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생각하는 것이 엉뚱한 놈이라..." 해손왕은 막내아들이 적잖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근해(近海)를 뒤지게 했는데 아직 찾지를 못했습니다. 어딘가에 있겠지요. 그건 그렇고 마타룡에게 철경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흐르기 전에 이제 회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한 때에 회수할 것이오. 지금은 아니오." "적당한 때라니요?" "마타룡은 바쁘더군. 수로연맹의 일로... 철경 때문에 바쁜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지 않소?" " .... " 유백이 얼굴을 줄줄 흐르는 빗물을 닦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입을 열었다. "양패구상을 노립니까? 그러나 마타룡이 없는 상태에서의 싸움이 수로연맹에게도 만로방에게도 더 타격이 클 텐데요. 마타룡이 있는 한 저울추는 이미 수로연맹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렇겠지." "승세가 수로연맹에 있다면 우리 해륭도는 수로연맹과 결국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타룡과 부딪히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지금 보다 마타룡을 처치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마타룡을 처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싸워서 수룡연맹을 접수한다. 그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소." 해손왕이 느릿하게 말했다. "싸우지 않고 접수할 방법이 있다니... 어떤 방법이 있기에... 도주의 생각을 도저히 나는 따라 잡을 수 없소." 유백이 한숨을 쉬었다. " .... " 해손왕은 침묵을 지켰다. 후두두두둑! 하늘에는 굵은 빗방울이 더욱 쏟아졌다. "그만 들어가십시오. 저는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해손왕이 말했다. "알겠소." 유백이 읍을 하고 등을 돌렸다. 해손왕은 바위에 석상처럼 서 가슴을 폈다. '강호를 제패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유 노야, 당신은 모르오. 천하를 제패하는 일은 바로 이런 일이지.' 그가 왼손을 천천히 들었다. 번뜩이는 의수! 강호 제패가 그에게 가져다 준 뼈저린 흔적이었다. 빗물이 의수에 투다닥 튀었다. '그럼에도 내가 강호를 제패하려 하는 이유는... ' 해손왕이 빗물에 씻기는 머리를 곱게 쓰다듬었다. 이 년! 너무도 지루한 세월이었다. 해손왕은 이제 끝을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해손왕은 빗줄기 속에서 바람으로 떠돌던 젊은 날의 노래 중 한 구절을 떠올렸다. 적적(滴滴) 창외파초(窓外芭蕉) 등하객(燈下客) 억억(憶憶) 일구침전(一句枕前) 물방울은 똑똑, 창 밖의 파초는 떨어지는데 등불 아래 외로운 나그네로다. 그립구나 그리워, 한 베개 밑의 그 때. 콰르르르르.... 파도는 천 장으로 날뛰고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 * * 삐꺽! 삐꺽! 지리한 통증이 혼몽 중인 그녀를 끝없이 괴롭혔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격렬한 통증이 찾아 들었다. 그리고 산고는 마침내 눈을 떴다. 깜깜했다. 수레바퀴가 구르는 듯한 삐꺽거리는 소리... 마차 안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팔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등의 통증만 다시 지리하게 그녀를 괴롭힐 뿐. '팔이 잘려 나갔나?'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팔을 보려고 했다. 두툼한 이불이 덮여 있어 그녀는 종내 자신의 팔이 붙어 있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발도 감각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투둑! 투둑! 투두두둑! 천장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는가?' 그녀는 전신의 힘을 빼고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어디로 가던 상관이 없었다. 팔이 붙어 있건 말건 개의할 기분도 아니었다. '해해해! 정말 산고가 되었네. 원래 내 이름은 산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산고는 히죽 웃었다. 파양호에서 그녀는 정말 귀신이 되었다. 두 번! 첫 번째는 산공이 담청이라는 여자만 달랑 데리고 적을 향해 나아갔을 때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마상에서 그녀를 내버려두고 떠났을 때... 그때, 그녀는 정말 영남의 이름 없는 귀신, 산고가 된 것이다. '히히히... ' 실없는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어디서 시비 아니면 노류장화로 구른 계집이... ' 엽광의 말도 지리한 등의 통증만큼이나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내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잠깐 동안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다. '울어 줄 사람도 하나 없네. 