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바로 섣달 그믐이 아닌가! 이제 한 시진만 있으면 새날이 밝아오는 것이다. 새로운 아침이 열리는 원년(元年)이. 사자림(獅子林). 그 깊은 숲속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전신에 먹처럼 검은 흑의를 걸치고 있는 청년. 복청양이다. 그가 마침내 사자림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바위에 앉아있던 사나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가오는 복청양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읽을 길이 없었다. 작은 철립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게." 그가 말했다. "다행히 약속을 잊지는 않았군." "당신은……." 복청양은 다소 실망감을 느꼈다. 그가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자리에서 그를 기다려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만이군." 그런데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나를 못 알아보는 모양이지?" "형님!" 그제야 복청양이 소리쳤다. "정말 형님이십니까?" "내가 아니면 누구겠나!" 그가 손을 내밀어 복청양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에는 강한 힘이 들어가 있어서 복청양은 팔이 끊어질 것 같았지만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되어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형님이셨군요. 그런데 그 얼굴은 어찌된 겁니까?" "이거 말인가?" 그가 흉터투성이인 턱을 어루만졌다. "놀랄 것 없네. 나 스스로 만든 것이니까. 한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그의 웃음에는 짙은 고독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그 동안 겪은 고초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복청양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꿈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은 꿈이었다는 생각이 점점 확실해졌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자림까지 와본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다리고 있다니. 교굉. 그가……. "형님을 정말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복청양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게 사실이었군요. 그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어요." "그럼 꿈인 줄 알았나?" 교굉이 빙긋이 웃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자네가 그렇게 떠나간 후, 나도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네. 그것이 꿈이 아니었기에 나는 교굉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삶을 버린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굉으로 사는 삶을 버리셨다니요?" "후후, 자네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군."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지금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네. 사람들은 나를 섬전도라 부르지." "섬전도……." 복청양이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섬전도라면 과거 칠대공적으로 불렸던 사람으로 지금은 단황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아닌가! "형님이 정말로 섬전도란 말입니까?" "왜, 믿어지지 않나?" 섬전도가 말했다. "하지만 믿어야 하네. 왜냐하면 나를 섬전도로 만든 건 바로 자네니까. 자네가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 동안 세상을 헛산 셈이지."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복청양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꿈이 아니고 단황을 죽이겠다고 굳게 약속한 교굉이 섬전도가 되어 나타나다니.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럼……." 복청양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남궁격이 보낸 칠화섬검수에게 당할 뻔한 저를 구해준 것이 바로 형님이셨지요?" "그렇네." 섬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마가 저를 죽이려고 할 때 나타나 구해주신 것도 형님이시고요?" "맞았네." "그렇군요. 형님이 저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셨군요." "두 번이 아니네." 섬전도가 정정했다. "잊은 모양이군. 세 번이지. 태행산에서의 일이 기억나지 않나? 자네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누가 칡넝쿨로 그물을 만들어 주었을 것 같은가?" "그럼 그것도?" 복청양이 놀라 입을 벌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 그것이 섬전도의 설명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그건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어. 만일 자네가 그 시간에 바로 거기에서 떨어질 줄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 그물이 펼쳐져 있을 수 있겠나. 그 모든 일을 우연이라고 생각했다면 자네는 너무 단순한 사람이지." "그렇군요. 아, 저는 바보였습니다." 복청양은 그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그 많은 일들이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이십오 년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형님은 어째서 단황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형님이 백마사에서 단황을 죽이기만 했어도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단황을 죽이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섬전도가 대답했다. "그때의 일은 내 평생에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었네. 그 한순간의 실수로 나는 평생을 후회 속에서 지내야만 했네. 내 인생은 오직 그 한순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섬전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먹빛 어둠이 덮여있는 하늘이었지만 그는 그 속에서 먼 과거의 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십 년 전이로군. 