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엇이 시작 된 것일까? 그의 미소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헌데 문득 그의 눈가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는... 여전히 몸을 숨기고 있군. 누굴까? 무엇 때문에 며칠전 부터 천기신궁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일까? 어디 확인을 해볼까 나...?'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어 그는 순식간에 수많은 누각들의 머리 위를 지나 천기신궁밖 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도봉으로 이어진 관도. 달빛이 잔잔하게 흐르는 관도에 한 인물이 조용한 걸음으로 신형 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바람이 불 듯 달빛 속을 유유롭게 걸어가 는 청의(靑衣)의 미청년은 다름아닌 북궁후였다. 그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감상이라도 하듯이 간혹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헌데 막 북궁후가 한 그루의 소나무 앞을 지나갈 때였다. 그의 입 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이제보니 나를 찾아온 손님이었군. 천기신궁에서부터 줄곧 나를 쫓아오는 것을 보니....' 며칠 전부터 천기신궁의 주위를 맴돌던 의문의 인영은 북궁후가 천기신궁을 벗어나자 당황한 듯 부랴부랴 그의 뒤를 따라 오고 있 었던 것이다. 허나 북궁후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걷고 있 었다. 이제 북궁후의 신형은 소나무의 그림자를 거의 벗어나 있었 다. 이때 소나무의 울창한 가지가 흔들리더니 그 속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번뜩 튀어 나왔다. 북궁후의 신형이 빙글 뒤로 돌아섰다. 그의 행동은 인영이 땅에 내려서는 시간과 맞춘 듯이 일치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북궁후는 가 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대막유유궁의 혈편웅이 아닌가?" 약간의 놀라움까지 섞인 북궁후의 음성에 혈편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전 공자님께 무례를 범했던!" 말을 끝맺지 못하고 혈편웅은 슬쩍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혈편웅은 대막유유궁의 괴뢰가 되었던, 무황성에서 북궁후와 별로 아름답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헌데, 그대가 이곳에는 어인 일로?" 북궁후의 의문어린 말에 혈편웅은 어색한 헛기침을 한 후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실은 공자님을 모셔 오라는 궁주님의 분부를 받들고 이곳에서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북궁후는 일순 기이한 눈빛으로 묘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후후, 아유라가 무슨 생각으로... 전처럼 안아달라는 앙탈을 부 리려는가?' 급기야 북궁후는 어이없는 실소(失笑)를 지으며 혈편웅을 바라보 았다. 허나 북궁후는 혈편웅의 안색이 어딘지 모르게 침중하게 굳 어 있음을 느끼고 곧 정색을 하였다. "무슨 일인지 연유를 말해줄 수 있겠는가?" 혈편웅은 북궁후의 기이한 표정에 당혹의 기색을 떠올리고 있다 그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궁주님의 신변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 지고 있는 듯 합니다!" 북궁후는 혈편웅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스침을 느꼈다. '음, 혈편웅은 자세한 설명을 꺼리는군. 그로보아 매우 심각한 일 인 듯한데!' 이때 말을 마친 혈편웅은 미동도 없이 북궁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혈편웅의 눈빛은 말을 대신하여 어떤 간절한 기대를 토하고 있었 다. 북궁후는 그러한 혈편웅의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이 자의 태도로 보아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헌데 그것이 무 엇이란 말인가?' 북궁후는 대막유유궁에서 일어난 일을 짐작할 수 없어 잠시 결정 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자 혈편웅이 안타까운 기색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중원의 안위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궁주님께서는 공자님 밖에 도움을 청할 분이 없다고...." 혈편웅은 말을 하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손등에서 시 퍼런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북궁후는 그런 혈편웅의 모습을 예리하게 주시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미 승소진에게 몇 가지의 안배를 해놓은 터, 대막에 다 녀올만한 시간은 충분하지 않겠나?'