히히히!' 그녀가 혀를 낼름 뺐다. 이로 콱 깨물면 깨끗하게 한 평생을 지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혀를 물지 못했다.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산고의 눈에 뽀얀 수막이 어렸다.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더라?' 그녀가 시린 가슴을 부둥켜안고 기억을 더듬었다. "무일! 맞았어. 위무일... 해해해! 산공보다 훨씬 못한 이름이잖아."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삐꺽! 삐꺽! 마차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던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부지런히 갔다. '아마 돌아올 것이다. 장강명이라는 놈에게 끌려갔을 때도 왔었고 삼본장선에 잡혀갔을 때도 왔잖아.' 산고는 그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다. 그러나 위로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는 담청이라는 여자가 없었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퉁증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상처의 통증인지 마음의 통증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결국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울기도 많이 운다. 노류장화로 떠돌다 그냥 뒈져 죽으면 그만일 계집이... 히히히!" 산고는 실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추었다. "행로난... " 그녀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제 14 장. 산 귀(山 鬼). 물빛은 진초록으로 짙었다. 심우는 초록 물빛을 바라보며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봉절(奉節) 백제성(白帝城)에서 촉한의 황제 유비(劉備)의 소상(塑像) 앞에서 실없이 눈물을 뿌리지 않았더라면 다시 눈물을 뿌렸을 그였다. 심우는 울컥한 감정을 참으려 애썼다. 모름지기 군자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흠!" 그가 헛기침을 하며 기분을 전환하려 노력했다. "화영(花英),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잘 살펴보아라. 잘 살피면 진주 목걸이를 주울 것이다." 심영이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뒤에는 비파(琵琶)를 든 십오륙 세의 계집이 서 있었다. 오밀조밀한 얼굴에 동그란 눈, 막 피어나는 꽃봉우리처럼 귀여운 소녀였다. 화영이라는 계집으로 원래 노래를 파는 아이였다. 강릉(江陵)의 객잔에서 파락호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는 것을 구해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다. 풍류를 논하는 여정에 계집이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화영이라는 계집은 그에게는 딱 맞았다. 분위기를 맞춰 줄 몇 소절의 시가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잠자리가 편했다. 주루의 기녀를 상대하다 톡톡히 창피를 당한 경험이 있는 그였다. 제법 남자인 척 유세를 부리려 했으나 농염한 계집의 완숙한 기술을 일 각도 버텨 내기 힘들었다. 그 이후로 기녀들만 보면 왠지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갓 남자를 알기 시작한 화영이 그에게는 부담 없는 상대로 제격이었다. 화영을 통해 여체를 좀 더 경험한 후, 삼황오해의 기녀들이 모두 놀랄 위신력을 발휘하리라는 계획도 세운 그였다. 찰박! 화영이 손으로 물살을 휘저었다. "누가 이곳에 진주 목걸이를 빠뜨렸나요?" 그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다. 바로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여자지." 심우가 말했다. 무협이 끝나는 파동(巴東)에서 서릉협으로 뱃길로 반 시진쯤 걸리는 곳! 그는 향계(香溪)라는 물줄기에 서 있었다. "왕소군이라면 옛날 옛적의 여인이잖아요?" "하하하! 알고 있었구나.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끌려가던 중 잠시 고향에 들렸었지. 이곳에 들린 왕소군은 향계를 지나다가 진주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그 이후로 이곳의 물은 청정해지고 향기까지 나기 시작했다더군." "아하!" 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꽃 같던 여인이 더러운 이족의 손에 끌려가 한 평생을 마쳤다니... " 심우가 왕소군에 대한 정회로 분통을 터뜨렸다. "왕소군에 대해서는 저도 조금은 알고 있어요. 왕소군은 황제의 눈에도 들지 못했던 한낱 궁녀였잖아요. 평생을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 홀로 밤을 지새웠을 지도 모르죠. 그런 여자가 비록 이족이지만 왕에게 시집가 호의호식하고 사랑까지 받았으니 그녀로서는 오히려 더 잘된 일이 아닐까요?" 화영이 쫑알댔다. "무슨 소리냐? 내 일찍이 여자들에게는 나라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만 너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줄이야... 