이십 년 전 유월 열이레. 그때 나는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백마사에 갔었네." "아!" 복청양이 짧은 탄성을 토해냈다. 섬전도는 역시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분명히 단황을 죽일 결심이었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십마가 나타나기 전에 단황을 찾아서 그를 죽이고자 했네. 그리고 약간의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결국 그를 찾아냈지." "그런데 그를 왜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하니 그가 그때 벌써 형님의 능력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아닐세." 섬전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일세. 그가 내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아는 사람이라뇨?" "놀라지 말게. 단(段), 바로 그 아이였어." "단이라고요?" 복청양은 잠시 멍했다. 섬전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단이란 말입니까? 단황이 바로 단이라고요?" "그렇다네." 섬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긴 인연의 실이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묘한 하늘의 안배였어. 자네는 단황을 죽이러 과거로 돌아왔고 원했던 대로 그를 만난거야. 그런데도 자네는 그를 못 알아보았지. 후후, 누가 알 수 있었겠나? 단, 그 아이가 장차 천하에 환란을 몰고 올 단황이 될 줄을……." 긴 침묵이 흘렀다. 사위는 너무나 조용했다. 하기야 섣달 그믐날에 풀벌레가 울 리도 없으니 조용한 것이 당연하다. 휘이잉 휘잉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누구도 추위를 의식하지는 않았다. "처음 자네가 말한 단황이 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정말로 당황했네. 어찌할 바를 몰랐지. 그를 죽여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네. 후후, 얄팍한 인정에 손이 마비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게 실기였네. 한순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단이건 누구건간에 죽여야겠다고 결심하였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지. 그때 이미 단은 십마를 만나고 있었으니까. 그 후로는 손을 쓸 기회가 전혀 없었네. 십마는 단번에 단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제자로 거두어들였던 거야."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단이 무공에 천부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단은 그가 가르친 후웅권을 단 하루만에 배워버린 기재였다. "십마는 단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뒤쫓았지만 결국은 놓치고 말았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어. 단 한순간의 망설임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던 거야." 단 한순간의 망설임. 그것이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단황과 섬전도와 천하의 운명을 가른 갈림길. "그 후로 나는 오직 내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살았네. 내 남은 평생을 그 일을 위해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자네는 섬전도의 전설을 알고 있나? 내 손에 수많은 고수들이 죽었지만 그들의 시체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는 전설 말일세?" "압니다." 복청양이 어찌 그 일을 모르겠는가. 그 신비로운 사건 때문에 섬전도는 무림칠대공적으로 불리며 숱한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하지 않았던가! "그 전설이 바로 내 노력의 결정판이었네. 그들의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그들은 하나도 죽지 않았으니까." "죽지 않았다고요? 그럼 그 많은 고수들이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섬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황을 놓친 후,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네. 그리고 그 방법은 단 한 가지. 이후 단이 단황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를 꺾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지. 그것이 미흡하나마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내 얼굴을 훼손하고 섬전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네. 천하의 살수 섬전도가 탄생한 거야. 그리고는 천하의 이름있는 고수들을 찾아가서 비무를 신청했지. 약간의 운도 따라주어서 나는 그들을 모두 이길 수 있었네. 그리고 그들을 하나씩 강호에서 사라지게 만든 거야. 교굉이 섬전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듯이 그들도 이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단황과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에 동참하게 만들었지. 그 일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네. 하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 그 결과 나는 그 누구도 모르는 막강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네. 천하에 오직 나만이 아는 거대하고 은밀한 세력을……." "아…… 형님, 제가 형님에게 너무 큰짐을 지웠군요." 복청양이 탄식했다. 그의 가슴에 따뜻한 감동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말은 수월하게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섬전도는 아마도 그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훼손하고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오직 그 일에 바친 것이다. "그렇게 미안해 할 것은 없네." 섬전도가 웃었다. "그 모두가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니까. 그리고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 나이기도 하고. 후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네. 