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18편 (18/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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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18편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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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가씨는 죽는 한이 있어도 장락방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
나의 입을 더럽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석파천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리에 나가서 사 먹고 싶소? 은자가 있소? 없다면 진 향주, 당신에게 은자가 있다면 약간만 빌려 주도록 하시오." 진충지는 즉시 말했다. "있습니다.
제가 갖다 드리죠." 화만자가 소리쳤다. "싫다.
싫어.
죽어도 싫다." 석파천은 말했다. "아마 당신에게 은자가 있는 모양이구료.
진 향주는 당신의 다리에 상처가 났다고 했소.
나는 본래 패 선생게게 치료를 받게 하려고 생각 했으나 당신이 그토록 장락방을 싫어한다면 거리로 나가서 의원을 찾 아 치료를 받도록 하시오.
피를 많이 흘리면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소." 화만자는 그가 자기를 놓아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양기 가 쥐를 가지고 놀듯 자기를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녀 는 분노에 찬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어떠한 간계를 쓰든 간에 나는 당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 을걸!" 석파천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곳은 감옥인 것 같은데 뭐가 좋다고 안 나가려 하시오? 역시 빨 리 나가도록 하시오." 화만자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그의 지금까지의 언행에 오히려 어리 둥절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태도를 보아 자기를 놓아 주려는 뜻 이 결코 거짓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렇다면 나의 검을 왜 돌려주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만약 무기가 있으면 석파천이 자기에게 무례 한 행동을 할 때 설사 싸워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결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진충지는 고개를 돌려 방주의 안색을 살폈 다.
석파천은 말했다. "화 여협은 검을 사용하는 모양이군.
진 향주, 검을 되돌려 주는 것 이 어떻소?" 진충지는 말했다. "예.
검은 밖에 있으니 소저가 나가는데로 돌려드리죠." 화만자는 이곳에서 한시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죽을 결심을 한 그녀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석파천과 진충지 두 사람은 그녀의 뒤를 따라 통로를 지나 석실에서 나오게 되 었다.
진충지는 방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재빠른 동작으로 화만자의 장검을 찾아 방주에게 건네 주었다.
석파천은 그 검을 받아서 화만자에게 돌 려주었다.
화만자는 그가 검을 내밀 때 그 기회를 틈타 손을 쓰게 될까 두 팔에 진기를 돋우고 재빨리 두 손을 내밀어서 검을 낚아채듯 받아 쥐게 되 었는데 다섯 치 정도 뽑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끔 석파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속으로 흠칫했다. '아! 맞다.
바로 이 녀석이다.' 진충지는 그녀의 검법이 뛰어난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혹시나 그녀 가 검을 뽑아서 방주를 해칠까 재빨리 등뒤에 있는 한 명의 제자로부 터 한 자루의 칼을 빼앗듯이 옮겨 받아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석파천은 입을 열었다. "화 여협, 다리의 상처는 어떻소? 상처 좀 봅시다.
만약에 뼈가 부러 지기라도 했다면 아황의 부러진 다를 이어 주듯이 내가 이어 드리리 다." 무심히 한 마디 한 것이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화만자는 그의 시선이 자기의 다리쪽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대뜸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내질렀다. "경박하고 무례하군!." 석파천은 의아하여 물었다. "아니? 그 말이 뭐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오? 내가 당신의 상처를 보 자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악의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고, 그의 얼굴 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화만자는 그가 자기를 희롱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장검을 뽑아 들고 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이 석가야! 그곳에서 한 걸음만 더 다가온다면 이 아가씨는 너와 사 생결단을 내고 말겠다!" 그녀의 장검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장검의 끝이 석파천의 가슴팍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충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화 소저, 아니 젊고 준수한 우리 방주님께서 당신을 보고 호감을 느 낀 것은 그대의 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천하에 얼마나 많은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방주를 모시고 하룻밤을 보냈으면 하고 바라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화만자의 안색이 창백해져서 대막비사(大漠飛沙)라는 일 초를 펼쳤 다.
검이 세찬 바람을 일으키면서 석파천의 가슴팍을 찔러 왔다.
석파천 은 이때 내력이 심후하기는 했으나 적을 상대하는 초식을 익혀 본 적 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적해 본 경험이 없었다.
화만자가 일 검을 찔러오자 그는 그만 당황하여 몸을 날렸다.
다행히 그의 내공이 절묘해서 둔한 손발의 놀림이긴 했으나 자연스럽게 휙, 하니 수장 밖으로 피할 수가 있었다.
화만자는 그가 몸을 날리는 것이 비호처럼 재빠른 것을 보고 자세가 어색하긴 했으나 뛰어난 경신법인지라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그야말로 한평생 처음 보는 재빠름인지라 멍해져서는 입을 다물지 못 한 것이다.
