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서너 명의 목숨 정도는 줄 테니 네놈도 팔 하나쯤은 내놓아라는 기세였다. 때는 산을 허물어뜨리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고 머릿수가 승부의 관건으로 논해지는 시대... 아무리 위무일이라 하나 진형을 갖춘 채 펼치는 탕백기의 합격을 쉽게 와해시키지는 못했다. "크악!" 그는 탕백기 수하의 팔 하나를 잘라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열을 공격하는 엽광과 두 당주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전열은 유건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음으로 오히려 밀리는 형국이었다. 파라락! 위무일이 귀두로를 허공에 멋들어지게 몇 번 휘둘렀다. 그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칼에 힘을 실었다. "으핫!" 위무일이 최초로 창룡음(蒼龍吟)을 터뜨렸다. 쐐액! 파양호의 갈대가 우수수 흔들릴 정도의 검파(劍波)가 탕백기를 향해 몰려갔다. 챙! 챙! 챙! 챙! 챙! 귀를 찢어지게 하는 굉음이 뇌성처럼 들려 왔다. 부러진 창칼이 발 밑에 쌓이며 순간적으로 철벽을 자랑하던 탕백기의 대형에 균열이 생기려 했다. "유건! 계집을 노려라! 마타룡은 내가 맡겠다!" 탕백기주 여맹이 뭍으로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크악!" "칵!" 후미에서 들려 오는 수하들의 비명... 유건도 전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자는 아닌지라 마침 전진을 명하려던 참이었다. "앞으로! 계집을 노려라!" 유건이 엽광을 향해 칼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와! 와!" 탕백기의 수하들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다. 위무일의 배후 공격에 더해 탕백기의 움직임은 비호처럼 빨랐다. 조신환과 염정이 뛰쳐나가는 탕백기 수하들을 막으려 했으나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들도 담청을 보호하기 위해 탕백기를 따라 뛰었다. "젠장! 네놈이 겁이 나서 피하는 것은 아니다!" 엽광이 살초로 유건을 떨친 후, 두 당주를 따랐다. "남기지 말고 죽여라!" 유건이 엽광을 추적하며 전진하는 수하들을 독려했다. 탕백기의 불시 습격으로 조신환 등은 대열을 갖출 수 없었다. 대형을 못 갖추기는 탕백기도 마찬가지였다. 챙! 챙! 챙! 싸움은 다시 난장으로 얽혔다. 여맹이 물을 차고 올랐다. 그는 수족으로 부리는 몇 명의 수하만 남기고 나머지 수하들은 유건을 돕게 했다. "마타룡! 어디 있느냐?" 그가 위무일을 찾았다. 순간, 날카로운 도기(刀氣)가 그의 옆구리를 찔러 왔다. 찍! 황망히 피했으나 여맹의 허리는 옷과 함께 찢어져 가는 혈흔을 보였다. "마타룡... " 여맹이 해쓱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의 옆구리는 삐죽한 내장을 보였을 것이다. "쳐라!" 그가 수하들에게 고함을 쳤다. 그 역시 마타룡에 대해 누누히 듣고 있었으므로 위무일을 단신으로 상대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여맹이 수하들과 함께 반원형으로 위무일을 둘러싸며 그를 공격했다. 팟! 위무일이 사선(斜線)으로 좌측의 적을 치며 회수하던 귀두도로 돌연 여맹의 목을 노렸다. "크악!" 좌측 수하의 목에서 묻은 피가 여맹의 장포에 휙 뿌려졌다. 여맹은 감히 합을 겨룰 생각을 않고 뒷걸음질을 쳤다. 위무일이 여맹을 그대로 둔 채 신형을 날렸다. "아악!" "으악!"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난전! 급한 쪽은 탕백기에 겹겹이 둘러싸인 담청 등이었다. 위무일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쫓아라!" 여맹이 위무일을 뒤쫓았다. 둥! 둥! 둥! 둥! 쾌선에서 들려 오는 급박한 북소리. "대열을 갖춰라!" 창백한 표정으로 서 있던 여맹이 고함을 질렀다. 챙! 챙! 챙! 싸움은 갈대 숲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싸움을 벌이던 탕백기 소속의 무사들이 여맹의 곁으로 우르르 후퇴했다. 그들이 빠른 속도로 대형을 갖추어 갔다. 대형이 갖추어지자 여맹은 수하들을 물가로 후퇴시켰다. 죽고 부상당한 무사들은 탕백기 인원의 삼할에 이르렀다. 자신의 수하들이 그 정도 죽은 만큼 장강 총채의 무사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싹! 싹! 마타룡과 총채의 무사들이 갈대 숲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정적... 여맹은 비로소 고개를 파양호로 돌렸다. ㅊ! ㅊ! ㅊ! 손에는 연노, 허리에는 유엽비도(柳葉飛刀)를 달랑이는 무사들이 세 척의 비익선에 나눠 타고 탕백기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서문중이었다. 여맹이 위무일의 습격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서문중을 맞았다. 서문중이 이끈 수하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비익선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비익선을 끌고 쾌선으로 향했다. 