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그것은 어제 복청양이 라마승들을 무찌를 때 선보였던 바로 그 주먹질이었다. 어제 복청양이 보여준 동작은 아주 단순했으며 단은 주의깊게 보았기 때문에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평범한 주먹질이 어떻게 그렇게 기묘한 조화를 부릴 수 있을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 그거!" 복청양이 빙그레 웃었다. "너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네." 단의 대답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배우고 싶어요. 가르쳐 주십시오." "단아, 무공이란 네 생각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아주 몹쓸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저는 배우고 싶습니다." 단이 복청양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빛은 아주 맑았으며 태도가 몹시 진지했다. "저는 무공을 배워서 반드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생이라도 달갑게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천하제일의 고수라……." 참으로 어린아이다운 발상이 아닌가! 만일 천하제일고수라는 게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이 아이는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복청양은 결국 단의 진지한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원한다면 배워 보거라. 이걸 배운다면 어제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네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단이 땅에 머리를 박았다. 어느샌가 그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천대만 받으며 길가의 돌멩이처럼 살아온 그였다. 누가 그에게 관심이라도 가져 주었는가. 그런데도 이 사람은 그에게 절기를 전수해 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단으로서는 꿈인가 싶을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건 행운이다. 그리고 나는 반드시 이 행운을 잘 살릴 것이다.' 단은 입술을 깨물며 굳게 결심했다. "잘 보거라." 복청양이 주먹을 뻗었다. 그의 주먹은 아까 단이 시전하는 것과 같이 평범하게 뻗어나왔다. 그러나 주먹이 상대의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기묘한 각도로 틀어진다. '저럴 수가.' 이미 수차례 본 것이지만 단은 놀라움으로 인해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팔이 어떻게 저런 각도로 틀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보았느냐?" 복청양이 진지한 얼굴로 단을 보고 있었다. "이 수법은 단 일초식이다. 그러나 이걸 올바르게 시전하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일권의 장점은 내공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당한 속도와 힘만 조절하면 어렵지 않게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이 일권을 제대로 펼치는 것은 쉽지 않다." 복청양이 다시 주먹을 뻗었다. 아까와 똑같은 방식이었으며 이번에는 단이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였다. 복청양은 연달아 세 번을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이제 네가 해보아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단이 신중하게 주먹을 뻗었다. 그는 이 일권의 묘리가 속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속도가 붙지 않는다면 아무리 기묘한 일권이라도 상대에게 타격을 입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복청양이 보여준 것과 같은 속도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는 다만 주먹이 틀어지는 각도만 흉내내려고 애썼다. 이번에 단이 시전한 동작은 복청양이 보여준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러나 설사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일권이 복청양이 시전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힘드네요." 연달아 다섯 번을 같은 동작을 반복한 단이 복청양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복청양의 놀라움은 컸다. '대단하구나. 겨우 몇 번 보여준 것만으로 저 정도까지 따라할 수 있다니!' 복청양은 이 일권이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후웅에게 이 일권을 전수받으면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방금 단이 보여준 일권은 비록 엉성한 것이기는 했으나 후웅권의 기초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무공에 천부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다. 무서운 아이다.' 그러나 복청양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고 잘 보거라." 복청양은 다시 몇 번인가 후웅권을 시전해 보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한결 진지했다. 그는 단이 무공을 익히는 데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고 부쩍 흥미를 느낀 것이다. 단이 다시 그의 동작을 따라 했다. 복청양은 그의 잘못된 동작을 교정해 주고는 후웅권의 묘리를 입으로 가르쳐 주었다. 단이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복청양의 무공전수는 한나절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단은 온 얼굴에 땀을 줄줄 흘리며 후웅권을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복청양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웬만하면 힘이 든다고 쉬었다 하자고 할만도 한데 단은 그러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이 일권을 배우는 데 자신의 생명이 걸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온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단이 보여주는 집중력과 끈기는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 사방에 어둠이 어둑어둑 내릴 즈음에 마침내 단은 후웅권의 기본 동작을 구 할 정도 익히는 데 성공했다. 복청양이 보름에 걸쳐 배운 것을 단 하루만에 끝을 낸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산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교굉과 교희가 돌아왔다. 좁은 방안에 커다란 초가 눈물을 흘리며 타고 있었다. 교희는 눈을 들어 술을 마시고 있는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잘생긴 남자였다. 세상에 저처럼 잘생긴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더구나 저 사람은 무공마저 고강했다. 교희는 이제껏 오빠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남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저 남자는 오빠보다도 한층 강하다. 그런 남자가 그녀의 남편인 것이다. 교희는 숨결이 가빠지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단순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 남자는 침울한 얼굴로 술만 마시고 있었다. '혹시 내가 싫어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교희는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저기……." 복청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제가 한 잔 따라 올릴까요?" "필요없소." 복청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퉁명스러워 교희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이를 악물고 참았다. "뭐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계신가요?" "그런 건 없소." 여전히 복청양의 말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다. "그럼 왜 그러시죠?" 교희가 마침내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시나요? 이 혼인이 저의 오빠가 강권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그러시나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 나가세요. 붙잡지 않겠어요." "그런 것이 아니오." 복청양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처음으로 교희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은 모르오. 