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금 다시 잔뜩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꼭 나와 싸울 작정이냐?" 단황이 물었다. 그의 심유한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소." "나와 싸워 이길 자신은 있느냐?" "이기고 지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소." 복청양이 삼절묵창을 여섯 자 길이로 늘렸다. 삼절묵창의 끝이 곧장 단황의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오. 동생이 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그렇군." 단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철검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오너라." "고맙소." 복청양이 고개를 숙여 사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삼절묵창이 긴 꼬리를 끌면서 단황의 가슴을 찔러갔다. "좋다." 단황의 철검이 비스듬히 삼절묵창을 베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삼절묵창은 넉 자 길이로 줄어들며 연속하여 열두 번의 변초를 하고 있었다. 그 열두 번의 변초는 한결같이 사혈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살기가 가득했다. 복청양이 누구를 상대로 이처럼 살기어린 초식을 전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단황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철검을 흔들어 일일이 삼절묵창의 변초를 해소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단 한차례도 두 사람의 병기가 부딪치지 않았다. "차앗!" 복청양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나왔다. 삼절묵창이 어지럽게 창영을 그려내고 있었다. 창영은 열여섯 개에서 순식간에 열여덟 개로 늘어났다. 쇄금십팔창법의 최고 단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창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열여덟 개의 창영이 다시 스무 개로 늘어났으며, 이어 그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쇄금십팔창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칠분의 수비와 삼분의 공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분의 공격과 사분의 수비로 변화하고 있었다. 사방에 창영이 가득하였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창영은 많아졌고 그 위력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저건?' 지마가 창영이 내뿜는 경기를 이기지 못해 뒤로 물러섰다. 백아아는 그보다 먼저 더 멀리 물러섰는데 그녀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고이고 있었다. '복공자의 저러한 수법은 본 일이 없다. 복공자는 이미 어느 한계를 극복한 것 같구나.' 백아아는 알지 못했다. 복청양의 쇄금십팔창법이 갑자기 그 위력을 증가한 것은 복금사의 죽음 때문이었다. 복금사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의 몸 속에 내재되어 있던 잠재력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손질을 시작하였을 때 백아아는 당연히 복청양의 안전을 염려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황의 안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단황의 능력을 믿는 마음이 크긴 하지만 그만큼 복청양의 창법이 위력적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검은 창영이 단황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심하기만 하던 그의 눈이 기이한 섬광을 발산했다. "핫!" 작은 기합이 터져나왔다. 버 언쩍! 돌연 철검이 무지개처럼 긴 꼬리를 그었다. 그와 동시에 단황은 검은 창영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무모하리만치 거침없는 돌진이었다. "앗!"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복청양은 그토록 엄밀하던 창영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경기가 여지없이 파괴되면서 단황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철검이 목을 찔러왔다. 그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는 필살의 일초였다. 복청양은 삼절묵창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철검은 그의 목에서 정확하게 한 치 앞에서 멎어 있었다. 만일 단황이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철검은 그의 목을 뚫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조금만 늦게 발초하였다면 삼절묵창이 그를 죽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단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한순간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좋은 창법이었다." 단황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철검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복청양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네가 나를 이기고 싶다면 나중에 다시 오너라." "어억!" 복청양의 입에서 돌연 한 모금의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선혈은 그의 옷을 흠뻑 적시고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복청양은 비록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으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으며 신형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의 일초로 그는 진력을 전부 소비하였으며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가거라." 단황이 돌아섰다. "반드시…… 다시 오겠소." 복청양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그는 채 열 걸음도 가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복공자!" 백아아가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복청양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한 팔로 땅을 짚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더니 휘청휘청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버리고 가는 복금사의 시신마저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저자를 그냥 보내는 겁니까?" 더 참지 못하고 지마가 소리쳤다. "이미 결정된 일이오." 