나무 뿌리를 먹고 팔불출과 살아도 제 나라가 좋은 것이다!" 심우가 화를 냈다. " .... " 화영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단지 떠돌아다니는 삶이 그녀에게 피곤해서 한 말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연 화가 났다. 정말 그는 나무 뿌리를 먹은 적이 있는가? 그녀는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따지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거슬려 좋은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귀( 歸)라는 곳이 있다. 굴원(屈原)의 혼이 깃든 곳이지. 네가 그곳을 먼저 갔다 왔다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우가 근엄하게 말했다. "굴원이라는 분은 누구예요?" "쯔쯔... 노래를 부른다는 아이가 그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搔)도 모른단 말이냐? 초사(楚辭)로 더 잘 알려져 있지." "한 구절 들려 줄 수 있나요?" "흠흠... 지금은 어쩐지 노래를 부를 흥취가 나지 않는구나." 심우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화영이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곳에서나 시를 읊조리는 창기가 아니다. 이소를 부를 양이면 당연히 자귀로 가야지!" 심우가 이유 없이 화를 냈다. "누가 뭐랬어요?" 화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쳇! 천상별부(天上別府)를 노래할 양이면 목숨을 끊겠군." 그녀가 입에 소리로 중얼댔다. "자! 이제 향계의 풍광도 즐길 만큼 즐겼으니 가자!" "이번에는 어디로 가실 생각이에요? 자귀라는 곳으로 가실 거예요?" "객잔! 당분간 이곳에 머물 것이다." "구경을 할만큼 하셨다고 했잖아요." "여기서 기다리기로 한 놈들이 있다." 심우가 휘적 계곡을 올랐다. 심우는 초가을의 햇살이 낮게 비취는 객방(客房)에 앉아 책갈피를 넘기고 있었다. "아!" 그가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좋은 책은 역시 한 번 들면 쉬이 내려놓기가 힘들구나." 심우가 아쉬운 듯 궤안에 책을 놓았다. 얼마나 읽었는지 양피지가 바랜 책은 심우가 가장 아끼는 송대(宋代)의 춘화도(春畵圖)였다. "좋은 책은 또한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가 않죠." 침상을 뒹굴던 화영이 한마디 거들었다. "뿐이냐? 좋은 책은 항상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충동을 느끼게 하지." 탁! 그가 궤안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특별히 호보(虎步)를 연구해 보아야겠다." 심우가 털썩 침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또?" 화영이 아미를 찌푸렸다. 향계의 객방에 머문지 이틀째였다. 그동안 둘이서 벌인 짓이라고는... "얏!" 심우가 침상을 벌렁 뒹굴며 돌연 화영의 두 발목을 잡았다. "아얏!" 화영이 비명을 질렀다. 심우는 화영을 거칠게 뒤집어 주르르 끌어당겼다. "선인(先人)들께서 음양상생(陰陽相生)의 비법으로 극찬(極讚)한 체위(體位)니라." 그가 화영의 치마를 그녀의 허리까지 뒤집어 올렸다. 화영은 내고도 입지 않고 있었다. 틈나면 뒹구느라 입기도 귀찮았을 것이다. "흠... " 심우가 명품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엉덩이, 그 사이로 가뭇한 그늘... 정말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은 이것뿐인 듯 했다. 심우는 화영을 조금 더 당겨 상체는 침상에 걸치고 발은 바닥에 닿도록 했다. 그가 아랫도리를 풀며 화영의 가랑이를 열었다. 화영은 아직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녀가 침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우는 무릎을 꿇고 화영의 가는 허리를 잡았다. "으음... " 화영이 교성을 터뜨렸다. 심우가 화영의 내부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갈 때였다. 툭! 툭! 누군가가 문고리로 객방을 두들겼다. "누구냐?" 심우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해해해! 소인입니다. 누가 찾는뎁쇼." 간드러진 목소리는 객잔의 점소이였다. "에잇!" 심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화영에게서 몸을 뗐다. "어디에 있느냐?" 그가 아랫도리를 추스르며 객방의 문을 열었다. "일층 주루에 계십니다." 점소이가 그를 인도했다. 심우는 이층 객방에서 고개를 빼고 주루를 살폈다. 번들번들한 머리! 톱 같이 생긴 기형도를 든 청년은 그의 충복 칠십이 타수, 장립이었다. "장립!" 심우가 이층에서 그를 불렀다. 장립이 심우를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성큼성큼 이층으로 올라왔다. "어떻게 되었느냐?" 심우가 난간에 기대서서 물었다. "전혀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찾은 것 같습니다." 장립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찾은 것 같은데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니... " "근동의 나부랭이들에게 듣기로 외모는 영판입니다. 