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3 - 11편 (11/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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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3 - 11편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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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이 알려주는구나." 노인이 어깨에 앉은 붉은 깃털의 새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하긴……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난 것이지, 너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기왕에 여기까지 온 손님이니 데리고 들어오는 게 옳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복청양은 은조의 음성에 은은한 노여움이 깃들여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그들을 따라왔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지금 곧 그자를 만나 보겠습니다." "무례한 행동은 삼가하거라.
그래도 내 거처에 온 손님이니…… 이리로 데리고 오너라.
다치게는 하지 말고." "그래도 되겠습니까?" 은조가 다소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이제 와서 더 무엇을 숨기겠느냐? 세월이 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만나야지." 노인의 음성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은조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 자세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어느새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신법이었다.
복청양은 새삼스럽게 은조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앞에서 진신실력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그것은 진실로 뛰어난 것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노인이 복청양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이리로 오너라." 복청양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번거롭겠지만 밀어 보겠느냐?" 노인이 말했다.
사륜거를 밀라는 뜻일 게다. "예." 복청양은 순순히 사륜거를 밀기 시작했다.
사륜거는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미는데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너희들은 가서 차를 내오너라." 노인이 동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몇 잔이나 내올까요?" "음…… 아마도 넉 잔이 필요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동자들이 허리를 숙이더니 다리를 내려갔다.
그들은 조금도 서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그 동작은 지극히 민첩한 것이었다. '저 아이들의 무공도 만만치 않구나.' 복청양은 새삼 노인에 대해 신비감을 느꼈다.
이 황산의 깊은 골짜기에 신선처럼 은거하고 있는 노인.
그는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였다.
하지만 제자인 은조를 세상에 내려보내 그를 데려오게 한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복청양이 잠자코 있자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 노인이 말했다. "아마도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곧 은조가 올 터인즉 그때 가서 얘기해도 늦지 않다." 청석정의 앞부분은 약간의 경사로 되어 있어서 사륜거를 밀어올릴 수 있었다.
복청양은 청석정으로 올라갔다.
새들이 그들을 따라오며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복청양은 노인과 함께 있어서인지 이제는 그런 것들이 조금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자연스럽다는 느낌이다.
계곡의 중간쯤 되는 부분에 한 사람이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조금은 꺼림칙한 얼굴로 구름으로 뒤덮인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고약하게 됐군." 그가 문득 중얼거린다. "저리로 들어간 건 분명한데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니 무작정 따라 들어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흥!" 뒤에서 갑자기 차가운 코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풍성한 흑의를 바람에 휘날리며 면사여인이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계곡 안에서 눈을 떼지 않았건만 언제 어디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다급히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났다. "흥, 누구인가 했더니 만리추종 섭등이었군." 면사여인 은조가 지극히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하긴…… 만리추종쯤 되니까 내 뒤를 따라올 수 있었겠지." "어, 어떻게……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 만리추종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제껏 누구의 뒤를 쫓아서 실패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실패를 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 신화가 여지없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만리추종, 네가 나의 뒤를 따라온 까닭이 무엇이냐?" 은조가 차갑게 묻는다. "너를 따라온 게 아니라 천노살성을 따라온 거지." 만리추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연신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눈치를 알아챈 은조가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그보다 만리추종의 동작이 더 빨랐다.
돌연 뒤로 몸을 빼면서 검은 화탄 같은 것을 은조에게로 날린 것이다. "에라, 기왕에 틀린 거 이거나 받아라!" 펑!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일어났다.
그가 던진 것은 화탄이 아니라 연막탄이었다.
연막탄이 은조의 시야를 가리는 틈을 타서 만리추종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었다. '기왕에 이리 된 거 계곡 밖에서 지키자.
제깟 놈들이 그 안에서 평생을 살 작정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기어나오겠지.' 그러나 줄달음을 치던 만리추종은 돌연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였다.