석파천은 멀찌감치 서서는 두 손을 내저으며 큰소리로 외 쳤다. "화 여협, 당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인정해 주겠소.
어째서 함부로 검 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좋소.
떠나고 싶으면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나는 당신에게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그는 화만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데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으 리라 생각했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지라 시검에게 물어보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 하고 즉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놓으려 했다.
화만자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냉랭히 물었다. "이 석가야, 나를 놓아주겠다는 것이 혹시 밖에다가 사람을 매복시켜 저지하려는 것이 아니냐?" 석파천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내가 왜 당신을 막는다는 것이오? 잘못하다가는 당신의 검에 찔린 판이고 그렇게 되면 큰일이지 않소." 화만자는 반신반의했다. '어디 그의 간계가 어떤 것인지 좀더 두고 보기로 하자.' 그녀는 매섭게 그를 흘겨 보았다.
석파천이 자기가 찾던 사람임을 확 인하고 감히 설산파의 제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하는 생각에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다리의 상처 때문에 그녀는 자연히 다리를 절룩이게 되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저 악적 앞에서 빨리 떠나야지 하는 생각에 상처의 고통 을 참고 더욱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진충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장락방의 총타는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을 지키고 있는 사 람들이 있소.
화 소저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그런 허술한 곳 이 아니지요." 화만자는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버들가지 같은 눈썹을 곤 두세우며 장검을 가로로 세워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진충지는 웃으며 말했다. "나의 의견으로 말하면 역시 이 진모가 소저를 호송해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그런 말씀이오." 화만자는 생각을 해보았다. '남의 집 처마 아래 서게 된다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너무 경솔하여 상대방을 얕잡아본 끝에 실수를 해서 사로잡히게 되었 으니 이 장락방 총타에서 뛰쳐 나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노릇이 아 닐 것이다.
잠시 화를 참고 사형제들과 같이 다시 찾아와 오늘의 치욕 을 갚도록 하자.' 이와 같은 생각에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그렇다면 부탁하겠어요." 진충지는 석파천에게 말했다. "방주, 속하는 화 소저를 보내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는 곧 귓속말로 나직이 물었다. "정말 그녀를 놓아보내는 것입니까? 아니면 밖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사로잡아와야 합니까?" 석파천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녀를 보내주는 것이오.
사로잡아 와서 무엇 하겠다는 것이 오?" 진충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는 속으로 화만자의 나이가 많기 때문에 아마도 방주의 마음에 들 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그는 화만자의 고운 살결을 보고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방주가 그녀를 곱게 보지 않은 이상 너무 겸손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자, 가자!" 석파천은 화만자의 손에 들린 예리한 검이 시퍼런 빛을 번쩍이는 것 을 보자 약간 두려운 마음이 앞서서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진충지가 그녀를 호송해서 문 밖으로 내보내 주니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곧 자기 방을 찾아 되돌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옆으로 피하는 등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방으로 되돌아 온 그는 즉시 화만자가 진 향주에게 어째서 사로잡히 게 되고 또 그녀가 어찌하여 자기를 검으로 찌르려 했는지를 시검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 패해석이 들어왔다. "패 선생, 방금 기이한 일을 겪게 되었소이다." 그는 화만자를 만나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패해석은 고개를 끄덕 이며 매우 어두운 빛으로 말했다. "방주, 속하가 방주에게 청을 드릴 일이 있습니다.
사위당의 진향주 는 방주에 대해서 매우 공손하며 본방에 대해서도 큰 공을 세운 사람 입니다." 그는 힐끗 석파천을 바라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쪼록 방주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석파천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죄를 용서해 주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 사람은 매우 착해 보이던데?"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말했다. "패 선생, 그가 무슨 병이라도 걸렸다면 패 선생이 치료를 해주시도 록 하구료." 패해석은 크게 기뻐하면서 급히 읍을 한 후 말했다. "방주께서 베푸신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그는 총총히 물러났다.
원래 진충지는 화만자를 문 밖으로 내보낸 이후 패해석에게 석방주를 찾아 뵙고 해약을 주십사 하는 청을 드리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패해석은 그의 눈을 살피고 맥박을 짚어본 결과 중독 증세가 대단하 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주가 고개만 끄덕이면 이쯤은 단번에 해독시킬 수 있다.' 본래 그는 석 방주가 독을 쓴 이상 가볍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젊 은 나이에 수단이 악랄하여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방주를 찾아온 것 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입을 열자마자 용서를 받게 되고 석 방주가 자기의 말에 순순히 따르자 그를 치료하는 일이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커다란 일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도 이런 방법을 쓰면 큰변고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니 여간 기쁘지 않았다.
패해석이 방에서 나간 후 석파천은 시검에게 자기의 궁금증을 물어보 았다.
