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으세요? 걸음 을 옮길 수 있겠어요?" 석파천은 내공이 심후했다. 조금전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삽시간에 아픔이 가시는 걸 느꼈다. 그는 말했다. "됐소. 이제 아프지 않소. 물론 걸어갈 수도 있소." 소녀는 그의 오른 손을 잡고 물었다. "이 며칠간 만나지 못했는데 내가 보고 싶지 않던가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약간 쳐들며 석파천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 았다. 석파천은 청수하고 희며 고운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그녀의 조그만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마저 떠올라 있었다. 달빛이 그 녀의 맑은 눈동자에 비쳐지자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두 개의 밝은 별 처럼 빛을 반짝였다. 거기다가 그의 코에는 소녀 특유의 향기가 풍겨 오고 있어서 그의 가슴이 갑자기 울렁이는 것처럼 야릇해졌다. 그는 남녀의 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나 이십 세의 젊은이 라 아무리 바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광경을 대하게 되는 처지에 놓 이게 되자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소녀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만 어리둥절해져서는 말했다. "그날밤 당신이 나를 보러 와서는 금방 떠나가지 않았소? 그후 나는 한시도 당신을 잊어 본적이 없소." 소녀는 방긋 웃엇다. "그토록 오랫동안 실종되었고 또 많은 날을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거예요. 이 며칠간 밤마다 계속해서 당신을 보러 왔는데 당신은 알고나 계신 거예요?"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무공 연마에 그토록 정성을 쏟길래 혹시나 상처를 치료하는 내공의 운공조식에 방해될까 봐 감히 부르지도 못했어요." 석파천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오? 나는 전혀 몰랐소. 좋소! 누님은 어째서 나에게 이토록 잘 대해주는 것이오?" 소녀는 갑자기 안색이 일변해서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나를 뭐라고 불렀죠? 나는 이미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길래 밖에서 어떤 나쁜 여자와 함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흥! 이제 다른 사람을 누님, 누님하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 나 에게까지 누님이라 부르는군요." 조금 전까지도 그녀는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그녀가 화를 내자 석파천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나는, 나는......" 소녀는 그가 변명을 하지 못하자 더욱더 울화가 치밀어올라 대뜸 손 을 뻗쳐 그의 오른쪽 귀를 잡아 당기며 노해 부르짖었다. "이 며칠간 도대체 어떤 천한 계집년과 함께 있었어요? 그녀를 누님, 누님이라고 부른 것이겠죠? 빨리 말해! 빨리 말해요!" 그녀는 빨리 말하라고 하면서 힘주어 그의 귀를 잡아 당겼는데 잇달 아 세번 말하면서 세번 귀를 잡아당기게 되었다. 석파천은 아파서 아야, 하는 소리를 내지르면 재빨리 말했다. "이렇게 거칠다니, 나는 당신과 놀지 않겠소." 소녀는 다시 힘주어 그의 귀를 잡아 당기며 말했다. "나를 떨쳐버리고 상대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쉽지는 않을걸! 어떤 여자와 함께 있었는지, 빨리 말해요!" 석파천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한 여자와 함께 있었소. 그녀는 내 방에서 자기도 했지요." 소녀는 크게 노하여 더욱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석파천의 귀에서 피가 맺히도록 잡아당기며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내 당장 가서 그녀를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석파천은 놀라 부르짖었다. "아! 그녀는 시검 누나이외다. 그녀는 연와탕과 인삼죽을 끓여서 나 에게 주었소. 죽을 쑨다는 것이 누룽지를 만든 적도 있었소. 그러나 그녀는 매우 좋은 사람이오. 누...... 당신은 그녀를 죽여서는 안 돼 요." 원래는 소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 다가 그녀는 갑자기 헤, 하고 웃으면서 혀를 차고는 힘주어 그의 귀를 다시 한번 잡아당기며 말했다. "쳇! 나는 누님, 누님하길래 어떤 계집애를 말하는가 했더니 그 못난 계집애를 말하고 있었군. 당신이 나를 속였어! 침도 바르지 않고 하는 거짓말에 누가 속을 줄 알고?" 그녀는 설명을 햇다. "이 며칠간 나는 매일밤 창 밖에서 지켜보았어요. 그 계집애는 매우 예의를 지켰어요. 당신이 착한 것으로 해두죠." 그녀는 다시 손을 뻗쳐 그의 귀를 잡으려고 했다. 석파천은 그만 깜짝 놀라 머리를 기울려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 다. 한데 소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귀를 살짝 어루만지며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물었다. "천 오라버니, 아프지 않으세요?" 석파천은 시큰둥하니 대답을 했다. "물론 아프지요." 소녀는 활짝 웃었다. "잘 되었어요. 누가 당신더러 나를 속이라고 햇어요? 그리고 나를 이 상하게 누님이라고 부르니까 벌을 받아야 해요." 석파천은 재빨리 말했다. "나는 남에게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어머 님에게 들은 적이 있소. 내가 잘못 불렀단 말이오?" 소녀는 그를 곱게 흘겨 보았다.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인사치레 같은 것을 따졌던가요? 좋아요! 