쾌선에서 줄을 내려 비익선들을 엮었다. 비익선에 탄 수하들이 물 속으로 뛰어들며 뭍으로 헤엄을 치자 쾌선이 움직였다. 쾌선이 햇발을 받으며 파양호의 수심으로 사라졌다. 배수(背水)의 진을 치겠다는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마타룡이 급습으로 비익선을 뺏어 파양호로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서문중과 여맹은 그때까지도 한 마디의 말이 없었다. 쾌선과 비익선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치열한 혈전, 신룡(神龍)처럼 날뛰던 마타룡의 무위가 그들의 말문을 앗아간 것이었다. 철벅! 철벅! 비익선을 끌고 갔던 수하들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문중의 뒤에 도열했다. 그제야 서문중이 말문을 열었다. "여 기주, 수고하셨소." "총사... " 여맹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물건은 버리고 잠시 쉬도록 합시다." 서문중이 여맹의 우수를 가리켰다. 여맹의 손에는 아직도 피를 떨구는 수급이 들려 있었다. 적룡당주 염정의 목이었다. 여맹은 염정의 목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휙! 그가 실소를 흘리며 염정의 목을 갈대 숲으로 내던졌다. "추적의 명을 내려 주십시오!" 여맹이 말했다. "급하지 않소. 우선 상처나 치료합시다." 서문중이 수하에게 고약과 침구(針灸) 등이 든 의료함(醫療函)을 열도록 했다. 여맹은 자신이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여맹이 미간을 좁혔다.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그어진 상처! 상처의 깊이는 뼈를 드러낼 정도였으나 뼈와 요혈(要穴)은 비켜 가 팔을 쓰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여맹은 이내 그 부상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기억해 냈다. 불현듯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타룡이 수하들을 도륙하며 담청이라는 여자에게 접근할 때였다. 담청이라는 여자는 황급했던지 귀두도를 든 마타룡의 팔을 껴안고 늘어졌다. 여맹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마타룡의 뒤를 바짝 붙으며 칼을 휘둘렀다. 유건도 합세했다. 그와 유건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해 펼친 출수였다. 순간, 붉게 치솟던 손그림자! 챙캉! 챙캉! 수도(手刀)에 칼이 날아갔다는 것을 누가 믿을 것인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마타룡이 여인을 뿌리치며 귀두도를 휘둘렀다. 여맹은 죽을 힘을 다해 피했다. 가슴에 뜨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슴을 돌볼 틈이 없었다. 옆구리를 노리며 달려드는 세찬 경기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칼을 휘둘러 오는 자는 염정이었다. 그가 염정과 어우러지는 동안 유건이 수하들과 함께 마타룡을 공격하고 있었다. 난전! 마타룡이 유건과 함께 그의 시야에 사라졌다. 그리고 북소리가 들린 것은 그가 염정의 목을 벴을 때였다. 붉게 치솟던 손그림자! 여맹의 얼굴을 일그러뜨린 장면은 그 장면이었다. "보셨습니까?" 여맹이 서문중에게 다급히 물었다. "자세히는 보지 못했소. 하지만... " "홍운산수! 홍운산수가 맞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여맹이 눈까지 붉히며 소리쳤다. 서문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양인을 적이라 생각하고 이 천라지망을 짰다고 말했소. 그런데 조양인과 같은 자가 나타날 줄을 누가 생각했겠소?" 서문중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태양은 점차 치솟고 갈대 숲에는 바람이 일었다. 비릿한 피냄새 속에서 여맹의 상처를 치료하는 서문중의 손이 미풍(微風)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가늘게 떨렸다. "재수없이... " 엽광이 낮은 소리로 투덜대며 무엇인가를 굴렸다. 갈대 숲 사이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것은 유건의 목이었다. 휘-잉! 바람은 점점 거세 지고 구름이 몰려들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쨍쨍한 날씨였다. 그러나 호변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기어코 한 줄기 비를 뿌릴 모양이었다. 비가 와 준다면 위무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바람과 빗줄기가 갈대를 두들겨 움직임이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툭! 툭! 툭! 툭! 툭! 마침내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쏴-아! 서늘한 바람이 갈대를 물결치듯 흔들었다. 