언제 이동했는지 은조가 여전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헉! 어느새……." 만리추종이 헛바람을 토해낼 때 은조가 비스듬히 움직이며 오른손을 뻗었다. "만리추종이 잔수에 능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그녀는 만리추종이 도주할 길을 완벽하게 차단하면서 그의 가슴을 짚어가고 있었다. "난화불혈수!" 만리추종은 다급히 두 손을 좌우로 가르며 은조의 장세에 맞부딪쳤다.
펑! 만리추종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안색은 낭패감으로 인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크으…… 공력이 대단하구나." "만리추종은 잔수에는 뛰어나지만 무공이 높은 것은 아니지." 은조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난화불혈수(蘭花佛穴手)였다.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꽃으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무수한 수영(手影)이 출출 춤을 추면서 화려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난화불혈수를 완벽하게 익혔구나." 만리추종은 연속으로 삼장을 갈겼지만 그녀의 공세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결국은 어깨에 일격을 얻어맞고 말았다. "크윽!" 비명을 지르며 그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차앗!"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조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장(掌)에서 지(指)로, 지에서 다시 조(爪)로 어지럽게 변화했다.
어느 것이 실초이고 어느 것이 허초인지도 분간하기 힘든 신속한 공세였다.
일거에 기선을 제압당한 만리추종은 얼굴에 콩알만한 땀을 흘리며 급급히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원래 만리추종의 무공도 그다지 가벼운 편은 아니었다.
마음먹고 은조와 일전을 겨루기로 작정을 하였다면 수십 초 이내로는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리추종은 자신의 종적이 탄로난 데에 이미 한풀 기세가 꺾여 있었다.
그러기에 우선 달아날 길부터 엿보았다.
처음부터 한 수 뒤지는 판에 달아날 궁리부터 하였으니 그가 수세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은조 역시 꺼리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한 번은 만리추종의 도주를 막았지만 그런 행운이 두 번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리추종의 무공은 그다지 고강한 편이 아니었으나 경공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일단 그에게 달아날 기회를 허용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처음부터 가진 바 절기를 발휘해서 속전속결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교환되었다.
처음부터 수세에 몰린 만리추종은 어쩔 줄 모르고 뒤로 물러남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절벽에 등이 닿고 말았다.
더는 물러날 길이 없다. "핫!" 은조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으며 가슴을 갈라왔다.
만리추종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매서운 일격이었다. '이젠 죽었구나.' 만리추종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평생을 세상을 주유하며 못해 본 일이 없이 살아온 자유인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황산의 절곡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당하다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만리추종은 눈을 감은 채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장심에서 한 줄기 강기가 발출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초식의 변화가 없는 평범한 일장이었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만리추종이 그저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데에 불과하다.
그런데 손에 촉감이 왔다. "억!" 은조가 면사 아래로 피를 뿌리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만리추종이 입을 벌린 채 스르르 주저앉았다. "왜?" 의문에 찬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은조가 옆으로 몸을 틀어 피하며 장세의 위세를 가속화시켰다면 그는 꼼짝없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은조는 그러지 않고 무리하게 장세를 거두며 손을 틀어 그의 마혈을 짚었다.
그 덕분에 만리추종을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만 최후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를 스친 것이다.
은조가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옷은 길게 찢어져 있었고 그리로 맨살이 드러났다.
그녀의 하얀 속살은 금방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외상은 대단한 것 같지 않았지만 내상이 심한지 그녀는 입으로 울컥 검은 피를 토해내더니 숨결을 가다듬었다. "그건 너를 데리고 오라는 사부님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조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혈도를 제압당해 꼼짝도 못하고 있는 만리추종을 옆구리에 끼더니 몸을 날렸다.
다행히 만리추종의 몸은 왜소하여 그녀가 끼고 가는 데는 그다지 지장이 없었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 만리추종의 공허한 외침만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저기 오는군." 노인이 찻잔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청석정 옆에는 화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화로에는 숯불이 담겨 있었고, 거기에 하얀 자기 주전자가 얹혀 있었다.
주전자 곁에는 동자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숯불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주전자의 온도를 가늠하는 것이다.
차맛은 물의 온도에 따라 결정된다.
물의 온도가 높고 낮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잘 달이는 사람은 함부로 찻물을 붓지 않는다.