이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 혼인은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었소. 이제 와서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나는 큰 실수를 하였소." "그런가요?" 교희가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 처연한 것이었다. "결국 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로군요. 그렇다면 가라고 하지 않았나요. 붙잡지 않아요. 하지만." 교희가 숨을 헐떡이며 잠시 말을 멈췄다. "가더라도 이것 한 가지만은 알고 가세요. 우리는 이미 혼인을 올린 사이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이 길로 저 문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저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니 이것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소." 복청양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늘 올린 혼례식의 의미를 부정할 생각은 없소. 당신이 나의 아내이듯 나도 당신의 남편이오. 이 사실만은 설사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오. 하나……." 복청양이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여자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오. 전에도 나에게 정을 준 여자가 하나 있었소. 하지만 그녀는 나 때문에 죽었소. 아직 그녀에게 진 마음의 빚도 다 갚지 못했는데 다시 당신한테 큰짐을 지운다는 생각을 하니 울적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구려." "그 여자는 예뻤나요?" 교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오늘 혼인한 남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다. "예뻤소. 그리고 다정했소. 용감하기도 하고……." 복청양은 백아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였는지 그것은 지금도 모른다. 아마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그를 살리려다 죽었다. "당신이 알아둬야 할 일이 있소." "그게…… 뭔가요?" "이 밤이 지나면 나는 떠나야 하오. 다시 돌아오기 힘든 먼 곳으로. 나는 이 얘기를 당신 오빠한테도 했었소. 그러나 그는 그걸 믿지 않고 이 혼인을 강요했소." "꼭 떠나야 하나요?" 교희가 숨을 헐떡였다. 갑자기 명치끝이 아파왔다. "가야 하오." "돌아올 수 없나요?" "아마 그럴 것이오." 그것은 복청양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람의 일을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좋아요." 교희가 흐느끼면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안아 주세요. 이 밤뿐이라면 더욱더…… 당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겠어요. 언제까지나 교희는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교희……." 복청양은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날아 들어온 작은 새였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그녀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설사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라도. 촛불이 꺼졌다. 사르륵 사륵! 어둠 속에서 남자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소중하게 다루어 주었다. 조금도 서둘거나 거친 면이 없이 마치 작은 유리구슬을 매만지는 것처럼 그녀를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좋아…….' 그녀는 남자의 손에 의해 알몸이 되어간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좋은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이것은 이성 이전에 감성적인 것이었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녀는 이불 위에 눕혀졌다. 방문으로 달빛이 보인다. 달은 문을 하얗게 채색하고 있었다. 엊그제 보름이 지나갔기 때문인지 달은 유난히도 밝았다. 그리고 그 달빛에 젖어서 그녀는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더운 입김이 그녀의 전신을 덥히고 있었다. 남자의 손길이 그녀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십 년 가까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순결한 육체가 남자의 손에 의하여 문이 열려 가고 있었다. 교희는 가만히 누운 채로 남자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더운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 열기는 간지럽도록 기분좋은 것이어서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음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렵다. "하아!"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의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움직이는 것을 알았다. 두 팔을 뻗어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두 다리를 들어 남자를 옭아매는 동작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우리는 이미 혼인했잖아.' 마음속을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던 끈이 풀어지자 그녀는 더욱 대담해졌다. 그녀는 남자를 단단하게 포박하였으며 남자의 전신을 애무했고 남자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민감한 곳에 가져가기도 했다. 그녀는 조금도 수치스럽다거나 어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뿐이었다. 마침내 남자가 그녀의 몸 위로 몸을 포개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사소한 동작 하나로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었다. 본능이 이끄는 가장 자연스런 행위였다. 그녀는 다리를 벌렸고 남자가 더욱 가까이 밀착해 올 수 있도록 이끌었다. "아학!" 어느 한순간,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급박한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뜨거운 불기둥 하나가 그녀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하고 거대한 힘이었다. 불기둥은 이내 그녀의 아랫도리를 관통하고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힘찬 열기가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 감당하기 힘든 불길이어서 그녀는 한순간 자신이 재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 한순간 그녀의 온몸이 타서 까만 재로 변해도 좋았다. 이 한순간이 영원이고 다시는 이러한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이 이 한순간을 위해 있어온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이 순간을 회상하며 지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아픔의 눈물도 서러움의 눈물도 아니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 한순간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이 그녀를 눈물짓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남자를 받아들였고 힘이 허락하는 데까지 그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남자가 더욱 강하게 자신을 찢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겨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다. 교굉은 동생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더 이상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멋쩍었던 것이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됐다.' 이제 동생은 행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마음놓고 떠날 수 있다. 동생에게 그보다 더욱 강하고 든든한 보호자가 생겼으므로. '며칠만 곁에 있어 주자. 그리고 떠난다.' 교굉은 이번 길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라마승들을 찾아가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늘 동생이 걱정이었다. 