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14편 (14/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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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14편 (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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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속하가 다시 문안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는 손가락을 뻗쳐 소년의 두 손 완맥 위에 얹어놓고 잠시 동안 맥 을 짚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방주님의 맥박은 매우 안정되고 규칙적인 것을 보니 이제 위험한 고 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정말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돌본다는 말이 옳으 며 우리 방 전체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년은 그만 아연해졌다. "나는, 나는 개잡종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며 방주가 아니외다." 노인과 비쩍마른 사내는 그 말을 듣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동시에 소년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방주께서는 편히 주무시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뒤로 물러서더니 몸을 돌리고 방을 나섰다.
그 노인은 바로 착수회춘(着手回春) 패해석이었다.
그리고 비쩍 마른 사람은 미 향주 미횡야(米橫野)였다.
미횡야는 마천애에서 사연객에게 상처를 입었으나 다행히 사연객의 내력이 그 당시 얼마 남지 않았고, 패해석이 때늦지 않게 구원을 했기 때문에 장락방 총단으로 돌아와 며칠 휴양하는 동안 점차 상세(傷勢) 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일세(一世)의 영명(英名)이 사연객의 일 초식에 사라지게 된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패해석은 따뜻한 말로 그를 위로했다. "미 아우님, 이 일을 두고 말하자면 우리가 좀 경솔했다고 생각되는 구료.
이제 생각해보니 당시 사연객이 차라리 우리 아홉 사람을 한꺼 번에 제압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료.
그렇게 된다면 방주께서 방해를 받고 주화입마가 되는 일이 없었을 게 아니겠 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방주님께서는 줄곧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며 상세가 꼭 완쾌된다고도 말하기 어렵소.
설사 몸이 낫는다 하더라도 음양이 서로 공격하는 신 기한 내공을 다시는 연마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이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만약 그에게 어떤 변고가 생기게 된다면 우리 아홉 사람 가운데 그대의 죄명이 가장 가볍소.
그대는 마천애로 오르기는 했지만 방주님 을 만나뵙기 전에 먼저 실수를 하여 방주에게 방해되는 일을 하지 않 았으니까 말이오." 미횡야는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방주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다면 모든 사람들 머리 위로 화가 떨어지는 셈이니 그때 누구의 죄가 크고 적고 를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와 같은 말을 주고 받았는데 여드레 째 되던 날 밤 방주실 로 문병을 가본 결과 방주가 이미 눈을 떴을뿐 아니라 말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패해석은 혹시나 해서 그의 맥박을 짚어 보았는데 매우 힘찬 것을 느끼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순 간 갑자기 그가 느닷없이 아리송한 말을 던지고 방주가 아니라 개잡종 이라고 하는 바람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두사람은 그만 아연실색하게 되었고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미횡야는 나직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패해석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말했다. "방주는 지금 정신을 아직 명백하게 차리지 못한 것 같소.
하나 혼미 상태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오.
이 우형(愚兄)이 온갖 정성을 다해 방주님을 치료하겠소.
며칠간 정성스레 치료를 하게 된다 면 반드시 회복될 것이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이 들이닥치려면 예고없이 신출귀몰하게 나타나는데 방 주께서는 언제쯤 완전히 치유될지 알수가 없으니 큰 걱정이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방주께서 이곳에 있는 이상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책임질 사람이 있 게 된 셈이오." 이어 그는 미횡야의 어깻죽지를 두드리며 웃음빛을 띄우고 위로하듯 말했다. "미 아우님, 걱정할 것 없소.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며 적절한 안배를 해두었소." 두 사람은 이렇게 대화를 나눈 후 각기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한편 소년은 두 사람이 물러가자 그제서야 희미한 의식 속에서 방안 의 광경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 자신은 한 커다란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으며 침대 앞에는 붉은 칠을 한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양쪽에는 두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방석이 깔려 있 었다.
방안에 커다란 비단방석이 여러 개 놓여 있고 향 냄새가 은은히 피어나는 것이 신선의 동굴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 도였다.
소년의 눈에는 모든 물건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이것이 꿈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방금 녹의소녀가 기뻐서 나직이 속삭이며 겸연쩍어하던 모양 은 아직도 그의 눈에 선했으며 또렷했다.
그녀가 달려 나간 창문도 반쯤 닫혀진 채 있는 것이 꿈이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른팔을 뻗쳐 보았다.
자기의 머리를 만져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볍게 손을 쳐들었을 뿐인데 전신이 다시 바늘에 찔린 것 같 은 고통을 느꼈다.
그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이쿠!" 그때였다.