한 쪽은 천하를 정복하기 위해 수십 년을 바쳤고 다른 한 쪽은 그 일을 막기 위해 수십 년을 바쳤으니 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있겠나. 어쨌든!" 섬전도가 돌연 언성을 높이며 복청양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단황의 주위에는 나의 수하들이 요소요소에 박혀 있네. 그들은 하급무사로, 혹은 단황의 측근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단황은 그 존재를 모른다네. 좀 지나친 자신감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명령만 내리면 단황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네. 나는 모든 준비를 끝냈어. 이제는 결행하는 시기만 남았네." "형님……." "천하를 위한 길일세. 사나이 한평생 천하를 위해 바쳤으면 족하지,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섬전도가 쓸쓸히 말했다. 바위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나의 편이 되어 이 모든 준비를 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있네. 그를 자네한테 소개하고 싶군." "소개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아는 사이니까요."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이었으며 텅 빈 소매 하나를 허리춤에 꽂고 있었다. "남궁격." 그를 본 복청양이 중얼거렸다. 이제는 너무 놀라서 놀랄 기력도 없었다. "오랜만이오." 무궁수사 남궁격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힘이 되었다니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나는 그저 교대협의 일을 옆에서 조금 거들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섬전도가 스스럼없이 웃었다. "하지만 자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그 동안 키운 세력을 지금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가 없었을 것이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교대협이 저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우리는 다같이 단황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남궁격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맑았으며 한 점의 사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섬전도에게 경복하는 표정이었다. "복형, 우리의 인연도 어지간히 질기구려." "그런가 보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남궁격이 그의 힘이 되어줄지는 몰랐기 때문에 복청양은 그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교대협이 말했다시피 모든 준비는 끝났소." 남궁격이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 교대협을 만났을 때 나는 그 동안 교대협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세력을 알고 정말로 놀랐소. 일백 명이 넘는 절정고수들. 더구나 그들은 교대협의 명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들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단황의 주위에 널리 포진되어 있었소. 내가 한 일은 그저 그들의 배치를 조금 바꾸어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었소." "하지만 그게 결정적이지 않았나?" 섬전도가 말했다. "그렇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쨌든 이제 단황은 끝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단황은 이미 태양 아래 천하대협이라는 이름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그늘에 숨어 있지요. 우리가 그들을 제거하면 엉뚱하게도 세인들은 우리를 악의 세력이라 몰아세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걸 뒤바꿀 시간의 여유가 없으니 결국은 우리가 천하공적으로 몰리겠지요." "아무려면 어떤가? 단황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단황처럼 천하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닐세. 단황이 제거되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 들어가 영원히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걸세. 그러니 세인들의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그거야 신경쓸 일이 아니지." "그렇지요." 남궁격이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단황이 제거되면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을 축이 사라지는 셈이니까요. 천하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깁니다. 그 공백을 메울 힘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이라면 염려할 것 없소." 복청양이 말했다. 세 사람은 어느새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두고 무림의 대사를 의논하고 있었다. "대무당이 아직 건재하지 않소? 무당의 소진도장이라면 능히 무림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남궁격이 빙그레 웃었다. "그 일은 역시 소진도장에게 맡기는 것이 적격이오. 그렇다면 우리의 걱정은 하나를 던 셈이니 마음놓고 거사를 결행할 수 있소. 하지만 우리의 계획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소. 그것은 바로 단황이오." "단황이라고요?" "그렇소." 남궁격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의 거사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소. 그것은 바로 단황을 꺾을 절대인이 없다는 점이오. 유감스럽게도 단황에게는 어떠한 암습도 통하지 않소. 그는 너무나 강하오. 그 강함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 그러니 그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와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뿐이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소. 만일 그와 정면으로 승부하여 꺾지 못한다면 우리의 거사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오. 가지를 아무리 잘라도 원 둥치가 살아있는 한, 가지란 언제든 다시 돋아날 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힘으로는 단황을 꺾을 수가 없소. 교대협도 그를 이기지 못하고 복형 역시 그의 적수는 되지 않소. 