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쁜 기운은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차마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염려할 것이 없으니 이해를 하신다면 다행이겠소" 고옥이 옷깃을 여민 뒤 작별하자, 주인이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하였다. 꿈에 과거 시험 문제를 미리 본 임백령 임백령(?-1546)의 본관은 선산이고, 자는 인순이다. 그의 어머니 박씨는 성품이 엄하고 의젓하였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임백령이 셋째이다. 형 임억령과 함께 눌재 박상에게 글을 배웠다. 박상이 임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면서 말했다. "너는 틀림없이 문장이 될 것이다" 임백령에게는 '논어'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각(홍문관과 예문관)을 맡을 만한 문장이 되기에 충분하다" 중종 11년(151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명종 즉위년에 충순당에서 모의하여 대윤 일파를 제거한 공신으로 기록되어 숭선부원군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선조 때에는 을사사화의 당인이라 하여 공신록과 관원 명부에서 추삭(죽은 뒤에 삭제됨) 되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과거 공부만 하고 경학은 익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알려주었다. "이름을 괴마라고 고치는 게 좋을 것이며, 또 강독할 때에 경서는 어느 장에서 출제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그 일을 낱낱이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즉시 촛불을 밝히고 일어나 노인이 가르쳐준 그 장을 뽑아 내어 따로 책자를 만들어 읽고 익혔다. 그리고 이름을 괴마로 고치려 하였지만 별다른 뜻이 없음을 싫어하여 별호로 삼았다. 그러다가 과거에 응시하여 강독하러 들어가서 문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을 하였더니, 시험관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수험생은 괴마가 틀림없다. 내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이가 말하기를, '이번 과거 시험의 수험생 가운데 괴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는데 틀림없이 한 세대의 걸출한 인물이 될 것이오. 그리고 또 경학의 정밀함이 뛰어나 그와 유가 될 사람이 없을 것이오' 하였기에, 그 때문에 물어 보는 것이라오" 임백령이 절을 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호를 괴마로 하였다고 대답하니, 여러 시험관이 모두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출세함에 이르러서는 행동하는 바가 그와 같았으니 여기에서 소인이 태어나는 것도 역시 시기와 운명에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개탄한 이해 이해(1496-1550)의 본관은 진보이고, 자는 경명, 호는 온계이다. 중종 20년(152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글씨를 잘 썼다. 대사헌이 되어서는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젊어서는 김안로와 이웃에 살았고 또 인척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김안로가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 그를 도와주는 뜻에서 등용하려 하였지만 이해는 끝까지 그 농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구수담과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기는 하였으나 서로 오간 적이 없었는데 구수담이 대사간이 되어 이해를 탄핵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해 여름에 대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구수담을 논박하여 죽게 하였다. 이무강이 이해와 같이 사국(예문관, 춘추관의 별칭)에 근무했는데 지나는 길에 자기 집에 들러 달라고 요청했으나 여러 차례 그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이무강이 이해를 중상하여 이기에게는 환심을 사고 자신의 분함을 풀려고 그가 구수담과 한 패거리가 되었다고 무고하여 옥사가 더욱 급박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허위로 자백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이해를 꾀었다. "허위로 자백하여 구차하게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 이해가 탄식하며 스스로 상소문을 초하여 올리려고 하니 취조관이 이기를 두려워하여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장형을 받고 갑산에 유배되었는데 유배 도중 양주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55세였다. 퇴계 이황이 그의 동생이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한 이황 이황(1501-1570)은 이해의 동생이고, 자는 경호, 호는 퇴계이다. 12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이우가 늘 그를 칭찬하였다. "집안의 명성을 유지시킬 자는 이 아이이다" 중종 23년(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원년에 대제학 박순이 아뢰었다. "신이 대제학이 되고 이 아무개가 제학이 되었는데, 나이가 많은 큰 선비에게 도리어 작은 임무를 맡게 하고 신진 초학의 선비에게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게 하는 것은 조정의 인재 기용이 이보다 더 전도될 수 없습니다. 교체시켜 임명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 박순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이황과 박순의 관직을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이황이 대제학이 되어 '성학십도'를 올리고 선조 3년에 죽으니, 나이 70세였다.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으로 경계하였으며,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 쓰게 하였다. 이황은 항상 도연명의 시를 애송하며 그의 사람 됨됨이를 사모하며 야당시를 읊었다. 이슬 젖은 고운 풀이 물가에 둘렸는데 연못의 활수는 모래 없이 깨끗하네 구름 날고 새 지나니 원래 서로 얽매어라 때때로 물결 차는 제비가 두렵다네 이황이 예조 판서의 임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니, 이이가 찾아 뵙고 말하였다. "어린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으니 분수와 의리를 헤아려 보면 물러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도리로 보면 물러날 수 없다고 하겠지만 내 몸을 볼 것 같으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성혼이 참봉에 임명되었는데도 나오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성혼은 왜 나오지 않소?" 