마음 속으로 승복하지 못하겠다면 나의 귀를 잡아당기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귀를 그의 얼굴 앞으로 디밀 었다. 석파천은 그녀의 얼굴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고 손을 들어 그녀의 귀 를 몇 번 만지작거리고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잡아당기지 않겠소." 그는 물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만 되겠소?" 소녀는 뾰루퉁해서 말했다. "예전에 나를 어떻게 불렀죠? 나의 이름마저도 잊었다는 거예요?" 석파천은 정색하며 말했다. "소저, 내 당신에게 말하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알고 있소. 나는 당신의 천 오라버니가 아니오. 나의 이름은 석파천이 아니라 개갑종이 오." 소녀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잡고 몸 은 반쯤 돌리게 하여서는 달빛에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만들 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소리내어 웃었다. "호호호! 천 오라버니, 정말 농담도 잘하시네요. 방금 너무나 그럴싸 하게 이야기하길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정말 사람을 잘못 보 았나 했죠. 빨리 가기나 해요."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석파천은 다급해져서 말했 다. "나는 장난을 친 것이 아니오. 당신을 정말 사람을 잘못 보았소. 자, 보시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있지 않소?"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석파천 쪽으로 돌리더니 오른손으로 그의 왼손을 잡고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꼭 당신이 이겨야만 끝내겠어요? 좋아요! 내가 당신의 뜻에 따르기로 하죠. 저의 성은 정(丁)가이고 이름은 당(糖)이예요. 당신은 줄곧 나를 띵땅이라고 불렀죠. 기억하세요?" 그 몇 마디 말을 하고 별안간 그녀는 몸을 바로 돌리더니 그의 귀를 잡고 나는 듯 앞으로 달려나갔다. 석파천은 그녀가 잡아 당기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앞으로 치닫게 되었 다. 따라서 몇걸음 휘청거렸으나 곧 그녀를 따라 붙을 수 있었다. 처음엔 씩씩거리면 매우 힘겨워했으나 한동안 급히 달리게 되자 내력 이 조절되면서 발걸음이 점점 가볍게 되었다. 이제는 전혀 힘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얼마나 달려가게 되었을까? 눈앞에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때 걸음을 멈췄는데 어느 덧 냇가에 도달해 있었다. 정당은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몸을 날려 냇가에 메어 두고 있는 한 척의 조그만 뱃머리 위로 올라섰다. 석파천은 아직도 내공을 경신법으로 변화시키는 수법을 모르고 있었 다. 쿵, 하고 뱃머리에 내려서게 되자 배가 출렁이며 크게 흔들렸다. 정당은 아, 하고 부르짖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이것 보세요. 배 밑바닥이 하늘을 보도록 할 참이에요?" 그녀는 뱃머리의 삿대를 들더니 가볍게 한번 저어 배를 냇물 가운데 로 나아가게 했다. 달빛이 비추고 있었으며 냇물 한복판에 한쪽 모퉁이가 으스러진 달이 둥실 떠서 일렁이고 있었다. 정당은 삿대를 들어 냇물을 한번 저었다. 그러자 냇물 속의 달이 산 산조각 나면서 줄기줄기 은빛 광채로 변하면서 조그만 배는 앞으로 일 렁이며 나아갔다. 석파천은 양쪽 언덕가에 수양버들이 심어져있고 멀리 드문드문 몇 채 의 인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밤은 깊고 주위는 조용했며 그윽한 향기가 풍겨왓다. 그것은 언덕 위의 꽃향기일까, 아니면 정당의 몸에서 나는 향기일까? 조그만 배는 몇 번 구비를 돌더니 조그만 포구로 들어서서 어느 돌다 리 아래에 이르러 정지했다. 정당은 조그만 배의 밧줄을 다리가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에 매었다. 언덕 위의 수영버들은 매우 무성했으므로 조그만 다리가 거의 뒤덮힐 지경이었다. 달은 버드나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잇었다. 조그만 배는 돌다 리 아래에 서 있었는데 마치 천연적인 조그만 집을 이루어 놓은 것 같 았다. 석파천은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곳은 정말 멋있군! 설사 대낮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배가 멈추어서 있는 것을 알아 볼 수 없겠는데?" 정당은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하는 게 항상 저렇다니까!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게 뭐가 그리 좋 아요?" 그녀는 선실로 기어들더니 돛자리를 한 장 꺼내서 뱃머리에 놓았다. 그녀는 두 쌍의 젓가락, 잔, 술 한 주전자를 꺼내들고 웃으면서 말했 다. "앉아서 술을 마시도록 하세요." 그녀는 쟁반에 담은 땅콩과 완두콩, 말린 고기를 석파천 앞에 내려 놓았다. 대뜸 술향기가 퍼졌다. 사연객은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간혹 한두 잔 마실 정도였 다. 석파천은 가끔 그와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그 술은 모두 고량주 였다. 이때 그는 정당이 따라 주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술은 노란 빛을 띤 가운데 발그레한 빛이 서려 잇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시자 한가닥 따뜻한 기운이 뱃속으로 곧장 뻗치면서 입안이 얼얼하면서도 약간 쓴맛이 났다. 정당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이십 년 묵은 소홍(紹興)의 여아홍(女兒紅)이예요. 맛이 그 런대로 괜찮죠?" 석파천이 막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을때 별안간 머리 위에서 굵직 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십 년 묵은 소홍의 여아홍인데 맛이 나쁠 리가 있나?" 