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세는 천하고수라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빗발치듯 압박해드는 가공할 공세속에서 여의괴노의 몸놀림은 점 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는 무공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 았다. 헌데도 흑의복면인들은 그의 그림자조차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같던 망우곡의 화원은 쑥대밭이 되버렸다. 여의괴노의 얼굴은 흠뻑 땀에 젖었다. 순식간에 백여 초가 흘렀다. 그는 연신 엄살을 해대고 있었다. "아이고 소진, 이놈아! 네 사부가 죽는데 두고만 볼테냐?" "사부?" 당혹한 외침은 승소진과 흑의복면인들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 다. '내가 제자?' 승소진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지는 순간, "흐흐, 그러고보니 네놈도 풋나기가 아니었군." "군사(軍師)께선 강호명숙대실록을 얻지 못하면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세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음침사악한 괴소를 터뜨리며 승소진을 공 격해 왔다. 싸움은 더욱 복잡한 형세로 치달았다. 승소진은 아연실색해 급급히 쌍장을 휘둘러 공세를 막아가며 소리 쳤다. "사부의 이 은혜는 눈물이 나도록 고맙소!" 여의괴노는 원숭이가 곡예줄을 타듯 허공을 거꾸로 차며 그를 힐 끗 쳐다보았다. "클클, 자고로 사부는 하늘처럼 섬기라 했느니라!" 허나 이 순간 그의 눈은 승소진의 교묘무쌍한 무공솜씨를 간파해 내고 있었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7 ━━━━━━━━━━━━━━━━━━━━━━━━━━━━━━━━━━━ ⑦ 순식간에 다시 오십여 합이 오갔다.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에 따라 사방 백여 장 내는 온통 불타고 얼어 붙기 시작했다. 나무, 바위, 화초, 제모습을 지니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구 름같은 낙진,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듯한 굉렬한 폭음과 진동뿐이 었다. 헌데 이때였다. "누가 감히 소진을 괴롭히느냐?" 돌연 허공중에 냉랭한 호통이 터졌다. 한줄기 이글거리는 광염(狂焰)같은 광채가 허공에 작렬한다싶은 순간 두 명의 흑의복면인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 다. 동시에 그들의 몸은 가루가 되어 허공중에 흩어졌다. 찰나 나머지 흑의복면인들의 눈빛이 확 불거졌다. "아니!" "실로 가공할 극양장력(極陽掌力)이다. 웬놈이ㄴ?" 고함소리와 함께 그들은 일제히 신형을 돌려 허공 한 곳으로 공세 를 퍼부어갔다. 허나 그 가공할 공세는 허공에 빨려들어가 버린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음 순간 허공에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또다시 핏빛 섬광이 번뜩 였다. 흑의복면인들의 눈빛에 극도의 공포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은 전신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들은 핏빛 섬 광이 뻗어 오는 것을 대하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갈가리 찢겨 나가는 육체의 조각들, 허공을 수놓는 피분수. 실로 목불인견의 끔찍한 광경이었다. 헌데 천하에 누가 있어 이런 패도적인 무공을 펼칠 수 있단 말인 가? 이윽고 갈가리 찢긴 살점 조각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때 돌연 승소진은 얼굴이 밝아지며 소리쳤다. "ㅋㅋ! 드디어 왔구나." 끔찍한 광경에 넋을 잃던 여의괴노가 물었다. "누군데?" "ㅋ! 내 동생이요." 승소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동생? 이 쥐방울만한 놈의 동생이?' 여의괴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자, 우린 어서 빠져 나갑시다. 여기는 동생에게 맡기고." 승소진은 소리치며 허공을 박찼다. 여의괴노는 뒤따라 지면을 박 차며 소리쳤다. "함께 가자. 제자여!" 두 사람의 신형은 안개처럼 망우곡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 돌연 황토바람같은 그림자가 허공 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장내에 내려서 초토화 되어 버린 주위를 둘러보는 인영은 대략 십 칠팔 세 가량의 미청년이었다. 오관은 단정하고 수려하나 몸은 깡말랐다. 특히 움푹 꺼진 두 눈 은 초점없이 음울한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장님이 었다. 헌데 그는 바로 화령(火靈)이 아닌가. 불(火)을 사랑해 눈(目)도, 혼도 다 불에게 바쳐버린 사나이. 천하제일의 장인(匠人), 일 년 전 북궁후에 의해 모습을 감췄던 그가 여기 나타나다니! 