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이 다시 검안서를 쫓았다. <음독(陰毒)의 흔적은 찾을 수 없음. …… 추증컨데 장기(臟器)가 화기(火氣)로 상한 데다 기력이 허한 상태에서 과음(過飮)을 해 급성폐로(急性肺 :급성폐병)에 걸린 듯함.> 견혼수는 백승명의 사인을 그와 같이 적고 있었다. 위무일은 견혼수의 검안서를 접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그 난리를 부렸는지 위무일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검안서로 자신의 손바닥을 툭툭 쳤다. 순간, 위무일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서신을 다급히 다시 펼쳤다. '하근에 입은 큰 부상…… 단도의 대접전……' 쿵! 머릿속에 쇠망치로 때리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위무일은 그 충격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만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무일,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는다. 도와 다오. 누구의 핏줄이든 상관 않겠다. 누구의 핏줄이든…… 백승명이 서신으로 남긴 말도 떠올랐다. "아아! 그 이야기였구나. 그 이야기……" 위무일이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전신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 * * 축하연의 마지막 날이었다. 천화인의 시신이 군산에 도착했다. 연회석은 일시에 싸늘하게 식었다. 천태림은 망연자실 넋을 잃었고 각 채주들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집사당주 하빈이 나서 연회석을 치우고 급히 천화인의 빈소(殯所)를 차렸다. 향연이 피어오르고 제법 상가(喪家)의 분위기가 났을 때쯤 채주들이 모였다. 아들의 죽음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천태림은 빠졌고 담청은 당연히 그 자리에 참가했다. 모두 굳은 침묵만 지켰다. 달리 할 이야기도 없었다. 일단 흉수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부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부검이 시작되기도 전에 흉수는 자신의 꼬리를 보였다. 가슴에 찍힌 붉은 장인(掌印)! 진강의 오 채주가 말했는지 가릉강의 도 채주가 말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천화인은 죽음으로 이끌고 간 것은 홍운산수였다. 홍운산수, 철경에 실린 무공! 채주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담청은 그들이 각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홍운산수 하면 그녀도 금방 떠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마타룡 위무일! 그러나 채주들 중 아무도 선뜻 먼저 그 이름을 올리는 사라은 없었다. 담청은 일이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은 조금 답답했다. 천태림이 다가왔다. 핏발선 눈, 그도 홍운산수를 본 모양이었다. "으으으……" 천태림은 짐승같은 신음을 흘렸다. 장중보옥으로 아끼던 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고 담청은 생각했다. "마타룡! 이 찢어 죽일 놈!" 분노가 극에 차면 먼저 떠오르는 자에 화가 쏠리나 보다. 다른 채주들은 설마 하고 있었지만 천태림은 바로 위무일에게 화살을 돌렸다. "유난히 간사스럽게 굴 적에 알아봤다!" 그가 고함을 지르며 칼을 빼 들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담청은 간을 졸여야 했다. 천태림은 바로 호반 영채로 달려갈 모양이었다. 흥분한 금사강의 수하들도 천태림 곁으로 몰려들었다. 용의 추락, 아니 죽음…… 그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는 담청도 약간 맛본 바가 있어서 알만했다. "참으시오!" "이성을 찾으시오, 천 채주!" 다른 채주들이 분분히 천태림을 잡고 늘어졌다. "홍운산수에 화인이 죽었다고 해서 꼭 마타룡이 죽였다고 할 수는 없소. 홍운산수로 화인을 죽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마타룡이 나에게 의심을 가져 주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가릉강의 도연오는 역시 늙은 이무기였다. 그는 차분한 말로 천태림을 달랬다. 그러나 천태림은 쉽게 분노를 삭이지 않았다. 다른 채주들이 그를 어르고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담청은 이제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이 일은 아무래도 석연찮은 점이 많아요. 일단 호반 영주가 거론되었으니 사람을 보내 그에 대한 의심을 풀기로 해요." 그녀의 말에 채주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슨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희 총채에서는 장 전주를 보내겠어요. 채주들께서도 몇 분 동행하시지요." "내가 가겠소." "나도……" 담청의 말에 오유와 이민이 나섰다. 도연오는 천태림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남는 듯했다. 담청은 장능을 불렀다. 장능과 오유, 이민은 쾌선을 타고 서둘러 호반 영채로 향했다. 