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은 불에 데인 듯 화들짝 놀랐다. 이민의 생각은 한 때, 흑살장으로 천하를 시끄럽게 하던 사파(邪派)의 고수에 머물고 있었다. 이민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음풍곡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기관도 매복도 아니었다. 삼악오! 주황이 형산으로 그들을 초대한 이유는 바로 그들 때문이었다.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판단이 빠를수록 한 명의 수하라도 더 건질 수 있었다. 그가 전신의 내력을 모아 적오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소리쳤다. "후퇴하라!" 이민이 다급히 신형을 물러나며 소리쳤다. 그의 절초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허초에 지나지 않았다. "만아! 너 하나로 수채의 모든 수하들을 죽일 수 없다! 못난 아비를 이해해라! 나는 삼악오의 상대가 아니다!" 이민이 수하들을 이끌고 후퇴하며 비분에 찬 고함을 질렀다. "어딜 가?" 삼악오가 도주하는 한수의 수하들을 쫓았다. 살기로 번뜩이는 눈, 살성(殺性)이 터진 모양이었다. "크악!" "억!" 그들이 살귀(殺鬼)처럼 따라붙으며 수하들을 도륙했다. '아! 아! 훗일을 기약하기도 힘들겠구나.' 곡구를 지나며 이민이 탄식을 터뜨렸다. 달아나다 죽을 바에야 이민은 한 판 승부로 마지막을 장식하려 했다. 그가 분광도를 세우며 휙 등을 돌렸다. 하지만 계속 따라오리라 생각했던 삼악오는 무슨 이유인지 곡구에 서 꼼짝을 않았다. "젠장! 이놈의 금쇄진(禁鎖陣) 때문에... " "백오,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야? 파진도(破陣圖)는 죽고 나서야 만들겠군!" 황오와 적오가 알 수 없는 고함을 터뜨렸다. 이민은 괴로운 표정으로 이만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그가 내키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삼악오가 주춤거릴 때 한 발이라도 멀리 음풍곡을 벗어나야 했다. 그의 뒤를 오십 여명의 수하들이 따랐다. 단 일다경!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산고의 표정은 냉막하게 굳어 있었다. 예의 그 헤픈 웃음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음풍곡을 걸어나갔다. 삼악오는 곡구에서 아직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산고가 다가가자 삼악오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엄청난 살생(殺生)을 저지른 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삼악오들이 몸을 도사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산고는 그들을 스쳐 지났다. "조심하시오! 그곳에는 절진(絶陣)이 있소. 대사가 쳐 놓은 무서운 진이오!" "나도 풀지 못한 진이오!" 황오와 백오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진이 있다는 건지? 방금 한수의 수하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보고서도 삼악오는 난리를 피웠다. 산고의 귀에는 삼악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발 가는 데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가 곡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어! 이상하네. 그냥 지나가잖아." 황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런!" 백오는 무릎을 쳤다. "당연한 일이지! 저 여자는 대사가 보낸 여자잖아. 파해법(破解法)을 알 수밖에... " 그가 흥분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럼 저 여자를 따라가면... " 황오가 백오와 적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유다! 조심해서 따라가자구. 발을 어디에 딛는가 잘 살펴!" 성질 급한 적오가 후다닥 산고를 따라갔다. 산고의 발걸음을 따라 발을 딛자고 해 놓고서 정작 그가 발을 디디는 곳은 제 멋대로였다. 백오와 적오도 뒤질세라 산고를 따랐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함부로 나와도 될까? 대사께서 절대 이곳을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했잖아." 산고를 바로 뒤따르며 황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백오가 '쉿!'하며 산고를 가리켰다. "아직 아무 말도 없잖아. 어쩌면 대사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저 여자를 보내 주었는지도 모르지. 사실 이곳에는 너무 오래 있었어."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럼 우린 이제 자유야?" 황오가 물었다. "멍청이 같은 놈! 대사께서 그렇게 쉽게 우리를 풀어 주겠어? 