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중원을 들락거리는 와중에 호법들의 종적이 강호인들의 눈에 띄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벽부의 잔당들에 대한 강호인들의 제이차(第二次) 추살령! 해손왕이 머릿속에 번개같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니면……' 유백과 타수들은 결국 견혼수의 서신이 마타룡에 전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견혼수의 서신이 마타룡에게 전해지고…… 해손왕은 얼굴을 찌푸렷다.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전자든 후자든, 아니면 전후가 함께 얽힌 일이든…… 해륭도에 이는 피바람을 면할 길은 없었다. "화를 불러라!" 해손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충영랑부도로 가면 저도(猪島)라는 곳이 있다. 만일에 대비하여 내가 준비해 둔 곳이다. 너는 지금 몇 명의 타수들과 함께 당장 그곳을 가라. 중원의 일이 매듭 지어지는 대로 곧 갈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로……?" 심화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알 것 없다. 당장 출발하라!" 해손왕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해륭도가 벽부의 후예라는 것이 알려져 강호인들이 쳐들어온다면 그는 아들의 안위를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심화를 저도에 먼저 피신시키려 했다. 견혼수의 서신이 전해져 마타룡과 수로연맹이 쳐들어온다고 가정(假定)해도 문제였다. 그 싸움은 결국 자신의 치정(癡情)에 얽힌 싸움이다. 치정에 얽힌 싸움에 해손왕은 아들을 끌어들일 수 없었다. 역시 심화는 저도로 가야 했다. 심화는 아버지가 저렇게 딱딱한 표정으로 명을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해륭도에 중요한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이런 경우는 더 생각해 볼 필요 없이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심화가 고개를 숙였다. "등요!" 그가 심화의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등요를 불렀다. 등요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라는 놈의 종적이 아직도 보고되지 않고 있다. 타수들 몇 명을 붙여 주겠다. 우를 찾아라. 그리고 우를 찾으면 해륭도로 오지 말고 저도로 바로 가라. 충영랑부도에 가서 저도를 물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등요가 읍으로 명을 받았다. "서둘러라!" 해손왕이 소리쳤다. 심화와 등요는 곧바로 첨각을 나섰다. 해손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천천히 첨각을 거닐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 벽부의 잔당! 마타룡이 아니라도 개방 놈들이 코밑을 기어다니고 있으니 그 사실은 금방 드러나겠지. 청!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구나. 나는 나의 기다림까지 참으며 장강을 호령하려던 네 꿈을 지켜 주려 했다. 그러나 이제 너는 그 꿈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중원을 떠날 것이다. 너와 흥악을 데리고……" 해손왕이 중얼거렸다. 그가 성큼성큼 벽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자전도를 허리에 걸쳤다. "모든 호법들을 불러라!" 그가 첨각을 나서며 소리쳤다. 저도로 담청과 흥악을 데려가는 것은 나중의 일! 지금은 마타룡과의 일전이 우선이었다. 마음이 급해 당장 나가 싸우고 싶었지만 심화가 저도로 떠날 때까지 해륭도를 지켜야 했고 정리할 일도 많았다. * * * <개방 강소 분타의 긴급 전언. 야효 등을 추적 중 벽부의 소굴로 짐작되는 곳을 발견. 해륭도. 계속 추적 중에 있으니 신중을 기하기 바람.> 휙! 위무일은 서신을 바람에 날렸다. 놀랄 것도 없었다. 이미 반은 예상했던 일! 위무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엽광이 보낸 서신을 건네고 난 사공이 노를 잡고 있었다. 위무일은 돌연 그 배를 잡았다. 사공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쾅! 쾅! 쾅! 위무일은 주먹질과 발길질로 배를 박살냈다. 배는 기우뚱하다가 이윽고 수심으로 꼬르륵 가라앉았다. 사공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위무일 때문에 놀라 서둘러 강변으로 헤엄쳤다. 물길에서 산 자라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 듯했다. 위무일은 다시 뱃전에 앉았다. 엽광이 보낸 배를 박살낸 이유는 엽광에게 더 이상 따르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해륭도가 바로 지척이었다. 