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2 - 11편 (11/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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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2 - 11편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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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체 그 동안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그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후웅의 저 기묘한 주먹질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피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주먹질이었지만 그 속에는 참으로 기묘한 변화가 숨어있어서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다.
만일 저러한 초식이 강호에 나타난다면 세상은 놀라움으로 경동을 할 것이다.
동굴을 나온 두 사람은 냇가에 나란히 앉았다.
복청양은 맑은 물에 퉁퉁 부은 얼굴을 비춰 보았다.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볼썽사납게 부어오른 얼굴은 그가 봐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복청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잘난 척하려다가 호되게 당한 셈이군.' "후웅, 넌 이런 수법을 어디서 배웠니?" "뭘?" "주먹질하는 거 말이다.
이렇게." 복청양은 방금 후웅이 한 수법을 그대로 흉내내 보여주었다. "원숭이." 후웅이 숲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를 가리켰다. "원숭이라고?" 아마도 후웅은 원숭이들이 하는 동작을 보고 따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동작을 익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거 아냐.
틀려." 후웅이 벌떡 일어나 주먹질을 해보였다.
복청양의 틀린 자세를 교정해 주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니, 그게 아냐." 후웅이 다시 시범을 보였다.
후웅이 보여주는 시범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으나 그 속에 내재된 오묘한 변화는 일조일석에 따라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거야 원, 사부가 되려다가 도리어 사부를 만난 셈이군.' 복청양은 뜻밖의 반전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열심히 후웅이 보여 주는 동작을 따라했다.
그의 이마에 어느덧 송골송골 땀이 흐르고 있었다.
시일이 흘렀다.
복청양은 날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낮이면 동굴에 들어가 바위를 부수고 그 파편을 동굴 밖으로 끌어냈다.
동굴을 가로막고 있는 돌무더기는 끝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는 지치지 않고 그 일을 해냈다.
밤이 되면 후웅에게서 그가 후웅권( 雄拳)이라고 이름붙인 초식을 배웠다.
후웅권의 변화는 단 한 가지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 감춰진 기묘함은 참으로 기오막측한 것이어서 그걸 완전히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날마다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도 복청양은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시일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내 공력이 증진되고 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공력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전 같으면 벌써 지쳐서 떨어졌을 일도 이제는 아무런 어려움없이 거뜬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날마다 먹고 있는 버섯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상한 뿌연 웅덩이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계곡 속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이 그에게 커다란 보탬이 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 * * 북경(北京).
중화(中華)의 부(富)가 도합 얼마나 되느냐고 따지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자(智者)라도, 설사 천하제일의 대상(大商)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그러나 그 많은 부가 반드시 한 번은 북경을 거쳐야 한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라도 안다.
북경은 바로 대명(大明)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럼 북경에서 가장 많은 부를 지니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 또한 어려운 질문이다.
북경제일의 부라면 곧바로 중화제일의 부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망설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황금대장(黃金大莊).
북경에는 황금대장이 있다.
그것은 북경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황금대장주(黃金大莊主) 가개풍(賈盖豊).
그는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나이 이십이 되기 전에 집안의 부를 두 곱절로 키웠고, 사십 세가 되기 전에 열 곱절로 늘렸으며 육십 세가 되었을 때는 자신조차 자신의 부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가 된 전설적인 상인이었다.
그는 상술의 천재라고 일컬어졌다.
지금까지 그는 일백 가지도 넘는 장사에 손을 대었지만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의 손은 문자 그대로 황금의 손이어서 그의 손이 닿은 것이면 재물이 되지 않는 게 없었다.
하다못해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라도 그가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북경에서 가장 가난한 자라고 낮추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반대로 생각했다.
그야말로 북경에서 가장 부유한 자라고…….
사람들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황궁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리고 그가 사흘만 문을 닫고 칩거한다면 북경 전체의 경제가 흔들릴 것이라고…….
그 모든 소문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인들이 알고 있는 그의 일각에 불과했다.
실상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지, 그의 부가 지니고 있는 위력이 얼마인지…….
밤이었다.
초승달이 검은 하늘에 외롭게 걸려 있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이상하게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초승달만 외롭게 사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밤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금대장.
