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9편 (9/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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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9편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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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공의 후한 뜻 때문에 본래 먹은 마음을 다시 바꿀 수 있겠습니까." 황인검이 마침 도내 살인사건의 의안을 보니 이 옥사가 있어 거의 30년이 되어도 원범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던 터다.
그래서 그 연월일을 물어보니 그대로 맞았다.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너와 정의가 비록 절친하나 공법은 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을 잡아다가 처형하고, 장수를 후히 주고 무덤에 가서 비통해 하였다.
조선조 선비들이 공과 사를 분별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거지와 어사를 분별할 줄 아는 어린 기생에게 감동된--이광덕 이광덕(1690__1748)의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관양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대제학을 지냈다.
북관(함경도)에 어사로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사의 신분을 숨기고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각 고을 수령의 잘잘못과 각 지방마다 풍속의 순함과 그렇지 못한 점,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형편 등을 두루 탐지하고, 마침내 해질녘에 하인과 함께 함흥 땅에 이르러 어사의 신분을 드러내려고 하는 터에 성내에 주민들이 분주히 오가며 부르짖었다. "수의사또가 장차 당도하게 되었다." 이광덕이 의아하게 여겨 말하였다. "열읍을 두루 다녔으되 아는 자가 없었는데, 지금 이처럼 소문이 파다하니 필시 종자가 누설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성밖으로 도로 나와 종자에게 따져 물었으나 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고 수일이 지난 뒤에 다시 성내에 들어가서 비로소 출도하여 공무를 판결하고, 또 군의 아전에게 물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가 온 것을 알았느냐?" 아전이 말하였다. "온 성안이 자자하여 말의 출처를 모르겠습니다." 이광덕이 그 말의 출처를 따져 묻자, 아전이 집에 물러와서 자세히 탐문 하였더니, 7살 먹은 어린 기생 가련이 맨 먼저 주창한 것이었다.
아전이 들어가 그 사유를 고하니 이광덕이 가련을 불러 앞에 가까이 오게 하고 물었다. "포대에 싸인 아직 어린아이가 어떻게 내가 오는 것을 알았느냐?" 가련이 말하였다. "소녀의 집이 거리 머리에 있습니다.
전일 창문을 열고 엿보니, 거지 두 사람이 길가에 나란히 앉았는데, 한 사람은 옷과 신이 해어지기는 하였으나 두 손이 매우 희고 고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얼고 굶주린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살결이 윤택하고 희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기던 즈음에, 그 사람이 옷을 벗어 이를 잡아다 곧 도로 입으려 할 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옷을 추스려 입히고 예를 지킴이 매우 공손하여 신분의 존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수의사또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이를 알렸는데 , 잠시 사이에 이런 사실이 전해져서 온 성안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광덕이 그의 영특함을 매우 기이하게 여겨 사랑을 지극히 하고 돌아 올 적에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 기생도 이광덕의 문장에 감복하여 그 시를 몸에 간직하고 자기 일신을 의탁하려는 뜻을 두었다.
시집 갈 나이가 되자 한결같이 절개를 지키며 맹세코 다른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이광덕은 이미 그를 잊어 버렸다.
그 뒤에 이광덕이 어떤 사건으로 벌을 받게 되어 관북지방에 유배되어 함흥에 우거 하였는데, 그 기생이 와서 뵙고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모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광덕도 그 성의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에 여색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그와 같이 생활한 지 4__5년이 되어도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적이 없었다.
기생도 그의 인격에 마음으로 감복되어 이광덕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가도록 하였으되 한사코 듣지 않았다.
가련이 또한 제 갈공명의 출사표를 즐겨 외어서 달이 밝은 밤마다 이광덕을 위해 한번 외면 맑은 소리가 마치 학의 울음과도 같았다.
이광덕은 그 출사표 외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어서 절구시 한 수를 읊었다.
함경도의 여자 협객 흰머리 가득한데 나를 위해 전후출사표 낭랑하게 외누나 낭송 소리 삼고초려 그 대목에 이르면 축출된 신 맑은 눈물 마냥 줄줄 흐르네 하루는 이광덕이 석방되어 돌아올 적에 비로소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광덕은 그에게 타일렀다. "내가 갈길은 정해진 날짜가 있으니 비록 너와 같이 가고 싶으나 죄를 사면받아 돌아가는 사람이 뒷수레에 기생을 싣고 가는 것은 하지 못할 바이다.
