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장풍파랑 - 15편 (15/61)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본문 바로가기

[무협] 장풍파랑 - 15편 (15/61)

💬 0 👁 5
☰ 목록
책갈피와 음성 읽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핫하하!" "잡아라!" 수풀 속을 우르르 뛰어나오는 백색(白色)의 거한(巨漢)들.
주간탕이 뒤집어지고 향저가 불길 속에 굴렀다. "악!" "노예상들이다! 싸워라!" 여인들의 비명, 남자들의 고함! 흥겨운 축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작을 패던 도끼로 거한들에게 달려드는 아버지가 보였다. "화우! 아남!" 어머니는 그들을 찾았다. "으악!" "악!" 거한들에게 달려들던 마을 사람들이 피를 뿌렸다.
아버지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오라비가 입에 물고 있던 홍서를 떨어뜨렸다.
그가 해쓱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오라비가 토끼보다 더 빠르게 후다닥 달아났다.
산고는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녀는 홍서를 깨작거리기만 했다. "화우! 아남!" 오라비와 그녀를 부르는 어머니의 외침은 울음이었다.
그제야 산고는 어딘 가로 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홍서를 내던지고 달아나려 할 때였다.
억센 손이 넝쿨처럼 단단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달빛을 받아 허옇게 빛나는 얼굴, 노란 눈동자! "앙! 앙! 앙!" 산고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노란 눈의 거한이 그녀를 들쳐업었다.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배였다.
그 배의 밑바닥에서 산고는 매에 쫓겨 달아날 곳을 잃은 토끼처럼 오들거렸다.
배에는 그녀 외에 십 여명의 여인들이 더 있었다.
모두 아무 말도 않았다.
배가 움직였다.
몰래 내던졌던 주먹밥을 허기에 지쳐 목구멍에 쑤셔 박을 때였다.
배 밑바닥으로 대 여섯 명의 여인들이 더 들어왔다.
모두 젊은 여자들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얼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 여자 중의 한 명이 산고에게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 보이는 얼굴은 그녀를 유난히 귀여워하던 이웃집 여자였다.
그녀가 산고의 머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남,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불에 타서...
놈들에게 끌려가느니 죽음을 택하셨어." 그녀가 말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직 실감 못할 나이였다.
그러나 여인의 눈물이 너무 뜨거워 산고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앙! 앙! 앙!" 산고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아마 소리내어 울기는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색목인(色目人)의 손에서 한인(漢人)의 손으로 산고가 넘겨진 것은 그로부터 한달 여쯤 후였다.
그녀는 그 자의 손에서 다시 남창 부호(富豪)의 손으로 넘겨졌다.
주(朱) 대인(大人)이라는 늙은이였다.
산고는 그 늙은이의 침상 시중을 들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발가벗겨 놓고 휘두르는 채찍은 정말 아팠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주 대인이라는 늙은이는 얼굴에 촘촘히 저승꽃이 피고 앉아 있는 시간 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산고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남아도는 시간은 사람을 이상한 쪽으로 모는가 보다.
그녀의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오를 때였다.
멀리서 들리는 산새 울음...
벗어나고 싶었다.
자연과 어우러져 마음껏 뛰놀던 모남족의 피! 한 번 꿈틀거리기 시작한 탈출의 욕구는 좀 체 식어 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밤중에 주 대인의 집을 나섰다.
그러나 지리도 어두웠고 물정도 어두웠다.
하인들에게 잡혀 온 그녀는 광속에 갇혀 몇 날을 두들겨 맞았다.
뼈가 부스러지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통쾌했다.
죽더라도 붙잡혀 살지는 않으리라 맹세했다.
두 번, 세 번...
살갗을 지져 낙인(烙印)을 찍고 족쇄를 매달았다.
그러나 한 번 폭발한 그녀의 야성(野性)은 숙여질 줄을 몰랐다.
그쯤 되면 죽이던가 다른 곳으로 팔아 넘기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주 대인이라는 늙은이는 그럼에도 그녀를 붙잡아 두려 했다.
어지간히 자신의 물건에 애착이 있었던 모양이다.
네 번째의 도주! 달아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산고는 이제 날개가 부르지는 줄도 모르고 새장 속을 치솟는 새였다.
네 번째 도주에서 산고는 산공을 만났다.