엄청난 명성과는 달리 그곳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북경 동쪽 외곽에 위치한 황금대장은 그저 그런 정도의 수수한 저택이었다.
북경에서 이런 정도의 규모를 지닌 저택을 찾으라면 아마 어렵지 않게 백 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하의 황금대장이 황궁에 버금가는 화려한 곳일 거라는 선입견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면 정작 황금대장을 본 순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정말로 황금대장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후원에 정각이 한 채 있었다.
정각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에는 가교(假橋)가 놓여 있었다.
초승달이 가교에 걸린 채 흐린 은광을 던지고 있었다.
정각 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베옷을 걸친 노인이 술상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술상에는 달랑 술 한 병과 편육 한 접시만이 놓여 있었다.
노인의 맞은편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건 젊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제 이십여 세나 되었을까.
뛰어난 미인이었다.
여인은 하얀 손을 무릎에 얹고 고즈넉이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조금 슬픈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우수(憂愁)는 여인의 천성임을 알 수 있었다.
고서에 보면 찡그리는 얼굴 하나로 천하를 치마폭에 둔 미인이 있다고 했듯이 미인은 그저 미소를 지어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슬픈 듯, 고단한 듯 아미에 다소 그늘이 지게 하는 것도 자신의 미를 뽐내는 한 방법이다.
이 여인이 그랬다.
그녀는 지극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설사 지구의 종말이 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노인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술을 마셨다.
그는 안주를 집는 대신 잔을 여인 앞으로 내밀었다. "따라라." 여인이 말없이 술병을 들었다.
술잔에 절반 가까이 술이 찰랑찰랑 채워졌다.
그러나 여인은 잔을 가득 채우지 않고 병을 내렸다.
노인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절반의 술을 다시 절반으로 나누어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는 손이 농사꾼의 손처럼 몹시 거칠었다.
그는 이번에도 안주는 집을 생각도 하지 않고 시선을 들어 후원에 군데군데 솟아있는 가산과 나무들을 돌아보았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이 넓은 후원에 그들 단 세 사람만이 있는지 짙은 정적이 사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좋은 밤이로구나.' 노인은 문득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다.
상식대로라면 그는 지금 잔뜩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심사인 것이다.
그리고 한 시진 전에 그가 이리로 올라올 때만 해도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정적이 깊어갈수록 왜 이렇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지 모를 일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가개풍이었다.
천하의 부를 좌지우지한다는 황금대장주.
적어도 재물에 관한 한은 남부러울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껏 비단옷을 몸에 걸쳐본 적이 없었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밥상에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올려본 적이 없었다.
또한 한 가지 이상의 안주로 술을 마셔본 일이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부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그가 일 년 전에 맞아들인 세 번째 첩이었다.
이름은 선우향(鮮于香)이라고 했다.
그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의 딸로 그 사람이 간곡하게 부탁하여 마지못해 첩으로 맞아들인 여인이었다.
선우향을 첩으로 맞아들인 후에 그는 많은 재물을 여인의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만큼 가개풍은 이 여인을 아꼈다.
그러나 여인은 그가 아무리 사랑을 쏟아부어도 언제나 무표정했다.
그것은 이 여인의 천성적인 결함 때문이었다.
선우향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정상인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정상인보다도 눈치가 빨라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어김없이 해내고 있었다.
일에는 실수가 없으면서도 언제나 침묵을 지키는 여인.
그래서 가개풍이 선우향을 더 아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너도 한 잔 하겠느냐?" 가개풍이 술잔을 선우향에게 내밀었다.
그는 선우향의 앞에서는 언제나 혼자서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자 선우향이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받았다.
가개풍이 몸소 술잔을 채웠고, 선우향은 얼굴을 돌려 술잔을 입에 대더니 그대로 상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이 극히 자연스러웠다. "좋은 밤이다.
그렇지 않나?" 가개풍이 이번에는 선우향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것을 아무런 생각없이 뱉어내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대답이 들려왔다.
육각(六角)으로 깎인 정자의 기둥에 한 사나이가 몸을 기대고 있었다.