더구나 실명(失明)한 두 눈에서는 강렬한 화광(火光)이 뻗쳐나오 는 듯하지 않은가. 또한 전신에는 은은히 풍겨나오는 신기비범한 기태를 보라! 대체 그는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단 말인가? 이때 화령의 입에서는 무겁게 가라앉은 심유(深幽)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태양파라신공, 역시 소야가 전수해준 이 무공의 위력은 경세적 (驚世的)이군." 아, 그렇다면 그 역시 소야 북궁후와 더불어 천하를 뒤흔들기 시 작한 것인가?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 ① 사사삭!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햇빛 속을 날고 있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두 개의 인영이었다. 흐르는 섬전같은 뛰어난 신법을 전개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여의 괴노였다. 승소진은 그의 옆구리에 끼여 있었다. "ㅋㅋ, 도둑질하다 도주하던 솜씨라 과연 빠르긴 빠르군요." 승소진의 외침에 여의괴노의 안색이 급변했다. "뭐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의괴노는 인적이 없는 산곡 속을 질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알고 있단 말이냐?" 승소진은 그의 옆구리에서 싱글싱글 웃었다. "투령문의 문주 투령신옹 추린노선배가 아니면 누가 있어 강호명 숙대실록을 만들만한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소?" - 투령신옹 추린. 철저한 신비에 가려진 문파 투령문의 장문인, 한마디로 그는 완벽 한 신비인(神秘人)이었다.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실제 존재 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허나 그는 분명 이렇게 몇 개의 신분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의괴노 투령신옹 추린은 왠지 힘 빠진 음성으로 물었다. "나의 신분 또한 소야가 말해준 것이냐?" 일순 승소진의 얼굴에 자랑스런 빛이 떠올랐다. "천하에서 그보다 많이 알고, 그보다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 소!" 투령신옹 추린은 번개같이 신형을 날려가며 말했다. "클, 사실 노부는 본문의 수백 명 제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 방대 한 저서를 저술했던 것이지." "도둑놈의 숫자가 그리도 많단 말이오?" "흐흐, 도둑? 머저리같은 위인들은 말한다. 개방( )의 정보가 천하에서 가장 신속하고 광대(廣大)하다고."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본 투령문의 정보망이야말로 천하를 손바 닥보다 더 환히 투시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승소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ㅋ, 과연 그럴까요?" 그의 미소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천기 신궁의 비밀세력인 철기령의 엄청난 수하들이야말로 천하에서 가 장 방대하고 정통한 정보통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그들의 신형은 망우곡에서 오십 리 떨어진 계곡을 질주 하고 있었다. 헌데 바로 이때 어디선가 음침사악한 중얼거림 소리 가 들려왔다. "흐흐흐!" "과연 군사의 말씀이 적중했군!" "청룡십자만으론 실패할 거라고 하시더니!" 마치 몇마리의 밤까마귀가 버드나무가지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속삭이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흠?" 투령신옹과 승소진이 흠칫한순간, 돌연 일 장 앞의 땅이 촤악, 갈라터지며 네 줄기 흑영이 폭죽(爆 竹)처럼 치솟지 않는가! 기이한 은둔술과 신법이었다. 나타난 흑영들은 추린과 승소진의 앞을 가로 막으며 내려서고 있었다. 추린과 승소진은 그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서늘하였다. 그들의 모습은 망우곡에 나타났던 인물들과 똑같았던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의 가슴에는 해괴한 문장(紋章)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다는 것이었다. 추린과 승소진을 노려보는 그들의 전신에서는 섬칫한 살기가 폭출 되고 있었다. 그것은 망우곡에 침입한 인물들보다 열배는 더 짙었 다. 투령신옹 추린이 전음으로 중얼거렸다. (일이 더 번거롭게 됐다. 빌어먹을!) 승소진이 흑의복면인들을 보며 말했다. (만류교 작자들이요?) (끈질기구나!) 이때 네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유령처럼 앞으로 다가서며 입을 열 었다. "흐흐, 강호명숙대실록은 어디에 감춘 것이냐? 아니면 없애버린 것이냐?" 