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외교관, 두주불사의 술꾼 최치운 최치운(1390-1440)의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백경, 호는 조은이다. 태종 때 생원시와 문과에 각각 합격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다. 나라일로 중국에 들어가 일을 성공시키고 돌아온 공으로 논밭과 노비를 하사했는데, 치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하사하신 논밭과 노비를 받지 않으니 내 마음이 이렇게 좋소" "임금의 하사를 사양하다니 복도 지지리 없구려" 그는 본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한 까닭에 이를 알고 있는 세종이 어찰(임금의 편지)을 내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치운은 그 어찰을 벽 좌우에 붙여 놓고 들락거릴 적마다 그것을 보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워낙 술을 좋아한 최치운은 밖에만 나가면 술에 취해서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그의 머리를 흔들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러면 치운은 취중에서도 상에 머리를 박으면서 사죄하는 시늉을 하였으며, 술을 깨면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상의 은혜에 감동되어 늘 술조심은 하고 있지만 술집 앞을 지나게 되면 그만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취하도록 마시게 된다" 그는 최윤덕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하여 '무원록'을 주석 하였다. 최치운의 아들 최응현의 호는 수재이다. 단종 2년(1454)에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고 대사헌을 거쳐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속세의 영욕을 그 몇 해나 겪었던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백발이 성성하네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버릇이 되었을 뿐 아침에 일어나면 그 자리 그대로 최응현의 아들 수성은 기묘명현 중의 한 사람이다.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의 황희 황희(1363-1452)의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구부,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이다. 고려 우왕 기사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조선의 이름난 재상이다. 시호는 익성이고, 죽은 뒤에 세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는 나라일에만 힘을 기울이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여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 계집종과 다투었는데 저 계집종은 매우 간악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이 와서 역시 이 계집종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네 말이 맞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였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너무도 심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저 아이는 저렇게 말했으니, 이 아이가 옳고 저 아이는 옳지 못합니다" 그는 역시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도 맞다" 황희는 때도 없이 글을 읽되 결코 자리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밭에서 일하다가 왕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쓰고 있던 삿갓과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입궐하였으므로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즉시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는 정승으로 30년 동안 있으면서 이미 있는 제도를 힘써 따랐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를 따랐고 도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함에 대신의 체모를 잃지 않았다. 세종도 그 사려 깊은 행동과 신중한 일처리를 늘 칭찬하였다. 어쩌다가 옛 제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임기응변의 재주가 없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감히 논의할 수가 없나이다" 그는 이론이 공평하고 항상 일처리가 너그러웠지만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시비를 가리는 데 과감하여 아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놓은 뒤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은 뒤에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총명한 머리가 감퇴되지 않고 모든 제도와 문헌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감정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평소 생활을 보면 자손들과 종의 아이들이 항상 모여 시끄럽게 하여도 그것을 금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떤 때는 아이들이 수염을 당기고 볼을 때려도 그대로 다 받아 주었다. 한번은 낮은 관리 하나를 옆에 두고 붓에 먹을 적셔 편지를 쓰는데 남자종 아이가 그 서류 위에 오줌을 쌌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그 오줌을 말없이 닦아 냈다. 하루는 여자종이 반찬을 들고 공에게 기대서서 관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술상을 내오리까?" "천천히 차리거라" 비스듬히 서 있던 여종은 불손하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그리 늦지요?" 할 수 없이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차려 내라" 술상이 나오자 남루한 옷과 맨발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공의 옷을 밟고 깔고 앉아 그 반찬을 손으로 다 집어먹고 어떤 아이는 손으로 공을 툭툭 치기도 하였지만 공은 "아이고 아프다. 아이고 아프다" 할 뿐이고 아이들을 꾸짖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종의 아이들이었다. 