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13편 (13/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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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13편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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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행히 각하를 만나게 되었소.
각하의 기개는 남들보다 뛰어나 귀신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터이니 나를 인도하여 산해관을 벗어나도록 해주겠소?" 김이소가 대답하였다. "제가 어떻게 산해관을 벗어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해흥군이 말하였다. "공의 기백은 모두 머리에 모여 있으니 나의 혼백이 공의 머리에 붙으면 나를 가로막는 귀신들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만 이곳과 산해관과의 거리는 하룻길이 넘으니, 공이 고통을 잘 견디러 신음하는 소리를 내지 않아야만 귀신이 범접을 못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귀신들에게 저지당하여 산해관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이오." 김이소가 감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허락하고 새벽이 되어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머리에 큼 돌을 얹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고 몸이 쑤시고 아파 고통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억지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가마를 타고 산해관까지 이르나 마치 태산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아야!' 하는 통성이 저절로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리와 이마가 매우 홀가분하게 여겨지면서 곧바로 쑤시고 아픈 고통이 사라지므로, '아차!' 하고 수없이 후회하면서 돌아와 이 사실을 해흥군의 집안에 나타나기를 매우 신령하게 하고, 제사 때마다 의자에 앉아 제사 음식의 기를 마셨는데, 만일 불결함이 있으면 번번이 그 여종에게 벌을 내리므로 온 집안이 두렵게 여겨 조금이라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의 영험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하였다.
큰 뱀이 배 위에 서려 있었던--김종수 김종수(1723__1799)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정부, 호는 진솔 또는 몽촌이다.
영조 26년(175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44년(176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조 13년(1789)에 정승에 임명되었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충이고, 정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떤 사건으로 남쪽 지방에 귀양 가서 그 고을 이방의 집에 우거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마루에서 낮잠을 자는데 큰 뱀 한 마리가 그의 배 위에 서려 있었으나 김종수는 그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침 그 고을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열세 살 된 이방의 아들이 점심을 먹고 관아로 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얼른 달려가 큰 개구리 10여 마리를 잡아다 뱀 앞에 던지자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김종수의 배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김종수가 그 사실을 알고 그 아이를 몹시 기특하게 여기고,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올 적에 그 아이를 데리고 같이 왔다.
그가 평안 감사로 있다가 가시 조종으로 돌아오게 되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대동강에서 전성하는 뜻으로 기생에게 춤과 노래를 크게 벌이게 하였다.
김종수도 흥겨워 담뱃대로 뱃전을 두드리며 소동파의 적벽부를 외우는데 잘못하여 담뱃대가 그만 강물 속으로 떨어지자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평안 감사로 있은 지 2년 동안에 이 담뱃대도 평안 감영의 물건이었는데, 지금 대동강의 신이 내가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강물에 떨어뜨리게 한 것이오." 그의 청렴 결백함과 풍류가 이와 같았다.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비난한 갈처사를 의로운 친구로 사귄--김유근 김유근(1785__1840)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경선, 호는 황산이다.
순조 10년 (18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직언하기를 좋아하여 그 때문에 여러 차례 영남의 바닷가로 귀양 갔었다.
임금이 그의 그런 경력을 생각하여 다시 불러다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에게는 도의로 사귄 친구가 남산 아래 살고 있었는데, 갈처사라고 불렀으며,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무렵에 갈처사가 김유근이 외출한 틈을 타 시 한 수를 써서 벽에다 걸어두었는데 그 시는 이러 하였다.
눈서리를 견뎌낼 대쪽 같은 지조 서릿바람 겪은 꽃처럼 우아한 모습 고요한 물에서 무한한 바다의 이치를 알게 되는 법 어찌하여 다시 풍파를 일으키려 하오 성명을 밝히지 아니하고 떠나버렸다.
김유근이 돌아와서 그 시를 보고 말하였다. "이 시는 틀림없이 갈처사가 내가 이조 판서가 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다." 사람을 시켜 그를 찾게 하였지만 이미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난 뒤였다.
