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북궁후는 담담히 그녀를 향해 다가서며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가겠소?" 그 말에 아유라의 안색이 처연하게 흐려졌다. 금발에 휘감긴 섬약 한 목이 마치 사슴의 목처럼 한없이 가냘퍼 보였다. 이제서야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을 압박하던 암경이 왜 중도에서 사 라졌는지 그 해답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북궁후를 바라보았다. 가을 호수처럼 푸른 눈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한 떨기 야생화라고나 할까? 그것은 가슴 떨리는 뭉클한 감동이며 신선함 이었다. 더구나 미의 극치를 이루는 금발의 미인(美人)임에야! 일순 북궁후는 냉혹한 가슴에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느 끼고는 흠칫하였다.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는 한동안 석상처럼 굳어진 채 움직일 줄 몰랐다. 허나 내심과는 달 리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굳어있었다. 아유라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돌아가겠어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북궁후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아유라는 그의 두 동공 속으로 파고 들 듯 그의 눈을 찾았다.타는 듯, 물결치는 듯, 야릇한 열기가 푸른 벽안에 황혼처럼 번지고 있 었다. 그녀는 고개를 북궁후의 얼굴에 바짝 들이대었다. 그리고 북궁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마치 다정한 연인에게 속삭이듯 이 은밀하게 말했다. "나를 안아 주셔야 해요." - 다음 권에 계속 - ■ 검 제1권이 끝났습니다. ━━━━━━━━━━━━━━━━━━━━━━━━━━━━━━━━━━━ 검 제1권이 끝났습니다. 물론 재미있게 읽으셨겠지요? 2권은 더욱 더 재미있어 지니까 많이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 검 제2권 안내 ━━━━━━━━━━━━━━━━━━━━━━ 검 제2권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 지금 그를 깨워라. - 나태(懶怠)의 나른한 침상에 누워 - 염세의 나락에 잠겨 있을 그를... 검(劍). 죽음의 시한을 딛고 일어나 찬란한 유성처 럼 스스로를 불태운 위대한 소년무인의 일 대기. 천년의 저주에 맞서 싸우는 대장정이 이렇 게 시작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검 제2권 - 차례 - ━━━━━━━━━━━━━━━━━━━━━━━━━━━━━━━━━━━ 제12장 폭우(暴雨) 속의 대혈투(大血鬪) 제13장 사당 속의 신기백출(神技百出)! 제14장 오마존(五魔尊)의 죽음! 제15장 운명의 만남을 위하여! 제16장 극마문(極魔門) 입성(入城)! 제17장 천하를 밝히리라! 제18장 천마전(天魔殿) 백십팔관문! 제19장 천년강시(千年疆屍) 불사금부군(不死金斧君)! 제20장 드러나는 마각(馬脚) 제21장 환요(幻妖) 요염한 함정 ■ 검 2권 제12장 폭우(暴雨) 속의 대혈투(大血鬪) ━━━━━━━━━━━━━━━━━━━━━━━━━━━━━━━━━━━ ① 중천(中天)의 태양은 뜨거운 햇살을 머리 위로 내쏟고 있었다. 쾌 청(快晴)한 날씨였다. 푸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벌써 여름 이 다가오고 있었는지 날이 제법 무더웠다. 관도(官道)에는 많은 행인(行人)들로 시끌벅적했다. 대부분 사람 들의 표정이나 음성은 날씨만큼이나 밝았다. 이런 날씨에는 대부 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웃고, 떠들며 열병 앓듯 자신의 감정에 골몰한다. 헌데 이때 예리하게 번뜩이는 한쌍의 고리눈이 번잡한 행인들 사 이에서 교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턱 밑의 몇 가닥 수염이 비비 꼬인 채 바람에 나부끼는 남루한 갈 삼을 입은 깡마른 노인이었다. 노인은 당황과 초조함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부리나케 행인들 속을 뚫고 지나오고 있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흠!" 노인의 가느다란 눈에 두 줄기 기광(奇光)이 짙게 번뜩였다. 그 눈은 곧장 행인 속의 한 얼굴에 직시되고 있었다. 약 십칠 세 가량 되었을까? 균형 잡힌 미끈한 체격에 천상(天上) 의 귀공자를 연상케 할 만큼 준미한 용모의 미청년이었다. 비록 차림새는 남루했으나 그의 몸에서는 은은히 밝은 기질이 풍 겨나오고 있었다. 특히 무심한 듯한 얼굴에 피어오르는 신비한 미 소는 매우 인상적이고도 매력적이었다. 바로 북궁후였다. 북궁후를 발견한 노인은 한쪽 소매 속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며 갈등의 빛을 떠올렸다. 허나 다시 미청년의 얼굴에 시선을 주는 순간 그는 뭔가를 결심한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놈들의 추격을 피할 수 없는 터, 이 늙은 목숨이나마 부지하려면 묵옥악마상(墨玉惡魔像)을 잠시 어디엔가 숨겨야 한다!' 노인은 그 대상으로 북궁후를 택한 것일까? 몸놀림이 번개처럼 빨 랐다. 노인은 행인들 속을 뚫고 북궁후 앞을 부딪칠 듯 슬쩍 지나 쳤다. 그 찰나 뭔가 검은 물체가 북궁후의 품 속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뚫어져라 그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해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로 빠른 솜씨였다. '됐다. 