담청은 그들을 보낸 후,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수룡채로 돌아왔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밖을 주시했다. 천태림은 울화를 술로 풀고 있었다. 도연오는 연신 한숨을 쉬고…… 담청은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야, 마타룡! 홍운산수는 운은 띄운 것뿐인걸…… 처음부터 완벽하게 흉수로 앞뒤를 맞추면 오히려 이상할 테니……" 그녀가 중얼거렸다. "조만간 흉수를 찾는 일은 미궁에 빠지겠지. 그때 통인이 증언해 줄 것이다. 악양루로 천화인을 부른 사람은 마타룡이라고……" 통인은 위무일이 기다린다고 천화인을 악양루로 부른 자다. 담청은 통인의 가족을 담보로 이미 그와 모종의 약속을 한 터였다. 통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천화인을 부른 사람이 위무일이라고 증언하게 되어 있었다. 담청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몇가지 안배를 더 해두었다. 타룡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물…… 담청은 타룡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그물을 설혹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타룡은 그간 받은 의구심에 대한 상처로 장강을 겉돌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천화인은 죽고 타룡은 겉돌고……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걱정을 한꺼번에 더는 셈이었다. "무일 오라버니, 진작 나를 따랐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에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랄까? 호호호!" 담청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 * * 단도의 대접전에서 하근이 상했다면 백흥악은 승명 형님의 아들이 아니다. 담청은 다른 놈과 어울려 씨를 벤 것이다. 견혼수는 검안 도중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례라 검안을 거부할 수 없었던 담청은 검안 후, 견혼수를 살인멸구하려 했을 것이다. 요행히 견혼수는 달아났다. 적들의 추적이 있었고 견혼수는 살기 위해 검안서를 추운객, 백부에게 보냈을 것이다. 담청의 행각이 백일하에 드러나야 그가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서신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서신은 과연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전해졌을 것이다. 백부는 노발대발 담익을 불렀다. 사부로부터 누이의 부정을 들은 담익…… 그는 누이의 야심을 알고 있었다. 권좌에서 내려오면 바로 죽음을 택하리라는 것도…… 그 누이는 담익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히 여기고 아끼던 여자였다. 누이의 몰락에 놀라 담익은 엉겁결에 칼을 휘두른다. 사부에게…… 사부는 피를 토하고 담익은 사부를 죽인 죄책감에 떠돌다 무산에서 산귀라는 귀신이 된다. 아아!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더욱이 시기적으로도 백부, 담익, 담청, 견혼수의 행동은 너무 딱딱 맞아떨어져 상상력의 현실감을 더했다. "후후후……" 위무일이 실소를 흘렸다. 일의 앞뒤를 맞추며 그는 자신이 천성적인 이야기꾼이라 생각했다. "후후후……" 실소는 끝없이 흘러나왔다. 담익이 이해가 갔다. 어떤 경우에 사람이 미치는가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미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지금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러나 그는 미치지 않고 있었다. 담익이 부러웠다. '누구의 씨일까?' 위무일은 멍한 눈빛으로 벽에 몸을 기댔다. 오만가지 생각 중에 질투의 감정이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백승명을 떠올렸다. 위무일은 미간을 좁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흥악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일,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는다. 도와 다오. 누구의 핏줄이든 상관 않겠다. 누구의 핏줄이든…… 몇 줄 서신으로 남겼던 백승명의 유언, 그 유언은 위무일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결국 그 이야기였어.' 위무일의 심장은 다시 터져 나갈 듯했다. 아내의 불륜을 보고도 모른 척해야 했던 남자! 자존심 때문에 수치를 감추려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의 말대로 장강의 평화를 위해 핏줄을 상관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까. 몸이 편치 않으면서도 매일 술을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악성폐로…… '형님……' 위무일은 고개를 떨구었다. 백승명의 고통은 또한 그에게 좌절이었다. 한평생 남자의 맛도 모른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의 외도를 인정하지 못할 각박한 마음을 백승명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위무일도 마찬가지였다. 