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검 누나, 나는 도대체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뭐가 뭔지 모 르겠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야기 해줄 수 없소?" 시검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머나! 한번 병을 앓고 나더니 어째서 성격마저 변하게 되었어요. 저와 같은 하인에게 누나라고 하시니!" 소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시검 누나는 어째서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자기 자신을 하인이 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구료. 그리고 그들 백부님들도 나를 방주라 부 르고, 전 형은 나에게 그의 처를 빼앗았다고 말하는 도대체 어찌된 노 릇이오?" 시검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진지한 것을 보자 결코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 했다. "도련님은 꼬박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어요. 밖에 인삼죽을 끓 여 놓은 것이 있으니 우선 한그릇 갖다 드리겠어요." 소년은 그녀가 들먹이는 말에 갑자기 심한 허기증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정말 배가 고프구료. 누나에게 어찌 수고를 끼칠 수 있 겠소? 죽은 어디에 있소?" 그는 음식 냄새를 맡고 웃으며 말했다. "아, 알겠소."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침실 밖은 커다란 방이었고, 방 한쪽 모퉁이에 조그만 화로가 놓여 있었다. 화로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고 그 위에는 조그만 솥이 얹혀져 있었는 데 죽이 끓어 부글부글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년은 시검을 한번 바라보았다. 시검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죽이 모두 타고 말았군요. 도련님, 우선 요기나 하세요. 그러면 그 동안 다시 죽을 끓여 드리겠어요. 그만 깜빡 잠이 들어 죽이 타서 풀을 쑤게 되었네요." 소년은 웃으면서 말했다. "누룽지가 더 맛있는 법이오. 걱정할 것 없소." 그는 솥뚜껑을 열었다. 대뜸 탄내가 코를 찔렀다. 솥의 죽이 거의 다 새카맣게 타버린 것이다. 소년은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인삼죽이라는 것은 본 래 쓴맛이 있었다. 거기다가 엿물도 넣지 않고 밑바닥이 타버려 더욱 쓴맛으로 변해 있 었다. 소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 모금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굉장히 쓰군!" 그는 다시 한 숟가락을 퍼서 입안에 넣은 후 말했다. "정말 쓰다. 써!" 시검은 급히 그의 숟가락을 빼앗으려 했다. "그렇게 눌었는데 먹어요?"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소년의 손등에 닿게 되었다. 소년은 숟가락 을 놓지지 않으려고 자연히 손에 힘을 주게 되었는데 그만 한가닥 반 탄력이 생기게 되었다. 순간, 시검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대경실색한 시검은 재빨리 손을 움 츠렸다. 소년은 그와 같은 사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시 한 숟가락의 죽을 떠서 먹었다. 허겁지겁 퍼 먹기는 해도 죽이 쓴 탓으로 소년의 얼굴이 우스꽝스럽 게 일그러졌다. 그 모양을 본 시검은 그만 훗,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의 탄 죽을 맛있게 잡숫다니! 그것도 무리가 아니예요. 이 며칠 동안 배가 무척 고팠을 거예요." 소년은 반솥의 탄 죽을 순식간에 깨끗히 먹어치웠다. 이 인삼죽은 풀을 쑤어놓은 상태였지만 이 죽에는 인삼이 들어있었고 그 인삼은 바로 백년 이상 묵은 것이라 크게 몸을 보호하는 효력이 있 었다. 그리하여 얼마후 그의 정신은 맑게 되고 또한 기운이 펄펄 나게 되었 다. 시검은 그의 얼굴이 불그레해진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도련님, 어떤 재간을 썼길래 저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탁 튕겨나갔 죠? 그리고 얼굴빛도 퍽 좋아졌어요."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무슨 재간인지 잘 모르겠소. 다만 그 나무 인형의 몸에 새겨져 있는 선을 따라 연마한 것 뿐이외다." 그는 물었다. "시검 누나, 나는 도대체 누구죠?" 시검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저와 농담을 하고 있 는 거예요?" 소년은 머리를 긁적긁적 하더니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나의 어머님을 보았소?" 시검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도련님은 한번도 어머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 요. 그렇군요. 도련님은 마나님의 말씀을 매우 잘 받드는가보군요. 그 래서 성격도 약간 고쳐진 것 같아요." 그녀는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그의 옛 성질이 다시 도지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아무런 동정도 보이지 않아서 안심이 되었다. 그 소년은 말했다. "어머님의 말씀은 물론 잘 받들어야지."