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 양인전, 숭무전, 영웅전... 새로 단장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만로방의 건물들이 불길에 휩싸인 채 밤을 밝혔다. * * * 심영은 창밖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등요!" 그가 창밖을 보고 소리쳤다. "부르셨습니까?" 사십일 타수, 등요가 심영의 앞에 서 머리를 숙였다. "이게 무슨 냄새냐?" 심영이 코를 찡긋거리며 물었다. "고래를 삶고 있습니다. 아주 커다란 고래지요." "고래?" "이공자께서 잡아 오셨습니다. 낙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잡았다더군요." "화가 돌아왔느냐?" "그렇습니다. 지금 첨각에서 도주를 뵙고 있을 것입니다." "낙도에서 영원히 돌아올 것 같지 않더니... " "당연히 돌아오셔야지요. 내일이 중추절(仲秋節) 아닙니까?" "중추절?" 심영이 화들짝 놀라며 날자를 계산했다. "중추절에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등요가 물었다. "아니다! 그만 나가 있거라!" 심영이 안색을 굳히며 손을 흔들었다. 등요가 읍을 하고 물어났다. '중추절...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긴 여기 있으면 해와 달의 흐름을 알 수 없으니... ' 심영이 창에 몸을 기댔다. 마음이 찡하게 쓰려 왔다. '아버님께 말해야 하나? 말을 한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 그가 창가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그냥 떠나자. 마음만 아플 뿐이다.' 심영이 첨각을 바라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해륭도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영원히... 은형문! 자신이 가야 할 길이었다. 심영은 첨각에서 시선을 뗐다. 그가 궤안에 앉아 어수선한 마음을 수습하려 할 때였다. "형님!" 누군가가 거실의 문을 왈칵 열고 들어섰다. 쭉 뻗은 몸매에 서글서글한 인상, 해륭도주를 꼭 빼 닮은 청년이었다. "화!" 심영이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은 낙도에 가 있던 그의 동생 심화였다. "얼굴이 그게 뭐냐? 곤륜노(崑崙奴:흑인)가 되어 돌아왔구나." 심영이 시커멓게 탄 심화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수하들이 내 얼굴에서는 기둥서방 냄새밖에 나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러 태웠습니다. 이렇게 태웠는데도 기둥서방 냄새가 난다고 하면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몇 개 만들어야겠지요? 하하하!" 심화가 호탕하게 웃었다. "쯧쯔... 욕은 네놈만 들어먹으면 될 일이지 왜 아버님까지 끌어들여? 아버님이 기둥서방처럼 생겼다는 것은 아니겠지?" 심영이 아버지와 심화의 얼굴이 빼 닮았음을 빗댔다. "아버님은 만났느냐?" 그가 물었다. "만났습니다. 오면 온 것이고 가면 간 것이라 별 말씀도 없으시더군요. 형님이나 가면 반길까... " 심화가 실소를 흘렸다. "네가 해륭도의 일은 전혀 관심에 없고 바깥으로만 나돌아다니니까 그렇게 대하시지." "해륭도에는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 나야 원래 그런 놈이고... " 심화가 씨익, 웃었다. "그런 소리하지 마라! 너는... " "아이고! 그만 둡시다. 그건 그렇고 우가 보이지 않는군요." 심화가 막내의 행방을 물었다. "나간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라 하나 소식조차 두절할 아이는 아닌데... 아버님께 청해 한 번 찾아보도록 해야겠다." "그냥 두십시오.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그리고 놈은 밖으로 나가 세상의 험함도 깨달아야 합니다." 심화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갑시다!" 그가 심영을 끌었다. "어디를 가자는 말이냐?" "고래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수하들이 삶고 있지요. 내일이 중추절이고 하니 고래고기로 오랜만에 실컷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좋아!" 심영이 심화의 손을 탁 치며 거실을 걸어나갔다. "고래고기는 너무 삶으면 기름기가 녹아 양도 줄어들고 맛도 없습니다." "별 것을 다 아는구나." 심영이 웃었다. "이제 다 된 모양입니다." 심화가 침을 삼키며 자리를 넓혔다. "맛있게 드십시오." 심화를 따르는 수하 한 명이 김이 펄펄 나는 고래고기를 덩이로 가져왔다. "이게 제일 맛있는 부분이죠. 원래 육회(肉膾)가 제격인데 형님은 날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 심화가 소도로 고래고기를 잘게 썰었다. "자! 드십시다." 그가 잔을 들었다. 심영과 심화가 잔을 부딪히며 술잔을 기울였다. "어디 얼마나 맛있는가 볼까?" 심영이 고래고기를 한 점 입에 넣었다. 그는 고래고기 맛은 처음 보는 터였다. "맛이 특별하구나." 심영이 술잔을 훌쩍 기울이며 말했다. 입이 까다로운지라 아무래도 고래고기는 입맛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입맛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먹고 나면 나중에 고래만 찾아서 다닐걸요. 