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쳤다. "좋소, 그대의 뜻에 따르기로 하겠소!" 혈편웅은 순간 얼굴을 환하게 풀며 반색을 하였다. "고맙습니다. 공자, 공자께서 행여나 거절하실까 무척 가슴을 졸 였습니다!" 북궁후는 혈편웅의 말에 고소를 머금었다. "허허, 그대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료!" 혈편웅은 머쓱 어깨를 추스렸다. "그런데 본인이 어떻게 궁으로 들어간단 말이오?" 혈편웅은 그것은 염려 말라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궁주님만이 아는 비밀통로를 통하여 직접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 다!" 북궁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았소, 어서 서두르도록 합시다!" 이어 혈편웅과 북궁후의 신형(身形)이 빠르게 관도를 벗어나고 있 었다. 대막, 그 광활한 땅은 무슨 연유로 북궁후를 부르고 있는가? 알 수 없는 의문을 남긴 채 관도는 햇볕에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 고 있었다. ■ 검 3권 제27장 심기(心機) 대 심계(心計)! -7 ━━━━━━━━━━━━━━━━━━━━━━━━━━━━━━━━━━━ ⑦ 대막, 그리고 대막의 패자인 유유궁! 대막과 유유궁은 언제부터인 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것은 유유궁이 명실상부한 대막 의 주인(主人)이기 때문이었다. 대초원의 중앙에 마치 고대전설 속의 궁전(宮殿)처럼 자리잡은 유 유궁! 광활한 대지 위에 세워진 유유궁의 웅자는 일견(一見) 사람을 위 압하는 웅자를 지니고 있었다. 위이이잉! 대막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도 유유궁의 웅자 앞에서는 한풀 꺾인 듯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인지 이 거대한 유유궁에 암운(暗雲)이 짙게 깔리고 있었으니! 접빈청(接賓廳). 극히 호화로우면서도 웅장하게 꾸며진 정청(正廳)이었다. 실내(室內)에는 굵은 밀향촉(密香燭)이 사위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밀향촉의 불빛과 향기가 집중되는 실내의 중앙에는 두 개의 장중 한 천주목(天柱木)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지금 태사의에는 두 명의 인물이 대좌해 있었다. 그들은 북궁후와 유유궁주인 아유라였다. 아유라의 신비스럽도록 푸른 눈동자는 북궁후를 그윽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어 무슨 심각한 생각을 하는 듯 싶었다. 북궁후는 그런 아유라의 눈을 정시한 채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 었다. "유유궁이 외부의 세력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니... 상상치도 못했던 사실이군!"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명실공히 대막의 패주인 유유궁을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니! 아유라의 태도로 보아 그것은 매우 심각 한 지경까지 이른 듯했다. "그들은 이미 본궁의 내부(內部) 깊숙한 곳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 어요." 아유라의 푸른 눈동자에 우울한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그럼에도 그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단 말이오?" 북궁후의 질문에 아유라는 긴 한숨을 불어냈다. "그러한 사실을 알았을 때는 내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도 늦어 있 었어요. 사실은...." 아유라는 문득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북궁후의 눈치를 살폈다. 북궁후는 무언(無言)의 눈짓으로 자신의 의아함을 전했다. "유유궁이 중원에 손을 뻗친 것도 그들의 의도였어요. 저는 그들 의 손아귀에 놀아난 거죠!" 아유라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으음, 아유라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인 모양이군!' 북궁후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그대는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까지 간파하고 있소?" 아유라는 자신의 손끝을 가만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들에게 복종하는 본궁의 첩자와 대막에 설치된 그들의 분단 정 도에 불과해요." 북궁후는 일순 눈을 번쩍 빛냈다. "좋소! 놈들에게 조종당하는 유유궁 반도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 소?" 아유라는 품 속에서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를 북궁후에게 건네 주 었다. 아유라의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북궁후는 잔잔한 눈길로 서찰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찰을 모두 읽은 북궁 후의 시선이 다시 아유라에게 옮겨졌다. "놀랍구료. 