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청은 눈을 감았다.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위무일은 정말 웃음이 나왔다. 여자들은 알몸으로 달려들면 모든 남자들이 정욕(情慾)을 느끼는 줄 아는 모양이다. 물론 신경을 조금 쓴다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위무일은 담청의 육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피곤했다. 위무일의 손이 담청의 젖가슴에서 힘없이 내려가 그녀의 허벅지 위에 걸렸다. 얇은 경장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허벅지의 촉감은 좋았다. 그 탄력있는 촉감은 가파른 벼랑을 넘어 자신의 비부로 사정없이 난입하기를 호소했다. 위무일은 허벅지의 그 애절한 호소도 냉정히 거절했다. 무안을 달래기 위해 몇 번 쓰다듬어 주었을 뿐! 담청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식어 있는 위무일의 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마지막 승부수라 생각하고 던진 몸! 하지만 위무일은 그 승부수에 미동도 않았다. 자존심은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지고 말았다. 왜 그같이 천박한 술수를 생각했을까, 하고 담청은 자신을 학대했다. 그리고 곧 이어 그녀의 수치와 분노와 증오로 바뀌어 갔다. 담청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을 번쩍 떴다. 풀어진 젖가슴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젖꼭지가 그녀의 분노를 웅변했다. 그녀가 한광을 쏟으며 위무일을 노려보았다. 위무일은 담청과 눈싸움을 벌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는 원독에 찬 담청의 눈동자를 가볍게 비켜 갔다. "청……" 위무일은 낮은 목소리로 담청을 불렀다. 창 밖에는 눈발이 그치지 않고 날렸다. 첫눈치고는 제법 많은 강설량(降雪量)이었다. "네 오라비를 만났다. 무산에서……" 위무일이 창밖에 시선을 꽂은 채 말했다. 권태로운 목소리였다. "……" 담청은 가지런히 이마를 찌푸렸다. "장 전주의 말이 맞더군. 놈은 미치광이가 되어 있었어." "오라버니를 만났다고요?" 담청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 정말 어이없는 만남이었지." 위무일은 콧 등을 매만졌다. "뭐라고 하던가요?" "미친놈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후후후……" 위무일이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무슨 말인가는 했을 것 아니에요?" 담청이 재빠르게 물었다. 역시 그녀는 자신의 수치보다 오라버니의 안부가 더 중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 대신 초조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는 했지. 제 사부를 죽였다고 하더라." "오라버니가 추운객을?" 담청의 안색이 핼쓱하게 변했다. "정말 오라버니는 미쳤군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이다니…… 오라버니가 추운객을 얼마나 공대했는가는 무일 오라버니도 잘 알잖아요!" 그녀가 소리쳤다. "잘 알지. 하지만 놈은 제 사부를 죽였어. 믿어지지 않겠지. 그러나 내가 이미 확인했다. 후후후……" 위무일은 실소를 흘리며 몸을 비스듬히 눕혔다. 담청은 의외의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상의 말은 없었나요?" "그 이상은……" 위무일이 무심히 대답했다. "……" 담청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가는 모양이었다. "왜 죽였다고 하던가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는 나보다 익을 더 잘 알 것 아니냐?" "오라버니의 그 같은 행동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담청은 쇳소리를 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익이라는 놈은 나도 조금은 알지. 그놈은 자신의 분수를 아는 놈이다. 화룡대주가 된 것만 해도 만족해 했지. 다른 것? 여자와 은자에 대해 초연한 것은 너도 알 것이다. 그리고 인정을 베푸는 자에게 유난히 약했어. 정을 받지 못하고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은혜를 입은 백부님을 죽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미쳤어! 미쳤으니 추운객을 죽였지!" 술로 붉게 달아올랐던 담청은 얼굴은 급속하게 식어 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아니다. 그리고 설혹 미쳐서 백부님을 죽였다 해도 미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 나는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증거를 찾지 않고 이유를 찾는 것을 보니 심증이 가는 곳이 있나보군요." 담청은 이마를 찌푸리며 눈빛을 빛냈다. "생각 중이다. 문제가 그놈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 "무슨 말이에요?" "종종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가 아니라 주변일 때가 있지. 나는 익이 추운객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미쳐 돌아간 세상을 생각한다. 