이제 적당한 장소에서 회수하면 된다.' 노인은 적이 안심이 되었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한지라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힐끗 뒤를 돌아보던 노인은 갑자기 흠칫하였다. 놀랍게도 마치 우연처럼 북궁후도 그를 뒤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 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노인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였다. 하지만 우연이려니 하면서 그 는 애써 어색하게 미소를 흘리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뭔가 뒤가 켕기는 듯한 느낌을 지을 수는 없었다. 북궁후는 태연하게 관도 위를 걷고 있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다시 한 번 돌아본 그는 노인의 종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 고는 눈을 번뜩였다. '절묘한 투공이다. 솜씨로 보아 당금 강호의 골칫덩이 기인(奇人) 다비삼각(多譬三脚) 염비(髥飛)가 틀림없다.' - 다비삼각 염비. 투술(偸術)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인 그는 공문(空門)의 당대 문주였다. 정사(正邪)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의 인물로서 괴팍한 성격을 가진 천하무림의 골칫덩이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누구나 싫어하면서도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괴걸 (怪傑)이었다. 수백 개의 손(手)과 세 개의 다리(脚)를 가졌다고 불리울 만큼 뛰어난 투술과 경공의 일인자였다. ■ 검 2권 제12장 폭우(暴雨) 속의 대혈투(大血鬪) -2 ━━━━━━━━━━━━━━━━━━━━━━━━━━━━━━━━━━━ ② 북궁후는 자신의 품 속의 물건을 꺼내 보았다. 그것은 섬뜩하게도 묵옥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흉측한 악마상(惡魔像)이었다. 너무도 정교하고 섬세해 등골이 오싹하도록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물건 이었다. '기이한 물건이다.' 북궁후는 내심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막은 모르겠지만 내게 선물한 것이니 받아두지!'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후후, 다비삼각, 당신은 나 북궁후의 품 속을 당신의 개인 창고 로 아셨소?' 허나 그가 이 묵옥악마상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결코 그처럼 태 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때 북궁후는 계속 머리 속의 생각을 지속시키고 있었다. '무황궁. 아니, 대막유유궁은 천기신궁을 공격한 자들과 아무 관 련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였다. '신비세력 중 나머지 문파의 존재가 미궁(迷宮)에 빠져 있다. 하 지만 곧 드러나고 말 것이다. 후후!' 자신만만한 냉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그는 문득 아유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저를 안아 주셔야 해요. 도발적으로 턱을 들이밀며 두 눈을 뜨겁게 불태우던 이국의 절세 미인(絶世美人). 하지만 북궁후는 그녀에게서 추호도 천박한 느낌 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 이다. '아유라... 그녀는 진정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여인이다.' 그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리고 너무나 희미해 거의 알아 차릴 수 없는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헌데 문득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돌연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흠... 하나, 둘, 다섯, 관도의 좌우 숲 속이다. 놀라운 무공의 소유자들이다!' 일순 그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모두 한곳으로 쏠리고 있다. 바로 다비삼각을 향해... 허나 그는 내상(內傷)을 입고 있어 멀리 못 가 잡힐 것이다!' 그는 다비삼각 염비가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단 말 인가! '저들이 쫓고 쫓기는 이유는 분명 이 조각품에 있다. 이것이 무엇 이기에....' 그의 눈에 짙은 의혹과 호기심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 이미 그의 몸은 관도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쏴아아아! 폭우(暴雨), 엄청난 빗줄기가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어둠을 두드리며 퍼붓는 폭우는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물씬 풍겼다. 하늘이, 땅이, 만물(萬物)이 비에 젖고 빗속에 울고 있었 다. 