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군." 시검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천지신명에게 감사할 노릇이군요. 이 세상에 도련님을 다스리 는 사람이 있었다니 말이예요." 바로 이때 문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방주께서 깨어나셨나요? 속하가 알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소년은 아연해져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는 시검에게 재빨리 나직이 물었다. "혹시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요?" 시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는 도련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소년은 급히 말했다. "그더러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오. 시검 누나, 시검 누나가 먼저 나에 게 좀 가르쳐 주어야겠소." 시검은 그를 한번 바라보며 소리높이 말했다. "밖에는 어느 분이세요?" 그 사람은 대답했다. "속하는 사위당(獅威黨)의 향주 진충지(陳沖之)입니다." 시검은 의젓하게 말했다. "방주께서 잠시 기다려 달라는 분부이옵니다." 사위당의 진충지는 곧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소년은 시검에게 손짓을 하고 나직이 물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요? 남에게 뭐라고 소개해야 하오?" 시검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마음 속에 근심이 생겨나게 되었 다.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도련님은 장락방의 방주이고 성은 석(石)씨이며 이름은 파천(破天) 이라고 해요." 소년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석파천, 석파천이라? 알고보니 나는 석파천이라는 사람이었구나. 그 렇다면 나의 이름은 개잡종이 아니겠군." 시검은 그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위로를 했다. "도련님, 번뇌할 것 없어요. 나중에 차차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거예 요. 도련님은 석파천, 석방주이며 장락방의 방주예요. 그러니 물론 개......가 아니죠." 이제 석파천이 된 소년은 나직이 물었다. "장락방은 무엇하는 곳이오? 또 방주는 무엇하는 사람이지?" 시검은 속으로 생각했다. '장락방이 무엇하는 곳인지 설명하기는 약간 곤란하구나.' 이와 같은 생각에 그녀는 신중히 말했다. "장락방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요. 패 선생이나 밖에 서있는 진 향 주등 모두 재간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도련님은 방의 우두머 리이고 모두들 방주님의 말에 따르죠." 석파천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오?" 시검은 말했다. "나는 시녀에 불과한데 무엇을 알겠어요? 도련님께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면 패 선생에게 물어보세요. 그는 장락방의 군사(軍師)이시니 해결해 주실 거에요. 그분은 가장 총명하시니까요." 석파천은 난처한 빛을 띠었다. "패 선생이 이곳에 없는데 당장 어디로 가서 물어야 한다는 것이오? 시검 누나, 진 향주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가 나에게 묻는 말을 내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니, 그 사람더러 가라고 하시오." 시검은 말했다. " 그에게 가라고 하면 좋지 않아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 덕여 보이면 될 거예요." 석파천은 기뻐 말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시검이 앞장을 선 가운데 석파천은 바깥의 한 조그만 객청으로 들어 서게 되었다.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사내가 의자에 앉았다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굽혔다. "방주, 방주께서는 몸이 다 나으신 것인가요? 속하 진충지가 문안드 리옵니다." 석파천은 허리를 굽히고 예를 했다. "진, 진향주, 나도 당신에게 문안드리는 바입니다." 진충지는 그만 안색이 홱 변하고 말았으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 다. 그는 평소 방주가 오만무례하고 성격이 잔인하여 사람을 잘 죽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인사를 하는데 방주가 되려 자기에게 인사를 하여 문안을 드 린다는 것은 바로 자기를 죽일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더럭 생긴 것이다. 진충지는 속으로 놀라기는 했으나 무공이 고강한 사람이었고 또한 좀 처럼 굴복하지 않는 초야의 호걸이었다. 그러니 어찌 순순히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그는 즉시 두 손에 암암일에 공력을 돋우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속하가 몇 조의 방규를 어겼는지요? 방주께서 처벌을 하여야 되겠다 면 반드시 향당(香堂)을 열어 뭇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선포해야 할 것 이외다." 