그제서야 그는 장락방의 총단이 진강(鎭江)이라는, 남북 요도에 위치 한 큰 고을에 위치해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 석파천은 장락방의 방주이며 장락방은 내삼당과 외오당으로 나뉘 어져 있으며 석파천이 방의 무리를 통솔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내었 다.
방에는 구름처럼 많은 고수들이 있고 최근에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 어 패해석과 같은 커다란 재간을 지닌 사람도 방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장락방의 기세는 정말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장락방이 도대체 강호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 조직이며, 설산파와 어떤 원한이 있는지 시검 역시 하녀에 불과한지라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석파천은 이때 반쯤 이해를 하게 되었으나 매우 애매한 상태였다.
그의 사람됨이 총명하기는 했으나 세상 일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적어 중간의 여러 가지 관건과 경위를 연관시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몰두하더니 입을 열었다. "시검 누나, 당신들이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소.
나 역시 꿈 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님이 틀림없소." 그는 신중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 석 방주라는 사람은 틀림없이 따로 있을 것이오.
나는 다만 산속 에 살고 있던 소년이지 무슨 방주인가 하는 사람은 아니외다." 시검은 웃으며 말했다. "천하에 설령 용모가 비슷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이 같이 똑 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거예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도련님은 최근 무공을 연마하다가 아마도, 아마도 머리에 충격을 받 은 모양이에요.
그러니 저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빨리 가서 좀 쉬도록 하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차츰 기억하게 될거예요." 석파천은 말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나는 마음속에 풀지 못할 많은 의혹을 갖고 있소.
그 모든 문제를 당신에게 묻고 싶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시검 누나, 당신은 왜 하녀가 되었소?" 시검은 눈가를 붉혔다. "누가 좋아서 하녀가 되겠어? 저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어요.
의지 할 데 없는 저를 어떤 사람이 거둬들이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몇 년 후 나를 장락방에 팔았어요.
두 총관(總管)께서 도련님을 시중 들라 하기에 그때부터 도련님을 시중들게 된 거예요." 석파천은 말했다. "그렇다면 싫은 일을 하느니보다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 시중을 들어줄 필요가 없소.
무슨 일이든지 내 스스로 할 수 있으니까 말이오." 시검은 다급해져서 말했다. "나는 사고무친한 몸이에요.
그런데 어디로 가란 거예요? 두 총관께 서는 방주님이 저의 시중을 마다하신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틀림없이 제가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고 인정하시고 저를 때려 죽이고 말 거예 요." 석파천은 말했다. "내가 그들께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부탁하겠소." 시검은 침울하게 말했다. "역시 방주님은 병이 완쾌되시지 않았어요.
이 같은 상황하에서 저는 떠날 수가 없어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방주님이 저를 업신여기고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즐거이 방주님의 시 중을 들겠어요." 석파천은 말했다. "떠나기 싫다니 나는 더 바랄 나위가 없소.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당 신이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언제 당신을 괴롭혔소? 나는 한번도 남을 괴롭힌적이 없다오." 시검은 속으로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입을 비쭉이며 말했 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석 방주께서는 정말 개과천선한 셈이라고 모두들 인정하겠군요.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그녀는 석파천이 전혀 경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속 으로 기뻐했다.
물론 그녀는 십중팔구 석 방주가 일시 기분이 좋아 그렇게 해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 받은 느낌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 다.
석파천은 이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석 방주라는 사람은 매우 흉악했던 모양이다.
사람들 마구 죽이 고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 다.
더군다나 그는 남의 처를 빼앗기까지 하였다고 하지 않던가? 도대 체 무엇 때문에 빼앗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밥을 짓고 옷을 빨라고 그 런 것일까?' 그는 그와 같이 포악한 방주와 나중에 맞부딪치게 된다면 자기가 어 떻게 해야 할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패해석에게 내 일 장락방의 고수들에게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사실을 털어 놓아야겠 다고 작정을 했다.
반면 그는 자기가 방주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말을 듣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라고도 느꼈다.
그러니까 그는 한편으론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진짜 방주가 돌아오게 되 었을 때 자기를 발견하고 크게 노할 것이며, 어쩌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이 떨려 오기도 했다.
해질 무렵, 부엌에서 여덟 가지의 푸짐한 음식을 만들어 날라왔고 시 검은 그가 밥 먹는 것을 시중들었다.
석파천은 그녀에게 함께 먹자고 했다.
시검은 얼굴을 붉히며 막무가 내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석파천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앉아서 음식을 맛있게 먹고 밥도 네 그 릇이나 먹어치웠다.
저녁밥을 먹은 후 그는 시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들이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그는 시검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검은 속으로 이 도련님이 또 옛날 버릇이 나와서 불칙이 마음을 품 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재빨리 인사를 한 수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석파천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할 일도 없고 해서 좌우에 열 여덟 개의 목각 인형을 꺼내놓고 다시 그 경맥대로 운기행공 했다.