그런데 놈이 맞는가는 아직... " "직접 확인하지 않았단 말이냐?" "공자께서 직접 오시기 전에 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십구(五十九) 타수와 팔십칠(八十七) 타수, 백이(百二) 타수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일단 가 봐야 알겠군." 심우가 객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화영과 함께 행장을 꾸렸다. "그놈이 무산 주위를 죽치고 있는 까닭을 모르겠군." 심우가 밖을 나서며 말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근동의 사람들은 놈을 산귀(山鬼)라하여 가까이 가기도 꺼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근처에 갔다가 죽은 자만하더라도 벌써 십여 명에 이른다고... " "산귀?" "생고기도 먹고 가끔 짐승처럼 행동을 한다는군요." "가까이 가면 모두 죽인다면서?" "그곳의 산적들을 때려죽이고 제 둥지를 틀 때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합니다." "놈이 있는 곳이 어디라 했느냐?" "호출(虎出)이라는 곳입니다. 무산과 금후봉(金 峯) 사이에 위치한 곳이지요." 장립이 말했다. "정말 놈이 머리가 이상해졌나?" 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수로연맹 놈들에게 들은 소문도 좋은 소문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 .... " 심우가 미간을 좁혔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생고기를 먹고 사람도 죽이는 미친 자라니... " 화영이 몸을 떨었다.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다! 놈이 우리 해륭도를 모독한 행동은 미치기 전에 벌인 짓이니... 놈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 내가 그 일로 아버지에게 망신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 심우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가자!" 그가 객잔을 성큼 걸어나갔다. 심우가 해륭도를 나선 것은 담익에게 설원을 하기 위해서였다. 흑진주를 깨뜨려 해륭도를 모독한 것을 둘째로 치더라도 아버지에게 면박을 받은 일은 참을 수 없었다. 평생 그에게 화 한 번 내지 않았던 아버지, 해손왕이었다. 따라서 심우는 담익을 실컷 두들겨 패 분풀이를 하고 용서를 받아 올 생각이었다. 담익을 건드려 해륭도와 수로연맹의 관계가 급히 악화될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담익도 최소한 무사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것을 다 제쳐 두고 일대일로 남자답게 싸워 보자는 데야... 그래도 담익이 두들겨 맞은 것을 고자질을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해륭도를 나선 심우는 이곳저곳을 수소문해서 마침내 담익이 신녀봉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데려온 타수들로 하여금 신녀봉 주변을 샅샅이 뒤져 담익을 찾도록 했다. 그리고 드디어 장립이 담익의 종적을 찾아 온 것이다. 무산에서 호출로 이어지는 협곡은 여자인 화영이 걷기에는 여간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희(歌姬)라 하나 데리고 다니던 계집인데 수하에게 업고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채신없이 그가 나설 수도 없고... 그런 까닭에 호출로 향하는 심우의 발걸음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산에 있겠다고 할 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인데... 하지만 그랬다가 어느 놈과 눈이 맞아서... 흠흠!' 심우가 뒤쳐진 화영을 기다리느라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직도 멀었느냐?" 그가 앞서 가고 있던 장립에게 물었다. "방금 후자방월( 子 月)이라는 곳을 지났습니다. 이제 멀지 않았습니다. 저곳이 호출이라는 곳입니다." 장립이 아스라히 보이는 산 아래를 가리켰다. 운무에 가려진 그곳은 먼 곳에서 보기에도 으스스했다. "먼저 가서 모두에게 기다리고 있어라 해라!" 그가 장립에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삼공자!" 휙! 장립이 신형을 날렸다. 심우는 장립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렸다. "젠장! 진작 이렇게 할 것을... " 그가 오던 길을 되돌아 가 계곡 아래에서 쩔쩔매고 있는 화영 앞에 섰다. "공자!" 화영이 울상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심우가 덥석 화영을 안았다. 그가 신형을 날렸다. 휙! 휙! 하는 짓은 고생 않고 큰 부잣집의 귀공자에 딱 어울렸으나 무공 실력은 과연 달랐다. 심우가 펼치는 심법은 칠십이 타수, 장립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그가 산양처럼 펄쩍펄쩍 뛰어 삽시간에 계곡을 올랐다. 멀리 장립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장립에게 여자를 안고 가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잠깐씩 휴식을 취하며 장립을 따랐다. 칼 같이 솟은 봉우리, 무저갱(無底坑) 같은 계곡! 