그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해륭도에 발을 들이고 싸우는 것을…… 자존심이 너무도 상하는 일이었다. 해손왕에게 몸은 던진 여자, 그 여자를 죽도록 사랑해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던 자신, 그런 그를 비웃듯이 보고 있었을 해손왕…… 엽광은 물론 알 리 없다. 자신과 담청, 해손왕에 얽힌 일들을…… 그러나 위무일은 엽광을 포함,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듯한 수치심에 싸여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서둘러 일을 끝냈으면 하는 마음뿐! 담청은 뱃전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툭! 위무일은 발끝으로 담청을 찼다. 담청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러나 움직이지는 않았다. 툭! 툭! 툭! 위무일은 가볍게 공을 놀리듯 담청을 다시 찼다. 담청이 눈을 치켜 떴다. 원독에 가득 찬 눈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독사같이 눈을 치켜 뜨고 달려들려는 여자! 담청은 정말 경탄할 만한 성품의 여자였다. "해륭도는 벽부 잔당들의 소굴이었어. 벽부의 잔당 중에는 홍운산수를 익힌 자가 있지. 해손왕…… 누가 천화인을 죽였는가 했는데, 바로 그였다." 위무일이 담청을 바라보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담청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담청은 가슴에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위무일이 발바닥으로 그녀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가슴은 압력으로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담청은 너무도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을 열고 있었다. "내…… 내가…… 시킨…… 일은…… 아니에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네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그럼 호반 영채를 불태운 일은?" 위무일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담청의 가슴을 짓누르는 힘을 줄이지 않았다. 담청은 억지로 호흡을 삼키느라 악을 썼다. "나…… 나와…… 상…… 상관…… 없는 일이에요. 처…… 철경을 얻기 위해 …… 저지른 일…… 일…… 아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위무일은 발로 담청의 가슴을 비비고 있었다. 담청의 연한 살결은 일순간에 벗겨져 일어났다. 그제야 위무일은 담청의 가슴에서 발을 뗐다. "허억!" 담청은 가쁜 숨을 삼켰다. 위무일을 바라보는 담청의 눈빛이 처음처럼 다시 두려움으로 떨렸다. 위무일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담은 채 담청을 무심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청에게 몇 마디 더 물어 볼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닫았다. 귀찮았다. 더 이상 물어 볼 의미도 느끼지 못했다. 털썩! 위무일은 뱃전에 머리를 기댔다. "청, 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을 맡겨 주어서 고맙다. 가문의 혈채, 화인의 죽음, 승명 형님의 한! 해손왕…… 그만 죽인다면 그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을 테니……" 그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담청의 눈빛이 다시 원독으로 타올랐다. 죽음은 무척 두렵지만 죽음의 순간이 지나면 다시 전의가 살아나는 모양이었다. "호호호! 당신이 무슨 재주로…… 당신 혼자로는 해손왕 당해 내기 힘들걸요!" 담청이 독기 서린 눈빛으로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라. 너를 죽이고 해손왕을 죽이고 나를 죽일 실력은 된다. 우리는 모두 해륭도에서 자신의 이름을 묻는 게야. 그 비천한 기억들과 함께…… 아마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될 것이다." 위무일이 잠결에 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도 눈을 질끈 감았다. 철썩! 철썩! 해륭도는 점점 가까워지고 풍랑도 거세졌다. 주사(朱砂)는 수은과 황을 섞어 만든 것으로, 정제하여 물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위무일은 주발에 주사를 풀었다. 황포강(黃浦江)을 지날 때 사공에게 부탁하여 구한 주사였다. 그는 주사를 물에 개고 붓을 꽂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무일은 천근추로 배를 눌렀다. 파도에 거칠에 일렁이던 배가 위무일의 신법에 눌려 꼼짝도 안 했다. 