집에 돌아간 뒤에 반드시 불러오게 할 것이니, 한스럽게 여기지 말고 조금 기다리라." 그 기생은 기쁨이 눈썹에 나타나서 개연히 허락하였다.
이광덕은 돌아온 지 몇 달이 못 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생은 부음을 듣고 통곡한 뒤 자결하여 죽으니, 집안 사람들이 길 옆에 장사 지냈다.
뒤에 영성군 박문수가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그의 무덤 있는 길을 지나다가 그 얘기를 들어서 알고 비석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썼다. "함관여협 가련지비" 체통과 예법을 잃은 감사를 탄핵한--김굉 김굉(?__?)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대서, 호는 독관재다.
영조 9년(1773)에 진사가 되고, 11년(17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필선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고 과감히 말하므로 사람들이 철공이라 불렀다.
송순면이 평안감사로 조정을 하직하고 서문 밖에 나가니, 이때 전별하는 자들이 있어 술상을 한판 요란하게 벌였다.
김굉이 마침 그 술자리에 있으면서 같이 술을 마셨다.
술상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순명이 말하였다. "우리 고모의 집이 근처에 있으므로 잠시 뵙고 오겠으니, 제공들은 조금 쉬며 잠시 기다려 주는 것이 좋겠소." 이어 문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돌아와서 곧바로 떠나려 하니, 자리에 있던 손들이 모두 작별하였다.
그러자 김굉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공은 떠나갈 것 없이 모름지기 여기서 조금 지체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송순명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굉은 대답하였다. "공은 주인으로서 좌석의 손님들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이 문을 나섰으니 손과 주인의 예를 크게 잃었고, 음식을 하인에게 내어주고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려 하니 하인이 어느 겨를에 나머지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
체통과 예법을 크게 읽소 아랫사람의 사정에 통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방백의 책임을 받아 열읍의 수령을 통솔하겠소.
내가 바야흐로 돌아가서 탄핵하겠소." 이어서 일어나 나가니 송순명은 농담으로 여기고 길을 떠났다.
김굉이 소를 올려 그를 탄핵하였다. "신니 신임 평안감사의 사석에서 한두 가지의 일을 목도한 바 있는데, 그는 체통과 예법을 크게 잃었고 아랫사람의 사정에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방백의 소임에 둘 수 없으니 고쳐 임명하소서." 주상이 그대로 시행하도록 비답을 내렸다.
송순명은 겨우 고양에 이르러서 체직을 당하였다.
조선왕조 시대에 관직에 대한 올바른 경계가 이와 같았다.
대나무 찍은 뾰족한 끝을 분별하여 잃은 돈을 찾아준--고유 고유(1722__1779)의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순지, 호는 추담이다.
추담이 어렸을 때, 나무하는 아이가 땔나무를 하여 힘에 부쳐 젊어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을 띄워놓고 물 아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가져가도록 할 만큼 영특하였다.
영조 17년(1741)에 생원이 되고, 19년(174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다.
영조 19년(1743)에 창녕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 한 상인이 여점에서 자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금덩이를 잃고 뒤를 추적하니 도둑이 대나무 울타리를 찍고 나갔다.
상인이 그런 사실을 고유에게 고하니, 고유는 말하였다. "무릇 대나무를 찍는 자가 밖에서 찍었으면 그 뾰족한 끝이 밖에 있고, 안에서 찍었으면 그 뾰족한 끝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대나무의 뾰족한 끝이 과연 안에 있었다.
여점 주인을 잡아다가 한 차례 심문하여 승복받고 급을 상인에게 돌려주었다.
정조 3년(1779)에 안주의 임소에서 죽었다.
고유의 장인 김광제도 영조 19년 (1743)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사위 고유와 동방급제하였다.
담을 뛰어넘게 하여 폐세제 전교를 거두게 한--송인명 송인명(1689__1746)의 본관은 여산이고 자는 성빈, 호는 장밀헌이다.
숙종 39년 (1713)에 생원이 되고, 45년(1719)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11년(1735)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헌이다.
소시에 집이 가난하여 비록 배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태연하였다.
집이 양주에 있었고, 부모의 산소는 장단에 있었다.