언제나 적정온도를 유지하면서, 차를 마실 때에 비로소 물을 붓는 것이다.
이 동자는 차를 달일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는 네 개의 찻잔을 내왔지만 그 중 두 잔에만 차를 따랐고 나머지 두 잔에는 차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은 채로 온도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과 복청양의 앞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차향은 지극히 향기로웠다.
복청양은 맹세코 이처럼 향이 좋은 차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가장 좋은 차를 마신 것은 은하수정원에서였다.
그때도 그는 차맛에 감탄을 하였지만 지금 이 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유감스러운 건 그가 차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노인은 차향을 음미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그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향 때문에 차를 즐기는 것 같았다.
반면에 복청양의 찻잔은 이미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는 차향에 취해서 한 잔을 더 부탁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노인이 문득 중얼거린 것이다.
복청양은 고개를 돌려 노인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과연 은조가 나는 듯한 신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신형은 곱절은 커진 것 같았는데 그것은 옆구리에 한 사람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의 눈살이 돌연 찌푸려졌다. "저런…… 다쳤구나." 복청양도 이내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몸을 일으켰다.
은조의 흑의 옆자락이 찢어져 너풀거렸다. "앉거라." 노인이 움직이려는 복청양을 만류했다.
복청양이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은조가 청석정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내상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보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사부님." 은조가 잡아온 자를 옆에 내려놓으며 허리를 숙였다. "많이 다쳤느냐?" 은조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에는 자상한 우려의 빛이 담겨 있었다. "견딜 만합니다." 노인의 눈길이 바닥에 누워있는 자를 향했다.
그자는 고개를 바깥으로 돌리게 하고 있어서 아직은 노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람의 혈도를 풀어주고 너는 그만 가서 조리하거라." "하지만 사부님!" 은조가 놀라 외친다. "시키는 대로 하거라." "네……." 은조가 마지못해 바닥에 누운 자의 옆으로 가더니 그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끄응!" 그자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인다. "빌어먹을 계집년, 약간의 재간이 있다고 사람을 너무 구박하는구나." 은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자의 말이 그녀의 노여움을 산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인의 편안한 기색을 보더니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청석정을 내려갔다.
그자가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복청양은 암암리에 공력을 운기했다.
노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침입자의 암수에 대비하는 것이다.
은조가 가고 없는 지금 노인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지 않은가! 그자가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조금 기이한 모습이었다.
왜소한 체격에 천결의(千結衣)를 걸치고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은조에게 끌려와서인지 그의 천결의는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그가 복청양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멀리 가지 못했을지 알았지.
아무리 도망쳐 봐야 부처님 손바닥이야." 그의 시선이 노인을 향했다.
그리고 눈이 벌어졌다.
그의 눈은 처음에는 약간의 의혹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 그 의혹은 점차 짙은 안개를 담은 것처럼 흐려지더니 급기야는 경악으로 변했다.
그는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입을 쩍 벌린 채 수염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은 급격하게 전신으로 번져가 마치 학질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두 손과 이빨을 마구 떨었는데 아래위 이가 부딪쳐서 딱딱 소리를 내는 데도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이군."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자네 이름이 섭등이라고 했던가?" "대협……." 만리추종의 입에서 발음이 분명치 않은 말이 새어나왔다. "진정 대협이십니까?" "그렇다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세.
내가 자네를 알듯이 자네도 나를 알 걸세." 만리추종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그는 더 이상 몸을 떨지 않았다.
그 대신 머리를 바닥에 박고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만리추종은 육십이 넘은 노인이 아닌가.
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것이 콧물과 섞여 범벅이 되었지만 그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엇이 만리추종을 이토록 감동하게 만드는지, 복청양은 옆에서 보면서도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복청양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매달려 있다.
그의 노안(老眼)에도 약간의 물기가 번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노인이 이 돌연한 침입자의 돌연한 행동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 하게." 이윽고 노인이 말했다. "예가 너무 지나치면 못 쓰지." "대협, 아아…… 대협." 섭등이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을 들어 노인을 보았다. "대협이 살아 계시다니 진정 이게 꿈이 아니란 말입니까?" "꿈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노인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보다 자네의 명성은 나도 들었네.