헌데 이때 암흑천지(暗黑天地)를 가르며 한 줄기 섬광(閃光)이 작 렬하는 순간, 폭우 속에 한 인영의 모습이 비쳤다가 다시 어둠 속 에 파묻혔다. 깡마르고 볼품없는 왜소한 인영(人影)이었다. 바로 다비삼각 염비 였다. 전신이 비에 젖어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으며 쭉 째진 두 눈은 극도의 초조와 피로감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 끈질기구나!" 염비는 비틀거리며 지친 듯 내뱉았다. 이때 멀리 어둠 속에 낡은 사당(祠棠)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곳 이었다. 염비의 마른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됐다! 저곳까지만 가면...." 그는 희열의 미소를 지으며 유령처럼 낡은 사당 쪽으로 날아갔다. 과연 천하제일의 경공술의 소유자답게 순식간에 사당 앞에 도착한 그는 번개처럼 사당의 기울어진 문틈 사이로 뛰어들었다. 헌데 염비의 신형이 사당 안으로 사라졌다 싶은 순간 돌연 사당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염비의 신형이 들어갈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밖으로 퉁겨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염비는 삼 장 밖의 흙탕물 속에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가 비틀거 리면서 간신히 신형을 바로세우고 있었는데, 그의 앞가슴에 기다 란 검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당 안에서 뜻밖의 기습을 당한 것 같았다. "크윽!" 그는 휘청거리면서 앞가슴을 움켜쥐더니 한 모금의 뜨거운 선혈을 토해냈다. 그의 앞가슴은 온통 피범벅으로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기세로 보아 그리 깊은 상처는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경악에 젖은 표정으로 사당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불신에 가득 찬 채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사당 속에 적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그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 던 일이었다. 사실 그가 조금만 늦게 움직였어도 그는 이미 가슴이 갈라져 싸늘 한 시체가 뒤어 흙탕물 속에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 사당은 전중원에 산재한 그의 서른아홉 군데의 은신처 중 최후의 은신처였던 것이다. 그는 당장 사당 속으로 뛰어들어가 상대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었 다. 허나 불현듯 그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그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 오는 것을 느끼면서 입안에 고인 핏물을 도로 삼켜 버리고 말았다. "흐흐흐, 과연 소문대로 빠르군!" 마치 갈가마귀가 우는 듯한 소리가 사당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순간 염비의 날렵한 몸은 빗속을 가르며 사당의 오른쪽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가히 섬전과 같아서 도저히 상처를 입은 사람이 내는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과연 다비삼각 염비다 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흐흐, 염비!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당 안에서는 이미 그의 다음 행동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잡초가 무성한 사당의 지붕이 흔들리는가 싶자 기왓장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더니 한 개의 시뻘건 불줄기가 빗속을 가르며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 검 2권 제12장 폭우(暴雨) 속의 대혈투(大血鬪) -3 ━━━━━━━━━━━━━━━━━━━━━━━━━━━━━━━━━━━ ③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섬광(閃光)이 사방 백여 장의 하늘을 뒤덮 었다. 무성한 수풀 속을 달리던 염비는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자 대경 실색하여 부르짖었다. "역시 마, 만류교(萬流敎)의 인물들이구나!" 그의 눈에 공포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는 다급 한 김에 본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산비탈이었던 까닭에 은신(隱身)할 만한 장소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그의 모습은 하늘을 뒤덮고 있는 섬광 덕에 십 장 밖에서 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흐흐흐!" "새앙쥐같은 놈!" "네놈이 본교의 물건을 훔쳐내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사방에서 음침한 소성이 울리면서 좌우 수풀 사이에서 시커먼 인 영들이 빛을 잃어가는 섬광 사이로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염비를 가운데 두고 포진하듯이 멈추어 섰는데 모두 여덟 명의 흑의복면인들이었다. 