석파천은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 몰라 놀람과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처벌이라니오? 무슨 처벌을 한다는 것이오? 진 향주께서 처벌을 받 아야 한단 말이오?" 진충지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속하는 본방과 방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으며 아무런 잘못도 저지 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방주께서는 자꾸 비웃음에 찬 말씀 만 하십니까?" 석파천은 시검이 잘 모르는 대목이 있으면 고개만 끄덕이라는 말을 상기했다. 나중에 천천히 패해석에게 물어 볼 작정으로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 이며 마른 기침을 한 후 말했다. "진 향주, 앉으시오. 겸손해 할 것 없소." 진충지는 말했다. "방주 앞에서 어찌 속하가 앉을 수 있겠습니까?" 석파천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음. 맞소, 맞아."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채 서 있었다. 대뜸 서로 뻣뻣해진 채 말을 나누지 못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격이었다. 진충지의 안색은 경계와 울분 그리 고 분노에 휩싸여 있었으나 석파천은 망연함과 곤혹 속에 잠겨 있는듯 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장락방의 규칙에 의하면 부하가 방주에게 기밀대사를 논하게 되었을 때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검은 객청에서 벌써 나가고 없었다. 만약에 그녀가 옆에 있었더라면 진충지에게 몇 마디 해석의 말을 했 을 것이고 방주가 가까스로 병석에서 일어난 몸이라 정신이 맑지 않으 니 진 향주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 면 모든 일이 간단해졌을 것이다. 이때 석파천은 탁자 위에 두 잔의 차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왼손으 로 한잔을 들고 오른 손으로 다른 한 잔을 들어서 진충지에게 내밀었 다. 진충지는 찻속에 독이 있는 것이 아닌지, 또는 석파천이 잔을 받는 틈을 빌어 손을 쓰는 것이 아닌지 염려되어 감히 손을 뻗쳐 찻잔을 받 지를 못했다. 이때 그가 오히려 한걸음 물러서자 쨍그랑, 하며 찻잔은 땅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석파천은 어, 하는 소리를 냈으나 미소를 띄우고 다시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미안하게 되었소." 그는 마시지 않은 자신의 찻잔을 내밀었다. "이 잔을 들도록 하시오." 진충지는 두 눈썹을 곤두세웠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의 독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내대장부 가 죽으면 죽었지 전전긍긍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방주의 무공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손 을 써서 그를 해치게 된다면 장락방이라는 용담호혈에서 도망칠 수 없 을 게 분명했다. 패 의원의 손 아래 십 초도 견디어내지 못할 그인지라 그때 죽게 된 다면 더욱더 참혹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찻잔을 받아 꿀꺽꿀꺽 다 마셔버린 후 찻잔을 탁자 위에 탁, 놓 았다. 그는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방주가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이와같이 대해주시니 아무쪼록 장락방 은 천추만대에 즐거움을 누리고 석방주께서도 백세 장수하시기를 바랍 니다." 석파천은 백세 장수하기를 바란다는 그 말은 알아들었으나 진향주가 자기를 비아냥거리는 뜻에서 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같이 인사말을 했다. "진 향주도 백세 장수하시길 바랍니다." 진 향주에게는 그와 같은 한마디가 악독한 풍자로밖에 들리지 않았 다. 그는 냉소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흐흐흐! 나의 이 목숨이 경각에 들려 있는 이때에 백세 장수라니."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낭랑히 외쳤다. "속하는 방주께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왔소이다. 다름이 아니라 어젯 밤 두 사람이 총단의 사위당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십 세 쯤되는 중년의 사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십 칠팔세쯤 되는 여인이었 습니다." 그는 힐끗 석파천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다 장검을 썼으며 능소성의 설산파의 제자인것 같았 습니다. 속하는 부하들과 함께 손을 써서 사로잡으려고 했는데 두 사 람의 검법이 고명해서 세 명의 형제가 살해당하게 되었으며 젊은 여인 만 다리에 상처를 입혀서 겨우 사로잡을 수 있었으나 사내는 그만 놓 치고 말았습니다. 방주님께 삼가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석파천은 말했다. "음. 여자는 잡고 남자는 놓쳐버렸다는 말이오? 그런데 그들 두사람 은 무엇하려고 들어왔다는 것이오? 혹시 물건을 훔치러 온 것이오?" 진충지는 말했다. "사위당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없습니다. 