백의를 걸친 사나이로 밤이건만 그는 작은 철립(鐵笠)을 머리에 덮어쓰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좀더 큰 철립을 썼을 것이다.
작은 철립 밑으로 사십대의 중후한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세 줄 그어 있었고 그 아래 매부리처럼 우뚝한 코가 솟아 있었다.
얇은 입술은 굳게 다물었고 턱에는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철립 밑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흉터투성이였다.
가는 칼선이 이리저리 그어져서 성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허리에는 집도 없는 반월도(半月刀) 한 자루를 매달고 있었다.
북경제일쾌(北京第一快) 유방(柳方).
그는 가개풍이 수하에 거느리고 있는 무인 중의 하나였다.
부를 지닌 자가 으례 그렇듯 가개풍도 수하에 많은 무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래 부라는 것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었다.
재물이 있는 곳에 항상 파리떼가 모여드는 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수하에 무인들을 두기를 좋아했다.
거느리고 있는 무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재물의 안전은 보장되는 것이고 또한 자신의 위상도 높아지는 것이었다.
가개풍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의 부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부를 빼앗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것은 때로는 회유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유혹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하며, 협박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회유나 유혹은 자신의 의지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협박은 사정이 달랐다.
그것은 힘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 대항하려면 그보다 더한 힘을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가개풍은 능력이 뛰어난 무인들을 고용하는 데는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휘하에는 강호에 나가면 당장에 일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수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가개풍은 그들에게 최상의 대우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현재 가개풍이 보유하고 있는 힘은 강호의 웬만한 방파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유방도 그런 무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 특이한 존재였다.
오 년 전, 그는 부평초처럼 북경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때 그가 지닌 것은 집도 없는 반월도 한 자루와 유방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출신문파가 어디인지도 밝히지 않았고, 과거에 어떤 행적이 있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게 수수께끼였다.
누가 그에게 그런 걸 물으면 그저 싱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가 북경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세 번의 싸움이었다.
상대는 모두 북경에서 제일간다는 고수들이었는데 그는 그들에게 차례로 도전하여 모두를 꺾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그들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단 삼초를 받아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단 삼초.
북경의 최고고수라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그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것은 경악의 표정이었다.
자신의 패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그래서 유방은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전설이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도 전에 유방은 가개풍의 수하로 들어갔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의 밑에서만 일을 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전설은 이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언제나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잘 잊는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돌아서는 그 순간 망각하는 것이다.
유방은 오직 한 사람, 가개풍의 인정만 받으면서 어둠 속에 묻혔다.
가개풍은 그에게 일정한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고용한 다른 무인들에게는 최상의 대우를 해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유방은 그 누구보다도 월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가개풍은 그의 재물을 관리하는 집사에게 유방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액수의 고하를 막론하고 돈을 내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유방은 마음만 먹는다면 황금대장의 부를 자신의 것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상 그는 그 동안 많은 재물을 가개풍에게서 받아갔다.
그가 그 재물을 어디에 쓰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는 일 년의 대부분을 황금대장에서 지냈으며 여색을 밝히는 것도 아니고 도박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가개풍만이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황금대장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였다. "한 잔 하겠나?" 가개풍이 유방을 보며 물었다. "싫습니다." 유방의 대답은 짧고 간명했다. "그래…… 자넨 언제나 혼자 있을 때만 술을 마시지." 가개풍이 잔을 비우자 선우향이 다시 잔을 채웠다.
선우향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따라 가개풍이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시는 것 같았다. "자네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 같군." "제가요?" 비로소 철립이 들리면서 유방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가개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눈은 못 속이네.
자네는 지금 잔뜩 굳어 있어.
자네답지 않은 일이야." "제가 조금 긴장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유방이 말했다. "하지만 장주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저답다는 건 무슨 뜻인지요? 저는 언제나 저입니다.
긴장하고 있는 것도 저이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저의 또 다른 모습이죠.
저답다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저다운 것입니다." "자네 말이 많군." 가개풍은 다소 의외였다.