헌데 이때 염비는 섬뜩한 광경을 보았다. 흑의복면인들이 지나온 주위의 수풀들이 시커멓게 타죽어 마치 뱀 들이 모래 위를 기어온 듯 여덟 개의 길이 염비 쪽을 향하여 생겼 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극양지공을 익혔구나.' 염비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 만류교 정예고수들이 총출동했는가!' 그는 어금니를 깨물며 교활하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는 강호경 험이 풍부한 노회한 인물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살 길이 하나쯤은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문득 경황중에도 그는 한 가지의 의혹이 일어났다. '헌데 저들이 어떻게 알고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돌연 그는 무엇에 생각이 미쳤는지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호, 혹시?' 이때 산비탈 위쪽의 사당 쪽에서 갈가마귀가 우는 듯한 괴성이 들 리더니 한 개의 흑영이 번쩍! 하는 순간 한 그루의 나무 위에 내 려섰다. 흑영은 나무 위에 갈가마귀처럼 앉아 아래쪽의 염비와 흑의복면인 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크크!" 그는 사당 안에서 염비를 암습했던 인물이 분명했다. 역시 나타난 이들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것이 있다 면 그의 가슴에는 한 마리의 비룡(飛龍)이 금실로 수놓아져 있었 다. 비룡을 보는 순간 염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청룡단주(靑龍壇主)! 아아, 오늘은 저들의 손아귀에서 무사하기 어렵겠구나!' 강호를 전횡하면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온 염비였다. 허나 상 대를 확인한 순간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깡마른 몸을 바짝 도사렸다. 청룡단주가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려 염비의 삼 장 앞에 내려섰다. 그의 움직임은 실로 일관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나에서부터 열까 지 갈가마귀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지그시 염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역시 시체를 파먹기 위해 부리 를 깃털에 문지르고 있는 갈가마귀의 느긋한 눈빛과 다를바없었 다. 그는 갈가마귀처럼 입을 열었다. "내놓아라, 염비. 순순히 내놓으면... 흐흐, 고통없이 죽여주마." 그의 음성은 단조로웠고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 려 듣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염비는 정강이에 소름이 끼쳤으나 역시 강호를 삼십 년이나 굴러 먹은 그는 배포가 고무가죽같은 위인이었다. "내놓는 건 어렵지 않으나, 먼저 알고 싶은 게 있다." "뭐냐?"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복면 사이로 빠끔히 드러난 청룡단주의 눈가에 야릇한 빛이 스쳤 다. "흐흐... 염비, 네 예쁜 제자계집이 가르쳐 주었다." "무, 무엇이라고?" 염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역시 짐작대로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었다. 거무튀튀한 염비의 낯가죽이 쉴새없이 꿈틀거리고 있었 다. 이때 휙! 하는 파공성과 함께 주위를 에워싼 흑의복면인들의 머리 를 날아넘어 또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유령처럼 청룡단주의 옆에 내려섰다. ■ 검 2권 제12장 폭우(暴雨) 속의 대혈투(大血鬪) -4 ━━━━━━━━━━━━━━━━━━━━━━━━━━━━━━━━━━━ ④ 공같이 둥글고 작달막한 체구의 다소 우스꽝스럽게 생긴 인물이었 다. 귀신같이 또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나타나자 염비의 얼굴은 더욱 당혹스럽게 변했는데 돌연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두 눈이 부릅떠 졌다. 나타난 흑의복면인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왜소한 홍영(紅影)이 축 늘어져 있었다. 몸매가 가냘픈 것으로 보아 나약한 소녀인 것 같 았다. 소녀를 확인한 염비는 경악해 부르짖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가죽공같은 인물이 몸을 흔들며 흐물흐물 웃었다. "흐흐흐, 죽이지는 않았다." 염비는 코를 씰룩이며 약간 안도의 기색을 보였다. 그의 태도로 보아 소녀를 끔찍이 아끼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안타까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염비는 문득 의아 한 생각이 들었다 '괴이하다, 금아(琴兒)는 설사 목숨을 위협한다 해도 이 사부의 행적을 말할 아이가 아닌데?' 이때 그의 내심을 짐작한 듯 청룡단주가 입을 열었다. "흣흣, 계집이란 제 몸을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법이거든. 발 작을 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더군." 