위무일이 정말 담청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더러운 년……' 위무일의 눈동자가 붉게 이글거렸다. 담청은 알고 있었다. 다른 남자의 씨까지 가진 자신의 부정을 백승명이 알고 있음을…… 그럼에도 그 여자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권좌에만 연연할 뿐…… '어떻게 그런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여자였다. 담청은…… '짐승보다 못한……' 위무일은 입술을 악 다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그는 다시 묻고 있었다. '나는……' 짐승보다 못한 그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어깨춤을 추었던 나는 누구인가? 그 여자로 인해 부유해야 했던 몇 년의 세월이 엄청난 고통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고통은 너무도 커 위무일을 방구석에 몰아놓고 꼼짝을 못하게 했다. 삐걱! 방문이 열렸다. 위무일은 햇살이 방을 차고 들어오자 미간을 좁혔다. 방문을 연 자는 산고였다. "식사를……" 산고는 소반을 들고 서 있었다. 외부의 바람과 빛살이 방안을 휘젓고 다니자 위무일의 가슴에 고여있던 적개심은 마침내 활화산으로 터졌다. 그 적개심은 상대가 누구인가를 가리지 않았다. "비켜라!" 그가 고함을 질렀다. 산고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소반을 든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더러운 남만의 계집!" 위무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쾅! 소반이 날아가고 산고는 비틀거렸다. "악!" 산고가 비명을 질렀다. 위무일이 칼집으로 그녀의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그가 흉광을 빛내며 영채의 마당에 섰다. "영주!" 엽광이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나는 바로 그런 놈이다! 짐승보다 못한…… 핫하하!" 위무일은 광소를 터뜨렸다. 휙! 그가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삽시간에 호반 영채에서 사라졌다. * * * 천화인의 죽음, 홍운산수…… 장능은 뱃전에 서서 생각했다. 과연 위무일은 의심받을 만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천화인의 죽음에 위무일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위무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 위무일은 친구를 죽이면서까지 자신의 욕심을 찾을 자는 못 되었다. 설혹 욕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친구에게 칼을 들이대는 그런 우매한 짓을 할 자라고는 더 더욱 생각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화인을 총채주로 기정 사실화한 자는 위무일이었다. 그 사실은 채주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흉수이든 아니든 의심받았다는 자체로 소영주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나같이 생각이 짧은 자라 하더라도 이번 일을 좀더 신중히 다루려 했을 것인데…… 모두 너무 서두른다. 이유가 무엇인가?' 장능은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그렇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 공자가 죽으면서 총채주 자리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누구라도 이제 자신의 아들을 총채주 자리에 앉히고 싶은 욕심이 생기겠지. 총채의 권위는 전례없이 추락해 있고 만로방도 와해되었으니…… 총채주는 이제 장강이 인정하는 준재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합종연횡만으로도……' 장능은 미간은 좁혔다. '대강의 채주들은 그 변화를 알고 있었던 거야. 총채주 자리를 놓고 벌이던 암투가 원점으로 돌아갔음을…… 다시 시작하겠지. 그 일에 가장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소영주……' 그가 한숨을 쉬었다. 마타룡은 너무 강하다. 주황이 있을 때는 그 강한 힘을 장강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하지만 주황이 사라진 지금은 짐만 될 뿐이었다. 마타룡은 장강에서 사라져야 했다. 아니면 침묵을 지키든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마타룡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총채주를 뽑는 데 있어서부터…… 총채주가 된 자도 마타룡이 살아 있는 한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 원하겠는가? 이 같은 상황을…… 천화인의 죽음이 전해지고 난 그 짧은 순간, 장강의 이무기들은 말은 않아도 그 같은 인식을 고유했을 것이다. 다행히 마타룡의 발을 묶을 수 있는 일은 벌어져 있었다. 홍운산수! 채주들은 그것을 빌미로 장강에서 마타룡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들 것이다. 마타룡이 두려워 정면에서 그를 의심하는 발언은 하지 않겠지만…… '소영주께서는 정말 곤혹스러운 일에 빠지셨군. 유난히 결백증이 심한 분인데……' 의심의 눈길이 쏠리는 것만 하더라도 장능은 위무일이 견뎌 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장능은 위무일을 걱정했다. 