그 때, 한 여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팔에 몸을 기댔다. 담청! 그 여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할 처지임을... 탕백기주 여맹과의 일전에서 거칠게 뿌려 친 것이 상처로 남았는지 담청은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몸을 노골적으로 붙여 왔다. 팔에 느껴지는 담청의 뭉클한 감촉! 그 여자는 촉감만으로도 과거의 즐거웠던 한 때를 호소할 수 있는 여자였다. 위무일은 조심스럽게 담청에게서 팔을 뺐다. "엽 선주!" 위무일이 엽광을 불렀다. 엽광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주위를 교란시키겠소. 그 틈에 이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가시오." 위무일이 산고와 담청, 아직도 살아남은 두 명의 호반영채 수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엽광이 위험을 자처했다. "다른 자들도 움직일 틈을 주어야 하오." 종우상과 조신환, 이만, 담향 등은 혼전 중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죽지 않았다면 갈대 숲 어디에 그들처럼 몸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위무일은 그들도 배려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철기대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십니까? 좌우 갈대 숲 중 한 곳을 골라 뚫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좌우 갈대 숲에도 놈들은 방어벽(防禦壁)을 쳐 두었을 것이오. 놈들과 싸우고 철기대와 싸우느니 바로 철기대와 싸우는 것이 낫지." 위무일이 흙탕물에 뒹굴고 있는 귀두도를 들었다. 그가 갈대 숲 사이를 바람처럼 달려갔다. 서문중은 하늘을 우러렀다. 쏟아지는 빗방울! 구름은 빠른 속도로 흐르고 동쪽 하늘이 밝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내릴 비는 아니었다. 그가 다시 갈대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간, 그의 눈빛이 빛을 뿌렸다. 사삭! 싹! 갈대의 움직임이 표시나게 커지고 있었다. "움직이기 시작하는군요." 여맹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서문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 기주, 좌우 보갑대에게 명을 내려 삼십 여 보폭쯤 포위망을 좁혀라 하시오!" 그가 침울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카랑 하게 소리쳤다. 여맹이 수기(手旗)를 든 수하에게 서문중의 명을 전하고 수기를 든 수하가 깃발을 흔들었다. 좌우 갈대 숲에서 한 무리의 무사들이 일어났다. 보갑대로 편성된 방어벽이었다. 좌측을 맡고 있는 자는 보갑대주 유성이고 우측은 보갑대의 부대주, 사인남(史仁南)이 맡고 있었다. ㅊ! ㅊ! 그들이 날이 넓적한 감도( 刀)로 갈대를 우수수 자르며 전진했다. 챙! 챙! 챙! 그와 때를 같이하여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갈대 중앙에 매복해 있던 보갑대들이 갈대 숲을 전진하는 적과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크악!" "케액!"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갈대 숲은 다시 평온을 유지했다. 좌우 보갑대의 전진도 멈추어졌다. "저놈이 마타룡입니다. 왜 연주노로 공격을 하지 않으십니까?" 잠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의 갈대가 다시 갈라지고 있었다. 여맹이 가리키는 곳은 그곳이었다. "연주노로 잡을 수 있는 놈이 아닙니다." 서문중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사삭! 싹! 갈대의 움직임은 점차 커지고 다른 곳에서도 갈대가 물결치듯 갈라지고 있었다. 비명을 신호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장강 총채의 무사들이 움직임을 개시한 모양이었다. 챙! 챙! "으악!" 갈대를 사이로 산발적인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총사, 놈은 남뇌로, 적양로를 치고 철기대를 뚫을 모양입니다. 그대로 두실 작정입니까?" 위무일이 나아가는 곳은 철기대가 있는 갈대 숲의 북단이었다. 북단의 갈대 숲에는 남뇌로와 적양로가 진을 치고 있었다. "놈들은 모두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소." 그러나 정작 서문중이 화신전으로 가리킨 곳은 갈대가 움직이고 있는 곳 두 곳이었다. "적양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놈이 마타룡, 남뇌로를 향해 나아가는 놈들은 총채의 놈들이겠지.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담청이라는 계집이 숨어 있는 곳!" 