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 동도들의 반발 없이 자연스럽게 장강에 합류한 자가 있다면 추운객과 단심호 뿐! 그들이 한 식구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수룡왕과의 친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장강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그가 장강에 공헌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기적으로 지금이 적기였다. 수로연맹의 최대의 적, 만로방과의 일전을 코앞에 둔 지금! 만로방과의 일전에 도움을 준다면 그도 장강에 할 말은 있게 되는 셈이다. 왜 도와주었냐고 묻는다면 이유야 찾으면 될 일. 담청은 찻잔을 코에 댔다. 그녀가 다향을 음미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를 부를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를 곁에 둔다는 것은 역시 부담이 너무 컸다. 한 순간에 이제까지의 판이 모조리 뒤집어질 위험성! 담청은 하늘을 우러렀다. 그녀의 눈동자에 하늘이 담겼다. "무일 오라버니, 아직은 당신을 믿어 보겠어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먼길의 그는 두말 않고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 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녀의 믿음은 그보다 위무일이 더 가까웠다. 그리고... 가을밤은 길어지고 그녀는 외로웠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위무일! 다른 누구도 없었다. 제 17 장. 견혼수(牽魂手). "어허! 완전히 추국(秋國)이로다!" 양웅이 붉게 타오르는 대파산의 정경에 고함을 질렀다. "연홍, 어때 이곳에서 한 잔 하고 가는 것이?" 그가 연홍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 " 연홍은 입을 굳게 다물고 걷기만 했다. "저... 연홍, 사실 오늘 아침에 말이야." 양웅이 어물대며 말을 걸었다. "살아나더라구. 살아났어! 그 의생이라는 놈을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흥! 살아났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연홍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것은... 연홍이 하도 고단하게 자고 있어서... " "핑계가 좋군요. 앞으로는 늦게 자더라도 그런 일이라면 사양하지 않을 테니 깨우세요!" 연홍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아! 어젯밤 늦게 잤었군. 나는 자고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무슨 이유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게야? 아직도 오라버니의 원수를 생각하고 있나?" 양웅이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연홍은 양웅의 안타까운 심정을 전혀 이해해 주지 않았다. "긴 가을밤을 홀로 뒤척여야 하는데 잠이 오겠어요! 차라리 옆자리에 남자가 없기라도 하면 체념이라도 하지." 그녀가 매눈으로 양웅을 쏘아보았다. 말꼬리를 돌리려다 오히려 더한 말을 듣게 된 양웅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험! 험! 하...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분명했다구. 저번의 실수도 있고 해서... 하룻밤 더 지켜볼 생각이었지. 그래서 말인데 그 의생 놈을 찾아가는 것도 하룻밤 연기를... " "내가 그것밖에 모르는 여자로 보이세요?" 연홍이 돌연 꽥 고함을 질렀다. "아니 내 이야기는... 그것밖에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역시 부부란 그것 때문에... " 양웅이 허둥댔다. "근자에 양 랑의 몸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약을 지으려는 것이니 딴소리하지 마세요. 그리고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요. 볼상 사납게끔... 잊었나요? 변황에서 양 랑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잖아요." " .... " 양웅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감성이 풍부한 자다. 연홍의 몇 마디에 그는 또 다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연홍, 너의 말이 맞다! 나는 변황 제일의 고수였지! 나의 염왕도를 당해 낼 자는 아직도 많지 않아!" 양웅이 가슴을 펴며 소리쳤다. "연홍이 먹으라면 보양제든 뭐든 닥치는 대로 먹겠어. 그런데... 지금 찾아가는 그 의생 놈만은... " "그 의생이 어때서요? 양 랑은 귀도 없어요? 그 의생의 신묘(神妙)한 처방(處方)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잖아요." "왠지 꺼림칙해! 백사에 있다고 해서 갔다니 성구(城口)로 갔다고 하고 성구로 갔더니 이번에는 진평(鎭評)이야. 이유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혹시 치료를 하다가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관부에 쫓겨다니다 보니... "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연홍이 눈을 치켜 떴다. "의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연홍, 약은 잘못 쓰면 독이 된다구. 