그러나 그 걱정은 한 순간이었다. 위무일이 흙밭에 발을 디디고 있다고 생각된 그 순간, 그 역시 총채의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위무일은 나루터에서 군산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과 배가 오가고 주변은 왁자지껄한 소리로 요란했지만 위무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그의 눈과 귀는 머리와 따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보는 것은 조각조각 단편이었고 듣는 것은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었다. 몸도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호변에 배를 대려던 장능이 그를 발견했다. 위무일은 사람들 속에 멍하니 휩쓸리고 있었다. "소영주!" 그가 배를 가까이 대며 위무일을 불렀다. 위무일은 못 들었는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르르…… 한 떼의 사람들이 유선에서 내리고 한 떼의 사람들이 유선에 올랐다. 위무일은 그 사람들 틈에 끼여 유선을 오르고 있었다. 오유와 이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가봅시다." 오유가 말했다. "소영주!" 장능이 배를 나루터에 대며 유선을 향해 뛰어갔다. 오유와 이민이 말머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를 고심하여 그 뒤를 따랐다. 자칫 말을 잘못해 마타룡의 분노를 산다면 그들로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유는 자신이 이곳에 괜히 왔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쯧……" 천화인의 죽음을 달래며 천태림을 구워 삶고 있을 도연오를 떠올리자 그의 입맛은 더욱 썼다. 생각하니 만약 대강의 채주들 중 총채주가 될 자가 있다며 그의 아들 오권과 도연오의 아들 도신행이 가장 유력했기 때문이다. 민강은 원래 총채주 자리에 무심했고 한수 채주 이민의 아들은 아직 치기 어린 애송이에 불과했다. '입이나 닫고 있어야겠다.' 오유는 비로소 자신이 공교로운 자리에 왔음을 깨닫고 조신(操身)할 것을 맹세했다. "소영주, 어디를 가십니까?" 장능은 유선에 뛰어올라 위무일을 붙잡고 있었다. 위무일이 장능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게 번들거리는 눈! 장능은 위무일과 눈이 부딪치는 순간, 머리칼이 곤두서는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위무일의 시선이 다시 동정호로 향했다. 장능은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뒤늦게 배에 오른 오유와 이민도 위무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장능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자신들이 온 사정을 밝히라는 뜻이었다. "천 공자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능이 말했다. 위무일은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천 공자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홍운산수에……" 장능은 약간 목소리를 크게 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동정호에 꽂혔던 위무일의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위무일의 머리에는 더 이상의 충격을 담을 여백이 없었다. 장능은 오유와 이민에게 눈길을 돌렸다. 오유와 이민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위무일의 전신에서 흐르는 싸늘한 한기는 그들의 간도 졸일 정도였다. 어떻게 할지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끼익! 끽! 유선이 나루터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 * * 위무일이 총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시끌벅적하던 총채가 일순간 정적에 쌓였다. 한파(寒波)도 몇 배로 더했다. 위무일은 묵묵히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천화인의 빈소(殯所)를 지날 때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요?" 도연오가 다급히 달려와 오유에게 물었다. "난들 어떻게 알겟소?" 오유가 손바닥을 펴 보았다.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단 말이오?" 도연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기 있으니 도 채주께서 직접 물어 보시오." 오유가 팔짱을 끼며 냉랭하게 말했다. 위무일은 연무장을 지나 내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만 마주볼 뿐 아무도 위무일의 발길을 잡지 않았다. 술잔을 기울이던 천태림이 벌떡 일어났다. "서랏!"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위무일은 들은 척도 않았다. "이……" 천태림의 눈에 불꽃이 번쩍였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칼을 빼 들었다. 천태림의 신형이 뇌전처럼 위무일을 덮쳤다. 위무일이 반사적으로 대응했다. 챙! 위무일의 칼에 튕겨난 천태림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으핫!" 