이이가 대답했다. "성혼은 병이 많아 감히 벼슬에 종사할 수 없을 것이오. 만약 그더러 억지로 벼슬하라고 하면 이는 그를 괴롭히는 것이오"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숙헌(이율곡의 자)이 어찌 성혼은 후하게 대접하면서 나에게는 그리 박하게 대접하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선생과 같다면야 일신의 사사로운 계책을 염려해 줄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혼을 말단의 벼슬에 나아가게 한들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생께서 높은 벼슬에 계신다면 국가에 보탬이 매우 클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신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황이 답하였다. "벼슬은 진실로 남을 위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약 이로움이 남에게 미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병통이 절실하게 되면 할 수 없는 것이오" 이황이 서울에 임시로 살 때에 이웃집에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는데 그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밤이 달리고 영글어 뜰에 떨어지자 선생이 혹시 아이들이 그 밤을 주워 먹을까 싶어 주워서 담장 너머로 던져 버렸다. 그의 청렴결백함이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임금이 부르는 명을 내렸지만 진출과 은퇴를 의리로 하였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도덕이 순수하게 갖추어졌으며, 주자를 높이고 믿어 학문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체득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과 도산서당에서 유고를 강론하여 성취한 이가 많았고, 동방학자들의 학설을 모으고 크게 완성하여 우뚝한 이학의 마루가 되었다.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임진왜란을 미리 안 이이 이이(1536-158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숙헌, 호는 율곡이다. 이이는 강릉부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꿈에 검은 용이 방에 들어와 아이를 품안에 껴안는 꿈을 꾸었으므로 어릴 때의 자는 견룡이라 하였다. 이이는 말을 배우면서 곧 글자를 알았으며, 그가 죽을 때에는 집안 사람의 꿈에 황룡이 그의 침실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명종 19년(1564)에는 생원시와 문과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호조 판서, 대제학, 병조 판서를 지냈다. 영특하고 총명하며 온화하고 낙천적이었다. 다섯 살 때에 그의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졌네" 즉시 이렇게 대답할 정도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총명이 있었다. 이이는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16세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상을 당하였다. 1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불교에 깊이 빠져 스스로 이름을 의암이라고 하였는데, 산속에서는 덕행이 높은 중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떠들썩하였다. 이듬해가 되자 다시 불교의 그릇됨을 깨닫고 즉시 절에서 내려와 성리학 연구에 전심하였다. 사계 김장생이 한번은 이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께서 금강산에 계실 적에 머리를 깎고 모습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이이가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미 속세를 떠나 중이 되었으니 아무리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불교에 빠져 버렸는데야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 그가 일찍이 경연에서 아뢰었다. "미리 군사 10만을 양성하여 돌발 사태에 대비하여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흙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는데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바로 화를 양성하는 것이 됩니다" 서애 유성룡이 군사 양성을 반대하였다. 당시 오래도록 태평을 누려온 터여서 경연에 참여했던 중신들 모두가 이이의 말을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가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했다. "국가의 형세가 달걀을 포개 놓은 듯 위태로운데 속된 선비들은 시대적 급선무를 모르니 그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마저 이런 말을 하는가? 지금 미리 양성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일세"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서애 유성룡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시에는 나도 소요를 우려하여 군사를 양성하자는 주장을 그르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선조 17년 정월에 서울에 살고 있는 선비 아무개가 마침 무슨 일 때문에 강릉 지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야윈 말 한 필과 종 한 명을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에 이르러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는데 날은 저물고 주막은 멀어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한 나무꾼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그 나무꾼이 건너편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넘으면 집이 한 채 있을 것이오" 선비가 그 산등성이를 넘어서 보니 정말 몇 칸 되는 초가 한 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촌락은 없으므로 곧장 그 집을 향해 가서 사립문을 두드렸더니 조금 있다가 동자가 나와서 