조심해서 사용해야... " "그만 하세요! 나라고 어디 대도(大都)의 명의를 찾아 양 랑에게 비싼 약을 먹이겠다는 마음이 없겠어요? 그렇게 의생이 걱정되면 미리 은자를 좀 모아 두지! 지금 가진 것은 이게 전부란 말이야!" 연홍이 신경질을 내며 은자를 내 보였다. 한 냥 반이나 될까? 양웅은 더 이상 아무말도 않았다. "이제 다 왔어요. 바로 저기예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연홍이 총총히 걸음을 빨리 했다. 양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굽이를 돌자 대파산의 산자락에 기대어 사는 십 여호의 작은 촌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홍은 마을과 뚝 떨어진 작은 초옥(草屋)으로 향했다. 의생이 있다는 바로 그곳이었다. "이상하네?" 초옥을 향해 걸어가며 연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이상하다고?" "처방을 기다리는 사람이 없잖아요." "또 어디로 내뺐는가 보지." 양웅이 얼씨구나 하고 소리쳤다. "아니에요. 이곳은 온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연홍이 초옥을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녀가 싸리문을 열고 초옥을 들어설 때였다. "연홍!" 양웅이 재빨리 연홍의 소매를 잡았다. "또 마음이 바뀐 것이에요?" 연홍이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양웅은 대꾸하지 않았다. 휙! 그가 신형을 날렸다. 양웅이 염왕도로 방문을 후려쳤다. 콰당! 문짝이 종이짝처럼 날아갔다. "뭐 하는... " 악을 지르려던 연홍의 안색이 변했다. 시뻘건 피! 방안은 혈흔으로 가득했고 약재(藥材) 더미에는 피가 엉켜 붙은 두 구의 시신이 드러누워 있었다. 초옥으로 다가서는 순간, 양웅의 예민한 코는 이미 피냄새를 느끼고 있었다. 방안으로 뛰어든 양웅이 발로 시신을 반듯이 눕혔다. 병색이 완연한 촌로와 얼굴이 시꺼먼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병을 고치러 왔다가 느닷없는 변을 당했음이 분명했다. 아직 피가 딱지로 엉켜 붙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은 지 몇 시진도 지나지 않은 듯했다. 촌로와 청년을 유심히 살피던 양웅의 눈이 번쩍 빛났다. '고수다!' 칼자국은 촌로와 청년의 심장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그어져 있었다. 그가 주위를 살폈다. 또 다른 핏자국이 뒷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양웅은 뒷문을 통해 뒤뜰에 내리 섰다. 어지러운 발자국! 최소한 두 명의 사람이 한 판 승부를 벌인 것이 분명했다. 발자국은 뒤뜰을 지나 산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연홍! 여기서 기다려라!" 양웅이 소리쳤다. 그가 쏜살 같이 신형을 날렸다. "흐흐흐! 더 달아나 보시지." 관자놀이가 불쑥한 사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그가 운두도(雲頭刀)를 흔들며 말했다. 그의 앞에는 깡마른 몸에 백의를 걸친 초로인이 서 있었다. 초로인의 옷은 나뭇가지에 긁혀 너덜너덜 했고 전신은 혈흔으로 가득했다. "찾지 않아 잊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지나치게 경박하게 행동했다." 백의의 초로인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지! 찾으려 다니면 더 숨을 줄 알았기에 일부러 모른 척했다." 중년인이 운두도를 들었다. 초로인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소매에서 침통(針筒)을 꺼내 은침(銀針)을 양 손 가득 들었다. 중년인은 초로인이 은침을 들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애초에 적수라고 생각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인명을 구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치료하다 보면 치부(恥部)를 많이 보게 되지.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본인 외에 떠벌려 본 적이 없다. 나는 협잡꾼이 아니라 의생이기 때문이다." "낄낄낄! 그래서? 그래서 비밀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는 말이냐? 그렇게 비밀을 중히 여긴다면 죽어라!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그 이상 비밀이 잘 지켜질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가 초로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초로인이 은침을 든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단 한 번!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그는 중년인의 좌측으로 돌았다. 중년인이 씨익, 웃었다. 쉭! 그의 운두도가 바람을 갈랐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갑자기 빛났다. 초로인도 은침을 뿌린 것이다. "핫!" 