서문중이 처음 위무일이 움직였던 곳을 화신전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담청이 있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여 기주, 반 수의 인원을 끌고 저곳을 공격하시오! 철기대를 제외한 다른 모든 자들에게도 저곳으로 공격을 명하겠소! 끝장을 봅시다!" 그가 화신전을 굳게 잡으며 소리쳤다. 여맹도 칼을 불끈 잡았다. 그가 수하에게 공격의 명을 전했다. 만로방의 깃발은 놀랍도록 다양해 철기대를 제외한 전 인원의 공격명이 떨어지자 빗줄기 속에 깃발이 형형색색의 무늬를 펄럭였다. "시작합시다!" 서문중이 곁에 있던 수하로부터 노를 넘겨받았다. 그가 노에 화신전을 장착하고 불을 붙였다. 핑! 화신전이 불꽃을 휘날리며 날았다. 쾅! 화신전은 담청 등이 앉아 있는 일 장여 근처에서 뻘을 퉁기며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전후 사방에서 만로방의 무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와!" "죽여라!" 탕백기, 보갑대, 적양로, 남뇌로, 만로방의 무사들이 화신전이 터진 곳을 향해 노도처럼 달려들었다. 질퍽이며 달려드는 발걸음 소리는 귀를 멍하게 할 정도였다. "엄청나게 숨어 있었군. 핫하하! 영주가 무서웠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엽광이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사태가 이 지경이니 몸을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쯔쯔... 작정을 했군." 그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갑시다!" 엽광이 담청을 일으켜 세웠다. 이 장여 거리에서 위무일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측 삼장 여 거리에서 위무일을 향해 달려오는 자는 종우상과 조신환, 이만, 담향, 화룡대의 수하 오륙 명이었다. 종우상의 어깨에 대롱거리는 것은 쇠뇌였다. 화룡대의 수하들 중 몇 명도 쇠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태부인, 우리의 사정은 이와 같고 놈들은 저렇소. 누구에게나 제 생명이 가장 중하오. 영주의 뒤를 놓치지 마시오. 이런 상황에서 남의 목숨까지 신경을 써 줄 여력을 가진 사람은 영주 뿐인 것을 태부인도 알 것이오." 엽광의 말에 담청이 입술을 깨물었다. 슥! 담청이 허리의 짤막한 비도(飛刀)를 뽑았다. 금은(金銀)으로 장신된 그 칼은 원래 태부인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차고 다니던 칼이었다. 그러나 상황의 급박함은 결국 고귀한 태부인의 신물에도 적의 더러운 피를 묻히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가세요!" 그녀가 앞장 서서 위무일을 향해 달려갔다. 쨍! 쨍! 위무일에게 합세하려던 종우상, 조신환 등은 또 한 차례 보갑대의 매복과 일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헉! 헉! 아이고!" 종우상 등이 적과 싸우는 동안 이만이 지친 표정으로 달려왔다. 담향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흥! 잘도 달아나더군!" 그녀는 위무일의 곁에 서자 마자 분노를 터뜨렸다. 아마 그녀를 내팽개친 데에 대해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위무일을 닦달할 수 없었다. 쩡! 챙캉! 후미에 선 탕백기의 무사들이 일제히 칼을 세우고 있었다. "엽 선주!" 위무일이 엽광을 불렀다. "뒤를 부탁하오. 정면으로 뚫고 나갈 것이오." 그가 칼배로 허벅지를 치며 말했다. 탕백기는 칼을 세운 채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좌우에서 밀고 들어오는 보갑대와 거리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사면의 진형도 정방형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서문중이 창칼을 세운채 긴장을 삼키고 있는 탕백기 소속의 무사들 앞에 섰다. 비는 그치고 파양호에서 무지개가 치솟았다. 서문중이 화신전을 치켜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 보았을 것이다. 놈은 예상외로 강하다. 하지만 우리는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방주께서 놈을 죽여라 명했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보갑대가 지척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만약 죽이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화신전을 쏠 것이다! 화신전이 일으키는 화마(火魔)는 피아를 가리지 않음을 너희도 알 것이다." 서문중이 그답지 않게 냉랭하게 소리쳤다. "여 기주!" 서문중이 모든 것을 여맹에게 맡긴 채 남은 수하들을 이끌고 몇 발자국 물러났다. 여맹이 견갑을 툭툭 치며 선두에 나섰다. 그는 아무 소리하지 않았다. 그저 칼을 들고 성난 들짐승처럼 위무일을 향해 질주할 뿐이었다. 수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제 11 장. 홍운행파(紅雲行波). 서문중은 수하들에게 끌려온 두 명의 남녀를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열여덟 정도의 사내와 그 나이 정도의 계집이었다. 