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이곳을 떠나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에요." "네, 압니다." "안다고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거예요?" 그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쳐 날뛰는 심장이 목을 메워, 그의 말소리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비로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동시에 도미니크가 입 밖에 내지 않은 대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의자로 옮겨앉으며 회한과 애정이 교차되는 목소리로 흐느껴 울더니, 그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양손을 잡아 볼에 갖다댔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가 그의 무릎 언저리에 파도처럼 퍼졌다. 그는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린 느낌이 되었다. 간신히 다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살며시 한쪽 손을 빼내 그녀의 머리결을 쓰다듬다가 그 손을 긴 명주실 같은 머리칼에서 볼로 옮기고 마침내 입술에 댔다. "틀림없이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는 남자다운 투로 말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묵묵히 기다리면 돼요.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면 기분도 달라질 겁니다." 그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고, 그 어른스러움에 존경의 마음까지 우러났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비통한 것이어야 했는데도 마치 꿀처럼 달았다. 단념의 넋두리가 아니라 소원을 성취한 기쁨의 여운이 실려 있었다. "단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눌러 살 생각은 하지 말고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키티.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기회를 잡는 겁니다. 반드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나타날 테니까요." 그녀는 그의 애무에 몸을 맡긴 채, 어른으로 향해 가는 길을 성큼성큼 걷고 있는 소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그에게 대한 사례로 어떤 선물을 할 것인가를 하루 종일 생각했었지만, 그의 승리를 깎아내리지 않고 그 대단원의 막을 장식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생각해 낼 수가 없어, 결국은 빈 손으로 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에게서 훌륭한 보답을 받고 만 것이다 -- 그것은 정한 곳 없이 방황하던 고독한 그녀에게 쏟아진 사랑의 격려에 의해, 새로운 인생 항로를 향해 출범하는 그녀 자신의 미래상이었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그에게는 그녀가 갈 길마저 정해 줄 권리 같은 것이 있었다. 더구나 -- 코마번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그녀가 모든 남성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딘가에 한 사람쯤은 그녀의 마음을 줄 수 있는 남성이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 나는 살아야 한다 --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 나는 이 사춘기 소년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그를 위해서도 살아나가야 한다.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며 말했다. "맞아, 그쪽의 말이 옳아요. 정말 그렇게 해야겠어." "인도라도 좋아요. 남아메리카도 좋고요. 세계의 이름난 곳은 모두 둘러보세요. 어느 곳에든 남성은 있습니다. 멋진 남성 말입니다. 당신은 그 중의 누구엔가에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쪽과 같은 멋진 남자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웃음이 번지는 자기의 볼에 비볐다. 그의 기쁨을 오래 가게 하기 위해, 그와 함께 계획을 짜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그런 감정을 매정하게 끊어버리고, 그의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미련을 대신해서 그에게 아름답고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추억으로 남겨주고 떠나는 일이다. 클라이막스에서 끝내는 것이다! 그는 얼마 동안은 괴로워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찬란한 슬픔이 될 것이다. 나날이 여위어가면서 몇달이고 질질 끌려온 그녀의 경우와는 달라야 한다. 그건 내가 미련을 남겼기 때문이다. 도미니크는 그래서는 안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쁜 여자였다. 만일 내가 좀더 정신을 차렸다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이저 씨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고, 그 계산이 치밀하고 집념이 강한 해밀턴도 살인범이 되지 않고서도 고비를 넘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내 슬픔만 보였던 것이다. 지금 이렇게 도미니크와 함께 있으면 내 자신의 모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그가 아주 믿음직해 보인다. 그와 함께라면 실수를 범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남성을 발견하게 되면, 맨 먼저 그쪽에게 알려 줄께요."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도미니크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망설이듯이 손을 머리가 짧게 깎인 그의 목 뒤로 조용히 뻗었다. 그녀의 열을 띤 큰 눈, 동정적인 입매, 그리고 얼굴 전체가 그의 눈의 초점에서 벗어났다. 그는 숨을 죽이며 와락 그녀를 가슴에 안고 세 번 키스를 했다 --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시작해서 끝내는 그녀의 입술에 익숙지 못한, 그렇다고 마냥 서툴지만은 않은 키스를 -- 당돌한, 순결한 정열을 품고서. 차갑고, 상쾌하고, 매끄러운 그의 입술은 희망과 흥분과 웃음과 애정이 뒤섞인 회오리로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그의 입술과 스칠 때마다, 그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포옹을 시키고, 그리고 끝나게 했다. 그가 그녀를 껴안고 싶어하는 동안에는 그녀도 그를 포근히 끌어안아 주고, 이윽고 그가 스스로의 입장을 깨닫고 그녀로부터 살며시 몸을 떼려 했을 때에는 그녀 역시 손을 풀어, 자연스럽게 몸을 빼어 무릎을 세우고 서너 걸음 물러나 섰다. "그럼, 안녕, 도미니크. 난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거예요." 그가 넋을 잃고서 간신히 이런 말을 했을 때는 그녀는 이미 방을 나서서 조용히 문을 닫고 있었다. "안녕, 키티. 행복해야 해요." 그녀는 물론 짐작하고도 남았다. 도미니크는 자기를 언제까지나 생각할 것이다 -- 그리스인이 마라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30분 뒤에 밴디가 방안을 기웃거렸을 때, 도미니크는 배가 부른 갓난아기처럼 만족한 작은 미소를 띠고 잠들어 있었다. 키티는 약속을 지켰다. 그로부터 9개월 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여름날 아침, 도미니크는 아침식사 테이블 곁에 리오 만(만)의 그림 엽서가 한 장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마침내 그 사람을 발견했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우선 알려 드립니다. 이름은 리처드 베인햄. 기술자이지요. 우리는 9월 중에 결혼할 예정. 우리는 지금 무척 행복하답니다. 행복을 빌어요. 키티로부터' 도미니크는 낯선 필적에 당혹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읽었다. 하지만 읽고 나서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편지 내용이 금방 머리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9개월이란 기간은 길었다. "키티? 누구더라......" 그는 딴전을 피웠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 아주 점잔을 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 키티 말이군."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엽서를 소중히 들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 서랍 깊숙한 곳에 간직했다. 그리고 나서 아무도 그 엽서를 본 사람은 없다. 그는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 속에서 추억의 빛이 반짝 스치고, 키가 몇 인치는 더 큰 것처럼 보였다 -- 어떤 과거와 미래를 가진 어른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