하인들에게 늘씬 두들겨 맞고 끌려갈 때였다. - 위무일은 그때 처음 산고를 만났다.
흑요석(黑曜石)처럼 반짝이던 눈! 장한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분노, 증오,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인가에 대한 희망으로 그녀의 눈빛은 연신 반짝이기만 했다.
위무일은 그녀의 눈빛에서 뭉클한 무엇을 느꼈다.
좌절의 끝에서 장강을 떠나올 때였다.
그래서 그녀를 구했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몇 냥의 은자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정착할 곳을 찾아 강호를 어슬렁거렸다.
산고가 떠나지 않고 그를 따랐다.
상관하지 않았다.
산고가 영남의 오지까지 그를 따라왔다.
한 마디의 말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 산고는 그와 한 침상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행로난... " 위무일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침묵이 찾아왔다.
철썩! 나룻배만 물살에 흔들렸다.
산고가 위무일의 가슴에서 일어났다.
위무일이 깊게 잠든 후였다.
산고가 뱃전에 몸을 기대며 술잔을 들었다.
그녀는 연이어 석 잔의 술을 마신 후에야 숨을 쉬었다.
그녀가 하늘을 우러렀다.
은하(銀河)는 발 디딜 틈 없이 촘촘했다.
이 끊이지 않는 불안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담청! 산공이 장풍 속에서, 잠꼬대 속에서 부르던 여자! 그 여자는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 현실로 산공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떠나면 어디로 가나?' 산고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산공은 철이 든 후, 유일하게 정을 느낀 사람이고 유일한 그녀의 하늘이었다.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산공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꿀꺽! 산고가 술을 동이째 마셨다.
그녀가 뱃전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행로난... " 인생길 어려워라.
인생길 어려워라.
갈림길도 많으니 지금 어디 계신가.
큰바람 물결쳐도 님을 만날 수 있다면 구름에 돛을 달고 곧장 창해를 건너가리.
산고는 그 노래를 부를 사람이 이제 산공이 아니라 그녀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 * * * 위무일은 집사당주, 하빈을 따라 주단(紬緞)이 깔린 석채(石寨)로 들어섰다.
수룡채! 용연향이 피어오르는 계단 위에는 두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고 그 자리에는 담청이 앉아 있었다.
그날 새벽의 소란 이후, 처음 대면하는 얼굴이었다. "수고했어요." 담청이 태사의에서 말했다.
하빈이 읍을 하고 물러났다.
위무일이 담청과 뚝 떨어진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시비 한 명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그와 담청의 앞에 놓고 황망히 물러났다. "어제 만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빈각에 돌아오시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 " "적룡당주가 보고하기를 어제 영외(營外)에서 십여 명의 무사들이 죽었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위 오라버니의 작품이겠지요?" " .... " 위무일이 실소를 흘렸다.
담청은 너무도 쉽게 그의 호칭을 불렀다.
그러나 위무일은 담청을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담청은 이제 태사의에서 그를 굽어보는 장강의 실권자다.
그리고 그가 형님으로 따르던 총채주의 부인.
하지만 태부인으로 부르기도 형수(兄嫂)라고 부르기도 내키지 않았다.
그날 새벽, 엉겁결에 반말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존어를 써야 할지 반말을 써야 할지 판단이 힘들었다. "누구라고 하던가요?" "알 것 없다!" 결국 위무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냉랭한 반말이었다. " .... " 이번에는 담청이 침묵을 지켰다.
어색함, 냉정을 찾고 보니 몇 년간의 공백(空白)은 커다란 괴리(乖離)였다.
담청은 그 괴리를 서둘러 메우어야 했다.
어색함으로 손해를 볼 자가 있다면 그녀였다. "쌍십절(雙十節)이면 우리는 항상 군산에 모여 유희(遊戱)를 즐겼죠.
하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모두 제 갈 길을 찾기에 바쁘니...
이번 쌍십절에는 제가 군산으로 모든 벗들을 부를 생각이에요.
위 오라버니의 생각은 어때요?" " .... " 위무일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쌍십절은 원래 수로연맹, 젊은이들의 축제일이었다.
백승명이 주재하던 그 축제에는 장강 열여덟 물길의 소채주들이 모두 모여 친교를 나누고 유희를 즐겼었다. "얼마나 모일지 모르지만...