석파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두사람은 매우 흉악하군. 어째서 대뜸 세사람이나 죽였지?" 그는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끼고 다시 말했다. "진 향주, 나를 그 여자에게로 데려가 주시오." 진충지는 허리를 굽혔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객청에서 나갔다. 갑자기 그는 마음 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 었다. '내가 잡은 여자는 매우 아름답다. 나이도 젊고 얼굴도 고왔다. 방주 가 만약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든다면 속으로 기뻐서 나에게 어쩌면 해 약을 줄지도 모르겠구나.' 또 한편으로 그는 자기가 이와 같은 장락방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다 는 것이 한없이 서글프게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는 요행이 오늘 목숨 을 부지하게 된다면 멀리 도망쳐서 이름과 성을 감추고 은거해야겠다 고 작정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작정을 하면서도 속으로 못내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락방에서는 도망치는 사람에 대해서 제일 무거운 죄로 다스렸던 것 이다. 만약에 자기가 도망친다면 장락방의 사람들이 이 세상끝까지 쫓아올 것이며 그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그게 여간 걱정 되지 않았 다. 석파천은 진충지를 따라 집을 가로지르고 두 곳의 화원을 지나 이윽 고 한 커다란 석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네 명의 사내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석문 양쪽에 서 있었다. 사내들 은 그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 바삐 달려와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는데 공손한 가운데 전전긍긍하는 눈치가 엿보였다. 진충지는 손을 내저었다. 석문의 안쪽에는 철책이 설치되어 있고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 다. 진충지는 품 속에서 열쇠를 꺼내 그 문을 직접 열었다. 철책 안은 기 다란 통로인데 커다란 촛불을 켜놓고 있었다. 통로 끝쪽에도 네 명의 사내가 지키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의 철책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 다. 그 철책마저 지나자 더 두꺼운 석문이 나타났다. 한 백의의 여인이 등을 지고 앉아 있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진충지가 통로 쪽에서 촛대를 옮겨와 석실 문 옆의 탁자 위에 놓았기 때문에 촛불이 자연히 그녀의 얼굴을 비치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석파천은 아, 하고 부르짖었다. "당신은 설산파의 한매여협 화만자가 아니십니까?" 그날 후감집에서 화만자는 이치를 따져 사연객을 몰아세워 꼼짝 못하 도록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석파천은 그들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설산파니 한매 여협이니 하는 말뜻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력이 무척 좋아 그때 들은 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 었다. 칠 팔 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었지만 화만자의 얼굴에 별다른 변화가 없어서 석파천은 대뜸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석파천은 그 당시 온 얼굴에 흙투성이의 거지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 늘 그는 화련한 옷차림에 풍채가 뛰어난 젊은이로 변해 있었으니 화만 자가 그를 알아볼 턱이 없었다. 그녀는 분연히 외쳤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지?" 진충지는 석파천이 이 여인을 보자마자 그녀의 문파와 아호 그리고 이름까지도 갈파하는 것을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녀석의 눈썰미는 뛰어나군. 역시 그 나름대로 여자를 후리는 재 간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한 그는 그녀를 향해 호통을 내질렀다. "이 분은 우리 방주님이시다. 말을 공손히 해라." 화만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곳에서 악명이 자자한 장락방의 방주 석파천을 만나보게 되리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형인 경만종과 어젯밤 장락방으로 침입하게 되었는데 그 목 적은 바로 석파천의 신분내력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 석파천이 호색하고 음탕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었으며 많은 여인들이 당한 사실도 알고 있엇다. 이제 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녀는 감히 그에게 자기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즉시 얼굴을 돌 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쇠와 쇠가 부딛치는 소리가 들렸 다. 