무슨 생각이 있겠지. 여기서 자칫 잘못 행동하면 다시 저 지긋지긋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야 한다구. 죽은 듯이 저 여자를 따라다니자. 아마 무슨 말이 있을 게야." "맞다!" "맞어!" 황오와 적오가 백오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그런데 저놈들은 어쩌지?" 황오가 이만과 담향을 가리켰다. "주황과의 약속은 약속이다. 이리와!" 적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만과 담향은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그들이 비칠거리며 삼악오의 뒤를 따랐다. "아하! 세상이 이렇게 좋은 것을... 도대체 우리가 저곳에서 지낸지 몇 년이지?" "이 년!" "삼 년!" 황오의 물음에 백오와 적오가 소리쳤다. "낄낄낄! 오래도 있었다." 삼악오들이 오랜만의 외유(外遊)에 신바람을 냈다. 그들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발 밑에 뿌려진 몇 방울의 물기를 보지 못했다. 건조한 하늘, 비가 내렸을 리는 없고... 물론 그 물기는 묵묵히 걷고 있는 산고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제 18 장. 개 봉(開 封). 대량(大梁), 변경( 京)이라 불려지기도 했던 개봉은 북송(北宋)을 비롯 숱한 왕조(王朝)의 수도였던 고도(古都)다. 위무일은 양주문(揚州門)을 지나 개봉부에 들어섰다. 그는 부중에 흐르는 변하( 河)의 물길을 따라 상국사(相國寺) 방향으로 향했다. 산책을 나온 듯한 느린 걸음걸이였다. 둥! 둥! 둥! 대가(大街)에 이르자 상국사에서 울리는 법고(法鼓) 소리가 석양(夕陽)에 어우러져 더욱 장중하게 들렸다. 원래 그의 목적지는 오장하(五丈河)다. 그러나 위무일은 법고 소리에 끌려 상국사 경내(境內)로 발길을 옮겼다.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천왕상(四天王像) 앞에 이른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살업(殺業)을 지으러 가는 마당에 불전(佛前)을 어슬렁거린다는 것이 왠지 머쓱해서였다. 그는 발길을 돌렸다. 산문을 나서던 위무일은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산소, 영남의 귀신... 다음에는 좋은 시절에 좋은 곳에서 만나자.' 그가 산문 앞에서 합장(合掌)을 올렸다. 서대가(西大街), 양문(梁門), 천파문(天波門)을 지나 경륭문(景隆門)에 이르렀을 때는 주위는 캄캄한 밤이었다. 원체 그의 걸음이 늦었었다. 몇 척의 배들이 오장하(五丈河)의 물결을 오르락거렸다. 그는 나루터로 향했다. 나루터에 이른 위무일은 사공에게 부탁해 한 척의 배를 빌렸다. 그리고 술과 안주도 사 오도록 시켰다. 술과 안주를 실은 위무일은 오장하의 물결에 배를 맡겼다. 배는 오장하의 물결을 따라 위주문(衛主門)으로 흘렀다. 위무일은 가을강의 정취에 빠져 몇 잔의 술을 들이켰다. 한식경 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배는 위주문을 지나 개봉의 외곽으로 흘렀다. 위주문에서 삼사십 여장 벗어난 곳에는 오장하의 강변을 따라 거대한 장원이 한 채 서 있었다. 만로방의 총단! 예전에 오장하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 쑥밭으로 만든 경험이 있는 그곳이었다. 위무일은 술잔을 놓고 노를 잡았다. 철썩! 철썩! 그가 노를 저어 강변으로 나아갔다. 만로방은 여기저기 횃불과 화톳불을 피워 대낮처럼 밝았다. 수로연맹과의 일전을 앞둔 시기라 경계도 삼엄했다. "어이!" 위무일이 노를 저어 강변으로 다가가자 외곽을 지키던 만로방 무사가 칼을 흔들었다. 다가오지 마라는 신호였다. 밤에는 외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모양이었다. 위무일은 만로방 무사가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그가 강변에 배를 댔다. "개 자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두 명의 만로방 무사가 씩씩대며 다가왔다. 위무일을 배를 묶었다. "어디! 촌구석에서 굴러 온 놈이... 억!" 흉광을 쏟으며 다가오던 두 명의 만로방 무사가 풀썩 쓰러졌다. 위무일은 그들을 물 속에 내던지며 등을 돌렸다. 그가 만로방의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정문을 지키던 만로방의 무사들은 위무일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누구냐?"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소리쳤다. 휙! 완보로 걷던 위무일이 돌연 신형을 날렸다. 조장(組長)쯤 되어 보이는 자는 호각(號角)을 물었고 나머지 무사들은 위무일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삣! 삣! 삣!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으악!" "악!" 그와 동시에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호각을 물고 있는 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위무일은 정문 아래 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쾅! 