사람 없이 돌아가는 세상은 없다. 따라서 미쳐 돌아가던 그 세상의 중심에는 누군가가 있었겠지. 추운객을 죽이라고 손짓하던 그 누가…… 아마 그 사람은 익이 추운객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위무일은 마치 꿈결에 드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담청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게 잠겼다. "오라버니가 중하게 생각하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아요." 그녀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익이 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 "생각하니 몇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저 외에는 없군요." "그랬던가?" "무일 오라버니는 일의 전후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방금 무일 오라버니가 한 말은 저에게 그렇게 들렸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툭! 툭! 툭! 위무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두들겼다.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가 무감한 어조로 말했다. "……" 담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틀어졌다. "호호호!" 담청이 반쯤 드러난 젖가슴을 출렁이며 웃었다. "누워서 무슨 청승맞은 생각을 하고 있나 했더니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오라버니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아직도 무산에 계신가요?" "장강…… 아니, 지금쯤 장강을 벗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제정신도 아닌 사람을 그냥 두셨다는 말이에요?" "그냥 두지 않았지. 익은 죽었다." "……" 담청은 호흡을 뚝 멈추었다. 그녀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 갔다. "내가 죽였다. 죽여 주기를 원하더군. 죽음보다 더한 세월이었다고 하던가? 죽여서 불에 태운 후, 뼛가루를 장강에 뿌렸다. 호사스런 죽음이었지. 백부의 죽음에 비하면…… 후후후!" 위무일은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오라버니를 죽였다고? 그 비루한 추운객을 죽였기 때문에? 불쌍한 오라버니…… 이제야 버러지 같은 삶을 청산하는가 했는데……" 담청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죽인다!" 그녀가 두 눈으로 광화를 뚝뚝 떨어뜨렸다. 휙! 그녀는 발치에 놓인 소도를 잡아 갔다. 객방에 서슬 퍼런 빛이 번뜩였다. 그녀의 소도는 위무일의 목줄을 노리며 섬전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위무일의 손은 그보다 더 빨랐다. 찰싹! 위무일의 손이 담청의 뺨을 후려쳤다. 담청은 방바닥을 굴렀다. "언제나 너는 네 감정에만 충실하구나. 익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너는…… 나를 더 이상 피곤하게 하지 마라." 위무일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벽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담청은 흐트러진 자세로 방바닥에 누워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오열(嗚咽)을 삼키며 눈물만 떨구었다. 담청은 객잔을 나서서야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오라버니에 대한 죽음이 슬퍼서인지, 위무일의 배신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서인지, 난마처럼 놓인 앞일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잘 몰랐다. 그저 그녀는 눈발 속을 눈물을 흩날리며 걸을 뿐이었다. 도성의 불빛이 보이자 비로소 그녀는 눈물을 거두었다. 실컷 울었으니 앞으로의 일을 숙고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자신이 정말 특이한 감정의 소유자라 생각했다. 울고 싶으면 울고, 그치고 싶으면 그치는…… 위무일에 대한 감정도 객잔을 나서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었다. 생각하니 그는 이제 가장 위험스러운 적이었다. 그녀는 한참 눈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에 몸을 기댔다. 생각이라 해봐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궁지에 몰릴 것에 대비해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계획을 정말 사용하고 싶지 않았었다. 지금은 적이지만 이전에는 동료로서 온갖 어려움의 방패막이가 되었던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머리칼을 쓸고 눈물을 닦았다. 도성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휘-잉! 눈보라가 그녀의 등뒤를 쫓았다. * * * 경주를 빠져 나온 수로연맹의 각 수채들은 빠른 속도로 개봉을 향했다. 떼거지로 몰려다녀 반역도나 비적으로 몰릴 것을 우려, 각 수채는 분산하여 전진했다. 