물었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 손님께서는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선비가 그 연유를 죄다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동자가 안으로 들어간 지 반 시간쯤 지난 뒤에야 다시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주인을 보니 나이는 60세 남짓 되어 보이는데 해진 털모자를 쓰고 청려장을 짚고서 억지로 일어나 손님을 맞으며 인사하였다. "오늘밤에 마침 경영하는 일이 있어 정말 손님을 맞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깊은 산골에 날이 저물었는데 하룻밤 묵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이 아니겠기에 하룻밤 묵도록 하였습니다만 불편한 것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대로 조용히 앉아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데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므로, 선비 또한 한쪽 구석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밥상을 올리는데 그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심부름하는 동자에게 명했다. "벌써 해가 지고 어스레한데도 아직 오지 않으니 너무나 이상스러운 일이다. 네가 문 밖에 나가 내다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심부름하는 동자가 주인의 명대로 문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고하였다. "방금 앞 내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 선비에게 말했다. "반드시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고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시골 서생이었고 한 사람은 늙은 중이었다. 서로 안부를 물은 뒤에 다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심부름하는 동자에게 명하여 정화수 한 그릇을 길어다 소반 위에 올려놓고 향로에다 향을 피우고는 세 사람이 함께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한참 동안 주문을 외다가 주인 늙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자를 불렀다. "네가 문 밖에 나가서 우러러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아라" 조금 지나자 동자가 들어와 고하였다. "별 하나가 금방 동쪽에서부터 떨어졌는데 그 광선이 땅에 비추어 환하였습니다" 세 사람이 갑자기 서로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모두가 하늘에서 타고난 운명이니 어찌하겠소" 두 사람 모두 처참한 얼굴로 나가 떠나가 버렸다. 그러자 선비가 의심스럽고 이상함을 견디지 못하여 물었다. "여러분이 탄식한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숙헌이 장차 죽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 두 사람과 약속하고, 경문을 외우며 재앙을 물리치도록 기도하여 그의 목숨을 조금이 라도 연장시키려고 하였는데, 큰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끝내 효과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에 별이 떨어졌으니 벌써 구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숙헌이 누구입니까?" "이율곡입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에 이 아무개가 바야흐로 병조 판서의 직임을 맡아 조금도 질병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말이오?" "앞으로 7, 8년 있으면 왜병이 크게 침입할 터인데, 숙헌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거의 난리를 미리 막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끝장이 났습니다. 온 나라가 허둥대며 모두 참살 당할 것이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소?" "국가의 운명이 이와 같다면 나와 같이 가난한 선비는 어떻게 하여야 보존할 수 있겠소?" "충청도의 당진과 면천 사이로 향할 것 같으면 거의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비가 또 물었다. "두 분의 손님은 누구입니까?" "선비의 의관을 갖춘 분은 성명을 드러낼 수 없고, 중의 옷을 입은 이는 바로 금단대사이니, 그대가 산을 떠난 뒤에 행여라도 소문을 퍼뜨리지 말도록 하시오" 그 뒤에 선비가 서울로 돌아와서 물어 보니 율곡이 정말 아무 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세 사람이 별에게 기도하던 밤이었다. 선생이 젊을 때에 꿈에 어느 관부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관리가 장부를 점검 열람하고 있으므로 무슨 장부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명의 길고 짧음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다" 하면서, 한 글귀를 베껴서 주었다. 용이 새벽 골짜기로 돌아가니 구름 아직도 젖어 있고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풀이 저절로 향기롭네 그것은 대체로 그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마치 용이 깊은 골짜기로 돌아가는 듯하며, 사향노루가 산을 지나가는 듯하여 머무는 곳마다 명성을 드날린다는 것이었는데 춘추가 겨우 49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해주의 사람들이 매번 기일이 되면 자기 어버이의 기일을 받드는 것처럼 하여 부녀자에게 이르기까지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그날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는 옛날 성현에게도 없었던 일이다. 묘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던 허엽 허엽(1517-1580)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태휘, 호는 초당이다. 중종 35년(154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을 지냈다. 광해군 15년에 아들 허균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잡혀 죽음을 당하자, 그 화가 죽은 허엽의 시체를 톱으로 자르는 데 이르렀다. 그 뒤에 사간 심대부가 그 산을 지나다가 울음소리를 듣고 이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허엽의 무덤에서 시체가 톱으로 잘리는 화를 당한 뒤에 밤마다 울음 소리가 들립니다" 심대부가 그 이야기를 듣고 돌 위에다 시를 썼다. 