그가 뱃전에 앉아 있어 담청을 거칠게 일으켰다. "왜 이러세요?" 담청이 쇳소리를 냈다. 위무일은 무심한 눈빛만 빛냈다. 그가 돌연 담청의 옷을 거칠게 잡았다. "악!" 담청이 비명을 질렀다. 찌직! 찍! 찍! 위무일은 담청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젖가슴이 출렁거리며 튀어나오고 세류요도 드러났다. "미친놈!" 담청은 악을 쓰며 반항했다. 그러나 그녀는 위무일의 거친 손길을 막아 낼 수 없었다. 투둑! 마지막으로 내고가 뜯겨져 하늘로 치솟았다. 담청은 위무일에게 목덜미가 붙잡힌 채 전신을 떨었다. 위무일은 담청의 목을 거칠게 눌렀다. "아악!" 담청이 비명을 지르며 갑판에 얼굴을 처박았다. 위무일은 담청의 푸들거리는 둔부 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주사에 담긴 붓을 휘저었다. "놔!" 위무일에게 깔린 담청이 반항했다. 퍽! 퍽! 위무일은 좌우 발꿈치로 담청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담청의 몸이 축 늘어졌다. 위무일은 주사가 묻은 붓을 담청의 등에 갖다 댔다. 그가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담청의 등에 무엇인가를 써 나갔다. 담청의 알몸은 등과 둔부, 종아기, 발꿈치에 이르기까지 주사로 새긴 글로 붉게 얼룩졌다. 단숨에 담청의 몸에 글을 새긴 위무일은 잠시 붓질을 멈추었다. 담청은 거친 호흡을 삼키고 있었고 주사는 천천히 말라들었다. 주사가 모두 마르자 위무일은 담청의 알몸을 자라처럼 뒤집었다. 위무일은 다시 주사로 담청의 알몸에 빽빽한 글자를 새겼다. 불룩한 젖가슴, 평평한 구릉, 비처를 향해 치닫는 두 다리 사이까지…… 위무일은 무성한 초지를 제외하고 담청의 전신에 주사로 된 글을 새겼다. 그가 붓을 들고 일어섰다. 휙! 위무일은 붓을 동해의 물결 속으로 내던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해륭도는 사람의 형상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륭도 놈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그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 * * 해손왕은 수하들과 함께 창파를 가르며 오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마타룡이 수로연맹 놈들은 아니더라도 호반 영채의 식솔들은 이끌고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해륭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배는 단 한 척이었다. 수하들을 우르르 끌고 서 있는 자신이 멋쩍었다. 그사이, 배는 해륭도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억!' 해손왕은 가슴에 답답한 통증을 느꼈다. 선수에는 일남 일녀가 서 있었다. 칼을 비껴 찬 자는 마타룡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담청…… 해손왕이 놀란 것은 담청의 행색 때문이었다. 담청은 알몸이었고 그녀의 전신은 부적을 붙인 듯한 주사칠투성이었다. 첨벙! 첨벙! 물이 가슴 부근까지 오는 곳에 이르자 마타룡은 담청의 목덜미를 쥐고 배에서 뛰어내렸다. 마타룡이 담청을 질질 끌고 물살을 가르며 걸어왔다. 담청은 수치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자꾸 움츠러드는 그녀의 몸을 마타룡이 주먹질로 곧게 세웠다. 몸을 가리기를 포기한 담청이 처연한 눈길로 해손왕을 바라보았다. 해손왕의 사자눈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곧 이어 그의 눈빛이 광화로 이글거렸다. 위무일은 바닷물이 발목을 찰랑거리는 곳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그는 가슴을 폈다. "벽부의 잔당들! 맨손으로 오기 미안해서 선물을 가져 왔다." 휙! 그가 담청을 거칠게 돌려 세웠다. 담청의 매끄러운 등과 도톰한 둔부가 수하들의 눈에 확 들어왔다. 수하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마타룡의 이상한 짓거리에 영문을 몰라 했다. 그때였다. "철경이다! 저 여자의 몸에 새겨진 글은 철경의 요결(要訣)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뭐야?" "맞아! 철경이다!" 수하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시에 소란을 일으켰다. "껄껄껄!" 위무일은 칼집을 두드리며 웃었다. "가져 가라! 이 여자도 함께 주겠다!" 그가 담청을 거세게 밀쳤다. 위무일에게 떠밀린 담청이 쓰러질 듯 해변을 걸어갔다. 순간, "육시할놈!" 해손왕이 광화를 번뜩이며 위무일에게 달려들었다. 위무일도 섬전 같은 발도술로 맞섰다. 챙! 챙! 챙! 챙! 해변에 붉은 마화(魔火)가 삽시간에 피어올랐다. 위무일도 해손왕은 일제히 홍운행파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외견으로 보기에는 별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 위무일은 밀리고 있었다. 사실 해손왕은 진작부터 자신의 승리를 장담했다. 단기내경은 현문의 심법과는 달라 일정한 그릇에 담긴 물을 끌어 씀과 같다. 