염비는 몸서리치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네, 네놈들이!" 그는 이제야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소녀의 정조를 위협하여 자신의 행적과 맞바꾼 것이었다. "흐흐흐, 걱정 마라. 영리하게도 이 계집은 입을 열었기 때문에 건드리지는 않았으니까." 염비는 그녀가 무사하단 말에 적이 안심은 했으나 내심 낭패감을 감출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되면 묵옥악마상은 엉뚱한 서생 놈의 품 속에 서 썩게 생겼구나!' 헌데 이때 멀리서 빗소리를 뚫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려왔 다. 장내의 인물들은 움찔하면서 휘파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 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너무나 또렷하게 들리는지라 대번에 심후한 공력을 가진 상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눈 깜박할 순간에 휘파람 소리는 지척지간에서 고 막을 찢을 듯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으로 보아 휘파람을 부는 인물의 공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공술까지 최상승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네 줄기의 잿빛 인영이 빗줄기 속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쏘아오고 있었다. 날아오는 속도가 워낙 빨라 십여 장 밖에 이르렀는데도 모습은 알 아볼 수가 없었고 단지 회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는 것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쐐애액! 회색장포인들은 순식간에 장내에 내려섰다. 지척지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들의 용모와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한결같이 강인하고 비수처럼 예리한 기운을 풍기는 화 강암같은 인상의 중년인들이었다. 단숨에 수백 장을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숨찬 기색은커녕 그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을 본 순간 염비의 안색이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헉! 저들은 끝까지 나를 추적해 오던 자들이 아닌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서다가 흠칫하였다. 장내의 분위기가 기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느 낀 것이다. 회색장포인들과 흑의복면인들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 긴장감은 청룡단주 등이 조성하는 것이었고, 회색장포인 들은 시종일관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들은 필시 초면임이 분명했다. 가장 확실하게 그것을 증명해 주 는 것이 바로 회색장포인들이 출현하자 흑의복면인들이 일제히 청 룡단주 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흑의복면인들과 회색장포인들을 번갈아보며 교활하게 눈을 번뜩였다. '저들은 무관한 사이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염비는 갑자기 먹구름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그가 쉴새없이 머리를 굴리며 실눈을 번뜩이고 있을 때였다. 회색장포인들이 천천히 염비에게 다가왔다. "염비, 기껏 도망간 곳이 여기더냐?" 흑의복면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염비는 마치 구원병을 청하는 것처럼 흑의복면인들 쪽을 쳐다봤다. 이때 청룡단주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음침하게 입을 열 었다. "웬 놈들이냐?" 회색장포인들중 외눈의 사내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청룡단주 를 보았다. "웬 놈들이냐고? 만류교의 일개 단주 따위가!" 얼음을 씹어뱉듯 차가운 음성이었다. 청룡단주는 순간적으로 당황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침없는 그들의 행동과, 상대가 결코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라는 직감이 그를 위축되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들은 또 무엇이냐? 아직 강호에 행적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본교를 알고 있다니!' 그는 내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일순 난해한 상황에 빠져 있 었다. "염비! 어서 묵옥악마상을 내놓아라!" 뱀눈에 매부리코를 가진 회색장포인이 쏜살같이 염비에게 덮쳐들 었다. 단숨에 염비를 박살내 버릴 듯 무서운 기세였다. 그것을 본 청룡단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잠시 회색장포인 들의 막강한 기세에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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