하루는 묘지기 종이 와서 다급하게 고하였다. "아무 댁에서 바야흐로 선친의 묘소 섬돌 아래에 투장(몰래 남의 산소 가까이 장사 지내는 것)하려 하는데 명일 묘시에 하관하게 되었답니다." 이른바 아무 댁은 당시 권세 있는 재상이었다.
송인명은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한 말 밥을 오늘 저녁에 마련할 수 있겠소?" 부인이, '좋습니다' 하고 곧 밥을 지어 올리자 송인명은 두 손으로 소금을 발라 뭉쳐서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한 말의 밥이 금새 다 없어졌다.
이에 부인이 비로소 송인명의 배가 큰 것을 알았으니, 대개 예전에는 가난하여 배고픔을 참았던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는 곧바로 걸음을 재촉하여 도보로 도성에 들어가서 밤중이 되어 그 재종형인 판서 성명을 찾아가서 그 연유를 대강 말하니 성명이 다음과 같이 마지 못해 말하였다. "여기에서 장단까지는 백여 리고 또 그 집안의 투장이 명일 아침에 있으니, 비단 권세도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그 시간에 급히 당도할 수 있겠는가?" 이에 송인명이 대답하였다. "저에게 나름대로 계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파하여(통금해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곧 나가서 묘소 아래에 이르니, 먼동이 이미 밝았다.
그 재상이 막 하관하려 하고 장사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송인명이 곧바로 상인의 앞에 당도하여 큰 소리로 꾸짖었다. "무수한 청산에 어느 곳인들 장사 지낼 땅이 없어 피혐의 땅에 장사 지내려 한단 말인가?" 그러자 그 상가의 측근 사람들이 풍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송인명을 포박하려 하였다.
송인명이 두 손으로 관을 들고 말하였다. "만일 손대는 자가 있으면 곧 이 관을 때려 부숴버릴 것이다." 이어서 관을 들고 천천히 논으로 걸어 들어가니, 여러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큰 비가 동이로 쏟아 붓듯이 내려 평지의 수심이 한 자 남짓하였다.
상인이 여러 종자들과 '아이고, 아이고' 호곡하며 진흙 수렁길로 관을 따라왔다.
송인명이 논 가운데 높고 조금 마른 듯한 곳에 이르러 그 옆의 마른나무를 뽑아 꺾어서 굄목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놓아두고 말하였다. "여기서 장사 지낼 만한 곳이오." 그리고 서서히 걸어서 돌아오니 그 재상이 그의 신력을 두려워하여 다른 곳에 옮겨 장사 지냈다.
신축, 임인년 정변에 조정에서 노론 사대신, 곧 김창집, 이이명^5,23조태채, 이건명을 유배시키고, 당시 당권파(소론)에서 마음대로 방자한 짓을 하여 이미 세제(영조)가 왕에게 문안하는 길을 끊어버리니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고, 인원왕후(숙종 계비 김씨)는 온 조정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조정에 애통전지를 내렸는데, 소론측에서 비밀로 하고 반포하지 않으니 인원왕후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세제가 핍박을 견디다 못하여 세제의 자리를 사양하고 물러나려 하니, 소론 일당이 거짓으로 간하여 말렸으나 역모는 더욱 급하게 움직였다.
하루는 김일경 등 소론 일당이 모두 주상의 앞에 이르러 바야흐로 '세제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글을 초하여 다음날 반포하려고 하였는데, 주상이 그만 정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잠이 든 사이 이를 몰랐던 것이다.
이 때 환관 장세상이 그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서 고하니, 세제가 그 말을 듣고는 주상에게 나아가 그 정상을 이루 다 아뢸 겨를이 없이 화가 매우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폐세제가 되면 죽게 되면 죽게 될 것이 뻔하므로 그만 독약 두 그릇을 만들어 손수 가지고 빈궁의 침실로 들어가서 서빈에게 울며 말하였다. "지금 화가 목전에 임박하였소.
천안(임금)을 한번 뵙고 위급함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나아가 뵐 길이 없으니 명일에 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그 욕을 참고 저들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이 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 이에 빈이 울며 대답하였다. "주상이 어질고 우애로우시나 병환에 계신 까닭으로 역적 무리들이 이와 같이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이 약을 마시고 함께 죽는다면 이 무리들이 장차 죽은 뒤에 또 무슨 악명으로 가할지 모르오니, 이러한 사정을 자전(숙종 계비 김씨)께 다 아뢰느니만 못합니다.