중년인이 철판교로 휘청 몸을 눕혔다. 은침은 중년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애초부터 은선백파(銀線百波)라는 간단한 수법으로 중년인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리고 초로인은 의생이었지 무공에 전념한 자가 아니었다. 암기술은 호신(護身)으로 약간 익혔을 뿐. 철판교로 몸을 눕혔던 중년인이 용수철처럼 일어서며 운두도를 휘둘렀다. 초로인은 중년인의 공격을 피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가 목에 차가운 금속성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냥 죽일 수는 없지. 네놈을 찾아다니느라 고생한 세월을 생각하면... 흐흐흐!" 중년인이 초로인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음소를 터뜨렸다. 초로인은 미간을 좁혔다. 도저히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라면 고통 없이 죽는 것! 그러나 중년인은 그를 쉽게 죽일 것 같지도 않았다. "윽!" 초로인이 비명을 질렀다. 중년인이 귀두도로 그의 목을 가볍게 벴다. 초로인의 목에서 가슴으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네놈을 찾아다니느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네놈도 그 고통을 느껴야 한다. 네놈의 몸 속에 있는 피를 한 점도 남김없이 빼 주마." 중년인의 운두도가 초로인의 혈맥(血脈)을 더듬었다. 중년인은 정말 피를 모두 빼 초로인을 고사(枯死)시킬 모양이었다. 절대 절명! 순간, 초로인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네놈들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라고 준비가 없을 줄 알았느냐? 비밀은 나 혼자만 알고 있지 않다. 만약 나의 죽음일 알려진다면 나에게서 비밀을 들은 자가 강호에 그 비밀을 모두 까발릴 것이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그래?" 중년인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가 억센 악력으로 초로인의 양 볼을 쥐었다. 초로인이 입을 쫙 벌렸다. "아! 아! 아으!" 볼이 잡힌 초로인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중년인이 귀두도로 그의 생살을 바르고 뼈를 갈고 있었다. 볼을 잡은 것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취한 조치! 중년인의 잔혹한 고문은 일각이나 계속 되었다. 결국 초로인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찰싹! 찰싹! 중년인이 초로인의 뺨을 갈기며 그를 깨웠다. 초로인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떴다. '아! 아! 괜한 이야기를 꺼냈구나. 살기 위해 한 말이 오히려 화를 자초할 줄이야.' 그가 가슴을 쳤다. "말하라! 누구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느냐?" 중년인이 운두도로 초로인의 이마를 쭉 그으며 물었다. 잠깐 사이에 초로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비밀을 말한 자는 사실 없소. 내가... 악!" 초로인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중년인이 그의 볼을 쥐고 뼈를 자르고 살을 후벼팠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통이 이만할까? 중년인의 고문은 이번에는 일다경이나 계속되었다. 초로인이 의식을 잃으려 할 때였다. "말을 하겠느냐?" 중년인이 운두도를 잠시 멈추고 물었다. 초로인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에 대비 소견서(所見書)를 작성해 두었소. 그러나 정말 비밀을 말한 자는 없소." "이놈이!" 중년인이 운두도를 들며 흉광을 쏟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소. 정말이오." 초로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네놈을 지금 당장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강호에 비밀이 떠다니면 그때는 이것 보다 더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중년인이 소리쳤다. "마음대로... " 초로인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밀을 전해 준 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추운객! 지자(智者)의 풍모로 일을 해결해 주리라 믿었고 또 그가 비밀을 해결해 주어야 자신이 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밀을 전했다. 그러나 추운객은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변고를 당했다면 장강에 벌써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중년인은 추운객의 이름을 들며 비밀을 발설한 자를 더 대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년인은 추운객의 이름을 입밖에도 내지 않고 있었다. 의외의 사태에 마음이 급했었다. 서둘러 달아나며 어린아이에게 서신을 전해 주라고 맡겼다. 심부름 값으로 은자 몇 냥을 주었다. 