얼굴은 지독히 못생겼어도 복이 많았던--윤명렬 윤명렬(1762__1832)의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언국, 호는 석유이다.
얼굴이 지독하게 못생겼다.
정조 13년(1789) 삼일제에 장원급제하였으므로 임금이 그에게 전시에 곧장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상신 채제공이 윤명렬의 제술(시나 글을 지음)은 고상한 품위가 없고 또 얼굴조차 못생겨 임금을 가까이서 모실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주청하자 임금이 그 주청대로 윤허하였다.
그것은 지난번 채제공의 종질이 상신 윤시동의 주청 때문에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되었다는 오해가 있던 터에 윤명렬이 윤시동의 가까운 친족으로 잘못 알고 이런 주청이 있게 된 것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임금이 말하였다. "윤 아무개의 아비 면동은 글을 잘 못한다는 비난은 이상스럽다." 마침내 과거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한 것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언젠가 윤명렬이 여러 재상의 자제들과 나란히 앉아 점쟁이에게 운명을 점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 점쟁이가 윤명렬을 보고 말하였다. "이 분은 아주 가난하고 궁색한 형상이니 함께 논의할 필요조차 없소." 그 말을 들은 윤명렬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 이튿날이 되자 전날 상을 봐주었던 점쟁이가 윤명렬을 찾아와서 말하였다. "당신은 매우 존귀하게 될 상이며, 특히 등허리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게 될 상이오.
내가 이 세 꾸러미의 돈을 당신에게 건네주겠는데, 한 꾸러미는 곧장 술과 안주를 마련할 비용으로 주는 것이며 두 꾸러미는 당신이 몹시 가난하니 지금 당장 땔감과 양식을 사는 데 쓰시오.
그리고 뒷날 틀림없이 존귀하게 될 터이니 20년 뒤에 되돌려주는 것으로 3천 냥짜리 물표를 만들어 나에게 주시오." 윤명렬이 흔쾌히 그 제의를 허락하였다.
뒤에 청나라에서 조선의 노론, 소론에 대한 곡해가 생겨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윤명렬이 사명을 받들고 연경에 가서 잘 수습하고 돌아오자 그 공로가 인정되어 강원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전에 그의 상을 봐준 점쟁이가 그때서야 찾아와서 물표를 내놓으며 돌려주기를 청하므로 서슴없이 즉각 물표에 적힌 대로 내주었다.
윤명렬의 부인은 학주 김홍욱의 후손이며 역시 못생겼다.
네 나들을 두었는데 윤치승은 판관이고, 윤치응은 목사이며, 윤치의, 윤치영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한 집안이 크게 드러났다.
윤명렬이 일찍이 그의 부인에게 장난 삼아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부인의 그런 얼굴로 시집 갈 수 없었을 것이고, 나의 이 얼굴로도 부인이 아니었다면 장가 들 수 없었을 것이오." 시호는 충헌이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임금이 내려준 집을 거절한--윤득부 윤득부(1723__1799)의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사휴, 호는 신암이다.
평생동안 구차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의롭지 않은 방향으로는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않아 명성과 의리 그리고 풍채와 절조는 당대 제일의 풍류였다.
이 때문에 전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성균관에서 유생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는 등 은혜와 예우가 융숭하고 극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줄어듦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당시 조정에서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물을 꼽는다면 그보다 앞설 이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가 처음에 세자 시강원의 유성으로 임명되어 임금이 반현에 집을 마련하도록 명령하고 집을 마련할 돈을 내려 주었더니, 윤득부가 사양하며 이렇게 아뢰었다. "강가에 오두막집이 있는데 그 값도 상당하여 그 집을 팔아 적당한 새집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감히 돈을 내려 주시는 명령은 받들 수 없습니다." 임금이 여러 번 유시하였지만 끝내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대궐 안의 일을 맡은 관원에게 엄밀히 영을 내려 강가에 있는 윤득부의 집을 후한 값으로 사들이게 하여 그 돈으로 집을 사서 살도록 하였는데, 반현의 초라한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스승의 꿈대로 우부빈객이 된--이의철 이의철(1703__1778)의 본관은 용인이고 자는 원명, 호는 문암이다.