밥을 먹을 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공은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곤 하였다. 종들이 간혹 잘못을 저질러도 매를 치는 일이 없으며 종들도 사람인데 학대하면 안 된다고 늘 말하였다. 뜰 앞에 붉게 익은 복숭아를 이웃 아이들이 와서 따먹으면 공은 부드러운 소리로 아이들을 타일렀다. "애들아, 다 따지는 말아라. 나도 맛은 봐야지" 조금 후에 나가 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 아이가 돌을 던져서 잘 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공이 소리쳐 종을 부르자 돌을 던진 아이는 담밖으로 도망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 종이 오자 그에게 떨어진 배를 주워 도망친 아이에게 주라고 하고 나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무를 보았는데 당시 김종서는 공조 판서였다. 그가 공조의 관원들을 시켜 술상을 차려 와서 대접을 하자 공이 벌컥 화를 냈다. 공은 공조 판서 김종서를 앞에 불러 준엄하게 꾸짖었다. "국가가 예빈시를 정부 옆에 두는 것은 정승들을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 정승들이 배가 고프면 예빈시를 시켜 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공조가 이 음식을 차리느냐?" 정승 김극성이 이 일을 경연석에서 임금께 아뢰니, 세종은 "대신이면 마땅히 그래야만 백관을 통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황희 또한 김종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비 새는 집에서 살았던 맹고불 맹사성 맹사성(1360-1438)의 본관은 신창이고, 자는 성지, 호는 동포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열 살 때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일주일 동안 미음도 먹지 않았고, 장례를 치른 뒤에 3년 동안 산소를 지키며 죽을 먹었다. 묘 곁에 잣나무가 있었는데 산돼지가 내려와 잣나무에 몸을 비비곤 하여 말라 죽게 되었다. 맹사성이 통곡하니 그 이튿날 산돼지가 그만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문이 서게 되었다. 정승이 된 후에도 그의 집은 늘 가난하고 협소하였다. 하루는 병조 판서가 공적인 일을 보고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집의 곳곳이 새서 의관을 모두 적시게 되었다. "정승의 집이 그렇게 초라한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짓겠는가?" 병조 판서는 집으로 돌아와 탄식하며, 집 지을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을 다 치우라고 하였다. 맹사성의 본가가 온양에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내려갈 때면 관청에 들르지 않고 시종 한 명을 데리고 간편한 차림으로 가곤 하였다. 한번은 소를 타고 온양에 내려갔는데 양성, 진위 두 사또가 공이 내려온다는 것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웬 사람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문책하였다. 그러자 맹사성이 사또가 보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서 온양 맹고불이라고 일러라" 그 사람이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니 이 말을 들은 두 사또가 혼쭐이 나서 도망가는 바람에 차고 있던 인끈이 언덕 아래 깊은 못에 빠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못을 인침연이라고 부른다. 맹사성이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인에서 비를 만나 여관을 찾게 되었다. 이 여관에서 제일 좋은 방은 어떤 사람이 먼저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딸린 하인들이 무척 많았고 그의 차림새도 무척 호화로웠다. 그는 영남에 사는 부자로서, 녹사(기록이나 문서, 전곡 등을 담당하는 관리) 시험을 보려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구석방에 든 맹사성을 누각으로 불러 올려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고 거만스런 말투로 제의하였다. 막힘 없이 말을 주고받되 묻는 말은 '공'자로 끝내고 대답하는 말은 '당'자로 끝내기로 약속하였다. 이 제의에 따라 맹사성이 먼저 시작했다. "서울은 무슨 일로 가는공?" "녹사 시험에 응시하러 간당" 맹사성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공이 뽑히도록 해줄공?" "하하, 그렇게 못한당" 뒷날 의정부에 그 사람이 녹사 입시생으로 들어와서 맹사성에게 인사하였다. 맹사성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공?" 그는 엎드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죽어지이당" 그 자리에 참석한 재신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맹사성이 그들에게 지난 이야기를 해주자 좌중은 배를 잡고 웃었다. 맹사성은 그를 녹사로 채용하였다. 그는 그 뒤 여러 고을에서 유능한 아전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는 모두 맹사성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공당문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앉아서 세종의 술잔을 받은 최윤덕 최윤덕(1376-1445)의 본관은 통천이고, 자는 여화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는 국경을 지키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최윤덕은 그 이웃 동네 양수척(무자리:사냥과 고리를 걸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집에서 길러졌다. 그는 차츰 자라면서 힘이 세고 활쏘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느 날 목우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윤덕이 즉시 달려가서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양수척이 윤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가 있는 합포진으로 갔다. 운해에게 윤덕의 재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운해가 "한번 시험해 보리라" 하고 사냥을 시켰는데, 달리면서 좌우로 쏘는 족족 다 맞추었다. 아버지 운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손이 제법 빠르긴 하지만 아직 법도를 전연 모르는구나. 네가 보인 솜씨는 하찮은 재주일 뿐이다" 아버지는 그 길로 아들에게 병법을 가르쳐 드디어 명장으로 만들었다. 