자네의 별호가 만리추종이라면서?" "송구합니다, 대협." 만리추종 섭등이 눈물 섞인 웃음을 흘렸다. "제가 약간의 재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 감히 천품신성 악대협 앞에서 재간 자랑을 하오리까?" 마침내 만리추종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천품신성 악자량.
그 이름이…….
복청양은 둔기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갑자기 멍청이가 되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천품신성.
그 얼마나 우뚝한 이름인가! 찬란한 이름이 많기로는 그 어떤 곳도 무림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무림은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을 쉬는 곳이었다.
얼마나 많은 영웅과 위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으며 불멸의 족적을 남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품신성만큼 찬란한 이름은 없었다.
삼십 년 전.
전 무림이 통천삼십삼마의 횡포에 신음하고 있을 때,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캄캄한 어둠뿐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찾아볼 수 없을 때 홀연 나타나 무림을 구원한 인물.
모래알처럼 흩어진 군웅들을 하나로 묶어 역사상 가장 큰 단체인 단심백결회를 결성했으며, 무엇보다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인물.
절묘한 계략으로 통천삼십삼마를 흩어지게 만들고 그들을 각개격파하여 무림에서 그 악명이 사라지게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천품신성이 아닌가! 그 후 오 년간 단심백결회를 이끌면서 무림의 질서를 바로잡았으며 이십 년이 넘는 평화 기간을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천품신성이었다.
그 후 십마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무림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리고 이 평화는 바로 천품신성 혼자의 힘으로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설적인 인물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짐으로써 전설이 되었다.
혹자는 천품신성이 스스로의 천명(天命)을 알아 어느 산속에 들어가 운명했다고도 하고, 혹자는 그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했다.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으나 그런 허무맹랑한 말이 조금도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천품신성의 이름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저 노인이 바로 그 천품신성이라니! 그가 죽지도 않았고 신선이 되지도 않았으며 저처럼 걷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 이 깊은 황산의 골짜기에서 살고 있었다니.
복청양의 가슴속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인다. "악대협……." 만리추종은 여전히 머리를 땅에 박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울음은 언제까지고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하기야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만리추종 섭등은 천품신성을 따라 단심백결회에 가담하여 통천삼십삼마와 싸우는 데 일조를 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아마도 천품신성이라는 이름이 신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단심백결회의 모든 초창기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므로 만리추종이 감격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만리추종을 망연하게 보고 있던 복청양이 돌연 무릎을 꿇으며 두 팔과 두 다리를 땅에 대었다.
오체투지.
가장 각별한 공경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후배 복청양이 감히 어르신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복청양의 말끝이 떨렸다.
그는 만리추종에 못지 않은 감격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허! 이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천품신성이 손을 뻗어 복청양을 일으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사륜거 위에 앉아있는 그의 손이 복청양에게까지 미칠 리 없다. "그만, 그만.
모두들 일어나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 "악대협." 만리추종이 눈물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그는 오체투지하고 있는 복청양을 돌아보았다. '설마 하니 이 녀석도 악대협이 누군지 몰랐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한바탕 격정이 휘몰고 지나간 뒤 세 사람은 둥글게 마주앉았다.
천품신성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며 만리추종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으나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반면에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것은 복청양이었다.
그는 천품신성을 바라보며 깊은 의문에 잠기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천품신성이 살아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가 나 같은 무명지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복청양은 가슴속 가득히 수많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들은 천품신성만이 풀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함부로 질문을 할 때가 아니다. "악대협,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격정을 가라앉힌 만리추종이 물었다.
아마도 그가 간직하고 있는 의문은 복청양의 그것보다 배는 많을 것이다. "뭐가 말인가?" 천품신성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십오 년 전, 악대협이 단심백결회를 버리고 홀연 모습을 감추셨을 때 우리는 큰 혼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행여 악대협의 신상에 무슨 변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여간 걱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만리추종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천품신성의 두 다리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분명 지금의 천품신성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천품신성이 걷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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