도암 이재 문하의 선각자로 그와 비교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도암이 언제나 글을 지을 적이면 번번이 그와 상의하곤 하였다.
어느 날 도암이 문암에게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자네 등 뒤에 '우부빈객 이의철'이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았네.
나는 헛된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혹시라도 그 전처럼 맞히려는지?" 그러던 차에 정말로 문암에게 경전의 학문이 뛰어나다고 하여 우부빈객 홍문관 제학을 제수한다는 어명이 떨어졌다.
과연 스승의 꿈대로였다.
성실과 솔직함으로 끝내 아내를 효부로 만든--이규복 이규복(?__?)의 는 송석이다.
처음 도암 이재를 찾아갔을 때 도암이 그의 집안 내력을 묻자, 이규복이 시를 지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삼대에 걸쳐 기마병의 신역 대신 포목을 바치는 자이고 일생동안 산골 향교의 심부름하는 신세입니다 자신의 미천한 처지와 신분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사람으로 이미 분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로 인하여 그의 성실한 마음도 알게 되었으며, 학문의 조예 역시 매우 뛰어난 선비였다.
그의 아내가 처음에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았는데 이규복의 훌륭한 행실을 보고, 항상 다투며 갈등을 빚던 마음이 감화되어 마침내 효부가 되었다.
이규복이 강원도 정성의 송석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호를 송석으로 지었다고 한다.
귀신도 꺼려하는 억센 기상의--김정묵 김정묵(?__?)의 본관은 광주이고 호는 과재이다.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종가의 부인이 무당에게 미혹되어 대대로 전해오던 많은 재물을 모두 없앴다는 소문을 듣고, 김정묵이 몸소 그 무당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늠름한 기품으로 자초지종을 물으려 하는데 무당이 파초를 쥐고 방울을 아무리 흔들어 대도 신이 내리지 않아 그의 술수를 행할 수가 없었다.
대체로 억센 남자의 기상은 귀신도 꺼려하는 것이었으므로, 과재의 행적이 우암 송시열의 어렸을 적 일과 비슷하였다.
과장의 문란함을 보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이직보 이직보(1738__1811)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유종, 호는 중주이다.
젊어서는 과거 공부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매번 과거 시험장에 가보면 요로의 인사에게 청탁하는 규격화된 서신, 즉 관절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직보는 번번이 그 관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종형인 판서 이익보가 그에게 관절을 받아 오도록 권하였으나, 이직보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지암 김양행을 따라 여주에다 살 곳을 정한 뒤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익보가 이렇게 책망하였다. "선비가 과거 공부를 하여 벼슬하기를 일삼지 않으면 자신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는 관절을 하면서까지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겠다는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니 그의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던 것은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종질 이술원은 늘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종숙은 바로 옛날에 이른바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하던 신선 같은 선비올시다." 사치하고 망하지 않은 사람 없다고 책망한--김용겸 김용겸(1702__1789)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제대, 호는 교교재다.
예에 밝아 매번 사대부 자제의 관례 때 갓을 씌워 주며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경계하는 빈의 자격으로 초대되어 의식을 진행하면서 사소한 실수도 없었다.
언젠가 이우당 조태채 사손의 관례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 물건들이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는 그만 그 집에서 나오자, 그 집 주인이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김용겸이 이렇게 꾸짖었다. "사치하고 안 망한 사람은 없으니 나는 이런 관례 의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소." 주인이 무릎을 끊고 무수히 사죄한 뒤 즉시 꾸밈없이 검소하게 바꾸니, 김용겸이 그제야 의식을 진행하며 거듭 경계하고 돌아왔다.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자에게 좌우명이 될 시를 지어 경계한--정종로 정종로(?__?)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사앙, 호는 입재다.