세종 원년(1419)에 이종무와 함께 주사(해군)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들어온 왜군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과가 보고 되자 세종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를 우찬성 겸 평안도 절제사 및 안주목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는 공무가 끝나는 여가여가로 관청 뒤 빈 땅에 손수 채소를 가꾸었다. 어느 날 채소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소송을 하러 온 백성 하나가 그가 목사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향해 "지금 사또께서 어디 계시오?" 하니, 윤덕이 시치미를 떼고 "지금 관청에 있소" 하고 재빨리 가서 관복으로 갈아 입고 그 소송을 처리하였다. 어느 날 부인 한 사람이 울면서 고하였다. "지난 밤에 호랑이가 제 남편을 물어 죽였습니다" "내가 너의 남편 원수를 갚아 주마" 최윤덕은 호랑이를 쏘아 죽여 그 배를 가르고 뱃속에 있는 뼈를 거두어 의복으로 싸서 관속에 넣어 주었다. 그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여진족 이만주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세종 임금이 최윤덕을 보내어 정벌하도록 하니, 최윤덕이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최윤덕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고 직접 최윤덕에게 술을 권했으며, 또 세자에게도 술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윤덕이 일어나서 잔을 받으려고 하니 임금은 일어나지 말고 앉아서 받으라고 하였다. 세종이 군관에게 춤을 추라고 하자 술에 취한 윤덕이 일어나서 그 군관과 함께 춤을 추었다. 경원부사 송희미가 군법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윤덕은 송희미와 친구 사이였다. 윤덕은 그를 위하여 술상을 차리고 술을 권하면서 위로하였다. "상심하지 말게. 법은 피할 수 없네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어야 하네. 나 또한 죽어서 그대 뒤를 따르겠네" 벼슬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방안에서 우산을 써야 했던 청백리 유관 유관(1346-1433)의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경부, 호는 하정이다.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유관은 그릇이 크고 너그럽되 공정하고 청렴하였으며, 남달리 총명하되 배움과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의 집은 흥인문(동대문) 밖에 있었는데 담장도 없는 초가삼간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태종 임금이 선공감을 시켜서 본인 모르게 집을 지어 주었다. 유관의 생활은 늘 청빈하였다. 장마비가 한 달 넘어 계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천장이 새서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유관은 우산을 받쳐 들고 방안에 앉아서 부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우산이 없는 집은 이 장마통에 어떻게 견딜까?" "우산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준비가 있을 것입니다"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니 유관이 웃었다. 겨울에 유관의 집을 방문하면 맨발에 짚신을 신고 나오는 유관을 흔히 볼 수 있었고, 봄에는 호미를 들고 채소를 가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세종 6년(1424)에 우의정으로 벼슬을 물러났다. 유관은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는데, 막걸리 한 동이를 뜰 위에 두고 늙은 여자종을 시켜 사발로 술을 대접하게 하였으며, 술을 마시며 손님과 화락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졸들의 고통을 임금에게 낱낱이 아뢴 노한 노한(1376-1443)의 본관은 교하이고, 자는 유린이다. 어릴 적부터 행동이 어른처럼 점잖았다. 뒤에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삼도 염찰사(암행어사)가 되어 해주군에서 전함을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감독하였다. 그는 서울로 복명할 때 전함 만드는 역졸들이 피부병에 걸려 몸에 벌레가 생겨 고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임금은 얼굴빛을 바꾸며 화난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진시황이나 수양제 같은 폭군이란 말이냐?" 노한은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하였다. "신이 염찰사의 명을 수행한 이래로 오직 백성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하여 왔는데 삼도 해변의 역졸들이 겪는 고통은 더없이 비참하므로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 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웃으며 그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했다. 그후 벼슬이 이조 판서에 올랐다. 태종 9년(1409)에 동서 민무구의 옥사가 일어나서 양주로 낙향하였다가 14년 후인 세종 4년 부인 민씨가 입궐하여 사례 인사를 올리자 임금이 말했다. "그것은 나의 은혜가 아니고 선왕 태종 임금의 은혜이다" 시호는 공숙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무죄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결한 슬기로운 신개 신개(1374-1146)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자격, 호는 인재이다. 어릴 적에는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하여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모두들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시끄럽게 변명하였는데 신개만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의 키와 벽 높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낙서한 벽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한 자나 높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무죄를 슬기롭게 말없이 증명한 것이다. 