단황이 단호하게 말을 끊더니 백아아를 돌아보았다. "네가 가거라. 가서 저자를 안전하게 보내 주어라." "예, 마주." 백아아가 냉큼 허리를 숙이더니 몸을 날렸다. 그녀의 날렵한 신형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주, 난 마주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오. 사실은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니까. 갑시다." 단황은 지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는데 느리게 걷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홀로 남은 지마가 주먹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네가 모든 것을 망치게 둘 수는 없다. 단황, 아무리 너라도 그렇게는 못한다. 지금까지 쌓은 공이 얼만데 너의 그 얄팍한 동정심으로 모두 망치는 걸 보고만 있겠느냐. 네가 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하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천노살성은 반드시 오늘밤 죽어야 한다." 결심을 굳힌 지마는 바쁘게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것은 단황이 간곳과는 또 다른 방향이었다. * * * 복청양은 걷고 있었다. 좌우쌍마와의 혈전에서 입은 상처는 실상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나 검상이 너무 많았고 지혈할 시간이 없어서 출혈이 심했다. 게다가 단황과의 싸움에서 입은 내상은 거의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단황이 무형의 강기로 그에게 내상을 입힌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입은 내상은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여 쇄금십팔창법을 시전하다가 그것이 부서지는 순간 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이 어찌나 심했던지 내장이 모두 자리를 바꾼 것만 같았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엄습했다. 심한 출혈은 그의 시야를 계속 어지럽히고 있었다. 눈앞에 까만 장막이 덮인 것만 같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긴다는 것이 지옥행 그 자체였다. 복청양은 쉬고 싶었다. 바닥에 편안히 몸을 눕히고 쉬고만 싶었다. 그래서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쉴 수 없었다. 복금사의 얼굴이 계속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복금사를 부탁한다던 아버지의 유언이 귓가에 쟁쟁 울리고 있기 때문에, 단황의 여유있는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저며 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걸어야만 했다. 얼마 걷지 않아 작은 돌부리가 발에 걸렸다. 복청양은 그만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그러자 지독한 통증이 몸을 엄습하며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아아……." 그는 하늘을 보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그러나 이윽고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걸었다. 걷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는 가야만 했다. 천품신성이 기다리고 있는 운유애로. 거기에 가서 파천일해로 단황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걸었다. 몇 번을 넘어졌을까.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복청양이 어느 순간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죽었는지도 몰랐다. 험한 산을 무수히 구르고 전신이 피범벅이 된 그의 모습은 시체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가 움직였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손이 움직였다. 팔이 움직이고 그 팔이 땅을 딛었다. 그는 일어나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차라리 눈을 감은 채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저 자신도 모르는 본능이 그를 일어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부드러운 팔이 그의 겨드랑이로 들어왔다. "내게 기대요." 달콤한 향기가 풍긴다. 여인의 향기, 그리고 여인의 음성, 언제까지나 기대어 편안히 쉬고 싶은 여인의 감촉. 복청양은 그것이 백아아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까만 장막이 덮여 있었고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그 장막은 더해지기만 했다. "천천히…… 무리하지 말고…… 그러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백아아가 그를 부축하며 속삭였다. 그녀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여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방법으로. '싫어.' 복청양은 도리질을 치며 그녀를 밀어내고 싶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도움만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단황의 여자이기에. 그런데 그녀가 과연 단황의 여자인가. 단황의 수하가 아니었던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복청양은 그녀를 밀어내지 못했다. 밀어내고 싶어도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로서는 지금 그녀에게 기대어 서 있는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던 것이다. 백아아는 복청양의 몸이 점점 처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생기를 거의 상실한 모습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말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거부의 몸짓을 하는 듯했지만 그것도 분명치 않았다. 그저 거친 숨만 색색 몰아쉬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아프다. 이 모든 일이 그녀의 책임인 것만 같았다. 실상 이번 일에서 그녀가 한 역할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복금사가 죽은 것도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는 복금사가 거기에 갇혀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미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법은 없었겠지만. 맹세코 그녀는 복청양을 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으며 면하려고 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복청양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적당한 휴식과 치료, 그것은 복청양에게는 감로수와도 같을 것이다. 