만로방의 현판이 위무일의 무영각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가 신형을 틀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자의 정수리를 눌렀다. 퍽! 호각을 문 자가 피화살을 쏟으며 떼굴 굴렀다. 파팟! 만로방을 들어선 순간, 위무일의 신형은 비호보다 빨랐다. 이전에 한 번 와 본 적이 있어 만로방의 구조는 그에게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그가 장포를 펄럭이며 내당으로 질주했다. "이런! 쯔쯔... " 칼 부딪히는 소리에 놀라 달려나온 주황은 혀부터 찼다. 벌겋게 치솟는 불길! "큰일났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자는 서문중이었다. "어떤 놈들이냐?" 주황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마타룡! 마타룡이 지금 양인전과 숭무전(崇武殿)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여 대주와 여러 수하들이 막고는 있으나 놈이 워낙 빨라.... " 서문중이 땀을 훔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서문중, 네놈은 수로연맹 놈들이 여기까지 올 동안 무엇하고 있었느냐?" "놈들이 아닙니다. 워낙 좌충우돌로 날뛰어 정확한 파악은 하지 못하고 있으나 마타룡, 그놈 혼자인 듯 합니다." "뭐야? 혼자!" 주황이 안색을 찌푸렸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찰칵! 주황이 비구를 찼다. 좀체 표정을 잘 드러내 않는 그의 얼굴에 살기가 번뜩였다. 화르르르... 숭무전을 받치던 지주가 불덩이로 타올랐다. 여맹은 미칠 지경이었다. 수하들도 당주들도 모두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타룡은 그만큼 빨랐다. 담과 담, 지붕과 지붕을 날아다니며 마타룡은 전각을 불태우고 수하들을 도살했다. 파양호에 보았던 것보다 두 배의 실력은 더 뛰어난 듯했다. 파양호처럼 신경을 쓸 자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빨리! 빨리!" 새로 임명된 보갑대주가 한 무리의 무사들을 이끌고 영웅전(英雄殿)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외당, 내당의 당주들이 좌우에서 그를 따랐다. 수로연맹이 공격해 온다면 틀림없이 대운하(大運河)의 물길을 따라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철기대는 운하의 요지를 지키는 중이었다. 여맹은 이 급박한 순간에 철기대가 자리를 비운 것이 통한(痛恨)이었다. 쨍! 쨍! "으악!" "악!" 들리는 것은 수하들의 비명 뿐! "대오를 갖추었습니다." 수하 한 명이 여맹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여맹은 이리저리 마타룡을 쫓아 보아야 별 소용이 없음을 알고 먼저 허둥대는 수하들을 정돈하고 있었다. "여 기주, 빨리 출동하십시오. 놈이 영웅전을 지나 비성각(飛星閣)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령(使令) 한 명이 먼발치에서 고함을 질렀다. "비성각? 놈이 그곳을... " 여맹이 한광을 번뜩였다. 비성각은 주황의 거소다. "가자!" 그가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철컹! 철컹! 탕백기 수하들이 그물과 투삭을 철렁이며 다급히 뛰었다. 창! 주황은 두 자루 검(劍)을 부딪혔다. 석 자 길이의 은색(銀色) 칼이었다. 여간해서 잘 꺼내지 않는 자신의 애병, 쌍백도(雙白刀)! 그가 쌍백도의 탄력을 음미하며 투기(鬪氣)를 불태웠다. 칼 부딪히는 소리는 점차 비성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방주... " 서문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마 몸을 피하라는 뜻일 게다. 주황은 손을 휙 저었다. 모두 비키라는 신호였다. "방주, 싸우는 일은 수하들의 일입니다." 서문중이 마타룡과 싸우려는 주황의 뜻을 꺾으려 했다. "일곱 살에 부모를 역병(疫病)으로 모두 잃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기루(妓樓)에 들어갔지. 기녀들의 치다꺼리를 하며 열 살을 넘겼다. 그리고 열두 살에 우연찮게 사람을 죽여 흑사회와 인연을 맺은 나다. 제일 밑바닥... 그곳으로부터 시작 천하제일방 만로방, 이 자리에 섰다. 서문중, 내가 기회를 잘 만나 이런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하느냐?" " .... " 서문중이 고개를 숙였다. "비성각의 문을 활짝 열어라!" 주황이 소리쳤다. 찰칵! 위무일은 비룡도를 칼집에 넣었다. "서랏!" 그의 뒤에는 주황의 수하들이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었다. 위무일은 도신을 감춘 채 비룡각의 문 앞에 섰다. 주황이 그를 맞았다. "만로방은 칼질이나 하던 자들이 비로소 사람다운 짓거리를 해 보자고 모여 세운 곳이다. 만로방이 사라진다면 여기 모인 놈들은 다시 녹림의 비적들로 떠돌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검하에 고혼이 되거나 뇌옥에서 평생을 썩히겠지. 