천태림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파파팟! 그의 칼이 빛살로 번뜩였다. 순간, 위무일의 칼도 뇌전으로 번뜩였다. 챙! 챙! 챙! 챙! 챙!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천태림의 칼은 폭풍처럼 휘감아 가는 위무일의 공세에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챙! 천태림의 칼이 허공을 날랐다. 일순간의 일이었다. 천태림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가슴에는 위무일의 칼이 싸늘하게 닿아 있었다. 위무일의 눈빛도 무심함을 더했고 천태림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군웅들의 침묵 속에 위무일은 칼을 내렸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곳은 향화각이었다. 총채주의 식솔들이 기거하는 곳……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무래도 호반 영주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장능에게 다가와 입을 여는 자는 집사당주 하빈이었다. 그제야 장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몇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급히 위무일을 쫓았다. 향화각을 지키던 화룡대원들은 위무일이 나타나자 포권으로 그를 맞았다. 위무일은 그들을 지나 향화각에 올랐다. 향화각을 지키던 화룡대원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향화각을 오르는 위무일은 신발도 벗지 않았다. 그 다음 행동은 더욱 가관이었다. 쾅! 위무일이 주먹으로 문짝을 박살내고 있었다. "영주!" 화룡대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위무일에게 달려갔다. 위무일은 달라붙는 그들에게 귀찮다는 듯 주먹을 내밀었다. "윽!" "아악!" 화룡대원들이 얼굴을 움켜쥐고 뒹굴었다. 쾅! 쾅! 쾅! 내실로 들어선 위무일은 눈에 보이는 문짝들을 모두 부셨다. "악!" "아악!" 위무일의 흉맹한 기세에 시비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달아났다. 향화각의 소란에 놀란 총채의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이 장능 주변으로 몰렸다. 장능은 곤혹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주숙예도 황급히 향화각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오?" 그가 엉망이 된 향화각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쳤소! 호반 영주는 미쳤소!" 하빈이 대신 대답했다. "미쳤다고?" 주숙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봅시다." 장능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위무일은 훈기가 맴도는 작고 아담한 방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삼십대 초반의 여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앉아 있었다. 담청의 아이인 백흥악의 유모(乳母)였다. 그녀의 품안에는 백흥악이 고른 숨을 쉬며 자고 있었다. 위무일은 여인으로부터 아이를 거칠게 뺏어 들었다. "앙!" 아이가 놀라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뜨렸다. 위무일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등을 돌렸다. 장능을 비롯한 총채의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무슨 짓이오?" 주숙예가 고함을 쳤다. 그는 위무일이 소주인을 탈취하기 위해 그 난동을 부린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그것은 장능 등도 마찬가지였다. "앙! 앙! 앙!" 아이는 계속 울고 위무일은 총채 무사들 사이로 발을 옮겼다. "미쳤어. 미쳤어! 담 대주에 이어 호반 영주도……" 하빈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쩡! 장능은 칼을 빼 들었다. 더 이상 생각할 일도 없었다. "막아라! 소주인을 구하라!" 그가 고함을 쳤다. 총채의 무사들이 위무일을 첩첩이 에워쌌다. 담청은 모처럼의 단잠에 취해 있었다. 그녀가 눈을 뜬 때는 위무일이 총채의 무사들과 나장을 벌일 때였다. 비명과 칼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뜬 그녀였다. "무슨 일이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시비를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얼굴을 보인 시비도 밖의 일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알아 보도록 해라!" 담청이 아미를 찌푸리며 명을 내렸다. 그사이, 칼 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수룡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담청의 안색이 변했다. 비명과 칼 부딪치는 소리에 섞여 들려 오는 아이의 울음! 자식의 울음을 모르는 어미가 어디 있으랴! 담청은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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