그녀는 복청양의 상세가 중하긴 하지만 그가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살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에게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지를 잃지 않는 한 그는 죽지 않는다. 백아아는 복청양을 부축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복청양의 체중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고 자신의 체온으로 인해 그의 몸이 덥혀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거칠기만 하던 그의 호흡이 점차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언제까지고 있고 싶다. 비록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으나 백아아는 그 시간을 무한정 연장시키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몸이 되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이 남자를 지탱한 채로 영원이라는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이대로 이 남자와 함께 죽어도 좋아.' 백아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고 지금이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님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그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제 33 장 역리(逆理) "보기 좋군." 그가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중얼거렸다. 백아아는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짐을 느꼈다. 하늘이 빛을 잃고 거대한 산 그림자 하나가 눈앞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너무나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는 패마였다. "보기 좋아." 패마가 다시 중얼거렸다. "마치 한 쌍의 원앙 같아." "여기는 웬일이죠?" 백아아는 처음의 당황함을 삼키며 물었다. "당신이 이런 곳에 나타나다니 의외로군요." "놀랄 것 없어. 나는 다만 저자를 죽이러 왔을 뿐이니까." 패마가 웬만한 나뭇가지보다 굵은 손가락을 뻗어 복청양을 가리켰다. "비켜라." "이 사람을 죽인다고요?" 백아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 사람을 안전하게 보내주라는 마주님의 명령을 받았단 말이에요." "마주의 명은 나도 알고 있다." 패마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저자를 죽이라는 지마의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 그래서 나는 이 순간만은 마주의 명령에 구애를 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비켜라." "그럴 수는 없어요." 백아아는 한 팔로 복청양을 끌어안으며 자신의 몸으로 그를 가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패마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노여움의 불길이 훨훨 일고 있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마주님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어요. 그 누구라도 안 돼요. 나는 이 사람을 안전하게 보내주라는 마주님의 명을 받았고 그 명을 지킬 거예요." "비키라고 했다." 패마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단순한 사람답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키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사실 지마는 너도 저자와 같이 죽이라고 했다. 유감스럽지만 너는 마주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만은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비켜라.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대단하군요." 백아아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당신들을 지배하는 게 누구인가요? 마주님인가요, 아니면 지마인가요? 당신은 지금 누구의 명을 쫓고 있는 거죠?" "마주는 위대하다. 하지만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는 마주보다는 지마가 낫다." 패마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비켜라. 아니면 너는 죽는다." "그렇게는 못해요. 절대로." 백아아가 입술을 깨물며 복청양을 감은 팔을 풀었다. 그녀는 복청양이 고통을 느끼지 않게 그를 바닥에 눕히고는 자신의 몸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사람을 죽이려면 먼저 나를 죽여야 할 거예요." "어리석군." 패마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아아가 이처럼 완강하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았다. "그럼 할 수 없지." "흥, 나를 가볍게 보면 안 될 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아아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패마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유일한 길은 달아나는 것뿐이다. 그녀 혼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패마는 결코 그녀를 뒤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복청양을 동반하고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백아아는 선수를 쳐서 패마를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패마는 백아아의 손이 바싹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리석군.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다니." 패마가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펴며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일장을 갈겼다. 펑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백아아가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패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아아는 뒤로 물러나는 기세를 빌려 옆으로 신형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패마의 주위를 싸고돌며 연속으로 삼장을 갈겼는데 그 빠르기가 비할 바 없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패마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신법의 정묘함으로 맞서 싸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패마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조금씩 돌리며 삼권을 쳐냈는데 그 삼권이 모두 백아아의 장력을 해소하고 있었다. 