얼굴에 흙탕물을 덕지덕지 바른 사내는 사내라고 부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로 애송이티가 풀풀했다. 마치 흙장난을 치다 끌려온 아이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계집은 달랐다. 탱탱한 몸매에 고혹적인 얼굴, 핏자국 속에 가려진 얼굴은 사내들의 정염을 불사르기에 충분했다. "아이고! 죽이려면 죽이고... 더 이상 서 있지도 못하겠다." 애송이는 털썩 주저앉았고 계집은 아미를 더욱 찌푸렸다. "누구냐?" 서문중이 물었다. "그저 그런 놈이라면 단칼에 죽일테지. 나는 한수의 소채주, 이만이고 이 여자는 상강의 식솔이오." 애송이가 소리쳤다. 끌려온 남녀는 다름 아닌 이만과 담향이었다. "저런 상황 속에서 포획을 생각하다니... " 서문중은 수하들을 칭찬하지 않았다. 그가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눈길을 던지며 미간을 좁혔다. 태양은 황도(黃道)를 따라 중천(中天)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명과 함성, 칼 부딪히는 소리... 창칼이 번뜩이며 스쳐 가는 곳에는 짓밟힌 갈대와 수급, 잘려나간 팔, 다리만이 뒹굴었다. "우리가 잡은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칼을 버리고 투항을 하더군요." 수하가 변명했다. "아버지께서 항상 말씀하셨소.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는 칼을 드는 자가 오히려 무모한 자라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겠지." 이만이 넋두리를 하듯 말했다. "아! 그리고 우리를 인질로 삼아 무일, 형님을 위협할 생각은 마시오! 마타룡의 악명은 장강에서도 당신들이 듣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소. 당연히 우리가 죽던 말던 상관을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투항이라도 할 생각을 한 것이지." 그가 쫑알댔다. 담향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위무일의 팔은 여덟 개쯤 되었다. 그러나 그 팔이 펼쳐드는 우산(雨傘) 안에는 담향, 그녀가 없었다. " ... " 서문중은 이만의 조잘거림에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눈길은 일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놈들을 어떻게 할까요?" 수하 한 명이 물었다. "묶어 두어라.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서문중이 무심하게 말했다. 수하들이 연노수의 뒤로 이만과 담향을 끌고 갔다. '마타룡... ' 서문중이 따가운 햇살에 눈을 찌푸리듯 이마를 좁혔다. 탕백기주 여맹과 보갑대주 유성은 이미 정면 공격을 포기한 상태였다. 오로지 머릿수의 우위에 매달려 차륜전(車輪戰)으로 지구전(持久戰)을 펼치고 있었다. 번뜩이는 귀두도, 붉게 치솟는 손그림자! 마타룡의 공격에 수하들은 물결치듯 흔들리며 한발 한발 강둑으로 후퇴를 거듭할 뿐이었다. '조양인! 천하제일의 고수!' 서문중이 한숨을 쉬었다. 백 여명의 탕백기, 백 이십 여명 정도의 보갑대, 다시 각기 오십 여명의 적양로, 남뇌로의 정예... 그가 거느린 삼십 여명의 연노수, 철기대 오십 여명, 북풍로, 황사로를 뺀 모든 인원이 마타룡의 포위 공격에 가세하고 있었다. 물경 삼백 여명의 인원! 이 정도의 포위망이면 조양인이라도 능히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러나 눈 앞의 현실은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지 않음을 증명했다. '천하제일고수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서문중이 탄식을 터뜨렸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힘의 한계의 지평(地平)을 새롭게 인식하는 그였다. '이것을 사용하겠다던 나의 말이 자칫하면 거짓으로 끝나지 않겠군.' 서문중이 화신전을 들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위무일과 엽광 등은 방추형(方錐形)으로 포진해 적과 싸우고 있었다. 선두는 위무일이 맡았다. 후미는 엽광, 좌우는 종우상, 조신형의 차지였다. 그 사이를 오가며 칼을 번뜩이는 자는 담청과 산고였다. 이만과 담향이 적에게 무릎을 꿇은 마당이다. 아직 살아남은 수하들이 있을 리는 없었다. 피에 뒤덮힌 조신형의 얼굴은 혈귀를 방불케 했고 종우상도 전신이 상처 투성이었다. 엽광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보갑대주 유성과 부대주 사인남이 후미를 무너뜨리기 위해 끈질기게 엽광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좌우 공격은 적양로와 남뇌로의 몫이었다. 여맹은 위무일의 공세권 밖에서 탕백기로 위무일의 진로를 차단했다. 여맹은 장창과 투삭, 겸도 등으로 위무일과의 근접전을 피하며 피해를 최소화 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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