분산 행렬의 선두는 금사강이었다. 중앙을 받치며 전진하는 세력은 총채, 민강은 후비를 받치고 있었다. "젠장! 잠깐 몰아치다 말 한파인 줄 알았는데……" 얼어붙은 산길을 전진하며 마원이 투덜댔다. "그런데 형님, 만로방이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가 위무일에게 말을 건넸다. "단번에 끝장을 볼 생각이겠지. 주황은 흑도 출신답지 않게 의외로 선이 굵은 자다." 위무일이 무심하게 말했다. "형님이 그를 어떻게 아십니까?" "일전에 주황과 칼을 맞댄 적이 있었다. 나는 칼만큼 정직하게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음 앞에선 언제나 정직하니까." "주황은 단도에서 고모부를 폭사시킨 자입니다. 그를 너무 후하게 평하시면 고모부께서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주황과 내가 화해하지 못할 유일한 이유지. 하지만 아버지도 알 것이다. 내가 주황을 한 사람의 무인으로 예우해 주려 하는 마음을……" "그렇겠지요. 죽은 자의 생각은 언제나 산 자가 대신 하니……" 마원이 삐딱하게 말했다. 위무일은 마원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적과 아를 명확히 구분 짓는 일은 강호를 행보하는 데 가장 편한 방법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주황의 칼 솜씨는 어떻던가요? 누구의 무공을 이어받은 듯합디까?" "온갖 시정 잡배의 냄새가 다 나더군." "그렇겠지요. 흑도 놈들의 무공이야……" 마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를 이길 자는 별로 없다. 수로연맹에서는…… 대단하지 않은가? 격검으로 자신의 검로(劍路)를 찾았으니…… 나를 포함, 대부분의 우리는 남이 애써 공들인 무공을 손쉽게 얻어 익혔을 뿐이다."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주황이 제법 하긴 하는 모양이군요." "화인과 나를 제외하고 그를 이길 자는 없다." 위무일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마원은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내심의 불만을 숨기며 총총히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좁은 산길을 낀 완만한 경사지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반원형으로 쭉 포진해 있는 무리는 앞길을 열고 가던 연맹의 동도들이었다. 그들은 한 떼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적인가?" 마원이 반짝 눈빛을 빛냈다. "서둘러라!" 그가 수하들에게 손짓을 하며 재빨리 달려나갔다. 오십 줄은 분명 넘은 듯했다. 그러나 까만 머리칼, 주름살 하나 없는 홍조 띤 얼굴은 나이를 감추기에 충분했다. 코는 준령(峻嶺)을 방불케 했고 이마는 단아했다. 말 위에 앉아 주위를 오시(傲視)하는 초로인의 허리에는 뇌전(雷電) 문양이 수놓아진 칼이 매달려 있었다. 초로인의 뒤로는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딱 벌어진 어개, 불룩한 관자놀이, 모두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는 자들이었다. 위무일의 곁으로 천화인이 다가왔다. "저자가 바로 해손왕이라는군."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해손왕? 저자가 무슨 일로?" 위무일은 미간을 좁혔다. "태부인의 청으로 왔다는데…… 아마 주황과 싸우는 데 일조를 부탁했겠지." "우리 수로연맹이 외인을 불러들여야 할 정도로 약했었나?" "핫하하! 나는 모르겠다." 천화인이 제법 큰 소리로 웃었다. 해손왕을 의식한 웃음이 분명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위무일과 천화인에게 쏠렸다. "이것 참! 쩝……" 그제야 한 가닥 불만의 소리가 들렸다. 혀를 차는 자는 가릉강의 도 채주였다. 갑작스런 해손왕의 출현, 그리고 그의 위용에 눌려 중인들을 굳게 침묵만 지키고 있던 터였다. 담청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무심하게 위무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녀가 해손왕을 향해 걸어갔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담청이 해손왕을 향애 사뿐히 머리를 숙였다. 해손왕은 말에서 내렸다. "이 심(沈) 모(某)는 이것으로 강호의 파랑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오."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철을 뚫는 눈빛이 있다면 해손왕의 눈빛이 그럴 것이다. "음……" 천태림은 신음을 흘렸다. 신비에 가려진 해륭도, 그곳의 도주 해손왕! 해손왕의 위용에 위축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담청은 연맹 동도들을 향해 섰다. "해손왕을 청한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동도들이 조금이라도 피를 적게 흘리게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합공을 통해 해륭도와의 친교를 더욱 다져……" "청!" 담청의 말을 자른 자는 위무일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러나 중인들이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담청은 아미를 찌푸렸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녀의 칭호는 누구에게나 태부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장능의 안색도 굳어졌다. 