그런 점에서는 해손왕이 오랜 연륜을 지녔다고는 하나 위무일보다 나은 점은 없다. 내력은 별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결국 누가 검로(劍路)를 잘 익혔는가 하는 것. 해손왕이 철경을 익힌 것은 위무일보다 물경 몇십 년이 앞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철경에 실린 무공을 조양인으로부터 직접 배웠었다. 스승을 통해 배운 것과 비급을 통해 배운 것. 그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다. 아무리 그 비급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어찌 순간 순간 눈으로 보여주며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스승의 눈과 입, 발보다 뛰어나랴. 물론 오성(悟性)의 차이로 인해 받아들이는 자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비급과 스승의 가르침이라는 차이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챙! 챙! 챙! 예상대로 위무일은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위무일은 전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해손왕이 위무일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도 해손왕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었다. 파파팟! 팟! 팟! 바닷물이 용천수로 솟구치며 뽀얀 수막을 일으켰다. 그들이 용쟁호투로 바다를 누빌 때였다. 해륭도의 몇몇 호법들이 담청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이제 마타룡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마타룡은 해손왕이 어떻게 처치해 줄 것이고 그들은 계집의 몸에 적힌 철경만 손에 넣으면 되었다. 누군가가 담청의 손을 휙 낚아챘다. "악!" 담청이 고함을 질렀다. 해손왕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사자눈이 광망을 쏟았다. 한 명이 달려들자 다른 호법들도 떼지어 달려들어 담청을 서로 끌어가려고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해손왕에게 눌려 있었던 사파의 흉악한 본성을 터뜨리며 철경을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을 번쩍였다. 사실 철경은 또한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던지는 물건이기도 했다. "비켜라!" 해손왕이 자전도를 섬전처럼 번뜩였다. 그는 위무일을 몰아친 후, 담청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위무일은 해손왕이 몸을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위무일의 실력이 약간 떨어진다고는 하나 해손왕이 함부로 그의 칼 그림자에서 몸을 뺄 정도로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 아악!" 담청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계속 비명을 질렀다. 해손왕의 마음은 조급했다. 그 때문인지 위무일은 자전도의 빠르기와 자전도에 실리는 무게가 불규칙적임을 경미하게나마 느꼈다. 휙! 위무일이 물기둥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의 몸은 빙글빙글 돌아 중천으로 바로 비상했다. 해손왕은 역시 강호 경험에 노회한 자다. 짧은 순간, 해손왕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른 생각은 모두 잊어야 한다. 그가 대지에 딱 버티듯 발을 벌리고 자전도를 세웠다. 파파팟! 하늘에서 현란한 불덩이가 쏟아졌다. 해손왕도 홍무로 맞섰다. 챙! 챙! 챙! 챙! 챙! 귀를 찢는 듯한 칼 부딪치는 소리는 끝간데없이 들려 왔다. 수하들의 안색이 변했다.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결! 호법들을 비롯한 수하들의 시선이 다시 위무일과 해손왕에게 고정되었다. 후두둑! 하늘에서는 때아닌 비가 내렸다. 칼바람에 물기둥이 치솟아 내리는 비였다. 붉은 홍무, 뿌연 수막, 천지를 가르는 파공음…… 위무일과 해손왕의 형체는 찾을 길이 없었다. "아!" 해륭도의 수하들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쩡! 쩡! 마치 산과 산이 부딪치며 나는 듯한 둔중한 소리가 해륭도를 두 번 크게 울렸다. 붉은 홍무가 점차 걷히며 뿌연 수막은 안개비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 수하들의 몸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담청의 몸도 경직되었다. 퓨퓨퓨퓨퓨…… 가슴에서 붉은 피를 솟구치고 있는 자는 해손왕이었다. "그…… 그것은…… 무…… 무엇이냐?" 해손왕이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삼전도법!" 