유유궁의 장로(長老)라는 자들이 역도에 끼어 있다니 말이오?" 순간 아유라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쭉 뻗쳤다. "그놈들은 본궁의 실권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더욱 욕심 을 내는 거예요!" 북궁후는 다시 한 번 서찰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한 후 두 손에 가 볍게 힘을 주었다. 서찰은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알았소. 오늘 밤 유유궁의 역도들을 깨끗이 청소해 주겠소!" 아유라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허나 조심하셔야 될 거예요.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예 요!" 아유라는 다시 한 번 걱정스런 표정으로 북궁후를 쳐다봤다. "더우기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아유라는 얼굴을 붉히며 다음 말을 맺지 못했다. '이런! 내몸에 이상이 생긴다면 당신을 안아주는데 차질이라도 생 긴단 뜻이오?' 북궁후는 어이없게도 아유라의 다음말을 상상하고 있었다. 약간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짧게 흘러갔다. "자, 이제 일을 시작해 봅시다!" 북궁후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그들 의 신형은 아직도 불꽃을 사르는 황촉만을 남긴 채 실내에서 사라 졌다. ■ 검 3권 제27장 심기(心機) 대 심계(心計)! -8 ━━━━━━━━━━━━━━━━━━━━━━━━━━━━━━━━━━━ ⑧ 밤(夜),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푸르스름한 조각달만이 싸늘 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 화려한 유유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간간히 순찰을 도는 경비무사들의 칼집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 이었다. 헌데 하나의 흑영이 야음(夜陰)을 타고 유령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흑영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하 나의 누각(樓閣)이 보였다. '음, 저곳이군!' 그의 몸이 거미처럼 누각의 벽에 찰싹 달라 붙었다. 다음 순간 실 로 상상도 못할 경이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의 신형이 흐려지더니 손가락 마디밖에 안되는 극히 미세한 창 틈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싸늘한 달빛 아래 찰라간 벌어 진 상황은 표현조차 못할 기이함을 풍겨 내고 있었다. 대체 이 기이한 정경의 장본인은 누구란 말인가? 방 안, 창틈으로 스며든 흑영은 창쪽의 벽에 찰싹 달라붙은 채 방 안의 정경을 예리하게 살폈다. 비록 그의 눈빛은 아무런 광채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보는 사 람을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흑영의 시선이 방 안의 어느 한곳에 멈추었다. 방 안 한구 석의 침상에는 한 노인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일순 흑영의 몸 이 유령처럼 침상 앞으로 미끄러졌다. 노인을 내려다 보는 흑영의 입에서 짤막하면서 무심한 음성이 흘 러 나왔다. "귀유마도(鬼幽魔刀) 천세환(千世桓)!" 노인이 눈을 번쩍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크윽!" 허나 그는 곧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해면체처럼 늘어졌다. 그의 앞 가슴에는 시퍼런 비수(匕首)가 등뒤를 꿰뚫고 침상까지 깊숙이 박 혀있었다. "후후, 유유궁 삼장로(三長老) 천세환, 나 북궁후가 네놈의 목숨 을 취했음을 알려준다!" 흑영은 바로 북궁후인가! 귀유마도 천세환은 결국 중원에서 온 이 방인에 의해 목숨을 탈취당한 것이다. 곧이어 북궁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검 3권 제27장 심기(心機) 대 심계(心計)! -9 ━━━━━━━━━━━━━━━━━━━━━━━━━━━━━━━━━━━ ⑨ 혈심천절(血心天絶) 나극찰(羅克刹)의 침소였다. 나극찰은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헌데 이때 부드러운 음 성이 문 밖에서 들려왔다. "나장로, 자는가? 본좌는 삼장로일세." "예? 삼장로께서 무슨 일로 이 야밤에?" 나극찰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빛에 의혹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하, 오장로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네!" "아! 어서 들어오십시오." 나극찰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과연 들어온 사람은 삼장로 인 귀유마도 천세환이었다. 귀유마도 천세환은 극히 음사한 기운을 풍기는 노인이라는 것을 나극찰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천세환은 평소의 그답게 전신에서 귀기로운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천세환은 심각 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요즘 궁주의 동태가 심상치 않소. 