아버님도 무척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니 아버님께도 드렸겠구나?" "드렸지요. 두 번째 맛있는 부위로... " "우리는 개망나니 자식들이다. 맛있는 것은 우리가 먹고 맛없는 것을 아버님께 드렸으니... " 심영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버님이 형님에게 쏟는 정을 반이나 나에게 쏟았다면 당연히 제일 맛있는 부분을 아버님께 드렸겠지요. 커!" 심화가 술잔을 털어 넣으며 인상을 썼다. "그래도 아버님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 있다면 바로 너일 것이다." "하하하! 누구를 세 살 먹은 아이로 아시오? 부정(父情) 운운하지 않아도 잘 자랄 나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 말이 거짓말인 것 같으냐?" 심영이 술잔을 입에 맞추며 말했다. 심화는 심영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화, 이제 그만 해륭도에서 자리를 잡아라. 그만 떠돌아다니고... 해륭도는 네 수중에 달려 있어." "무슨 말입니까? 해륭도에는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 나야 계집과 술이나 좋아하는 파락호인데... " 심화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사들은 칼을 풀어놓은 시간에 무엇을 하고 지내는가? 시끌벅적한 사랑을 나누던가 아니면 술, 투전(投錢)을 벌이던가 하겠지. 사랑은 흐르는 피 만큼 감흥을 가져다주고 술은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그늘을 가져다주는 훌륭한 도구다. 투전은 적을 상대할 때 느끼는 그 짜릿함을 대신한다. 그래서 너야말로 무사지. 자격이 있다." "파락호 짓이 무사의 본분이라면 형님은 왜 파락호 짓을 하지 않습니까?" "반쪽의 무사라서 그렇다. 하지만 글은 배우지 않았지. 시, 서, 화 같은 나부랭이들로 무사의 숭고한 피를 더럽히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시, 서, 화에 정통하시죠." "아버님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라! 아버님은 모든 사람의 위에 있고 모든 사람의 예외에 자리한다!" 심영이 표정을 엄숙히 하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자격이 있다. 타수들이 너를 가장 많이 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인가 네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하하하!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군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갑자기 왜?" " ..... " 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홀로 몇 잔의 술을 더 들이켰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해륭도를 이리저리 살폈다. "해륭도! 우리들의 뼈가 굵은 곳! 좋긴 좋구나. 자! 다시 한 잔 하자! 오늘 너와 만 잔의 술을 마실 것이다." 심영이 잔을 들었다. 심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잔을 부딪혀 갔다. 심영은 새벽달을 등에 지고 해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중추절 전날을 심화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어제는 낮부터 등요 등과 어울렸었다. 아버지와는 저녁 식사를 같이 했었다. 세끼 밥을 같이 먹고 싶었으나 별스런 짓거리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렇게도 못했었다. 해변을 걷는 심영의 시선은 계속 첨각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심영은 이를 악물었다. 심영은 만곡(彎曲)이 져 있는 해륭도의 으슥한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작은 배 한 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십니까?" 구부정한 등의 노인이 그를 맞았다. 심영은 두 말 않고 배에 올랐다. 노인이 돛을 세우고 닻줄을 끊었다. 새벽 바람을 맞으며 배는 쏜살 같이 나아갔다. 해륭도가 가물거릴 쯤 되어서야 심영은 고개를 들었다. "도주께서는 아십니까?" 노인이 물었다. "말하지 않았소." 심영이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요. 강서와 절강에 은형문의 표기를 걸었습니다." " .... " 심영은 이를 깨물었다. "남들은 도주를 한낱 해적의 수괴쯤으로 평하지만 도주는 정말 좋은 분입니다. 언젠가 은혜를 꼭 갚아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은혜 운운하는 법은 없소!" 심영이 격하게 소리쳤다. "그렇지요. 그럴 것입니다." 노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도 노인은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해륭도는 이제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났다. '아버지... ' 심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 됐다. 