삼라만상이 잠든 고요한 밤에 갑자기 똑똑똑, 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파천은 눈을 떴다.
창문이 천천히 열어 젖혀지면서 가늘고 흰 손이 안으로 뻗쳐 들어왔 다.
그 손은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어렴풋하나마 손목 저쪽 에 엷은 녹색옷의 소맷자락이 보였다.
석파천은 마음 속으로 짚히는 바가 있었다.
그날밤 나타난 갸름한 얼굴에 엷은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머리에 떠 오른 것이다.
그는 벌떡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 앞으로 달려가서는 불렀다. "누님!" 그러자 창밖에서 혀를 끌끌차는 소리와 더불어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 왔다. "쳇! 어째서 누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빨리 나오기나 해요." 석파천은 창문을 밀어붙이고 성큼 뛰어나왔다.
그런데도 눈앞엔 사람 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때 갑자 기 눈앞이 캄캄해 졌다.
그 누구의 부드럽고 가늘며 따뜻한 손가락이 자기의 두 눈을 덮고 있 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등뒤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코에 향긋한 난초와 같은 향기가 풍겨왔다.
석파천은 내심 놀랍기도 기쁘기도 했다.
이 소녀가 자기와 장난을 한 다고 생각하니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에 황량한 산속에서 친구 하나 없이 자라온 터였으며, 옆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황밖에 없었다.
이 때 갑자기 젊은 여인이 자기에게 장난을 걸자 그는 매우 흐뭇해져 서 뒤로 손을 돌려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어디 내가 당신을 잡지 못하는가 두고 봅시다." 그가 재빨리 손을 돌렸으나 그 소녀는 미꾸라지보다 더 매끄럽게 빠 져나갔다.
손을 뻗친 그 순간 그 소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꽃나무 덤 불 속에서 파란 그림자가 번쩍했을 뿐이다.
석파천은 허공을 더듬자 재빨리 몸을 돌려서 그 녹색이 번쩍이는 곳 으로 손을 뻗쳐 잡으려고 했다.
허나 손에 잡히는 것은 장미의 가시였 다.
그는 그만 소리를 내질렀다. "아야!" 소녀는 앞쪽으로 자색빛 장미나무 덤불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며 나직 이 웃었다. "바보! 소리를 내지 말고 빨리 나를 따라와요." 석파천은 그녀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 랐다.
소녀는 담장 곁에 이르러 담장 위로 몸을 솟구치려고 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두사람이 그 기척을 듣고 달려왔다.
한 사람은 손에 칼을 들고 있었고 또 한사람은 두 자루의 조그만 도 끼를 들고 있었다.
그들 두사람은 소녀의 앞을 가로막고 호통을 내질 렀다. "게 서시오! 누구요?" 바로 이때 석파천은 소녀곁으로 다가가 서게 되었다.
두 사람은 화원 을 순시하는 방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석파천과 그녀의 히히덕거리는 표정을 보자 재빨리 양편으로 물러나며 허리를 굽혔다. "속하는 방주의 친구이신 줄 몰랐습니다.
용서하십시요." 그들은 소녀에게 약간 허리를 굽혀 사과한다는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 소녀는 그들에게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고 석파천에게 손짓을 하 더니 몸을 날려 담장 위로 올라갔다.
석파천은 이토록 높은 담장 위로 자기의 재간으로는 도저히 뛰어올라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와 제자들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체면불구하 고 두 발로 땅을 차며 곧장 위로 올랐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었다.
발밑에서 뜻박에도 한가닥 세찬 기운이 뻗쳐나면서 휘익, 하니 그의 몸뚱아리는 담장 위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날렵하게 담장을 뛰어넘고 만 것이 아닌가! 두 명의 제자들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칭찬을 했다. "훌륭합니다!" 곧이어 담장 밖에서는 쿵, 하니 무거운 물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 리가 들렸다.
원래 석파천은 어떨결에 뛰어 올랐으나 땅바닥에 떨어지 법을 몰라 그만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었다.
제자들은 아연해져 서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이 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주의 경신법이 그토록 신묘한데 그야말로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꼴 을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담장 위에 서있던 소녀는 그 같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그가 쓰러진 후에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자 재빨리 몸을 날려 담장에서 뛰어내려서 석파천을 부 축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천 오라버니, 어떻게 된거에요? 병이 아직 다 낫지 않은 모양인데 억지로 기운을 쓸 건 없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그의 겨드랑이에 집어넣고 그를 부축해서 일으 켰다.
석파천은 엉덩이가 여간 아프지 않았으나 소녀의 부축을 받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때 소녀가 다시 물었다. "우리들은 역시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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