투령신옹 추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왜 남의 물건에 이렇게들 관심이 많은 거지?" 헌데 이때였다. "후후, 그거라면 소진 아우의 머리 속에 있을 것이다." 돌연 낭랑한 음성과 함께 우람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떡갈나무 숲 에서 걸어나왔다. 여드름이 범벅인 더벅머리의 청년이었다. 손에는 이상한 가죽 주 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투령신옹 추린이 의혹이 서린 눈으로 그를 힐끗 보더니 승소진에 게 말했다. "소진, 이번엔 네 형이라는 자가 나타났다. 너에겐 형제도 많구 나." "ㅋ, 저 녀석은 용린의국의 점소이요." 승소진은 그의 옆구리에 끼인 채 계속 말했다. "저 녀석이 한 번만 더 형 소릴 하면 궁둥이를 질러버릴 작정이 오." 나타난 이가 바로 용린의국의 점소이인 천낭중이란 말인가? 폐뇨음마환을 만들어 화화공자 경휘천의 상사병을 고쳐 주었던 의 술의 기재(?)가 아닌가. 헌데 지금 그는 크게 변해 있었다. 얼굴과 체격은 어른처럼 성숙 하고 늠연한 기상을 풍겼다. 호쾌하고 비범한 기질이 엿보이는가 하면 그 이면에는 깊은 현기 (玄機)가 깃들어 있었다. 실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2 ━━━━━━━━━━━━━━━━━━━━━━━━━━━━━━━━━━━ ② 이때 흑의복면인들은 복면 사이로 무서운 광망을 뿜으며 소리쳤 다. "애송이, 네놈은 누구냐?" "방해하는 자들은 모조리...." 허나 그들은 광오하고 냉막한 외침을 다 잇지 못했다. 네 명의 흑 의복면인들이 갑자기 복부를 움켜쥐며 휘청했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그들을 투령신옹 추린은 의혹에 찬 눈 으로 쳐다보았다. 이어 천낭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천낭중은 가죽 주머니를 기이 하게 흔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푸흐흐, 자고로 어린아이와 여자를 가장 조심하라 했거늘!" 그가 익살을 떠는 순간 네 명의 흑의복면인들은 놀랍게도 마치 촛 농처럼 서서히 핏물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불신(不信)과 회 의의 빛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미, 믿을 수 없다!" "군사께서 우리 몸에 베풀어 주신, 금음골부시고(金音骨腐屍蠱)의 균형을 파괴하는 독술(毒術)이 존재했다니!" 한(恨)스런 신음이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단지 역겨운 냄새를 피워올리는 혈수(血水) 만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한줌의 핏물로 녹아 버린 것이다. '무, 무서운 일이다.' 투령신옹은 안면의 주름살을 꿈틀거리며 내심 부르짖었다. 멍청해진 그의 고리눈은 천낭중과 승소진을 번갈아 오갔다. '대체 이 아이들이 누구기에 이토록 무서운 힘을 지녔단 말인가?' 천하만사무불통지를 자처하던 투령신옹조차 이 금릉의 악동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천낭중은 발밑으로 흐르는 핏물을 내려다 보더니 어깨를 으 쓱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잔인했나?" 투령신옹의 옆구리에서 벗어나 땅에 내린 승소진이 설레설레 고개 를 저었다. "아니다. 자고로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다." 힐끗! 천낭중은 그를 쳐다보았다. 일순 그의 눈엔 감탄의 빛이 뭉 실뭉실 피어올랐다. '소진, 임마, 네게선 벌써 상대를 압도하는 무서운 기도가 풍기는 구나!'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 무심한 듯 마주 그를 쳐다보는 승소진의 눈에도 뜨거운 기운이 솟 아오르고 있었다. '녀석, 너와 나, 그리고 소야, 우리 모두 변했다. 이제 때가 온 것이다. 날개를 펼칠 때가....' 다음 순간 그들의 입가로 동시에 야심만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자!" 누구의 입에선가 짤막한 외침이 터져나오는 순간 세줄기 인영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때 문득 승소진이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낭중! 너는 이제부터 천하의 썩은 곳을 도려내는 칼질을 해대는 진정한 의원이 되어야 한다!" 잠시 후 또 한 줄기 외침이 허공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알고 있다. 임마! 그것 또한 소야의 말이겠지!" "ㅋ" "클클!" "하하하!" 호쾌한 웃음의 메아리는 곤륜산 험준거봉에 길게 울려퍼졌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3 ━━━━━━━━━━━━━━━━━━━━━━━━━━━━━━━━━━━ ③ 월광(月光), 어두운 하늘에 은은히 부서져 흐르는 푸르스름한 달 빛은 너무나 아름다왔다. 나무도, 새도, 바람도 잠든 밤의 고요속에서 달빛은 더욱 요요(遙 遙)롭고 영롱하게 허공에 아롱졌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달빛이었다. 허나 이 달빛조차 무색케 하는 것 이 있었다. 한 명의 미청년(美靑年)이었다. 