동생을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데려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그 짐을 던 것이다. '저 녀석이라면 교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조금 이상한 녀석이긴 해도 말이다.' 그는 복청양이 들려준 얘기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도대체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 생각만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며칠은 저 녀석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키고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리고 교희라면 저 녀석을 충분히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능력도 없으면 내 동생이 아니지.' 교굉은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 오늘이 유월 열여드레던가. 달의 한쪽 편이 조금 떨어져 기운 것 같다. "젠장, 빌어먹게도 달도 참 밝다." 그는 문득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아악!" 요란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교희야 무슨 일이냐?" 와장창! 문이 부서져 나가고 당황한 교굉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알몸의 동생이 무릎을 꿇고 앉아 흐느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오빠……." 그녀가 눈물이 글썽글썽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없어요. 그가…… 그 사람이 가버렸어요……." 제 35 장 군림마천성(君臨魔天城) 복청양은 눈을 떴다. 전신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다시 하나로 조합되는 것 같은 지극한 고통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주위는 어두웠고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바로 그 달이다. 검은 구름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다. 그는 제단 위에 누워 있었다. 천품신성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바로 그 장소, 그 제단에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내가 꿈을 꾸었던 것일까?' 복청양은 잠시 동안 멍하여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일장춘몽이라는 말도 있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꿈이라면 너무나 선명하지 않은가. 그의 몸에는 아직도 교희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그녀를 안았을 때의 그 감촉과 그의 품을 적시던 눈물의 촉감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꿈이라면 이렇듯 모든 것이 선명할 리가 없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단 아래에 천품신성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천품신성은 죽어 있었다. 그의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워 마치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육신의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고 빈 껍데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무엇이 이 위대한 기인을 마지막까지 안타깝게 하였는지……. "어르신……." 복청양은 할말을 잊었다. 천품신성이 고귀한 목숨을 바쳐서까지 그를 과거로 보냈는데 그는 아무 것도 이룬 일이 없었다. 그저 빈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순히 과거에 갔다온 것만으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천품신성이 이미 죽었으며 그 생명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 * * 한 여인이 있었다. 한때는 날수염적이라고 불리며 천하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 중에 하나로 손꼽히던 여인이었다. 천하를 손에 넣기를 원하여 그 어떤 남자보다 당당하게 싸웠던 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사랑에 빠진 연약한 여인일 뿐이다. "아아!" 군성초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 오늘도 그 사람은 오지 않는 것일까?" 누가 이 강철처럼 강한 여인을 기다림에 빠지게 한 것인지. 대체 누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인지. 군성초가 자기 방에 앉아 저물어가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시비 하나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궁주님, 오셨어요!" "오다니? 누가 왔단 말이냐?" 군성초는 세상 모든 일에 흥미를 잃은 눈으로 호들갑을 떠는 시비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시비가 저처럼 경망스럽게 날뛰는 것으로 보아 아마 여벌의 목숨을 준비해 놓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 그분이 오셨다고요. 천하대협께서요!" "뭣이?" 군성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졌지만 그녀는 이미 그것을 돌아볼 여가가 없었다. 어느새 밖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기도 하시지……." 혼자 남은 시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군성초는 보았다. 화화궁 앞에 짧은 바지 하나만을 걸친 건장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것을. 그는 천하대협이라는 거창한 명성과는 달리 혼자 몸이었다. "아아…… 마침내……." 군성초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는다. 단황. 그가 드디어 화화궁을 찾아온 것이다. * * * 무림은 평화로웠다. 하기야 언제는 무림이 평화롭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느닷없이 천노살성이라는 자가 나타나 단심백결회에 도전장을 던진 그 몇 개월을 제외하고 무림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단심백결회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 안주하면서. 그러나 지금 그 그늘은 없다. 단심백결회가 사라진 지 겨우 한 달 남짓이건만 세인들은 벌써 그러한 단체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아무리 조석변으로 변하는 것이 인심이라지만 그것은 너무도 빠른 망각이었다. 하지만 세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몸을 편히 쉴 수 있는 새로운 그늘을 마련했으므로. 그 그늘의 이름은 정의지성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우뚝 솟아나 무림의 새로운 정의로 군림한 경이로운 이름. 정의지성에는 천하대협이 있었다. 십마의 준동을 잠재우고 무림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 인물. 이미 그 능력이 신의 경지에 접어들었으며 지혜는 하늘을 덮는다고 알려진 신비한 이름. 그 이름은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당연히 천하대협의 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백도의 인물도 있었으며 흑도의 인물도 있었다. 소문으로는 산속 깊숙이 은거해 있던 흑도의 거마들도 천하대협의 감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소문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천하대협의 주위에 지나치게 많은 흑도의 인물들이 모여드는 것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았다. 그들은 이 평화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무조건 소문을 사실로 믿으려고 했다. 천하대협 단황. 그는 이미 무림의 중심이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다.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에 경악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천하대협 단황. 그가 혼인을 한다는 것이다. 상대는 화화궁의 새로운 궁주인 날수염적 군성초라고 했다. 대협과 기녀의 만남. 그것은 천하인들을 다시 한 번 충격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단황의 전설에 한 겹 더 신비함을 안겨주었다. 그 누구도 꺾지 못한 날수염적을 손에 넣은 사내로.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섣달 그믐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어둠이 짙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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