못난 자식 두기보다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으니 빈 산 속에 백골이 쓸쓸하구려 밝은 영혼이여 밤에 울지를 마소 순장 때 쓰는 기물 역시 인간이 만들었다오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된 민제인 민제인(1493-1549)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회중, 호는 입암이다. 중종 15년(1520)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젊어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백마강부'를 지어 자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선배에게 품평을 구하였는데 선배가 차중(네 등급 중의 둘째)으로 등급을 매기자 만족하지 않은 표정으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어서 꽃과 버들이 도성에 가득하므로 남쪽 성곽을 산보하다가 남대문 위에 올라가 자기가 지은 '백마강부'를 낭랑하게 읊으니 그 소리가 남대문의 다락과 들보를 진동시켰다. 그때 마침 장안의 이름난 기생인 성산월이 장차 남대문을 나가 어느 재상이 강가에서 베푸는 잔치에 가려고 하다가 민제인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다락에 올라가서 보니 어느 젊은 유생이 두건을 벗고 이마를 내놓은 채 글을 외고 있으므로 다 듣고 난 뒤에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떤 서생이기에 가사가 그리도 맑고 그리도 낭랑하시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마음에 항상 좋게 여겼다가 선배에게 욕을 당하였기에 큰 소리로 외어 본 것이오" "서생은 함께 이야기할 만하니 저와 함께 누추한 저의 집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그와 함께 집으로 가서 3일 동안 머문 뒤 청하였다. "엊그제 외던 백마강부를 한 본 나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민제인이 써서 주었더니 성산월이 그 부를 사인의 연회 자리에서 펼쳐 놓았더니 자리를 가득 메운 고관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감탄하며 칭찬하고, 어디서 이런 절창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성산월이 대답하였다. "이는 첩이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이로부터 백마강부가 동방에 크게 전파되었다. 백마강부의 끝에 가사가 없었는데 어떤 문사가 가사를 지어 붙여 놓았더니, 중국의 학사가 그것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였다. "아깝다. 이 가사는 부를 지은 이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곤장 크기가 넓적다리만 하니 오늘 목숨이 다할 것이라고 한 박광우 박광우(1496-1545)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국이, 호는 혁재 또는 잠소당이라 하였다. 중종 1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박광우의 어머니 장씨가 네 아들을 기르면서 한결같이 예제를 따라 서실 세 칸을 짓고, 별도로 길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밤낮으로 형제가 함께 거처하도록 하였다. 또 한 벌의 옷과 한 개의 갓으로 손님이 오면 교대로 착용하고서 영접하고 전송하게 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막으니, 여러 아들들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교훈에 감동하여 학문과 덕행이 성취되었다. 박광우는 더욱 어린 나이로 빛나는 재주를 발휘하여 오로지 성리학 연구를 일삼았다. 정암 조광조가 맹자 어머니와 같은 가르침을 다시 보겠다고 자주 칭송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박광우가 대궐 뜰에 들어가 울부짖으니, 임금이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박광우가 상처를 입어 피가 흐르자 옷을 찢어 머리를 동여매고 의정부 행랑에 나와 앉았으니 도성 안 방리(행정 구역)의 약도(향약 회원)들이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소를 올리려고 박광우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는 자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참판 이해와 김노는 모두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썼으므로 박광우가 두 사람에게 종이를 앞에 놓고 붓을 잡게 한 다음 좌우로 글을 불러 대는데 문장이 샘물이 솟는 듯하여 이해와 김노가 미처 받아쓰지 못하였으며, 같은 시간에 지은 것이 10여 건이나 되었지만 문장 내용이 간절하였다. 그 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박광우가 사간으로서 논쟁하기를 그치지 않아 잡아다 옥에 가두었다. 그가 범죄 사실을 진술한 것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곤장 크기가 넓적다리만하니 오늘 목숨이 다할 것이다. 어진 삶을 구하다가 어진 삶을 얻었으니 또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리오" 봉산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겨우 돈의문(서대문) 밖에 나가서 죽었다. 소인들이 조정에 있으면 붕당을 만든다고 임금에게 책임을 물은 임권 임권(1486-1557)의 본관은 풍천이고, 자는 사경, 호는 정용재이다. 중종 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을사년(1545) 7월의 인종 상사에 조정 신하들 중 절반이 평상복 차림의 옥관자를 썼으나 유관과 임권만은 유독 소복을 입었었다. 그리고 인종의 위패를 별묘인 연은전에다 모시려고 할 때에, 임권이 인종은 위로 중종을 계승하고 아래로 명종에게 물려 주었으니 실제로 대통을 이은 군주인데, 별도로 연은전에서 모시게 하는 것은 남에게 붙여서 먹는 그런 임금과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혼자서 정론을 가지고 항거하며 사사로운 의논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권이 언제인가 경연에 나아가 아뢰었다. "김안로가 조정에 있게 되자 소인으로서 일정한 주관이 없는 자들이 붕당을 만들어서 못된 짓을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겠지만 전하께서도 붕당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못된 짓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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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1 - 19편 (19/20)
중종이 대답하였다. "내가 그 책임을 핑계댈 수는 없다" 임권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융성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참으로 만세 제왕의 본보기이다. 신하의 바른 말을 수용하고 과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