어린아이에게 일을 맡기면 주위의 시선을 덜 받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생각하니 어린아이에게 일을 맡긴 것은 잘못이었다. 동정호를 건너 서신을 전달하는 일은 어린아이에게는 역시 벅찬 일이다. 또한 추운객은 떠돌기를 좋아하니 몇 번 찾다가 그만두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서신이 추운객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서신이 전해지지 않았으니 추운객이 비밀을 알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추운객의 이름은 끝내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추운객에 대한 그의 마지막 의리이기도 했다. 자신의 세 치 혀로 추운객을 위기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한 때, 비밀을 담은 서신을 다시 보낼까 하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신을 다시 보내는 일이 너무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자칫 서신을 들고 가던 자가 저들에게 발각되면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해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살인멸구를 위해 나서리라 생각했던 적들의 추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신을 다시 보내는 것을 포기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겪기 마련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그럴 수 있는 일의 하나로 치부하고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세월 속에 파묻혀 지나갔을 줄 알았는데... "흠... " 중년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 정도 엄포에도 비밀을 말한 자가 없다는 것을 보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살려면 무슨 말을 못해.' 중년인은 초로인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 소견서라는 것은 어디에 두었느냐?" "초옥의 처마 밑... " "알았다!" 중년인이 초로인을 휙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그가 운두도를 번뜩였다. 두 손이 허공을 날며 초로인이 풀밭을 뒹굴었다. 초로인의 손목에서 피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예전에 비해 성질이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를 고생시킨 대가로 관절이라는 관절은 모두 뽑고 구멍이라는 구멍은 모두 후벼파 죽였을 것이다. 좋은 주인을 만나 개과천선(改過遷善)했기 때문에 네놈은 그렇게 편하게 죽는 줄 알아라." 중년인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저놈은 뭐야?" 산길을 내려가려던 그가 돌연 얼굴을 찌푸렸다. 타타타탁! 나무 사이로 달려오는 자는 곽원 양웅이었다. "이게 뭐야?" 양웅도 고함을 질렀다. 풀밭 속에 누워 있는 자, 그의 몰골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네가 저랬어?" 양웅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물론 본좌의 솜씨지." 중년인이 운두도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자가 의생은 아니겠지? 대파산에서 제법 명성을 떨친다던 그 의생 말이야." "맞아! 제 목숨도 못 건지는 돌팔이 의생이 바로 저 자지. 그래서 내가 죽였어." "뭐야? 아이고! 연홍과 내가 어떻게 찾은 잔데!" 양웅이 소리쳤다. 그가 후닥닥 쓰러져 있는 자를 향해 달려갔다. "어딜!" 중년인이 양웅의 발길을 막았다. 파파팟! 그가 다짜고짜 양웅을 향해 운두도를 휘둘렀다. "젠장! 이제 우수마발(牛 馬勃)이 다 달려드는군!" 양웅이 노화를 터뜨렸다. 그가 염왕도로 중년인의 공격에 맞섰다. 챙! 챙! 챙! 양웅과 중년인이 서너 차례 합을 겨룬 후, 각기 서너 걸음씩 물러섰다. 중년인이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런 오지에서 양웅과 같은 고수를 만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양웅도 안색을 찌푸렸다. "제법 하는군." 그가 염왕도를 고쳐 잡았다. "싸우더라도 이유나 알고 싸우자. 저 자를 왜 죽였어? 혹시 보양제인가 뭔가를 혼자 처먹고 온갖 계집들을 섭렵하려는 생각 때문에 죽인 것은 아니겠지?" 양웅이 물었다. "늙은이가 별 일에 다 참견을 하는군. 정 알고 싶으면 저승길에 따라가서 물어라!" 중년인이 운두도를 세웠다. "늙은이?" 양웅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곽원이라는 별호와 함께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늙은이였다. "뉘우치기에는 늦었다! 어디 죽어 봐라!" 그가 노화를 터뜨리며 중년인을 육박했다. 중년인도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양웅을 공격해 왔다. 챙! 챙! 챙! 산 속의 좁은 공간에 일대 격랑이 일었다. 우지끈! 파팟! 나무가 부서지고 풀들이 이리저리 날았다. '좋지 않다.' 합을 넘길수록 중년인의 안색은 무거워졌다. 양웅의 공세는 무지막지했다. 중년인이 이를 깨물었다. 파팟! 팟! 