훤칠한 키에 고요히 나부끼는 백의자락이 신비롭다. 허리까지 늘 어진 흑발은 미풍에 나부껴 차라리 아름다웠다. 월광 아래 드러난 용모를 보라. 천인(天人)의 현신(現身)을 본다 면 이러할까? 눈이 부셨다. 특히 무심 속에 푸른 달빛을 담고 있는 서늘한 두 눈, 불타는 정열과 만상(萬上)의 능력을 깊이 갈무리하고 있는 듯 한 두 눈은 세상의 모든 매력의 요소들을 한데 뭉쳐 놓은 것 같았 다. 더구나 전신에서는 탈속(脫俗)한 듯 고귀한 기질이 엿보이는 것이다. 천하에서 이런 기질을 풍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북궁후인 것이다. 누구를 기다리는가? 그는 백포를 나부끼며 천상의 능풍옥수처럼 달빛 속에 서 있었다. 이때 문득 주위 공기가 흔들린다 싶은 순간 힘찬 외침이 터져나왔 다. "대형(大兄)!" "대형, 무사히 임무를 마쳤습니다." 사방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여러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승소진과 투령신옹, 천낭중, 그리고 화령이었다. 헌데 그들의 말투와 또 북궁후 앞에 정중히 포권하는 태도는 무엇 이란 말인가? 이것은 아무도 약속한 일이 아니었다. 북궁후는 자연스럽게 그들 의 대형이 되고, 그들이 심신(心身)으로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우상이 되었다. 그것은 북궁후의 전신에서 풍겨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상이 입증해 준다. 보라! 그가 절세미공자라 해도 그의 가슴에 숨겨진 웅지(雄志)를 가릴 수는 없다. 만인을 압도하고 남을 위엄, 감히 범접치 못할 싸늘한 기품이 보는 이의 심혼을 사로잡는 것이다. 북궁후는 등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수고했다."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승소진 등의 얼굴엔 환한 웃음이 피어 올랐 다. 이때 투령신옹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이 아이가 소야? 그렇군! 저 신출한 기품, 패도적(覇刀的)인 남 아의 야심을 잠재우고 있는 잠룡(潛龍)의 기상!' 극렬한 격동과 경탄으로 그의 원숭이같은 얼굴은 쉴새없이 꿈틀거 렸다. 그의 왜소한 몸에 미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이때 북궁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곧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그는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반갑소, 신옹." 그는 이미 투령신옹 추린을 알고 있단 말인가? 투령신옹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노부는 지난 수 년간 무림의 잠룡이 깨어나기를 기다려 왔소. 이 렇게 만나다니 영광이군, 클클!" 그로서는 최대의 찬사였다. 그의 평생에 있어 단연코 상대에게 이 토록 담콤한 말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바로 가슴 깊은 곳에 서 저절로 우러나왔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소리였다. 북궁후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헌데 문득 그는 미미하게 검미를 좁히며 허공을 응시했다. 청력이 확대되었다 좁혀지며 그의 입가 엔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소, 소야가 왔다고?" 희열에 떨리는 아름다운 옥음이 달빛을 흔들어 놓음과 동시에 한 명의 소녀가 장내에 내려섰다. 날씬한 몸매에 뛰어난 미모를 가지 고 있는 그녀는 바로 아랑이 아닌가.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그 녀의 용모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멍청히 북궁후를 바라보았다. 감격과 기쁨에 겨워 일 년 전보다 한결 성숙한 미를 돋보이는 갈색 피부의 매력적인 소녀의 얼굴은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움푹한 두 볼우 물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대한순간 북궁후의 눈에도 언뜻 놀람과 감탄의 빛 이 스쳤다. 그는 곧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아랑." 아랑의 눈에 뿌연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꽃잎을 베문 듯 붉은 입 술이 더듬더듬 안타까운 음성을 토해냈다. "소야, 우린 오래 기다렸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4 ━━━━━━━━━━━━━━━━━━━━━━━━━━━━━━━━━━━ ④ "소진, 강호명숙대실록에 대해 듣고 싶다." 북궁후는 마른 풀더미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토지묘(土地廟)? 폐가(廢家)? 아니었다. 썩은 기둥 네 개가 겨우 낡디 낡은 잡초 지붕을 지탱시키고 있는 곳이었다. 흙벽도 없다. 