권풍과 장력이 부딪칠 때마다 백아아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 기혈이 들끓어 신법조차 제대로 전개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세불리를 깨달은 백아아는 선향무(仙香舞)의 절초를 구사하여 바람처럼 패마의 등 뒤로 돌아가며 일장을 갈겼다. 그리고 패마가 몸을 돌려 그 일장을 받아치는 순간 장세를 회수하며 뒤로 돌아갔다. 백아아는 계속하여 패마의 뒤로 돌아가며 장력을 발출하였는데 그 장세는 패마의 권풍이 몰아쳐 오면 어김없이 회수되었다. 그러니까 단 한 번도 제대로 시전된 적이 없었고 두 사람의 힘이 부딪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지나갔다. 백아아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옷이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계속하여 신법을 전개하며 싸운다는 것이 힘에 겨웠던 것이다. 하지만 패마의 얼굴에도 점차 짜증스러운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가시군." 패마가 문득 중얼거렸다. 쏴아 백아아의 옥수가 패마의 등을 격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패마의 몸을 돌리는 속도가 조금 늦었다. '이건?' 백아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전력을 다해 패마의 등을 격타했다. 퍽! 북 치는 소리가 난다. "아악!" 그러나 비명을 지른 것은 오히려 백아아였다. 그녀는 손목을 움켜쥐고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는데 손목이 밑으로 축 늘어진 것이 부러진 것 같았다. 그녀의 콧등에 콩알만한 땀이 흘렀다. "어, 어떻게…… 분명히 명문혈을 때렸는데……." "흐흐…… 너의 그 솜뭉치 같은 손으로는 가렵지도 않다." 패마가 불쑥 손을 뻗었다. 그는 휘청이며 신형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백아아의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고 있었다. "핫!" 백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수치심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그 순간 패마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떠오르며 손에 힘이 들어갔던 것이다. "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백아아의 탐스러운 젖가슴이 풍선처럼 터져나가고 있었다. 검붉은 선혈이 상체를 적셨고 그녀는 작살에 찔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얼굴에는 까만 죽음의 기운이 뒤덮이고 있었다. "흐흐흐……." 패마가 다시 비릿한 웃음을 토해내더니 다른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이어 그것도 여지없이 터져나갔다. "아!" 이번의 비명은 짧고 가늘었다. 백아아의 긴 머리칼이 아래로 늘어졌다. 그녀는 스르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릎이 땅에 닿기 전에 패마가 그녀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낙엽처럼 떠올랐던 그녀의 몸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나 그 순간 패마는 주먹을 들어 대력신왕권으로 그녀를 후려치고 있었다. "으와아!" 짐승 같은 괴성이 터져나왔다. 비명도 없이 백아아가 훌훌 날아갔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는 공처럼 한 번 튀어오르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흐으으……." 패마의 얼굴에 잠깐 희열의 빛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의 눈이 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복청양에게로 향한다. "흐흐, 이제는 저놈 차례인가?" 패마가 걸음을 성큼 옮겨 놓았다. 그는 단 두 번의 발걸음으로 복청양의 곁에 이르러 있었다. "영광으로 생각해라. 고통없이 죽는 걸." 패마의 큰손이 들렸다. 바야흐로 그 손이 내려오면 복청양의 목숨이 열이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저 여자는 죽었소?" 흠칫 패마가 몸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철립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사내. 섬전도였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백아아의 사체를 보고 있었다. "흐흐, 그런 셈이지." 섬전도가 느닷없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을 의아해 하면서도 패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살릴 재간이 있으면 어디 살려 보라고. 대라신선이 와도 그건 안 될 걸." "내가 왜 저 여자를 살리겠소." 섬전도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음성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소." "부탁? 내게?" "저자를 내 손으로 죽이게 해주시오." 섬전도가 턱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복청양을 가리켰다. 그러자 패마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흐른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나? 자네도 지마의 부탁을 받았나?" "그런 셈이오." 섬전도가 허리춤에 매달린 반월도를 움켜쥐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비록 그가 원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번쩍 도광이 하늘을 갈랐다. 마치 어둠 속에서 하얀 번개가 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번개는 너무도 빠르게 사라졌다. "크윽!" 패마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을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왜……?"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건 마주의 명이기 때문이오. 저자를 안전하게 보내라는." 섬전도가 여전히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주의 명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소. 어떠한 경우라도." 섬전도가 몸을 돌렸다. 그는 거창한 소리를 내며 패마가 쓰러지는 것을 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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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도는 정확했으며 새삼스럽게 그 결과를 확인한다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나 같았다. '당신은 너무 방심했소…….' 섬전도는 몸을 숙여 복청양을 안아 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