위무일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하…… 할아버지는…… 처…… 철경으로…… 겨…… 결국…… 나까지…… 주…… 죽게……" 해손왕이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의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잠시 담청에게 머문 듯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몸은 바닷물 속으로 침몰했다. 당대 제일 기남(奇男), 해손왕! 그의 최후였다. "크악!" 위무일은 마치 초부나 나무를 베듯 해륭도의 수하들을 베어 나갔다. 다리는 빳빳하게 굳어져 갔고 칼을 휘두르는 데도 힘이 들었다. 홍운행파도법에 이은 삼전도법! 해손왕을 고흔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기력은 급속히 쇠락하고 있었다. 그래도 호법이라는 자들을 태반이나 베었고 타수들도 부지기수로 목을 날린 터였다. 그는 적들의 공세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가 눈길을 떨구었다. 그의 발 밑에는 피와 흙으로 범벅된 여인이 가랑이를 아무렇게나 열고 누워 있었다. 담청…… 그는 담청을 질질 끌고 다니며 적들에게 몇 번을 내동댕이쳤었다. 그리고 그녀를 취하기 위해 달려드는 자들의 목을 베고…… 해륭도 수하들과의 싸움은 대충 그런 식이었다. 때문에 담청은 위무일의 손에 이리저리 뒹굴어야 했다. 얼마나 뒹굴었으면 주사고 적어 놓은 철경의 요결들이 반은 지워지고 없었다. 담청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네 활개를 펼친 채 알몸을 감출 생각도 않는 것을 보면 그녀도 지칠대로 지친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위무일은 미간을 좁혔다. 다음 번의 공세는 정말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담청을 죽이려면 지금 죽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칼을 쉽게 담청의 심장을 후벼 파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한 수치를 주었기 때문에 원한을 갚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칼에 담청의 피를 묻히기가 싫었다. 그 더러운 피를…… 위무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그의 표정이 흠칫했다.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는 여자! 가만히 바라보니 그 여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여자가 아니었다. 위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는 자신의 기억속에 없는, 전혀 이질적인 물체임이 맞았다. 죽이니 살리니 할 이유가 없었다. 위무일은 담청을 무심히 지나쳤다. 편안했다. 담청에 대한 질긴 마음의 끈이 놓여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위무일은 해륭도의 수하들을 마주보고 칼을 세웠다. 순간, "으악!" 나루터가 갑자기 적들의 비명으로 요란했다. 위무일은 미간을 좁혔다. "젠장!" 그는 하늘을 우러렀다. 아무래도 자신의 명은 조금 더 남은 듯했다. "영주!" 엽광이 달려오고 있었다. 곧 이어 산고도 보였고 삼악오도 보였다. 삼악오는 신들린 듯 쌍장을 뿌렸고 엽광과 산고도 종횡으로 칼을 휘둘렀다. 해륭도의 수하들은 삼악오 등의 무위에 놀라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엽광, 산고, 삼악오가 풍마처럼 달리며 그들을 휩쓸었다. 위무일에 의해 도주는 죽었고 변변하게 살아 있는 호법들도 없었다. 해륭도의 수하들이 웅성댔다. "달아나자!" 한소리 고함이 터지자 해륭도 수하들이 줄행랑을 쳤다. 삼악오와 엽광이 그들을 뒤쫓았다. * * * 산고는 칼을 놓고 있었다. 위무일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 산고는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장강에 오면 항상 이상한 꿈을 꾸지. 이번에는 제법 긴 꿈이었다. 가자!" 위무일이 산고의 손을 잡았다. 산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반 영채에서 자신의 길을 떠나리라 굳게 맹세했던 그녀였다. "어디를 간단 말이에요?" 그녀가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산소들이 사는 곳이 따로 있었던가?" 위무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산고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위무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또 이상한 꿈을 꾸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그녀가 화를 냈다.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 大 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