갑자기 방 한쪽 모퉁이에서 그 누가 하품을 하더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이제 정신을 차리셨나요?" 그것은 여인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그녀는 놀라 부르짖었다. "아! 정신이 드셨군요!" 이렇게 말하며 일어서는 사람은 황삼(黃衫)의 소녀가 아닌가? 그녀는 방 한쪽 모퉁이에서 달려 나와 소년의 침대 앞으로 다가섰다.
소년은 처음에는 먼저번에 창문으로 달려나간 소녀가 다시 나타난 것 이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번쩍 뜨 고 바라보았다.
소녀는 몸에 황색의 짧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창문으로 나간 소녀와는 복장이 다를 뿐만 아니라 모습도 전혀 달랐다.
이 소녀의 얼굴은 약간 동그란 편이었으며 눈망울도 둥글고 컸다.
그 녹색 옷의 소녀같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곱상한 면은 더욱 뛰어난 데가 있었다.
소년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나이가 비슷한 두 소녀와 이야 기를 나누게 된 터이라 두 소녀의 미세한 차이는 물론 분간할 수가 없 었다.
이때 소녀는 놀람과 기쁨에 찬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
이제야 정신이 드신 모양이군요?" "그렇소.
그런데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오?" 소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호호호!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엄숙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 무슨 분부가 있으세요?" 소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당신은 나를 지금 무어라고 불렀소? 도, 도련님이라고?" 소녀는 미간에 약간 노기를 띄우고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저는 비천한 몸이예요.
당신을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 고 뭐라고 불러야 되겠어요?" 소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 사람은 무슨 방주라 부르고 또 한사람은 도련님이라 부르니 도대 체 나는 누구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는 이곳에 오게 된 것이오?" 소녀는 약간 안색은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도련님, 몸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연와탕(燕窩湯:제비집 요리)이나 잡수시는 것이 어때요?" 소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연와탕이라고?" 그는 연와탕이 무슨 음식인지 잘 몰랐다.
다만 배가 무척 고파 먹을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 덕여 보였다.
소녀는 즉시 옆방으로 가더니 얼마후 쟁반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그 쟁반 위에는 파란 꽃무늬가 그려진 자기로 된 그릇이 놓여 있었고, 그 자기그릇 안에서는 김이 무러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그 구수한 향기를 맡자 그만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방그레 웃더니 입을 열었다. "꼬박 여드레간을 두고 인삼탕만 마시면서 목숨을 부지했으니 정말 배가 고프기도 하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쟁반을 그의 앞에 갖다놓았다.
그릇에 담긴 음식은 눈과 같이 하얀 죽 같기도 하고 죽이 아닌 것 같 기도 했다.
그 위에 장미의 꽃잎이 둥둥 떠서 청아하기 이를 데 없는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소년은 몹시 배가 고픈 듯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내가 먹어도 괜찮겠소?" 소녀는 그의 질문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호호호!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음식은 도대체 얼마나 값이 나가는지 모르겠군.
나에게 는 은자가 없으니 먼저 내 입장을 분명히 말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는 여기까지 생각을 굴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 나의 주머니에는 엽전 한 닢도 없소.
그러니 당신에게 지불할 은자가 없는 것이오." 소녀는 처음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니 이내 웃음을 터뜨 렸다. "호호호! 큰 병을 앓고 나서도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군요.
겨우 하실 말씀이 그거예요? 배가 고프시다면서 빨리 드시기나 하세요." 그녀는 쟁반을 좀더 가까이 소년에게로 디밀었다.
소년은 크게 기뻐 하며 물었다. "내가 먹고 돈을 주지 않아도 괜찮단 말이오?" 소녀는 그가 여전히 그런 말을 하자 귀찮은 생각이 들어 안색을 굳혔 다. "돈은 필요 없어오.
도대체 먹겠어요? 안 먹겠어요?" 소년은 재빨리 말했다. "먹지요.
먹어!" 그는 손을 뻗쳐 쟁반에 놓인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오른손을 쳐들 자마자 온몸이 쑤시면서 아파왔다.
그는 나직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쳐들었으나 힘없이 떨구고 말았다.
소녀는 싸늘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도련님, 진짜로 아픈 거예요? 아니면 가짜로 아픈 거예요?" 소년은 언짢은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물론 진짜지요.