해륭도에는 풍파가 깎아 놓은 기암괴석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증 사자 바위는 단연 뭇 바위를 압도할 정도로 크고 위맹했다. 그 사자 바위에 안광이 부리부리한 초로인이 서 있었다. 해손왕! 그의 시선은 멀리 가뭇가뭇 사라져 가는 배를 쫓았다. 그리고 어는 순간, 배는 수평선 저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해손왕은 하늘을 우러렀다. '잘 가거라. 내 아들아... ' 눈동자가 시려 오는지 그는 미간을 좁혔다. - 한 때, 해손왕은 풍류에 취해 바람처럼 떠돌았다. 강호를 떠돌며 그는 한 명의 친구를 사귀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은형문의 문주였다. 둘은 만나자 마자 의기투합(意氣投合) 하여 강호를 종횡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같이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 여인이 두 남자를 선택했으면 좋았을 일이지만 결국 여인은 한 남자를 선택함으로 만족했다. 해손왕, 바로 그였다. 조촐한 혼례식이 치러졌다. 하지만 바로 그날, 질투심에 불탄 벗은 여인을 납치해 제 아내로 삼았다. 해손왕은 양보를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사랑을 양보할 줄 몰랐다. 한 달여 지났을 때쯤, 여인은 돌아왔다. 당찬 강호의 여인답게 그녀는 자신을 납치해 간 친구를 죽였다고 했다. 해손왕은 또한 지난 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인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아이가 태어났다. 물론 해손왕은 자신의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분 못하는 천치는 아니다. 친구의 아이! 해손왕은 개의치 않았다. 둘째가 태어나고 셋째가 태어나고 여인은 죽었다. 잘못 꿰어진 자신의 삶을 학대하다 결국 요절한 것이다. 여인이 죽고 난 후, 그는 무척 쓸쓸했다. 그날 꽃배가 해륭도에 닿기까지 오랫동안... 꽃배가 나타난 이후에는 쓸쓸함이란 없었다. 단지 절절한 그리움만 있을 뿐! 하지만 심영이 떠나는 것을 보자 해손왕은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아픔으로 다시 천년의 고독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리웠다. 휘휭! 해륭도를 몰아치는 바람은 언제나 거셌다. * * * 만로방 남뇌로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분회주, 허규(許圭)는 근자에 이런저런 일들로 심기가 불안했다. 마타룡의 등장! 만로방에 몸을 담은 자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사실이다. 파양호에서 회심의 일격을 가했지만 결국 그는 유유히 포위망을 뚫었다. 그리고 근자에는 총단까지 불태웠다고 한다. 다행히 방주가 친히 나서 그를 패퇴시켰다고 하나 방주가 없는 곳에서는 그를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허규는 삼명, 남창 분회처럼 재수 없이 장사 분회가 마타룡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마타룡의 등장과 더불어 그를 초조하게 하는 것은 수로연맹 상강 수채의 느닷없는 공격이었다. 이미 호북의 분회가 불탔다. 회주, 문회가 상강의 침공을 막기 위해 다급히 호북으로 나아갔으나 마타룡의 기세가 살아난 상강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마타룡의 등장! 상강의 침공! 걱정은 되지만 그 일은 그래도 아직 먼발치의 불이었다. 정작 허규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얼마 전부터 이 지역에 나타난 한 떼의 비적들이었다. 만로방의 분회주가 비적을 두려워한다면 모두 웃을 것이다. 하지만 노하구(老河口)를 비롯한 두서너 개의 수로연맹 분타들이 박살나고 호남 최대의 부호로 꼽히는 몇 몇 토호(土豪)들의 집이 벌건 대낮에 쑥대밭이 되었다면... 비적들의 수는 많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세 명의 늙은이와 두 명의 계집, 한 명의 애송이 청년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의 흉폭함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쑥대밭, 그 말에 딱 어울렸다. 오죽하면 관부에서도 근처에 가지 않으려 할까? 허규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비적들로 인해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수로연맹과의 일전에 대비 각 분회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는 방주의 엄명이 떨어져 허규는 분회를 비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걱정은 늘어만 가고... 결국 간이 남보다 작은 허규가 기댈 곳은 술과 계집뿐이었다. 생각하면 정말로 그로서는 잘한 판단이었다. 죽어서 염왕에게 술과 계집을 달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스름이 하루가 저물어 감을 알렸다. 