아마 위 오라버니를 보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겠죠?" "만나고 싶지 않다.
분주할 뿐이야." 위무일이 끊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투가 필요 이상으로 냉랭함을 알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려 했으나 막상 튀어나오는 말은 그런 식으로 냉랭했다. "위 오라버니가 싫어 하신다니...
어쨌든 통첩은 보낼 생각이에요." 담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찻잔을 입에 댔다.
준비는 했으나 역시 말을 이어 가기가 쉽지 않았다.
담청이 다향(茶香)만을 음미하고 고개를 들었다. "호반영채가 불탄 것은 정말 애석한 일이에요.
총채와 지척인데.
총채가 조금만 더 관심을 쏟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총채주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당시의 총채는 지금 보다 더 혼란스러웠죠." '총채주? 침상을 뒹굴 때는 백(白) 랑(郞)이라 불렀겠지?' 위무일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의 생각에 실소를 흘렸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무당에 영을 내려 흉수를 찾도록 했어요.
그러나 아직도 별반 새로운 소식이 없으니...
위 오라버니께서는 흉수에 대해 짐작하는 곳이 있나요?" "없다!" "죄송해요.
아직 흉수도 찾지 못했는데 짐만 맡겨서... " 담청이 고개를 떨구었다. "만로방은 아버지의 원수다.
짐이라고 생각했다면 총채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무일은 풀 죽은 담청이 조금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총채를 이끄는 일은 너무 힘든 일이에요." 담청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무일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힘이 든다니... ' 그는 버릴 수 없는 담청의 야심을 모르지 않았다.
증오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렇게 힘이 드는데 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냐? 형님께서도 총채주 자리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셨지.
형님이 살아 계셨다면 아들에게는 절대 총채주 자리를 물려주지 않으려 하셨을 것이다." 그가 울컥 치솟는 화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담청의 안색이 변했다.
버릴 수 없는 그녀의 야심을 알면서도 그것을 들추고야 마는 위무일의 태도에 그녀는 분노했다.
그녀의 분노는 그녀가 오늘 위무일을 만나고 있는 이유를 잊을 정도였다. "힘이 들어도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죠.
위 오라버니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아니었던가요?"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후후후...
물론 나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지.
하지만 나는 사귀던 사람과 절연(絶緣)까지 하면서 그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위무일이 독설(毒舌)을 멈추지 않았다. " .... " 담청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찰라간에 칼날 같이 곤두선 마음들이 서로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파고 있었다.
상처를 더 받은 쪽은 아무래도 담청인 모양이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의 눈에 그렁한 물기가 담겼다. '더러운 계집!' 위무일은 담청을 외면했다.
그러나 게운치 않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야심이 그녀의 천성이라면 그것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위무일 또한 들끓는 피로 한동안 고생을 한 터였다. '주워다 주는 밥이나 처먹고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 만족하는 여자보다 야심을 가진 여자가 낫기는 낫지.' 위무일은 그런 식으로 담청을 이해하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분노를 잠재우려 했다.
침묵이 흘렀다.
담청은 눈물을 떨구는 모양이었다.
찻잔이 식을 때쯤 되어서야 비로소 담청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때는... " 그녀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말투란 참 묘한 것이다.
울먹이며 내던진 담청의 말은 위무일의 가슴을 찡하게 울렸다.
여진(餘震)으로 남은 분노도 어느 순간, 그 분노의 크기만큼 담청에 대한 측은한 마음으로 변해 있었다.
조변석개(朝變夕改)! 위무일은 모를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그의 마음이 얼마나 뒤바뀌고 있는 가를...
위무일이 처음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 "익이 보이지 않더구나." "무산 어디쯤 있을 거예요." "일이 있느냐?" "모르겠어요." 담청이 눈물을 닦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위무일은 더 이상 담익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실 없는 것이 편했다.
담익에 대해 소원(疎遠)한 마음은 삼 년 전과 그대로였다.
따지고 보면 담청과 헤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담익이었다. "백부(伯父)님은?" "근자에 총채에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요."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느냐?" 위무일이 묻고 있는 사람은 추운객이었다. "그분은 원래 떠도는 구름 같은 분이니...