원래 그녀의 손과 발에 수갑과 차꼬가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석파천은 어머니로부터 손발에 쇠사슬을 찬 죄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친히 목격하게 되자 진충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 향주, 이 여협의 손과 발에 묶여 있는 것이 바로 수갑과 차꼬가 아니오?" 진충지는 방주가 그와 같은 당연한 말을 묻는 것이 무슨 의도인지 몰 랐으나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석파천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쇠사슬로 묶어 놓은 것이오?" 진충지는 확연히 깨달았다. '알고보니 방주께서는 내가 화소저에게 지나친 대접을 했다고 나를 탓하는 것이구나.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그와 같이 독수를 쓴 것이로 군. 빨리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서 보안책을 세워야 되겠다. 사내대장 부가 한 여자 때문에 목숨을 잃는 데서야 너무 억울한 노릇이 아니겠 는가?' 그는 재빨리 말했다. "예, 이 속하가 죄를 지은 것을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내 화만자의 쇠사슬을 풀어주었 다. 화만자는 손발이 자유롭게 되자 더욱 더 당황하게 되었다. 일시 손과 발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으며 지략과 용기도 여느 무림 고수에 못 지 않았다. 만약에 석파천이 죽음으로 그녀를 위협한다면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 지 않고 당당히 언변으로 맞설 수 있으며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기를 사로잡은 진 향주를 꾸짖으며 좋은 말로 자기에 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불칙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만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여지껏 몸을 깨끗이 지켜온 것이다. 따라서 석파천의 악명을 생각하자 그만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된 것이었다. 전전긍긍한 그녀는 얼굴을 차가운 석벽에 갖다대며 속으로 생각했다. '말소리를 들어보니 그 녀석이 아닌 것 같다. 몇 번 쳐다볼 수 있다 면 확인할 수 있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좀처럼 석파천의 얼굴을 바라볼 엄두를 내 지 못했다. 진충지는 이때 몰래 운기조식을 해보았다. 자기가 마신 차에 별로 이 상한 점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 독이 그렇게 무서운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주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방주님, 어떻습니까? 화 여협을 방주님의 방으로 모시고 가서 이야 기를 나누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곳은 어둡고 또 좁을 뿐만 아니 라 차나 술이 없으니 귀빈을 접대할 장소가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석파천은 기뻐하며 말했다. "좋지요! 화 여협, 나의 방에는 연와탕이 있소. 매우 맛이 좋으니 한 그릇 잡숴 보시구료." 화만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안 가요! 먹지 않겠어요" 석파천은 다시 권했다. "매우 맛이 좋다오. 한 그릇만 잡숴 보시오." 화만자는 노해 부르짖었다. "나를 죽일 테면 빨리 죽여라! 나는 설산파의 제자이다. 너에게 결코 용서를 빌지 않겠다. 이 몰염치한 악적아! 감히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다니, 차라리 이 석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으면 죽었지 너의 방 으로는 가지 않겠다!" 석파천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마치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니 정말 이상한 노 릇이군. 내가 감히 어떻게 당신을 죽이겠소? 연와탕이 정말로 먹기 싫 으면 그만두고 닭고기나 오리고기를 먹으면 될 것이 아니겠소?" 그는 진충지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진 향주, 우리에게 그런 고기가 없소?" 진충지는 즉시 대답했다. "있습니다. 화 여협이 먹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 있기 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대령하겠습니다." 화만자는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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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가씨는 죽는 한이 있어도 장락방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 나의 입을 더럽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석파천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리에 나가서 사 먹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