그 어스름 속을 몇 몇의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불행히도 허규가 걱정하는 그 비적들이었다. 두명의 계집과 한 명의 애송이, 그리고 세 명의 늙은이로 이루어진 비적! 산고를 비롯한 그들이 바로 그 비적이었다. 대가(大家)를 습격하고 수로연맹, 만로방에 좌충우돌로 부딪히는 자는 삼악오가 아니었다. 산고! 비적의 수괴는 바로 그 여자였다. 이만은 알 수 없었다. 산고라는 여자가 왜 갑자기 돌변했는지? 그리고 삼악오는 왜 산고 앞에만 서면 꼼짝을 못하는지? 산고가 삼악오에게 비적질을 하라고 명을 내린 적은 없다. 명은 둘째치고 말을 거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삼악오는 거머리처럼 따라다니며 산고를 흉내냈다. 주절대는 것을 들으니 비적질도 이미 제 좋은 방향으로 갖다 붙인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양산박(梁山泊)의 호걸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이상한 행렬에 그는 담향과 빼도 박도 못한 채 끌려 다녔다. 그저 끌려 다닌다면 문제도 아니다. '협행(俠行)으로 강호 도의를 지키자는데 네놈들은 왜 빠져? 물론 주황이 우리에게 맡길 정도면 너희들은 아주 흉악한 놈이었겠지. 개과천선을 위한 좋은 기회다. 만약 그래도 네놈들이 협행을 방관한다면... ' 적오가 작두를 들며 흉광을 뿜었다. 결국 그와 담향은 삼악오의 위협에 못이겨 같이 비적질을 해 대는 판국이었다. 이만은 제일 마지막에 쳐져 너털너털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 마지못해 걷고 있는 여자는 담향, 담향의 앞에는 삼악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연신 히히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두에 선 여자는 산고! 산고의 전신은 값비싼 보석으로 주렁주렁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발걸음이 빨라진다는 것은 또 어딘가 분탕질을 할 곳을 찾았다는 뜻... 이만의 얼굴이 우거지상으로 구겨졌다. '훗일, 내가 고인(高人)이 되었을 때 오늘의 행적에 대해 강호인들이 뭐라 할까? 재물을 약탈하고 가옥을 불지르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협사라는 소리는커녕 비적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겠구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원래 협사란 불의(不意)를 보면 죽음을 두려워 않고 달려드는 자! 칼을 잡았으면 누구나 협사가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오늘의 일을 계속 모른 척 넘어갈 것인가?' 이만은 고심에 잠겼다. 벌써 몇 날을 같은 질문만 던지는 그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악행을 막아야 한다.' 이만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또 다시 그의 입과 발은 그의 뜻을 따라 주지 않고 있었다. '이만, 너는 정말 형편없는 놈이구나. 스물이 다 되어 가도록 배운 것이 고작 죽음이 두려워 개처럼 질질 끌려 다니는 것뿐이더냐?' 이만이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며 자책했다. 그는 눈동자에 힘을 주고 가슴을 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이만이 자신의 용기를 부추겼다. "에잇!" 그가 어깨를 펴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담향을 지나 삼악오의 곁에 이르렀을 때 이만은 주춤했다. '이놈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귀축(鬼畜)들에게 떠들어 봐야 내 입만 아플 뿐... ' 이만이 슬금슬금 삼악오를 비켜났다. 삼악오를 지난 그가 휑하니 산고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저! 소저!" 이만이 산고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지 않소? 내가 생각하기에 나쁜 일이오. 나쁜 일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 이만이 두서없이 말했다. 산고는 이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약 무일 형님께서 오늘의 일을 알면.... " 그가 돌연 입을 닫았다. 파랗게 빛나는 산고의 눈동자! 그 눈동자는 야수의 눈보다 더 흉폭했다. 팟! 산고가 돌연 협도로 이만을 갈라 왔다. "아이고!" 이만이 비명을 터뜨리며 나귀처럼 굴렀다. 산고가 이만을 찢어 죽일 듯 바라보며 광화(狂火)를 불태웠다. 그녀의 눈빛에 이만은 전신의 소름이 돋고 머리칼이 곤두섰다. 이만이 앉은 자세에서 주춤주춤 물러났다. 슥! 산고가 협도를 칼집에 넣었다. 그녀가 살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잠깐 사이, 이만은 지옥의 나찰녀를 만나고 온 기분이었다. 그가 창백한 안색으로 일어섰다. '아! 아! 아버님 말씀이 결국 옳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와는 말을 말고 상대가 되지 않는 자와는 상대를 하지 마라.' 이만은 탄식을 터뜨렸다. '진정한 영웅은 대세(大勢)를 아는 자라 했다. 지금 달려들어 봐야 개죽음밖에 더 되겠어.' 그가 삼악오의 뒤로 황망히 꼬리를 뺐다. 화르르르르... 