만일 자전께서 어여삐 여겨서 구해주시면 다행이고, 만일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 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세제가 그 말을 따라 앉아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드디어 빈과 샛길로 나서려는 때 송인명이 설서로 숙직을 하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아가 아뢰었다. "아침저녁 문안하는 길에 복병이 있다 하는, 동궁의 작은 담을 넘으소서, 작은 담을 넘으면 바로 자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영조가 그 말을 따라 빈과 청휘문에 이르니, 문이 과연 닫혀 있었다.
드디어 담을 뛰어넘으려 하였으나 담이 높아 자신의 힘으로는 넘을 수가 없었다.
송인명은 팔힘이 뛰어나서 급히 두 손으로 세제와 빈을 떠받들자 비로소 담을 넘어설 수 있었다.
세제가 담에 기대어 물었다. "네가 어떻게 담을 넘으면 자전이 계심을 알겠느냐?" 송인명이 황공하게 아뢰었다. "신의 아비가 호조낭관으로 궁궐을 수리하였는데 신이 어릴 때 아비를 따라 이곳에 왔으므로 궁정을 자세히 압니다."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인명이 급제하기 전 꿈에, 어떤 사람이 붉은 옷을 가지고 다섯 가지 채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오르려다가 반공에 이르러 앞으로 떨어지려 하기에 급히 손으로 받들어 올리니 이에 훌쩍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이상히 여겼는데 이 때 와서야 그 꿈의 뜻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 때 자전이 새벽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다가 세제와 빈이 오는 것을 보고 손으로 머리털을 움켜잡고 머리 빗는 일을 정지하고 분부하였다. "그대들이 어찌하여 이처럼 일찍 오는가?" 빈이 앞에 나아가 울며 세제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려 한 정상을 고하며 아뢰었다. "화가 촌각에 달려 있어 마마께 고하고 물러가 죽으려 합니다." 자전이 깜짝 놀라 빗을 던져버리고 불끈 성을 내며 분부하였다. "이 무리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나는 막연히 알지 못하였다." 머리를 미쳐 다 빗어 올리지도 못한 채 일어나 신도 신지 않고 전정에 걸어 내려가서 세제에게 명하여 앞에 인도하여 가니, 궁인이 급히 대비(숙종 계비 김씨)를 받들어 업었다.
그러나 대조전에 이르니, 문이 다 닫혀 있고 안에서 어떤 사람이 비밀히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세제가 문을 흔드니 문고리가 저절로 열렸다.
드디어 대비를 받들어 안으로 들어서는데, 환관 박상검이 홍수(궁녀)의 무리들과 창 앞에서 전교를 비망지에 쓰다가 갑자기 세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에 무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비망지를 거두어 뛰쳐나가 섬돌을 맴돌며 달아나는데, 세제가 펄쩍 뛰어 옷소매를 잡아 그 종이를 빼앗으니 박상검이 한사코 놓으려 하지 않아서 각각 한쪽 끝을 잡고 당기니, 종이는 한가운데가 찢어지고 박상검은 그만 몸을 뿌리치고 달아나버렸다.
세제가 그 전교의 반쪽을 보니, '제위서인(제를 서인으로 삼는다')'이라는 네 글자가 있었으니, 대개 세제를 폐하여 서인으로 한다는 전지였던 것이다.
대비가 이를 보고는 크게 노하여 약방에 일러 언문 전교를 내렸다. "이달 초엿새 이후의 일은 모두 대전의 처분이 아니고 두 환관이 병약한 주상의 왕명을 사칭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번 조정의 관료를 유배하는 일은 오로지 대전의 장번내관(늘 모시는 내관) 박상검, 승전색 문유도, 대전상궁 필정, 석열 등이 결탁하여 번갈아 올린 데서 나온 것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할 뻔하였고, 나와 세제를 외롭고 위태롭게 한 정상은 천만 번 몹시 통분하다...." 이 날 세제(영조)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대체로 송인명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선정을 펴 삼한을 이룬--최규서 최규서91650__1735)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문숙, 호는 간재 또는 소릉이다.
현종 10년(1669)에 진사가 되고 숙종 6년(16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내고, 경종 1년(1721)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영조 4년(1728) 무신란 때 주상이 그에게, '한 올의 실로 나라를 부호하였다'라는 친서를 하사하였다.