이것을 본 외갓집 원씨는 기특하게 여기면서 뒷날 신씨 문중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희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굶어 죽은 왕자 광평대군 광평대군(1425-1444)은 어릴 적에 관상을 보았는데 굶어 죽을 팔자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세종 임금은 내 아들이 어떻게 굶어 죽을 수가 있느냐며 적전(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을 많이 하사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광평대군은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려 그 길로 음식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육신보다 격이 더 높은 사람 최덕지 최적지(1384-1455)의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가 당나라 청하로부터 뱃길로 와서 전주에 살게 된 것이다. 지금 전주를 객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최담은 문과에 합격하여 참의를 지냈으며, 광지, 직지, 득지, 덕지 사형제를 낳았다. 덕지의 호는 연촌우수이고 권양촌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태종 5년(1405)에 생원시, 문과시를 거쳐 직제학을 지내고 남원부사로서 영암 영보촌에 눌러앉아 누각에 존양루라는 편액을 달고 살았다. 문종 원년에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 겨울에 나이 때문에 사직하였는데, 집현전의 학사들이 그를 위해 한강가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전송하였다. 이때 그를 흠모하여 부른 송가가 40여 편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리를 온전히 했으니 공은 곧 나의 스승일세 당시에 국가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참혹한 화를 많이 당하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김시습은 오늘의 백이요, 육신은 오늘의 방련이요, 연촌우수는 육신에 비해서 더 높은 자다"라고 하였다. 향년 72세이고, 시호는 문숙이다. 하늘의 조화를 부른 절개를 지킨 정본 정본(?-1454)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자외, 호는 애일당이다. 태종 16년(1416)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2년(1452) 좌찬성에 올랐으며 곧 우의정에 올랐다. 계유년(1453)에 황보인 등이 죽음을 당하자 정본은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곧 변방 지역에 안치되었다. 정본이 전경체찰사(지방에 병난이 났을 때 왕을 대신하여 평정의 임무를 띤 임시 벼슬)로서 영남으로 가는 길에 용안역에 닿았는데 거기서 자기를 잡으로 온 관원을 만났다. 정본은 즉시 말에서 내려 인사하였다. "길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역관사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관원이 말하였다. "귀양지까지 갑시다" 정본은 다시 재배하고 나서 물었다. "그러면 나를 살려주는 것입니까?" "..." 그때부터 같은 길을 가면서 열흘 동안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관원은 옛날에 함께 있던 동료였다. "정본과 허눌은 안평대군 용의 당 조극관과 모의하여 병권을 장악하였으니 그 죄가 황보인에 못지 않다. 마땅히 같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헌납 김계우가 이렇게 주장하였으나 그대로 되지 않고 단종 2년(1454)에 사사되었다. 정본이 귀양소에 있을 때 늘 선대의 사판을 모시고 있었는데, 하루는 따라온 승려를 시켜서 밥을 짓게 하고 제사한 뒤에 그 사판을 태웠다. 그리고 곧 사약을 받게 되었다. 죽음에 임해 아내가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슬피 울자 정본이 아내에게 말했다. "조정의 명령이라 거역할 수 없소. 나 죽은 뒤의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그는 또 사약을 마시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한탄하였다. "나에겐 두 마음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죽자 갑자기 소나기가 몰아쳤고 하늘에 흰 무지개가 섰다. 그의 아내 변씨는 정본의 오촌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신'자 대신 '거'자를 써서 세조에게 항거한 박팽년 박팽년(1417-1456)의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다. 세종 16년(1434)에 문과시, 29년에 중시(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 각각 합격하였다. 을해년에 단종이 선위하니 박팽년이 경회루 연못에 빠져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를 본 성삼문이 제지하며 말하였다. "우리 상황(단종)을 위하여 뒷날을 기약하자. 만약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 박팽년은 그의 말에 따랐다. 드디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 등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였다. 박팽년은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세조 2년 (1456)에 형조 참판이 되었다. 모의가 발각되어 국문 받을 적에 박팽년은 당당하게 말했다. "성승, 유응부, 박청이 운검이 되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때 장소가 좁아서 운검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성공하지 못하고 뒷날 임금이 권농하러 가는 길에 일을 꾀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은근히 달랬다. "네가 만약 나에게 돌아온다면 살려주겠다" "..." 박팽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신이라고 일컫지도 않았다. 세조가 노여워하며 말했다. "너는 이미 나에게 신이라고 칭하였는데 이제 와서 신이라고 청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나는 상왕의 신하입니다. 전에 제가 관찰사로 있었을 적에 올린 편지에도 신이라고 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편지를 가져와서 확인해 보니 모두 신자가 아닌 거자였다. 금부도사인 김명중이 박팽년을 달랬다. "공은 어찌하여 이런 화를 자초하는가?" 팽년은 한숨지으며 말했다.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부득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네" 팽년은 죽음을 앞두고 그의 아버지 박중림에게 울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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