해서 그대와 대책을 상의해 보 려고 온 것이오." 나극찰은 기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도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중원에 다녀온 뒤로 무엇인가 비 밀리에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오장로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천세환은 더욱 음사한 기운을 뿜으며 말을 이었다. "본좌는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네. 말로 하면 혹시 타인의 귀에 새어나갈 우려가 있으니 글로 쓰겠네." "아, 역시 삼장로님은 용의주도 하시군요. 그게 좋겠습니다!" 나극찰은 감탄을 터뜨리며 곧 지필묵(紙筆墨)을 가져왔다. 천세환은 사이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 이리 가까이!" 나극찰은 궁금한 표정으로 목을 길게 뽑았다. 찰나 천세환의 눈빛 에 언뜻 섬칫한 살기가 빠르게 스쳤다. 허나 나극찰은 탁자의 종이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기에 그런 기색 을 볼 수가 없었다. 이어 천세환은 재빨리 붓을 움직였다. 나극찰은 온 신경을 집중하 여 쓰여진 글자를 바라보았다. <死> "억!" 나극찰은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물러났다. "후후, 이미 늦었다!" 녹슨 쇠를 무자비하게 깎아내듯 역겨운 음성이 천세환의 얄팍한 입술을 비집고 섬뜩하게 울려 나왔다. 돌연 천세환의 손에 든 모 필이 빳빳이 곤두서더니 ㅆ! 하는 소리와 함께 나극찰을 향해 폭 사되었다. "어헉!" 나극찰은 피하고 막고 할 여지도 없이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그의 전신에는 가느다란 붓털이 고슴도치처럼 빈틈없이 박혀 있었 다. "이, 이게 대체?" 나극찰의 눈빛에는 의혹과 불신이 가득 서려 있었다. 천세환은 문 득 음산한 괴소를 흘려냈다. "후후, 나극찰, 지옥에 가면 삼장로가 친절히 맞아줄 것이다." "뭣이, 그, 그럼 삼장로도 이미!" "그렇다, 그놈은 너보다 한발 앞서 황천으로 달려갔다!" "크윽!" 나극찰은 안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리며 탁자 위에 곤두박질쳤다. 절명한 것이다. 천세환은 다름아닌 북궁후였다. 그는 나극찰의 시신을 내려다 보 며 중얼거렸다. "후후,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염라대왕에게 내 이름이 북궁후 라 여쭈어라." 지금 이 순간 북궁후는 얄밉게도 가느다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어 그는 어디론가 귀신같이 사라졌다. ■ 검 3권 제28장 뜨거운 여인! ━━━━━━━━━━━━━━━━━━━━━━━━━━━━━━━━━━━ ① 유유궁 칠장로(七長老) 승천혈룡마(昇天血龍魔) 형태려는 지금 막 운기조식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였다. 헌데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방문이 박살나며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방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엇!" 형태려는 안색을 긴장시키며 급히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려 만일 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헌데 그 물체를 보는 순간 형태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아, 아니, 오장로!" 놀랍게도 형태려의 앞으로 굴러온 것은 전신이 피투성이로 변한 오장로 나극찰이 아닌가! 이때 나극찰의 전신은 처참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형편없이 찢어지고 뭉개져 있었다. 또한 입에서는 연신 선지피를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다. "오장로, 오장로!" 형태려는 다급한 나머지 그 말만을 외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나극찰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내 말을...." "어서 말해 보시오!" 형태려는 황급히 나극찰의 입에 자신의 귀를 가져다 댔다. "궁주가, 중원에서 고수들을 초빙... 남은 것은 그대 뿐... 나머 지 장로들은 이미... 어서 이 사실을!" 찰나 나극찰의 안면이 처절히 일그러졌다. 거기에 극도의 당황감 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어서, 어서 이 사실을!" 나극찰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푹 꺾었다. "으!" 형태려는 짐승같은 신음을 흘려내며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 바람에 형태려의 품 속에 있던 나극찰의 시신이 바닥으로 나뒹 굴었다. 헌데 돌연 죽은 나극찰의 시신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가! "빌어먹을 자식, 살살 내려 놓으면 누가 잡아먹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나극찰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이젠 이따위 변장은 필요 없겠지!" 