건조한 가을 바람과 어우러져 화마(火魔)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허규는 장사 분회가 불길에 쓰러질 때까지 꼼짝을 못했다.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 명의 늙은이와 계집 한 명은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을 타고났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단 순간에 장사 분회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애첩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건네준 보석함을 들고 나오던 계집이 문득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허규는 오줌을 찔끔거렸다.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래 전에 그의 발은 꽁꽁 얼어 있었다. 계집이 다가왔다. 팟! 계집의 손에서 서슬 퍼런 도신이 번뜩였다. 비로소 허규의 발이 움직였다. 그가 다급히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협도가 그를 따라가며 빛을 뿌렸다. "크악!"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허규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장사 분회의 괴멸! * * * "무산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호출에 출현하는 괴물을 산귀라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인근 촌로들에게 들은 이야기들로 앞뒤로 맞추어 볼 때 저는 호출의 산귀가 담 대주가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촌로들이 전한 산귀의 모습은 담 대주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산귀가 호출에 있는 산적들을 소탕한 시기도 담 대주가 기녀의 시신을 마차에 태우고 사라진 시기와 비슷했으니까요. 저는 반령패를 돌려받기 위해 당장 호출로 향했습니다. 촌로들이 말렸습니다. 산귀의 흉폭함은 촌로들에게 공포를 넘어 이미 경배의 대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호출을 금역으로 정하고 산귀를 달래기 위해 두 달에 한 번 제사까지 지낸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나는 웃었지요. 담 대주의 괴팍함을 이미 경험한 저입니다. 저는 담 대주가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해 일부러 귀신으로 행세하며 촌로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산귀로까지 행세하며 사람을 저어한다면 반령패만 돌려 받고 나오리라. 그 같은 생각으로 저는 순무당의 수하들과 함께 호출로 향했습니다. 결단코 호출에 가는 저를 막는 촌 로들을 뿌리치고 말입니다." 거지 같이 너덜너덜한 복장,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공허한 눈빛, 순무당주 모삼풍의 입술은 바짝 말라 들어가고 있었다. "호출에는 그렇게 도착했습니다. 무지랭이 촌로의 말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데... 뒹구는 뻐!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이 갈갈이 찢겨져 나부끼는 육편! 수하들과 저는 호출에 펼쳐진 정경에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산발로 늘어뜨린 머리칼, 파랗게 빛나는 눈, 야수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자! 촌로들이 말하던 산귀였습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치장을 했다고는 하나 내가 어찌 그를 모르겠습니까? 맞습니다. 산귀로 나타난 자는 담 대주가 맞았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반령패를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 아! 그러나 태부인,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늑대! 맞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늑대가 분명했습니다." 모삼풍이 몸을 부르를 떨었다. 그의 눈빛이 담청에게 공포를 호소했다. 모삼풍이 마른 침을 억지로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느닷없는 공격! 순무당의 수하 한 명이 담 대주에게 붙들려 갔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가장 흉칙한 장면을 저는 눈뜨고 보아야 했습니다. 담 대주, 아니 그는 산귀가 맞았습니다. 산귀는 손과 발, 이빨로 수하들을 갈기갈기 찢은 후, 심장을 찾아 우걱우걱 씹었습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38편 →
39편부터
39편
[무협] 장풍파랑 - 39편 (39/61)
우걱우걱... " 모삼풍의 눈빛이 다시 흐려져 갔다. "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호출을 어떻게 도망쳐 나온지 모르겠습니다. 수하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