나는 그들이 그같이 되지 않기 위해 만로방을 끝까지 지킬 책임이 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네 아비가 죽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강호는 먹고 먹히는 야수들의 밀림! 따지고 들면 네 아비가 원한을 쌓은 자도 나 못지 않게 많을 것이다. 그래도 복수를 해야겠다면... 오라!" 슥! 주황이 쌍백도를 빼 들었다. "미리 말해 두겠다. 나의 미덕은 승리뿐이라는 것을! 열두 살에 흑사회에 입당, 수백 번의 싸움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다!" 파팟!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황은 소매를 뿌렸다. 소매에서 우골침이 하얗게 위무일을 덮쳤다. 위무일이 비룡출운(飛龍出雲)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그를 귀여워했던 수룡왕이 직접 가르쳐 준 신법이었다. 위무일이 사용하는 신법은 실상 수룡왕의 신법이 대다수였다. "핫!" 주황이 쌍백도를 번뜩이며 위무일을 따라 신형을 솟구쳤다. 위무일처럼 산뜻한 멋은 없었으나 빠르기는 위무일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쨍! 쨍! 쨍! 위무일과 주황이 허공에서 칼 그림자를 난무했다. 그들이 허공에서 난장으로 뒤엉킨 후, 각기 반대 방향으로 신형을 착지했다. 위무일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형도 식도 없었고 저자 패의 싸움꾼들이 벌이는 칼질과 다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주황의 무공은 이제껏 그가 상대한 그 누구보다 고강했다. "카핫!" 주황은 위무일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우골침과 봉미침(蜂尾針)을 연이어 뿌리며 위무일을 덮쳤다. "핫! 위무일도 창룡음을 터뜨렸다. 비룡도에서 홍운(紅雲)이 피어올랐다. 홍운행파도법! 카캉! 캉! 챙! 두 번째 싸움은 첫 번째 보다 배는 극렬했다. 붉게 휘감아 가는 비룡도, 마치 장난으로 막대를 휘두르는 듯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쌍백도! 일순간에 너무 눈동자를 빨리 움직여 서문중은 눈이 깨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종내 그들이 남긴 것은 칼 그림자뿐이었다. 뒤늦게 나타나 싸움을 지켜보던 여맹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가 놀라워하는 사람은 위무일이 아니었다. 위무일, 마타룡은 원래 작금 강호에서 첫 손으로 뽑는 자! 여맹이 놀란 사람은 그가 주인으로 모시는 주황의 무공이었다. 그는 흑사회 출신이 아니다. 서문중 보다는 일찍 입당했으나 서문중과 마찬가지로 주황이 불러서 만로방에 몸을 담았다. 그래서 그는 흑사회, 출신들을 내심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남뇌로의 회주, 문회! 문회만 하더라도 무공으로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주황의 무공도 그렇게 높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주황의 무공은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다. 당금 강호에 그 누가 마타룡을 상대로 저만큼 합을 겨룰 수 있을지... 수백 번의 싸움으로 다져진 실전 무공! 오로지 방주이기에 가능한 싸움이었다. 파양호의 일전 이후, '패배'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서 잘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여맹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위무일과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싸우는 주황의 무위는 여맹의 호승지심까지 불태우고 있었다. "지켜만 보고 있을 것입니까?" 신임 보갑대주가 여맹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재주가 있으면 방주를 응원해 보아라. 나는 누가 누군지 분간할 능력이 없다." 여맹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신임 보갑대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당의 부당주로 있던 자라 여맹은 하대를 했다. "그렇군요." 신임 보갑대주가 멋적은 미소를 흘렸다. 그들이 다시 싸움판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쨍! 쨍! 쨍! 쨍! 쨍! 수백 개의 칼 그림자가 한꺼번에 폭사되며 천지를 진동하는 소음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위무일과 주황은 처음의 그 자리에 섰다. 위무일이 검미를 꿈틀댔다. 왼쪽 어깨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주황은 그의 말대로 승리를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였다. 승리를 위해서는 체면을 가리지 않았다. 사실 실력으로는 주황은 위무일의 몇 수 아래였다. 그럼에도 주황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전신이 암기였기 때문이다. 