나극찰은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뜯어(?)냈다. 그러자 거기에서 북 궁후의 영준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피에 젖은 겉옷까지 벗어 버렸다. 헌데 겉옷을 벗은 북궁후의 몸에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리석은 놈, 이따위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 가다니!" 북궁후는 피식 웃으며 하나의 가죽주머니를 벽에 던졌다. 퍼억! 가죽주머니가 벽에 부딪히며 비릿한 액체가 확 터져 올랐다.그것 은 소름이 쫙 끼치도록 선렬한 피(血)였다. "이것이 돼지의 피라고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북궁후는 이윽고 몸에 달렸던 가죽 주머니를 모두 떼어냈다. 간단하면서도 상대가 의심(疑心)하지 못하도록 한 교묘한 계략이 었다. "이제 놈을 뒤쫓아 뿌리를 뽑는 일만 남았군. 내 예측이 맞는다 면!" 북궁후의 눈에 반짝 기광이 스쳤다. "서문유허, 놈들의 뿌리는 서문유허의 만류교에 귀결될 것이다!" 마지막 말의 여운이 길게 꼬리를 끄는가 싶을 때, 북궁후의 신형 이 허공 아득히 솟아 올랐다. 곧이어 북궁후의 신형은 암천으로 형체없이 빨려 들어갔다. ■ 검 3권 제28장 뜨거운 여인! -2 ━━━━━━━━━━━━━━━━━━━━━━━━━━━━━━━━━━━ ② 형태려는 조물주가 자신에게 두 개의 다리만 부여한 것을 원망하 며 비지땀을 쏟으며 질주하고 있었다. 형태려는 야공이 비명을 지 를 정도로 빠르게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유유궁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달렸을 까? 형태려의 눈에 웅장한 장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리는 약 백여 장 정도였는데 희미한 장원 속에서 달빛은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매우 웅대한 장원이었다. "휴! 그 계집이 그런 맹랑한 짓을 하다니!" 형태려는 맹랑한 일이라 말했지만 대뜸 분노가 치솟는 듯 뿌드득 이빨을 갈아 붙였다. 뒤이어 형태려는 달리던 속도를 늦추며 이마 의 땀을 씻었다. 그의 전신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윽고 형태려는 걷는 듯 천 천히 장원으로 접근해 갔다. 헌데 그 순간 형태려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구냐?" 그의 음성에는 극도의 경악이 물씬 배어 있었다. 허나 다음 순간. "엉!" 형태려는 자신의 뒤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당혹성을 흘렸다. 거기에는 달빛을 받은 한 그루 고목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 었다. "제기랄, 나뭇가지에도 놀라는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도 형태려는 무언가 미심쩍은 듯 사위를 둘 러보았다. "역시 나뭇가지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형태려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친구, 이번 놀이에는 자네가 졌네!" "어!" 형태려는 억 소리도 미처 맺지 못하고 뻣뻣이 몸이 굳어졌다. 어느새 마혈과 아혈이 짚인 것이다. 야풍이 스산하게 형태려의 얼 굴을 스치는 순간 형태려의 앞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북궁후였다. 지금 북궁후의 몸은 형태려의 머리 위 나뭇가지 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형태려의 얼굴과 북궁후의 얼굴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마 주보고 있었다. 북궁후는 빙긋 웃었다. 하얀 치아가 달빛에 반짝 였다. "칠장로 나리, 여기까지 본인을 안내하느라 매우 애쓰셨소!" "이놈! 네놈은 누구냐!" 말은 할 수 없으나 형태려의 눈빛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북궁후라는 귀궁주의 손님이오, 우리 앞으로 벌어질 재미 있는 일을 구경해 보도록 합시다." 북궁후는 형태려를 향해 정답게 웃어 보였다. '이, 빌어먹을 놈!' 형태려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하하, 화내지 말고 정답게 구경이나 하자니까." 빙글빙글 웃으며 북궁후는 품 속에서 무엇인가 허공을 향해 던졌 다. 손으로 던질 수 있게 만든 화전(火箭)이었다. 화전은 허공에서 소 리없이 아름다운 꽃무늬를 수놓았다. "잠시 후면 당신의 궁주가 당신의 친구들을 황천으로 인도하기 위 해 달려올 것이오." '으!' 형태려는 내심 신음을 흘리며 잡아먹을 듯 북궁후를 노려보았다. 허나 북궁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무 위에서 형태려의 앞으 로 신형을 떨어뜨렸다. "당신은 앞에 보이는 장원이 어찌 되는지 잘 살피시오, 본인은 달 빛이나 감상하겠소." 북궁후는 선 채로 뻣뻣이 굳어 있는 형태려의 발을 베고 길게 누 웠다. '이 귀신같은 놈!' 형태려는 미칠 지경이었다. 북궁후는 형태려의 발을 베고 누운 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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