우복 정경세의 사손으로 집안에 전해오는 학업을 잘 계승하여 상주 우상의 옛집에서 경서를 강론하니, 영남의 선비들이 그를 따라 배운 사람이 많았다.
일찍이 그가 제자 최상룡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천리 길 멀다 않고 찾아온 자네가 가련한데 석실에서 얼마 동안이나 글을 읽었던가 약석은 준걸들이 뒤끓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젊었을 때 재덕을 고상하게 닦아야 하네 학문은 세밀하게 철저히 하며 일 처리는 나무 다리를 건너듯 조심해야 하네 다시 소강절처럼 운명을 추산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초어편에 화답해도 무방하다네 역시 젊은 선비들을 경계하는 채찍이 되어 두고두고 암송할 만하다.
술과 시를 즐기며 경치 좋은 곳에서 숨어 산--이양연 이양연(1771__1853)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진숙, 호는 임연 또는 산운이다.
여덟 살 때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동그라미 속에 네모를 그리고 그 네모 안에 '인'자를 썼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 즉 삼재를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장성해서는 성리에 대한 학설을 강론하여 밝히니, 홍석주가 그를 충청도 도사로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며, 헌종조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시 짓기를 즐겼으며 풍광이 뛰어난 곳에서 놀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당나라 때의 학자 부혁이 자신을 '높은 산의 구름이 끼는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한 것을 모방하였으므로, 고향에서는 그를 산운으로 불렀다.
어느 날 율곡 선생의 문집을 읽다가 어슴푸레 깨닫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지향하는 도가 여기 있다." 이어서 송나라 때 이연평이 세상과 단절하고 풀로 지은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은둔 생활했던 일을 자신의 공부하는 목표로 삼고, 마침내 온돌을 없애고 이불을 덮지 않으며 배고프면 솔잎을 씹고, 입으로 글을 외고 손으로는 글을 베끼기를 병이 들거나 먼 길을 갈 때도 중단하지 않았다.
수절하는 기생 무운을 사랑한--이경무 이경무(1728__1799)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사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냈다.
그가 강계부사가 되었을 적에 그 고을에 무운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용모와 재능이 뛰어나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울에 사는 성 진사란 자가 우연히 강계에 왔는데 무운이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애정이 매우 깊어졌다.
성 진사를 전송한 뒤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고는 몹쓸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경무가 부임하여 그를 불러다 보고는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무운이 종기 난 곳을 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첩에게 이런 종기가 있어 감히 사또를 가까이서 모실 수 없습니다." 이경무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내 앞에서 잔 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이 때부터 무운은 낮이면 청지기 노릇을 하고 밤이면 그의 처소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5개월이 지나자 어느 날 밤에 무운이 갑자기 이경무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오늘 밤에는 사또를 잠자리에서 모실 수 있겠나이다." 이경무가 되물었다. "네가 몹쓸 병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꺼내는가?" 무운이 대답하였다. "첩이 성 진사를 위하여 수절을 하였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또를 모시고 몇 달을 지나면서 사또의 동정을 지켜보았사온데 참으로 훌륭한 대장부이십니다.
첩이 아무리 식견이 없는 비천한 기생이기는 하오나 어떻게 사또를 흠모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나이까?" 이경무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마음이 그와 같다면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다." 그 후에도 여느 때처럼 대해주며 유달리 가까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무운이 따라오기를 바라므로 이경무가 말하였다. "나에게는 본처와 첩까지 있으니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편안하지 못하겠구나." 무운이 말하였다. "만약 그러시다면 첩은 수절을 하겠나이다." 그러자 이경무가 다소 비웃는 투고 말하였다. "네가 말하는 수적이란 성 진사를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냐?" 무운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즉시 단도를 가져다가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깜짝 놀라 데려가겠다고 하였지만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작별하고 말았다.