내가 무엇때문에 꾀병을 부리겠소?" 소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번에 큰병을 앓느라고 반주검이 된 점을 생각해 서 파격적으로 제가 다시 한번 먹여 드리겠어요." 그녀는 엄숙한 얼굴로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이 기회에 손을 잘못 놀린다면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테니 잘 알아서 하세요." 소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기회에 함부로 손을 놀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소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곱게 흘기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어 그녀 는 한 숟가락의 연와탕을 떠서는 그의 입속으로 넣어주었다.
소년은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세상에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입으로 연와탕을 받아 먹었다.
연와탕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달 콤하고 향긋한 것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소녀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다시 숟가락으로 연와탕을 떠서 그에게 먹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대 앞에서 상당히 떨어진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팔을 뻗쳐 그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는데 혹시나 소년이 갑 작스럽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까봐 두려워 하는듯 했다.
소년은 연와탕을 다 받아먹고 나서 입술을 ㅎ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군, 맛있어.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구료.
하하하!" 소녀는 그말에 냉소했다. "어떤 간계를 써서 나를 속이려 하지 말아요.
수천 그릇의 연와탕을 먹어봤으면서도 언제 한번 맛이 좋다고 칭찬한 적이 있었나요?" 소년은 그만 망연해졌다. '이와같은 음식을 내가 언제 먹어보았단 말인가?'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그는 질문을 던졌다. "이게, 이게 바로 연와탕이라는 것이오?" 소녀는 코웃음쳤다. "흥! 정말 시치미를 잘도 떼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 계의 빛이 완연했다.
소년은 뭐가 뭔지 몰라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색 저 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었으며 두 가닥으로 머리를 땋고 있었다.
갓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라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져 있었고 발은 버선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백설 같이 하얀 발에는 한쌍의 꽃을 수놓은 비단신이 신켜져 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버선을 신고 있었으면서도 그에게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소년은 칭찬의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신의, 당신의 발은 정말 아름답군요." 소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으나 곧이어 노기를 띄웠다.
그녀는 그릇을 탁자 위에 놓더니 몸을 돌려 방 한쪽 모퉁이에 깔아놓 았던 돗자리와 엷은 이불 그리고 베개를 들고서는 방문쪽으로 걸어갔 다.
소년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이것 봐요.
당신은, 당신은 어디로 가는 것이오? 나를 홀로 내버려 두겠다는 것이오?" 그 말에는 퍽이나 간절한 빛이 서려 있었다.
소녀는 걸음을 옮기면서 차갑게 말했다. "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자 더러운 말을 함 부로 주워담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가면 어딜 가겠어요? 당신은 주인이고 나는 비천한 몸인데 어 찌 당신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렇게 말을 하면서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소년은 그녀가 노해서 가는 것을 보자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 줄 알았다. '한 명은 창문으로 달려나가고 한명은 문으로 달아나지 않았는가? 그 녀들이 한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이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다시 그 소녀가 들어섰다.
그녀는 여전히 얼굴에 약간 노기를 띠고 있었으며 손에는 세숫대야를 들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가 다시 나타나자 속으로 기뻐했다.
그녀는 세숫대야를 탁자 위에 놓더니 뜨거운 손수건을 꺼내 쥐어짜서 소년에게 내밀면서 싸늘히 말했다. "얼굴을 닦으세요!" 소년은 즉시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는 수건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두 손을 움직이자 마자 전신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오는 것 이 아닌가! 그는 입술을 깨물며 두 손으로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으려고 애써 보 았으나 두 손이 벌벌 떨리면서 얼굴과 한 자의 간격을 둔 채 좀처럼 수건을 당길 수가 없었다.
소녀는 반신반의하면서 냉소를 쳤다. "정말 연극도 잘하시는군요." 그녀는 수건을 빼앗다시피 받아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리 주세요.
제가 얼굴을 닦아 드리겠어요.
그러나 엉뚱한 마음을 품고 손을 함부로 놀린다면 영원히 당신을 상대하지 않을테니 알아서 하세요." 소년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아, 아니오.
낭자는 얼굴을 닦아주지 않아도 되오.
나는 얼굴이 더 러워서 말인데요.
그렇게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면 아마 수건 을 못 쓰게 만들 것이오." 소녀는 그의 음성과 말투가 전과 판이하게 달라지고 내용도 요상한 것을 보자 오히려 의아심이 생겼다. '혹시 큰병을 앓고 나서 머리를 상한 것이 아닐까? 패 선생의 말을 듣건대 무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되어 오장육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고 목숨도 건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하더니 머리가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어찌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생각이 뇌리에 떠오르자 그녀는 물었다. "도련님.
저의 이름을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나한테 한번도 이름을 애기한 적이 없는데 내가 당신의 이름 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소?" 그는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도련님이 아니라 개잡종이라 하오.