나이 81세에 죽었으며, 시호는 문충이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라 감사로 있을 때 명곡 최석정이 그 지역 사람에게 그의 정사에 대해 물으니, 다음과 같이 그가 조용한 가운데 선정을 펴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특별히 다른 일은 없고 오직 세 가지 한가로운, 즉 삼한으로 일컬을 뿐이니 주부들의 부서가 한가롭고, 공방이 한가롭고, 기방과 풍악이 한가로운 것을 말합니다." 최규서는 일찍이 말하였다. "소시에 길에서 여인을 만나 한번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마음이 장차 나를 죽이게 되는구나'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였다." 최규서가 사리사욕을 이겨내는 극기공부는 젊었을 때부터 이와 같이 하였다.
끝내 이름을 고치지 않은--정호 정호(1648__1736)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중순, 호는 장암이다.
숙종 8년(1684)에 문과에 급제, 영조 1년(1725)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이 되고 기로소에 들어 갔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급제하기 전 꿈에, 시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네 이름이 좋지 못하니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름 글자에서 '물 수'와 '흰 백'을 떼어버리면 반드시 급제할 것이다." 정호는 꿈에서 깨어나 말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학문에 달려 있지, 이름에 달려 있겠느냐." 신인이 세 뻔 고하였으나 정호는 끝내 고치지 않았다.
끈질긴 노력 끝에 드디어 뒤에 과거에 올랐다.
집이 충주에 있었는데 나이 많고 할 일이 없어 배나무 수십 그루를 밭 사이에 심었다.
이 때 참판 이형좌가 도승지로 왕명을 받들고 정호를 부르러 왔다.
정호가 친히 배나무를 접목하는데 큰 나무가 한 자 남짓하였다.
이형좌가 빙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렇게 어린 나무가 언제 열매 맺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 때 정호의 나이 80세였으므로 그가 늙어서 그 배의 열매를 맛보지 못할 것임을 풍자한 것인데, 정호도 웃고 말았다.
뒤에 이형좌가 충청감사로 부임하여 정호를 찾아가니, 정호가 술상을 간단히 차리고 배 10여 개를 같이 내놓았는데 감미로운 맛이 특이하였다.
이형좌가 물었다. "이 배는 참으로 맛이 좋은데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정호가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연전에 내가 친히 접목한 것이네.
그대는 내가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이라 근심했는데 지금 열매를 따먹은 지 이미 수년이 되었네." 정호는 나이 89세에 죽었다.
돈피갖옷을 벗어 정순왕후에게 바친--이사관 이사관(1705__1776)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숙빈, 호는 장음이다.
영조 13년 (1737)에 문과에 급제하고 48년(1772)에 정승에 임명되어 좌상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이다.
영종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가 어릴 때 서산에 살았다.
지극히 가난하여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가 일찍이 친척의 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이 때 돌림병이 크게 성하여 온 마을 이 모두 전염되자, 야외에 초막을 지어 피하였다.
정순왕후와 그의 모부인이 나가 피하였는데 정순왕후는 그 때 겨우 3세였다.
도깨비들이 정순왕후가 묵고 있는 초막 밖에 떼를 지어 와서 말하였다. "곤전(왕비)이 임어하셨으니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모두 흩어져 가므로 모부인이 사뭇 이상하게 여겼다.
영조 23년(1747) 정월, 정순왕후가 3세 때 김한구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이사관이 호서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여관에서 만났는데 예전에 이미 서로 아는 처지였다.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매우 추운 날씨였다.
이사관이 김한구에게 말하였다. "날씨가 이처럼 추운데 그대의 딸이 추위에 고생이 없을 수 있겠소." 그리고 드디어 돈피갖옷을 벗어 그에게 주었는데, 김한구가 그것을 매우 고맙게 여겨 항상 정순왕후에게 익히 들려주었다.
김한구가 서울에 와서는 남촌의 학주 김홍욱의 옛집에 우거하였다.
정순왕후가 15세 되는 영조 35년(1759)에 이르러 정성왕후의 상기가 이미 다하자, 영조가 친히 왕비감을 간택할 적에 사대부의 딸을 궁중에 모았는데, 정순왕후가 홀로 지정된 자리를 피하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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