반 시진을 더 달리자 장립이 말한 호출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심우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다경 정도 쉬고 난 후에 호출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공자, 기분이 영 으스스해요." 화영이 호출의 음산한 분위기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호출이 아닌가? 원래 호랑이가 나타날 때면 으스스한 바람이 불지. 하지만 걱정 마라. 호랑이 정도야... " 심우가 씨익, 웃으며 가슴을 폈다. 화영의 콧등에 송글한 땀방울이 식었을 때였다. "가자!" 심우가 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같이 가요!" 화영이 황급이 일어섰다. 그때였다. "악!" 날카로운 비명이 계곡을 울렸다. 틀림없는 장립의 비명이었다. "뭐냐?" 심우는 앞 뒤 가릴 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화영을 껴안고 휙 신형을 날렸다. "으으으... " 장립은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한쪽 어깨에는 피가 줄줄줄 흘렀다. 왼쪽 팔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들쭉날쭉한 살점, 칼에 당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힘에 뜯겨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사람의 팔을 뜯는 흉악한 물건이 있었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심우가 물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가... 갑자기 무... 무엇인가 휙 지나가더니... " 장립이 고통에 찬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칠십이 타수, 단언컨대 만로방의 분회주나 수로연맹의 분타주 이상의 실력을 가진 자가 그다. 그런 놈을 이토록 만든 것을 보면... 심우는 상대가 예사로운 고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경각심을 돋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삼공자, 저... 저기... " 파랗게 질려 있던 장립이 비로소 생각난다는 듯 손을 들었다. 심우의 시선이 장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랐다. "아악!" 화영이 비명을 질렀다. 가뜩이나 질려 있던 그녀는 장립이 가리키는 곳을 본 순간, 꼬르륵 혼절을 하고 말았다. 심우도 안색을 찌푸렸다. 장립과 화영이 보고 있어 태연한 척 한 그였지만 그의 속마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들... 날짐승에 먹혀 형체를 분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너덜너덜한 살점 속에 드러난 뼈는 나무에 걸린 고기덩어리들이 죽은지 삼사 일 정도 지난 사람의 육편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떤 놈이?" 휙! 심우가 신형을 살렸다. 찢겨 죽은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 명... 심우는 그들을 찬찬히 살폈다. 너덜너덜한 육편을 따라 몇 발자국 걸어가던 심우는 크다란 나무 밑동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밑동에는 아직도 뇌수가 마르지 않는 세 개의 수급이 나뒹굴고 있었다. "개자식! 누구냐?" 심우가 발작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퀭하게 뚫린 눈에 찢겨진 안면... 분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으나 심우는 수급의 주인들이 누군지 단번에 알았다. 오십 구, 팔십 칠, 백 이 타수... "우드득!" 심우가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아악!" 장립의 비명이 다시 처절하게 울렸다. 심우가 급히 등을 돌렸다. 장립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칠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붙어 있어야 할 팔이 이제는 하나도 없었다. "으으으... " 장립이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공포에 질린 그의 눈빛이 닿는 곳에는 산발 괴인이 서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립의 팔을 든 괴인은 야수처럼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여기는... 나의 땅이다. 아무도... 아무도 침범할 수 없다." 산발 괴인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가 뚜벅뚜벅 장립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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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립이 절망스런 표정으로 심우를 바라보았다. 심우는 장립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은 물론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칼을 들었던 무사가 두 팔을 잃었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