오라버니에게 물어 보면 아실 지 모르죠." "알았다." 위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千) 공자(公子)에 대한 소식은 들었나요?" "화인을 말함이냐?" "그래요." "청성산에 있겠지." "아니에요.
천 공자님은 이미 하산을 했어요.
근자에 통천하를 통합했다고 하던데... " "통천하?" "양웅이라는 자가 채주였죠.
그 자의 무위는 대소강의 채주들도 두려워할 정도인데 천 공자께서 한 팔의 힘으로 그를 꺾었다고 합니다." "대단하군." 위무일이 쓴웃음을 흘렸다.
곽원 양웅은 그도 알고 있는 자였다.
강호 도상(途上)에서 만난 자로 대식국인들의 손에서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긴팔, 어수룩하지만 호쾌한 태도, 위무일은 호감이 가는 자로 양웅을 기억했다. "이번 쌍십절의 군산 유희에 천 공자님도 부를 생각이에요." " .... " 위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인! 유난히도 호승지심(好勝之心)이 강했던 친구...
위무일이 장강에서 유일하게 칼로 경쟁심을 느꼈던 친구이기도 했다. "오라버니... " 담청이 위무일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호칭도 예전처럼 '오라버니'가 전부였다.
정신없이 수로연맹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동안 서로간의 어색함은 이미 허물어지고 없었다. "주 전주가 호반영채를 재건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어요?" " .... " 위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호반영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호반영채는 젊은 날의 그의 족쇄였다.
담청도 위무일이 호반영채에서 느낀 좌절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좋아진 위무일의 기분이 호반영채에 대한 이야기로 흐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알았어요.
없던 일로 하겠어요." 그녀가 호반영채에 대한 이야기를 서둘러 매듭지었다. "무턱대고 좌충우돌 할 수는 없겠지.
하빈처럼 다른 자들도 나를 외인으로 내몰면 곤란할 테니.
당분간은 호반영채의 이름을 떼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호반영채를 다시 세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주 전주가 호반영채를 세우기를 꼭 원한다면 사당(祠堂)을 세워 주도록 부탁해라.
아버님, 어머님, 영채 동도들의 넋이 편히 쉴 수 있도록... " 위무일이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담청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정도면 주 전주는 물론 그녀도 만족할 대답이었다. "삼 년 동안 어디에 계셨나요?" 위무일에게 과거를 묻는 것은 금기(禁忌)다.
그의 상처를 건드릴 위험을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청은 물었다.
위무일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재 그의 행적이 궁금하기도 했다. "영남! 장풍이 쉴새 없이 불던 바닷가였지." 위무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산고라는 여자는 그곳의 여자인가요?" 위무일이 고개를 저었다.
담청이 위무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에 입고 계신 옷을 그대로 입고 계시군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느냐?" "새벽까지 기다렸죠." " .... " 툭! 툭! 위무일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쳤다. "그 옷은 이제 벗으세요.
핏자국으로 너무 너저분해요." 담청의 말에 위무일이 자신의 단삼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그의 옷에는 핏자국이 덕지덕지 했다.
묵회와의 일전에서 새긴 핏자국이었다.
그는 그 옷을 입고 총채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옷에 묻은 혈흔에 대해 묻는 사람이 없었다.
마타룡의 옷에 새겨지는 무늬는 당연히 혈흔이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사자인 그도 혈흔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터...
위무일이 씁쓸하게 웃었다.
담청이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면포에 싸인 물건과 함을 들고 위무일에게 다가섰다.
그녀가 먼저 면포를 풀었다.
면포 속에 든 물건은 옷이었다.
화려한 금의! 담청이 탁자에 옷을 ㅊ 펼쳤다.
그녀가 위무일의 단삼을 벗겼다.
코끝에 일렁이는 담청의 체향은 여전히 향기로웠다.
위무일은 묵묵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단삼이 벗겨지고 금의가 걸쳐졌다. "이것은 어때요?" 담청이 함을 열었다.
함 속에 든 물건은 은제(銀製) 비구와 옥대(玉帶)였다.
그녀는 비구와 옥대는 차마 자신의 손으로 채워 줄 수 없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비구와 옥대가 든 함을 위무일에게 내밀었다.
위무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섭섭해하지 마라.
원래 내가 이런 옷들을 좋아하지 않음은 너도 잘 알 것이다." 그가 금의를 벗고 단삼을 찾았다. "그냥 입으세요." 담청이 위무일의 손을 잡았다.