일전을 벌였던 곳 아래에 수북히 떨어져 있는 암기! 주황은 위기의 순간마다 암기를 날렸다. 어깨의 통증은 그 암기 중 하나가 박혔기 때문일 것이다. 장포에도 몇 가닥의 혈흔이 보였다. 하지만 처지가 나쁘기로는 주황이 더 했다. 주황의 장포는 불에 탄 듯한 자국과 칼자국으로 너덜너덜 했다. 그럼에도 주황은 투지를 더욱 불살랐다. 파랗게 번들거리는 눈! 주황의 눈은 먹이를 앞둔 맹수의 눈에 다름 아니었다. 위무일은 호흡을 골랐고 주황은 쌍백도를 세웠다. "주황!" 호흡을 고르던 위무일이 돌연 주황을 불렀다. 주황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모든 신경은 쌍백도에 실려 있어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였다. 위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지만 무사로서 주황은 찬탄 받을 가치가 있는 자였다. 위무일이 단기내경으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핫!" 이번에는 위무일이 먼저 선수를 뽑았다. 주황이 쌍백도를 엇갈리게 세우며 자세를 낮췄다. 쐐액! 맹렬한 도기(刀氣)가 밀려들고 있었다. 순간, 주황은 주춤했다. 갑자기 비룡도가 회선풍을 그리며 그를 비켜나 후미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룡도가 노리는 자는 여맹이었다. 여맹이 쏟아지는 칼바람에 놀라 펄쩍 뛰었다. 위무일이 그를 뛰따르며 비룡도를 번뜩였다. 쨍! 쨍! "크악!" "악!" 느닷없는 위무일의 공세에 탕백기가 일대 혼동을 일으켰다. "그물과 투삭을 날려라!" 여맹이 고함을 쳤다. 탕백기가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보갑대도 따라서 외곽으로 포진했다. 위무일은 그들이 진형을 갖출 틈을 주지 않았다. 여맹을 쫓던 그가 훌쩍 훌쩍 신형을 날려 불타고 있는 영웅전의 지붕에 섰다. 그가 팔짱을 끼고 주황을 오시했다. 주황이 얼굴을 찌푸렸다. "잡아라!" 만로방의 수하들이 물밀 듯이 달려들었다. 휙! 위무일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전각들을 뛰어넘어 오장하로 향했다. 주황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렇다고 목을 못 벨 정도로 힘든 상대는 아니었다. 단지 그의 목을 베기 위해서는 상당한 내력을 소비해야 했다. 주황을 죽이고 다시 만로방의 수하들을 상대하기에는 그의 능력으로 벅찼다. 그래서 그는 퇴각(退却)할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팟! 위무일의 신형이 삽시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맹! 돌아 오라!" 주황이 고함을 질렀다. 여맹은 어둠 저편을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수하들에게 불을 끄도록 지시한 후, 비성각으로 향했다. 주황은 마타룡과 싸우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문중과 여맹을 제외한 나머지 놈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 주황이 비성각에서 수하들을 물렸다. 수하들이 읍을 하며 우르르 비성각에서 사라졌다. "서문중! 여맹... 욱!" 주황이 갑자기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가 피화살을 쏟았다. 그와 동시에 주황의 머리칼은 급속하게 퇴색하고 있었다. 마타룡과의 일전에 얼마나 심력을 쏟았으면... "방주!" 서문중과 여맹이 주황을 좌우에서 부축했다. "이래서야... 서문중, 우리가 이기겠느냐?" 주황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주께서는 져 본 일이 없지요. 조금 힘들겠지만 이번에도 이길 것입니다." 서문중이 말했다. "여맹!"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불충해서 비성각까지 마타룡을... " 여맹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든 놈이었어. 다음 번에 내가 그놈과 싸울 때에는... 신화전이 아직 남아 있겠지. 그것으로 같이 날려 버려라. 만로방의 방주야 나보다 서문중이 낫지. 그렇지 않은가? 서문중!" 주황이 다시 피를 주르르 흘리며 실소를 흘렸다. "방주... " 서문중도 참괴한 심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서문중, 내가 여맹의 손에 맞아 죽기 전에 먼저 네가 할 일이 있다. 화해를 다시 청해 보거라. 파양호의 일을 사죄하고... 화해의 이유야 네놈이 더 잘 만들겠지. 만약 수로연맹에서 화해를 거절하면... 별 수 없이 태감의 힘을 빌려야겠구나. 동창의 차보를 찾아가 수로연맹에 압력을 넣으라고 하라. 다시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내가 이토록 싸움을 싫어하는 이유는... 껄껄껄! 서문중, 네놈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주기 싫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주황이 공허하게 웃었다. 활!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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