이 지경이 된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남궁격이 텅 빈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묻어났다. "전일 나는 시험삼아 그와 겨뤄본 일이 있었네. 그때 나는 구성의 진력을 사용했고 그에게 패했네. 하지만 설사 전력을 다했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야. 왜냐하면 그 역시 그때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니까. 단황은 무서운 자네. 우리의 힘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네." "혼자서 안 된다면 여럿이 힘을 합쳐야죠." 복청양은 천공검환록을 생각하고 있었다. 파천일해를 시전하기 위해서는 은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은조는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하나 만일 섬전도가 은조의 역할을 대신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믐밤은 길었다. 그러나 천하의 대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긴 밤이라는 짧은 법이다. 섬전도와 헤어지면서 복청양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이제는 희망을 간직한 뿌듯한 것이었다. "자넨 교희의 얘기는 한마디도 묻지 않는군." 헤어질 때에 섬전도는 섭섭한 듯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도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그 아이의 고집은 나로서도 꺾을 수가 없었지. 하기야 일을 그렇게 만든 것이 나니까 꺾을 명분도 없었지만. 자네 일이 모두 끝나면 그 아이를 한 번 찾아봐 주지 않겠나? 비록 모습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겠지만 말일세." "물론이죠." 복청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가 있는 곳은……." "알고 있습니다." 복청양이 섬전도의 말을 잘랐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압니다.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런 걱정도 없군." 섬전도가 환하게 웃었다. 밝은 웃음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이거 불공평하지 않은가? 자네는 아직 이처럼 젊은데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말일세." * * * 정의지성. 현 무림의 중심지인 그곳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곧 있을 단황과 군성초의 혼례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정의지성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큰 경사이니만큼 그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바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 은밀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쏴아 붉은 머리 하나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적발수룡이었다. 그녀가 물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동안 물속에 머물더니 이윽고 물 밖으로 나와 바닥에 반듯하게 누웠다. 그녀의 몸에 묻은 물기가 햇빛에 반짝였다. "재미없어."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단심백결회가 무너지고 단황이 천하를 수중에 넣은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아무런 재미가 없어졌다. 모든 게 그저 밋밋하기만 했다. 긴장은 사라졌고 위험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극히 안정되고 평화로운 나날. 그것이 그녀를 무료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기를 말리던 적발수룡은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들은 누구요?" 적발수룡이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물었다. "우리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사사(四師) 중에 뇌사와 우사다." 우측에 있는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풍운뇌우? 그런 자들도 있었나?" "지금까지는 없었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존재하게 된다. 네가 죽은 후부터." 싸악 날카로운 한광이 적발수룡을 내리쳤다. 그 빛은 곧바로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앗?" 기겁한 적발수룡은 몸을 굴려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피하기에는 그 한광이 너무 매섭고 빨랐다. 푹! 그녀의 목에 검끝이 박혔다. 적발수룡은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당한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었다. "하나가 끝났군." 우측의 노인, 우사(雨師)가 중얼거렸다. "이 계집은 물 밖으로 나온 게 실수야. 적발수룡은 물 밖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거든." 담담하게 말한 뇌사(雷師)가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다. * * * "하아, 하아." 가쁜 숨소리가 방안에 가득하다. 알몸의 두 남녀가 끈적끈적한 숨소리를 내며 방안의 열기를 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힘이 좋았다. 그들은 넓은 침상 위를 좁다 하고 뒹굴었는데 그것은 정사를 나누는 게 아니라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격렬한 모습이었다. "허억, 헉. 너는 정말 대단한 계집이다." 무흔색투 유빈은 자신의 모든 것이 여자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거친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여자라면 지겹도록 대해온 그였다. 하지만 이처럼 질기고 끈적끈적한 여인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그야말로 방중술의 달인이었다. 색이라면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던 무흔색투였지만 이 여자에게만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러기에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한 여자와 한 달간이나 즐기고 있었지만 도무지 질리지가 않는다. "호호, 이제 겨우 시작인데 뭘 그러세요!" 여자가 교성을 터뜨리며 빙글 체위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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