그가 운두도에 살기를 더했다. 그러나 양웅은 싸움에서 얻은 상처를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 그의 염왕도는 중년인의 악랄한 출수에도 개의치 않았다. 쩡! 염왕도와 운두도가 부딪히며 봄볕에 두터운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중년인이 신형을 비틀거렸다. 천화인이 양웅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처음부터 근접전을 시도 연환(連環)으로 이어지는 염왕도의 기세를 가닥가닥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기세를 끊지 못했다면 이화접목이라는 현묘한 수법으로도 양웅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년인은 염왕도의 도세를 가로막는데 실패했다. 힘으로는 당할 자가 없다는 곽원 양웅! 처음부터 전력을 다 기울여도 이길까 하는 판이었는데 중년인은 양웅을 경시까지 했었다. 경시했으니 물론 싸움을 건 것이겠지만... 타타타타탓! 중년인의 주위로 흙먼지와 돌가루가 튀었다. 팔연참(八聯斬)! 가속이 붙은 염왕도는 뇌전처럼 빨랐다. 양웅은 신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뿌듯했다. '아직 나는 늙지 않았어. 아무렴!' 그는 그간의 정신적 시달림을 모두 이 한 판에 풀고 있었다. 중년인의 운두도가 점차 빛을 잃어 갔다. 몇 초식만 더 어우러지면 땅바닥을 뒹굴 것이 뻔했다. 중년인이 두 눈에 흉광을 쏟았다. 그는 운두도가 나아가는 방향을 가슴 어림으로 좁혔다. 완전 수비만을 생각하는 동작! "핫!" 승리를 확신한 양웅이 최후의 공격을 펼쳤다. 순간, 중년인이 운두도를 세우고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양패구상, 동귀어진의 수법! 중년인은 이 한 초를 위해 운두도의 방향을 좁혔던 것이다. 양웅은 흠칫했다. 상대가 이토록 악랄한 수법으로 공격해 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비틀며 반사적으로 염왕도를 내리 그었다. "헉!" 양웅이 신음을 흘렸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젠장!" 양웅이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그가 중년인을 바라보며 투덜댔다. 중년인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양웅의 염왕도에 깨끗이 동강나 있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의생 놈이 죽은 것을 알면 연홍이 팔딱 뛸텐데." 찍! 양웅이 옷을 찢어 옆구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대... 대협... " 누군가가 양웅을 불렀다. 양웅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찾는 자는 죽은 줄 알았던 초로인이었다. 피를 많이 흘려 이미 육신은 명부로 치닫고 있었지만 가슴에 쌓인 한이 그를 이승에 굳게 묶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죽지 않았어?" 양웅이 초로인을 향해 걸어갔다. "내 품에.. 단환(丹丸)이... 먹여... 주시오." 초로인이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웅이 초로인의 품을 뒤져 단환을 꺼냈다. "어떻게 된 게요?" 그가 초로인에게 약을 먹이며 물었다. 단환을 삼키자 초로인의 안색은 금방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눈빛도 맑아졌다. 그러나 양웅은 알고 있었다. 단환은 초로인의 명만 약간 길게 해 주었을 뿐 곧 죽으리라는 것을... "원래... 나는 비밀을 나불거릴 생각이 없었소. 그러나 저들이 저렇게 악독하게 나오니... 때맞추어 당신이 나타난 것은... 하늘이 나의 복수를 용인(容認)한다는 증거!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소." 초로인이 고통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양웅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수로연맹을 아시겠지요?" "알지!" "나는 장강수로연맹 총채의 전의(專醫)를 맡고 있던 신담(申澹)이라는 자라 하오. 별호는 견혼수!" "아하! 원래 장강 총채의 전의였구려. 어쩐지 실력이 있다고 했더니...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목숨에 경각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견혼수라는 초로인은 양웅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있던 초옥의 처마를 뒤지면 한 장의 서신이 나올 것이오. 그것을 추운객 어른께 전해 주시겠소?" "추운객? 왜 하필이면 그 늙은이야? 어디 있는 줄 알아서?" 양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도 추운객의 역마살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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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견혼수라는 자가 미간을 좁혔다. 사실 추운객은 이번 춘절의 만회까지 그가 머물고 있는 청류동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양웅과 견혼수는 그 사실을 모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