10여 년이 지난 귀에 이경무가 훈련대장이 되어 성곽과 나루를 보수하고 정비하던 무렵의 어느 날, 무운이 찾아와서 뵙기를 청하므로 이경무가 기뻐하며 불러다 보고 그와 거처를 함께 하면서 밤에 그를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있는 힘을 다하여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무운이 대답하였다. "사또를 위해서 수절하기 때문입니다." 이경무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미 나를 위하여 수절한다면 어찌하여 나마저 거절한단 말인가?" 무운이 말하였다. "그 뜻은 이미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맹세하였기에 감히 사또의 명령도 따를 수 없나이다." 1년 동안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 뒤 이경무의 처가 죽자 무운이 상중에 달려와 서울에 머물다가 장례를 치른 뒤에 되돌아갔으며, 이경무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스스로 운대사란 호를 짓고 그대로 자기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경무의 시호는 무숙이다.
순라군으로 시문을 잘하여 어전에까지 불려간--왕태 왕태(?__?)의 일명은 한상이고 자는 보경, 호는 수리이다.
고려 왕씨의 후손이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워 나이 스물 넷에 김성을 가진 노파의 주막에서 술상 나르는 일을 거들면서 얻어먹고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술상 나르다가도 틈만 나면 책을 앍으므로 처음에는 노파가 그러지 말라고 꾸짖자, 그 뒤로는 책을 품고 다니면서 읽기도 하고 간혹 밥을 짓는 불빛으로 책을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노파가 그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날마다 초 한 자루씩을 사주어 밤에도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더니 이 때문에 문장이 크게 향상되어 그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언젠가 금호문(창덕궁 돈화문의 서쪽문) 밖에서 징발된 병졸 대신 보초를 서는데, 이 날 따라 달빛이 유난히도 밝기에 움막 속에서 나와 "상서" 한 장을 외우니 그 목소리가 쇠붙이와 돌을 치는 것처럼 낭랑하였다.
마침 그 때 대사간 윤행임이 그곳을 지나다가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겨 수레를 멈추고 그를 불러 보았더니, 더벅머리에다 의복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윤행임은 놀라면서도 그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강물이 맑아 밤이면 안개 끼는 때가 적다'고 시를 지은 왕상한이 아닌가?" 그 뒤에 소문이 대궐의 임금에게까지 알려지자 임금이 그를 불러다 시를 짓게 하였더니, 몇 걸음 옮겨 놓으면서 이렇게 읊었다.
따뜻한 바람은 신하들의 검은 장막에서 일고 아침 햇살은 대궐의 붉은 문에 비치도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왕태가 정조 77년(1787)에 경점졸(북과 꽹과리를 쳐서 시간을 알리는 군졸)로 복무하면서 틈만 나면 대궐 밖 순라군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글을 읽었는데,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불러오도록 명하여 그의 용모가 건장함을 보고 경서와 사기를 강독하게 하였더니, 임금이 명이 떨어지자마자 외우기를 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하였다 한다.
그는 또 시를 지었으므로, 임금이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여 우림장으로 삼고, 잇달아 큰 철장을 하사하여 야간에 궁성을 순찰하게 하였으며, 조령별장에 임명하였다.
도둑에게 해진 갓을 되돌려 받은--정민수 정민수(?__1830)의 본관은 월성이고 자는 기범, 호는 벽산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겼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거친 음식마저도 거르기가 예사였다.
걸칠 옷이 없어 맨발에 왼쪽에는 짚신을, 오른쪽에는 나막신을 신고 시장에 낙 물건을 팔아 그날그날 어머니를 봉양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초하루와 보름달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메고 가서 성묘를 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렇게 하기를 삼년상을 마칠 동안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를 가리지 않았다.
그가 본래 의술을 배웠지만 이루지 못하고 시 읊기를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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