차 양 옆으로 다가갔고, 두 사람은 마차길에 널린 통나무 문의 잔해를 치워 차가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다섯 번째의 형사는 베드퍼드 밴으로 달려가 아들의 머리를 자기의 어깨에 올려놓고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미니크는 공포와 아픔의 파도를 넘나들다가 문득 의식을 회복하고는, 자기가 아기처럼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느꼈다.
그 누군가의 손길이 찢어지는 듯한 머리의 통증을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는 멍한 머리를 그 아늑한 어깨 위에 파고들듯이 기댔다.
뜨거운 것이 눈꺼풀 속에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그의 의식회복을 재촉했다. "엄마, 머리가 아파!"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거기에 대꾸한 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응, 알고 있다.
곧 아픔이 가실 약을 갖다주마."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 그를 놀라게 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잠깐 눈을 뜨려고 했으나 힘에 겨워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자기를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틀림없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 얼굴은 조금도 험악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화가 난 얼굴도 아니었다.
그가 예상했던 바로는 운이 최고로 좋다고 해도 개집에 처박힐 벌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의사를 묵살하고 큰일을 저질렀다면 아무리 가혹한 처벌을 받은들 지나친 일이겠는가.
완전한 의식보다 그 표면의 밑을 오락가락하던 그의 생각이 꼭 확인해야 할 중대한 일을 머리에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키티가 아니었어요." 그가 말했다.
조지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도 이젠 아셨죠?" "응, 알았다.
이젠 모든 것이 해결되었지.
안심하고 쉬거라." 도미니크는 피로와 안도에 따른, 저항하기 어려운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눈물이 감은 눈까풀 사이로 흘러나와 아버지의 어깨를 적셨다.
그때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갑작스러운 소리에 다시금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웃은 것이다.
그 비꼬는 듯한, 거침없는 웃음소리는 마치 비명처럼 귀에 거슬렸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상처입은 신경이 짜르르 아픔을 몰고 왔다.
아버지의 얼굴과 데이켓 총경의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그 어깨너머로 손을 마주잡고 있는 레슬리와 진, 그 저쪽에 미친 듯이 허둥대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양장은 갈기갈기찢어지고, 볼에는 유리 파편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검고 긴 머리가 크고 무거운 열쇠 모양으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도전적인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입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네, 그래요, 내가 그 자를 죽였어요.
나는 이제 누가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날 고발한다고 해서 겁날 줄 알아요? 내가 그 자를 죽였다는 게 뭐 어때서요? 당신들은 나를 교수대로 끌고 가려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는 안될걸요.
1급 살인은 아니니까.
난 법률을 알고 있어요 -- 알지 않을 수가 없지.
그자는 내 생애에서 20년을 망쳐놨다구요 -- " 그녀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20년이나 말이에요! 난 결혼할 마음만 먹었으면, 그 동안 열 번도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요.
하지만 그러질 못했지.
그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그자의 마누라가......그 다 죽어가는 할망구가 숨이 넘어가는 것이 이제냐 저제냐 하고 10년 동안이나 기다렸다고요 -- " 도미니크는 아버지의 팔 안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울음이 터지자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범하기 어려운 위엄도 기품도 교양도 모두 그의 눈앞에서 내던져 버리고, 그걸 그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보기에도 처참했다.
그는 조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 -- 그런데 20년이나 버티다가 할망구가 죽었는데도 그자는 보상해 줄 생각이 없었지.
나는 닭 쫓던 개꼴, 세월만 허송한 거라고요.
그놈 때문에! 그리고 그날 밤 그 여자가 뜻밖의 전화를 걸어 왔지.
고르고 골라 나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정말 바보스러운 여자라고 -- 더구나 그자가 자기와 결혼하자고 한다는 말까지 내게 알려주었지 뭐야.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일인가.
나는 여자의 전성기를 그자에게 바쳤는데, 과연 얻은 게 뭐죠? 아무런 권리나 지위도 얻지 못하고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으니.
낮에는 비서질시키고, 밤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전부였어! 그러더니 키티를 마님 자리에 끌어다 앉히려 하다니 천벌을 받아도 싸지.
그래서 내가 죽여버렸다고." 그녀는 가슴을 벌렁이며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그냥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지.
그자를 몇 번이고 되살아나게 해서, 내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고 짓이겨 죽여야! 그자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열번을 죽이고도 다시 죽여야 속이 후련했다고!" 제 17 장 도미니크는 밴을 타고 집에 돌아온 과정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 진이 해준 이야기에 의하면, 조지가 그를 안고 열심히 간호를 했고, 레슬리는 마치 임산부를 둘이나 구급차에 싣고 운전하는 것처럼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고 한다.
그는 의식은 있었으나 수시로 가물가물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가벼운 뇌진탕이어서 오래지 않아 기억력도 정상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는 했으나, 그날 밤은 끝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를 침대에 눕히고 약을 먹였다.
그 약은 서서히 아픔을 가라앉혀 주기는 했으나 그의 세계까지 잠재웠다. "걱정할 건 없습니다.
내일 아침 다시 한 번 가벼운 진정제를 먹이면 저녁때까지는 소나기 지나간 것처럼 멀쩡해질 테니까요." 의사가 말했다.
그는 밤중에 한 번 눈을 떴다.
여러 시간 동안 억제되어 있었던 저항 본능이 꿈속에서 폭발하여 멋대로 날뛰고 울부짖어, 그 바람에 잠이 깬 것이다.
밴디는 그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그는 그것을 마시고, "내가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이상하다는 듯 묻고는 어머니의 팔을 베개삼아 다시 잠들었다.
새벽녘에 다시 한 번 잠들은 채 흐느껴 울었으나, 어머니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이마를 축여 주자 발작이 가라앉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얼굴은 창백했지만, 시장기를 느낀다며 먹을 것을 찾았고, 기운을 차리고서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졸라댔다. "밤까지 몸조리나 해." 밴디가 달랬다. "아버지는 지금 키티 양 석방수속으로 바쁜 모양이야.
그게 궁금한 거지? 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안정을 해야지.
뒷일은 아버지께 맡기고." "어머니는 저렇게 무사태평하다니까!" 도미니크는 원망하듯 말하고 돌아누웠다.
어젯밤 네가 업혀 들어왔을 때 내 얼굴을 보았다면 그런 소리 못할 거다 --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했다.
도미니크는 조금씩 정리가 되는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어떤 것을 회상하고는 멋적게 물었다. "내가 한 일, 화나세요?" 밴디는 체온계를 뽑아, 그의 체온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별로 칭찬할 일은 못되지." "죄송해요.
그런데......참, 그렇지.
엄마가 준 경비가 초과해 버렸어요.
그 가죽장갑, 33실링하고도 11펜스나 됐어요.
여자 장갑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네.
청구해도 되죠?" "탐정 흉내에는 손해보험 같은 건 붙지 않는단다." 그녀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네가 헤이워드 상점에서 그걸 살 때 엄마 앞으로 달아놓는 걸 잊어버린 게 불찰이지." "그래요? 그걸 몰랐군!" 도미니크는 정말 약이 올랐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평상시대로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나중에 공식적인 진술서를 작성할 필요는 있겠지만, 코앞에 둔 중요한 일은 그의 가슴속에 간직했던 일을 남김없이 아버지에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수속은 끝났나요?"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의자를 그의 침대맡에 끌어오는 틈도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키티는 풀려났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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