태부인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외인이 끼여드는 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심기가 불편한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렇지만 태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데에야 그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영주, 말을 조심하시오." 장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위무일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청, 너는 아직 우리 장강의 힘을 모르는구나. 장강은 외인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외숙부로부터 대화해의 배후에 해손왕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그는 해손왕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맞는 말이오!" "맞는 말이외다." 천태림은 소리쳤고 도연오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가장 말이 많을 것 같은 진강의 오 채주는 의외로 조용했다. 아마 해륭도와 근접해 있어 해손왕의 힘에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영주, 나는 동도들의 피를 적게 보기 위해 해손왕을 초빙했다고 분명 말했어요." 담청이 가라앉는 목소리로 말했다. "핫하하! 누가 그런 배려를 원한다고 하더냐? 동도들이 흘린 피! 그 피값의 보상은 당연히 우리가 받아 낼 것이다! 물어 보아라! 여기 있는 동도들이 형제의 피값을 받아 내는 일에 다른 자들의 도움을 원하는지!" 위무일의 한소리 고함에 술렁대던 연맹 무사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위무일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장능은 눈을 감았다. 위무일의 언행을 책하려 해도 책할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라고 해서 어찌 위무일과 다르랴! 위무일의 호령에 담청의 손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속으로 불덩이 같은 울화가 치솟았지만 그녀는 적당한 반박의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해손왕께서 대가없이 그 먼 물길을 건너오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공(功)이 있다면 우리가 가질 것이요. 과(過)가 있다면 그 또한 우리가 책임질 것이다. 외인은 필요없다." 위무일의 냉랭한 시선은 담청을 지나 해손왕에 머물고 있었다. 해손왕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때 임을 눈치챘다. "대가를 바라고 이곳에 왔다니…… 아니외다. 이익을 생각했다면 나는 벌써 중원의 일에 끼여들었을 것이오. 주황도 나의 힘을 무척 원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같은 물길에 선 자로서 물길의 평화를 위해 수로연맹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요." 해손왕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위엄이 절로 배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물길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돕겠다고? 그런 말은 지금보다 이전에 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아깝군! 해손왕, 당신은 물길의 의기(義氣)를 자랑할 기회를 놓쳤소." 위무일이 옅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해손왕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더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물러가시오. 대가를 바라고 오지 않았다니 더 물러나기 쉬울 것이오. 만약 우리가 걱정스러워 물러날 수 없다면…… 시험을 해보시겠소? 우리의 힘을……" 위무일은 성큼 걸어나가 해손왕의 앞에 섰다. 그가 옅은 미소로 해손왕을 바라보며 칼집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이런 건방진……!" 해손왕의 뒤에 서 있던 갈의인(葛衣人)이 뛰쳐 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적발(赤髮)의 갈의인은 바로 득검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삼십육 타수 한고(韓高)였다. 한고가 칼자루를 들썩이며 흉광을 쏟을 때였다. 위무일의 비룡도는 어느 틈에 도망(刀網)을 짜며 한고를 덮치고 있었다. 한고의 실력은 웬만한 해륭도의 호법들도 당해 낼 수 없다. 챙! 챙! 챙! 서로의 칼날이 난마처럼 엇갈리며 서너 차례 불꽃을 튀겼다. 그리고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해손왕이 인정한 해륭도의 최고의 타수, 한고! 그의 목덜미에 달라붙어 초겨울의 햇살을 반짝거리는 칼은 위무일의 비룡도였다. "……" 해손왕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칼도 초겨울의 햇살에 붉은 도신을 반짝이고 있었다. 