지금까지 유방이 이처럼 주절주절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필요한 말만을 하고는 입을 다물지 않았던가.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가개풍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이제껏 그가 살아오면서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네." 가개풍은 이 고약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짐짓 가볍게 말했다. "뭘 말입니까?" "자네가 이 일에 이토록 신경을 쓰는 까닭을 말일세.
자네가 원해서 이런 배려를 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네." "곧 아시게 됩니다." "그렇겠지.
시간은 언제나 모든 걸 해결해 주니까." 가개풍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저 별없는 하늘처럼 밝지 못했다.
사흘 전, 가개풍은 한 장의 봉서를 받았다.
봉서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사흘 후, 해시(亥時)에 황금대장을 접수하러 가겠다.
단황.> 단 한 줄의 글과 서명.
그것이 전부였다.
봉서를 읽고 가개풍은 코웃음을 쳤다.
이런 협박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받아온 그였다.
아니, 이보다 몇 배 더한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그였다.
삼 년 전이었다.
어떤 간큰 자가 사냥나간 그의 외아들을 인질로 잡고 막대한 재물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황금 일만 냥을 주지 않으면 그의 아들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는 다만 말없이 그 협박장을 유방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유방 역시 아무 말도 없이 협박장을 읽었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이틀 뒤에 유방은 그자의 목을 베어 들고 왔다.
외아들을 무사히 구해왔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니 이런 터무니없는 글을 보고 가개풍이 코웃음을 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당장에 그 봉서를 무시해 버리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유방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급변했다.
봉서를 읽는 순간 유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유방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가개풍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과 기대가 범벅이 된 복합적인 것이었으므로. "드디어……." 유방의 입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유방이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유방은 외부에 나가있는 황금대장의 모든 경호무사를 장 내로 불러들였다.
뿐만 아니라 전 가솔들에게 장 밖 출입을 엄금시켰으며, 이 후원에 천라지망을 설치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해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단황, 그 이름을 들어본 바 없다.' 가개풍은 강호에서 웬만큼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사들은 거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단황이 만일 유방이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라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껏 그런 이름을 듣지 못했다.
유방이 두려워하는 것이 봉서의 내용이 아니라 바로 그 밑에 적힌 서명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단황이라는 인물은 철저하게 어둠 속에 묻혀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개풍을 약간 찜찜하게 만들었다.
북경제일쾌라는 유방을 두렵게 하는 인물.
그러면서도 전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단황은 누구란 말인가.
선우향이 가볍게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병이 비었다는 뜻이었다.
선우향이 그를 빤히 보는 것은 새로운 술을 가져올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만 되었다." 취기가 적당하게 올랐다.
이대로 선우향을 안고 잠자리에 들면 아주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을 것이었다.
이처럼 고약한 밤만 아니라면. "해시는 아직 멀었나?"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아 가개풍이 유방을 보며 물었다. "곧 됩니다." "자넨 그자가 정말로 올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유방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 "어째서지? 우리가 이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자도 알 텐데." "그래도 옵니다." "자네는 아직 그자에 대해서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네.
단황이 대체 누구인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 가개풍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마침 해시가 되었으므로.
제 16 장 야(夜)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유방은 이미 후원을 제외한 모든 곳의 경비를 해제시켰으므로 그가 나타난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은 되지 못했다.
약간의 재간만 있는 자라면 무인지경을 가듯이 후원까지는 쉽게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사나이는 상반신을 훌렁 벗고 있었고 아래에는 짧은 바지만을 걸치고 있었다.
손에는 뭉툭한 철검을 들고 있었는데 마치 나무막대기를 끌듯이 그 철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사나이는 몹시도 단단해 보였다.
검은 돌로 만든 조각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사나이가 후원에 들어서는 순간 가개풍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옴을 느꼈다.
도저히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태산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용하게 잠들어 있던 후원의 공기가 갑자기 팽창하기 시작했으며 그토록 구성지게 울던 밤벌레들이 울음을 딱 그쳤다.
괴괴한 침묵이 주위에 가득했다.
사나이가 어둠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명을 내렸고, 그래서 천하만물이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명에 복종하는 것 같았다.
참으로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사나이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나이는 어둠에 대고 명을 내리는 그 이상의 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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