우리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부르오.
노백부님은 욕이라 듣기 흉하다고 했소.
그런데 당신의 이름 은 무엇이오?" 소녀는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하여 절로 눈살을 찌푸렸 다. '말하는 모양을 보니 경박하거나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중 병을 앓고 나더니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게 아닐까?' 소녀는 속으로 약간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도련님, 정말 저를 몰라 보시겠어요? 저 시검(侍劍)을 몰라보신다는 말이에요?"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좋은 이름이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을 시검누나라고 부르겠소.
어머니께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를 할머니나 아주머니로 부르고 비슷한 또래의 여자를 누나라 부르라 했소." 시검은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곧이어 서글픈 생각이 들어 고 개를 떨구었는데 그녀의 두 눈에서는 이슬방울이 반짝였다. "도련님, 저를 속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째서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건가요?" 소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거요? 시검 누나, 어째서 우는거요? 내가 무슨 잘못 이라도 저질렀소? 우리 어머님은 기분이 나쁘면 나를 때리고 욕해요.
당신도 기분이 나쁘면 나를 때리고 욕하시오." 시검이 더욱더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수건을 들어 그의 얼굴을 닦아 주면서 나직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시녀에요.
그런데 어떻게 도련님을 때리고 욕하겠어요? 아무쪼록 하늘이 보호하시어 당신의 병이 완쾌하기를 바라겠어요.
정 말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면 어떻게 하죠?" 소년은 시검의 따뜻한 호의에 고마음을 느끼고 사의를 표했다.
얼굴 을 닦은 수건이 그렇게 더럽지 않은 것을 보고 소년은 안심을 했다.
그는 시검이 매일 그의 얼굴을 닦아 준것을 모르고 있었다.
시검은 쓴 웃음을 지으며 나직이 물었다. "도련님, 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면 다른 일은 기억하세요? 그럼 도 련님은 어느 방의 방주인지 아세요?" 소년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방주가 아니오.
백부님이 나에게 무공을 가르쳤소.
그런데 갑 자기 나는 반신이 뜨거워지고 반신이 얼음같이 차가워졌소.
그래서 나 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을 느끼고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이외 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시검누나, 내가 지금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당 신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오?" 시검은 소년이 계속 동문서답을 하자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기억을 잃어버린 모양이구나.' 이때 소년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백부님은 어떻게 되었소? 그 분은 나에게 흙으로 빚은 인형에 새겨 져 있는 선을 따라 무공을 연마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반신이 뜨겁고 반신이 차갑게 변하는지 그에게 물어봐야 겠소." 시검은 그가 흙으로 빚은 인형이라는 말을 하자 마음 속에 짚히는 바 가 있었다.
칠일 전 그의 옷을 바꿔 입히게 되었을 때 그의 품 속에서 하나의 나 무 상자가 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그 나무상자를 열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열여덟 개로 된 남자인형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평소 방주가 여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옷을 입지 않은 인형, 즉 볼성 사나운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뚜껑을 닫고 서 랍속에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이 흙으로 빚은 인형을 그에게 보여준다면 혹시 그가 주화입마되기 전의 일을 기억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서랍을 열고 그 나무상자를 꺼내 소 년에게 내밀며 물었다. "바로 이것인가요?" 소년은 그것을 보자 반색하며 말했다. "그렇소.
그곳에 있었군.
백부님은 어디로 갔소?" 시검은 반문했다. "백부님이라니요?" 소년은 그녀의 반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백부님을 모른단 말이요? 그는 마천거사라고 하오." 시검은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한번도 마천거사 사연객이라는 이름을 그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제 의식을 회복하셨으니 다행이예요.
예전의 일 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이 없어요.
날이 아직 밝지 않았으니 더 주무시도록 하세요.
어쩌면 옛날의 일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지요." 그 소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고 쟁반을 들고 방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소년은 의혹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시검누나, 어째서 옛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 라 하는 것이오?" 시검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예전에 한 일을...." 그녀는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고 몸을 돌리더니 급히 방안에서 나갔 다.
소년은 속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모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데 마침 밖에서 딱딱이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우렁찬 종소 리가 세 번 울려 퍼졌다.
그는 이것이 경고(更敲) 소리인 줄 몰랐다. '밤중에 왜 막대기를 두드리고 종을 치지?' 바로 이때 그는 갑자기 오른손 식지의 상양혈(商陽穴)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손목 으로, 그리고 손목에서 곧장 위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깜짝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곧이어 왼쪽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이 뼈를 에일 것처럼 싸늘해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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