허나 달빛만은 비쳐들어 바닥 풀더미에 앉은 여섯 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북궁후와 승소진, 천낭중 등 그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자리를 옮겨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승소진은 북궁후의 물음에 먼저 만면에 엄숙한 빛을 떠올리 며 말했다. "대형, 나는 지금껏 강호명숙대실록만큼 엄청난 책은 보지 못했 소." 그는 망우곡에서 투령신옹에게 대했던 광오했던 태도와는 달리 이 렇게 평가했다. 투령신옹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기이하게 빛났으나 그는 의미모를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승소진이 말을 이었다. "나는 확신했소. 그 책의 방대한 정보만으로도 능히 천하의 판도 를 바꿔놓을 수 있으리라고." 모두들 승소진의 말에 심각히 귀를 기울였다. "근간 이백 년 내에 강호에 활동한 천 명의 고수들의 문파와 내 력, 무공, 특징, 성격은 물론... 거기에는 세외변방의 기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소." 천낭중이 감탄의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의 산 역사로군." "헌데 놀라운 것은 그 어마어마한 자료를 기술한 짜임새에도 있 소" 이때였다. "잠깐!" 북궁후의 검미가 가볍게 꿈틀거리며 말을 막았다. "후후, 끈질긴 추적이군." 그의 눈이 예리하게 허공에서 불빛을 뿜었다. 이어 그의 신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쾌하게 달빛 속으로 쏘아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당혹에 찬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들이 확신하건 대, 백 장 내에는 들짐승의 숨소리조차 한점 없었던 것이다. ■ 검 1권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5 ━━━━━━━━━━━━━━━━━━━━━━━━━━━━━━━━━━━ ⑤ 십여 장쯤 떨어진 곳은 산악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무수한 기 암괴석(奇巖怪石)으로 뒤덮여 있었다. 을씨년스런 귀풍(鬼風)이 밤낮으로 맴돌고 있는 음지(陰地)이기도 했다. 슥! 북궁후는 한 줄기 미풍처럼 이 괴암 숲 속에 내려섰다. 그의 냉막 한 두 줄기 시선은 줄곧 한 괴석에 화살처럼 꽂혀 있었다. 시커먼 이끼에 뒤덮여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였는데 일견 그것은 그저 좀 못생긴 바위에 불과했다. "후후, 비류잠종술(飛流潛踪術)이라... 훌륭하다. 나와라!" 거암도 가루로 날려버릴 듯 칼바람같은 일갈이 적막한 어둠을 갈 랐다. "흐흐흐, 제법이군. 본좌의 존재를 알아채다니!" 지옥(地獄)의 혈무를 뚫고 흘러나오는 귀혼(鬼魂)의 울음소리인 가? 어디선가 공포를 일으키게 하는 괴음성이 음산하게 울려퍼지 는가 싶자, 놀랍게도 전면에 있는 시커먼 괴암이 연체동물처럼 흐 느적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면서 이상한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범인들이 보았다면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장면이었지만 북궁후는 차가운 시선으로 태연하게 주시하 고 있었다. 이때 승소진과 천낭중 등이 북궁후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들은 멈칫하더니 돌연 눈 앞에서 벌어지는 괴사(怪事)를 발견한 듯 갑 자기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면서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럴 수가!" "비류잠종술!" 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 비류잠종술. 이것은 신법이면서 일종의 사술대법(邪術大法)이었다. 십이 성 경지에 이르면 나무껍질이나 바위의 한 부분으로 몸을 변 신시킬 수 있다. 심지어 물처럼 땅 속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이 무공의 맥(脈)은 알 수 없다. 허나 백오십 년 전 천하를 혼란 과 공포 속에 몰아 넣었던 기괴한 신법이었던 것이다. 마치 용암 속에서 기어나오는 괴물처럼 흐느적거리며 형태를 만들 고 있던 시커먼 괴암은 마침내 하나의 존재를 이루면서 우뚝 일어 섰는데 놀랍게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음사(陰邪)한 기질로 뭉쳐진 듯 깡마른 몸, 그 전신에서는 무서운 사기(邪氣)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두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 나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사신이 유부에서 빠져 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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