중인들은 그가 언제 칼을 뽑았는지도 몰랐다. 본 사람이 있다면 위무일과 천화인뿐…… 해손왕은 삼십육 타수가 위무일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단번에 눈치챘다. 수하의 패배는 자신의 수치! 해손왕은 삼십육 타수를 휩쓸어 가는 위무일의 칼을 가로막으려 했다. 해손왕의 칼이 뽑혀진 것은 그때였다. 쐐-액!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발도술이었다. 그의 자전도는 단번에 위무일의 비룡도를 박살낼 듯했다. 하지만 위무일의 명성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팟! 위무일의 칼도 그에 못지않게 빨리 움직였다. 기세 싸움에서 질 수 없었다. 파파팟! 세 자루의 칼이 난마처럼 얽혔다. 하지만 결과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손왕은 자전도의 무안함을 덜기 위해 뻗었던 것보다 빠르게 자전도를 회수했다. "마타룡…… 생각했던 것보다 강하군."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후후후……" 철컥! 위무일은 실소를 흘리며 비룡도의 도신을 칼집에 감추었다. 그가 허리에 두른 비룡도를 풀어 돌연 허공으로 날렸다. 철컹! 비룡도는 정확히 담청의 발 아래 떨어졌다. "화려함이 너무 짙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원, 가자!" 위무일이 마원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마원이 수하들을 향해 기세 좋게 소리쳤다. 민강 수채의 수하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열었다. "가자!" 천화인도 소리쳤다. 금사강 수채가 민강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는 한수였다. "해손왕, 먼 길을 와주어서 고맙소. 하지만 장강 젊은 용들의 마음이 저러하니 이해하시오." 해손왕을 지나치며 한수의 채주 이민이 말했다. 가릉강이 움직였고 진강이 움직였다. 전진하는 수채의 행렬을 바라보는 장능의 노안에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끝까지 말렸어야 하는데…… 태부인께서는 장강 동도들의 감정을 너무도 모르셨다.' 그가 때늦은 후회를 할 때였다. "장 전주!" 발 밑에 나뒹구는 비룡도……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담청은 장능을 불렀다. "대열을 움직이세요." 그녀가 장능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장능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 그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총채의 긴 대열이 후미를 맡으며 최종적으로 움직였다. 담청은 총채 무사들의 진군을 지켜보며 해손왕에게 다가갔다. 해손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담청을 맞았다. "장강의 동도들은…… 별반 나를 환영하지 않는군." 해손왕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만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호목(虎目)을 연상시키던 그의 눈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눈앞의 여자가 그렇게 어려운 존재인지…… 전혀 해손왕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담청은 머리를 숙였다. "긴말은 나중에 나누도록 해요. 오는밤, 하 당주와 함께 왕야를 찾겠어요. 원양(原陽) 근교에 머물기를 바래요." 그녀가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해손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훌쩍 말 등에 올랐다. "그만 가도록 하자." 그가 일순간의 패배에 아직도 망연해 하는 삼십육 타수에게 명했다. 삼십육 타수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손을 휙 저었다. 따각! 따각! 해손왕을 필두로 해륭도의 무사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담청은 고개를 들고 팔짱을 꼈다. 그녀의 눈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비룡도가 보였다. "흥! 당연히 어울리지 않지! 하 당주, 저 칼은 대장간이 보이면 줘버려요. 쇳덩이로 만들어 버리게!" 그녀가 비룡도를 가리키며 하빈에게 소리쳤다. 위무일은 다시 뒤처졌고 천화인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어떻던가?" 천화인인 위무일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칼의 힘을 느껴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알겠나? 나는 일거수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고수가 아닐세."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55편 →
56편부터
56편
[무협] 장풍파랑 - 56편 (56/61)
"그래도 느낌은 있었을 것 아닌가?" "주황보다는 강해 보이더군. 그리고 기파(氣波)가 왠지…… 나와 아주 유사한 느낌이었어." "그 정도로 강한가? 나는 그저 해손왕을 바다의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