위무일이 미간을 좁혔다.
이런 간지러운 장난을 즐길 나이는 이제 아니었다.
담청이 위무일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는 금의를 입을 자격이 있어요." 위무일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담청의 입술은 붉고 촉촉했다. "이제 장강에는 오라버니를 거스를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누구도... " 담청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은 석양에 반짝이고 위무일은 한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금린어(錦鱗魚)! 여전히 담청에게 어울리는 별호라 생각했다.
산고의 눈은 수룡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 번 들어간 자는 쉽게 나올 생각을 않았다.
불안이 분노로 변해 가는 시간들이었다.
쓱! 쓱! 엽광은 칼을 갈고 있었다.
칼날은 스치는 것으로 창궁을 가를 듯 날카로웠다.
그가 숫돌에서 칼을 들었다. "소영주의 시중을 든 적이 있느냐?" 엽광이 칼날을 눈에 맞추며 무심하게 물었다. " .... " 산고의 관심은 오로지 수룡채였다. "소영주와 자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엽광이 칼의 물기를 닦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산고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엽광을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물론 시중을 당연히 들었겠지." 엽광이 칼날을 석양에 비춰 보며 중얼거렸다.
산고의 시선이 휙 수룡채로 향했다. "얼마 동안 네년을 지켜보았다.
소영주에게 관심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꿈은 꾸지 마라." 파-팟! 엽광이 손목으로 칼을 놀리며 말했다.
수룡채를 바라보고 있는 산고의 몸이 경직됐다. "소영주께서는 장강을 호령하실 분이다.
남만족 출신의 비천한 네년에게는 첩의 자리도 어울리지 않아.
행여 헛된 꿈으로 상처를 입을까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스-릉! 엽광이 칼을 꽂았다.
산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엽광을 마주보며 섰다.
야수(野獸)처럼 번들거리는 눈! 그녀의 눈빛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팟! 대나무를 빠져 나온 산고의 협도가 엽광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찍어 갔다. "헉!" 엽광이 헛신음을 토하며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챙! 대리석으로 깔아 놓은 바닥에 불꽃이 튀었다.
산고는 한 번의 출수로 분노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원을 들어서며 쌓여 온 분노와 불안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었다.
파파팟! 산고의 날카로운 칼질은 엽광에게 칼을 뽑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엽광은 체면도 잊은 채 방바닥을 굴러야 했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산고의 협도는 그가 전혀 견식해 본 바가 없는 초식이었다.
칼의 흐름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기묘한 수법, 아슬하게 스쳐 가는 칼날에 엽광은 머리칼이 곤두섰다.
만약 산고의 팔에 완력만 더 붙었다면 이미 자신의 목은 방바닥을 구르고 있을 것이다.
쾅! 궤안이 협도에 반으로 갈라지자 비로소 산고는 알아챘다.
그녀가 죽이려는 자가 누구인지...
엽광, 산고의 수하였다.
산고의 협도가 주춤거렸다.
엽광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무영각(無影脚)으로 산고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퍽! 산고의 하체는 생각보다 강했다.
비틀거리며 물러날 뿐 쓰러지지는 않았다.
엽광이 방바닥을 구르며 산고에게 달라붙었다. "비천한 계집!" 그가 노호를 터뜨리며 무영각을 연이어 날렸다.
퍼퍽! 산고는 이번에는 엽광의 각력(脚力)을 견디지 못했다.
그녀가 방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쓰러졌다.
엽광이 비호처럼 달려들며 협도를 쥔 그녀의 손을 밟았다.
산고는 손가락이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협도를 놓지 않았다.
엽광이 산고의 배에 걸쳐 앉으며 뺨부터 후려쳤다.
산고의 눈빛이 다시 독기로 불타올랐다. "네년의 처지를 잊지 마라!" 짝! 엽광이 산고의 뺨을 다시 후려쳤다.
찌직! 그가 느닷없이 산고의 가슴을 열었다.
팽팽하게 치솟은 산고의 젖가슴이 엽광의 눈을 찔렀다. "네년이 남만족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HTML/스크립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은 최대 120자이며 페이지를 이동하지 않고 바로 등록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Copyright © webstoryboard.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