순간, 정당의 손에 들려져 있던 술잔이 뱃머리에 떨어지면서 쨍, 하 는 소리를 내었고 잔 안의 술이 그녀의 치마에 튀었다. 곧이어 술잔이 데구르르 굴러 퐁당, 하니 냇물 속으로 떨어졌다. 정당은 그만 사색이 되어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석파천의 손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오셨어요." 석파천은 고개를 들고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쌍의 다리가 머리 위에 드리워져서 흔들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 그 사람은 다리 위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두 발을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뜨리고 있었는데 다시 한 자만 더 내려오게 된다면 석파천의 머리에 닿을 정도였다. 그 발에는 하얀 버신이 신겨져 있었고 수(壽)자를 수놓은 자색 비단 으로 만든 신이었는데 깨끗했다. 이때 머리 위의 그 늙으수레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렇지! 너의 할아버지가 왔다. 이 계집애야, 몰래 사내를 만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내가 고생해서 모아 놓은 이십 년 묵은 여아홍을 훔쳐내어 정랑에게 먹이다니!" 정당은 어거지로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그는, 그는 정랑이 아니예요. 그냥 친구예요." 노인은 노해 부르짖었다. "퉤! 그냥 친구인데 그토록 잘 대해줘? 할아버지가 생명처럼 아끼는 술을 감히 훔쳐내다니!" 그는 석파천에게 들으라고 호통을 내질럿다. "이 꼬마 도적아, 썩 기어 나오너라! 어디 한번 보자. 내 손녀딸이 좋아하는 정랑이 어떤 상판을 하고 있는지 좀 보잔 말이다." 정당은 왼손으로 석파천의 오른손 손바닥을 쥐고 오른손 식지로 그의 손바닥에 글을 쓰며 입으로는 큰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이 친구는 우둔하고도 못났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보시게 되면 좋아하시지 않을 것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훔친 술은 특별히 그에게 먹이려고 한 것이 아니예요. 흥! 이 사람은 그만한 자격도 없어요! 사실은 제가 먹고 싶어서 아무나 잡아 와서 대작을 하려고 한 거예요." 그녀가 석파천의 손바닥에 쓴 글은 절대로 장락방주라는 신분을 밝혀 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파천은 어머니에게 글을 배운적이 없었다. 사연객도 그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일자무 식이었다. 그녀가 자기의 손바닥에 마구 이리저리 간지럼을 태우는 것을 느꼈으 나 그는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간질간질 한 것이 꽤나 재미있는 장난 같았다. 그런데 자기를 우둔하고 추악하다고 말하고 그녀의 술을 마실 자격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자 그는 그만 화가 나서 그녀의 손을 홱 뿌리쳐 버리고 말았다. 정당은 재빨리 그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다시 글을 썼다. 목숨을 위 협받게 되었으니 반드시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글귀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힘주어 몇 번 잡아 주었다. 이것은 다정함을 시사하는 것이었고 은밀히 당부하는 행동이기도 했 다. 석파천은 그녀가 자기에 다정함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속으로 흐 뭇해져서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사연인지 그는 여 전히 모르고 있었다. 이때 머리 위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 두 꼬마 녀석은 모두 얼른 기어 올라오도록 해라. 그런데 당 아, 이 할아버지가 오늘 몃 사람을 죽였지?" 정당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도, 아마도 한 사람만 죽인 것 같아요." 석파천은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살벌하기만 할까? 만나는 사람마다 사람 죽이는 것을 예사로 알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이때 머리 위의 노인은 입을 열었다. "잘 됐다. 오늘 나는 한사람밖에 죽이지 못했으니 아직도 앞으로 두 사람은 죽일 수 있겠구나. 그런 후에 죽인 두 사람을 술안주로 삼아 술을 마신다면 그럴싸하겠군!" 석파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죽인 후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시겠다니, 이 늙은 영감은 농담 을 꽤 좋아하는군.'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뱃머리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람은 백발에 하얀 수염을 기른 매우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었는 데 눈가에는 미소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석파천은 그 노인의 눈과 자 기의 눈이 마주치게 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의 두 눈동자에서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흉악한 빛이 번뜩 였으며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뜸 온몸에서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하엿고, 뼈마디마저 싸늘히 만드는 찬기운을 느껴야만 했다. 그 노인은 해벌쭉 웃더니 오른손으로 석파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입 을 열었다. "이 녀석, 너는 정말 먹을 복이 많구나. 이 할아버지의 이십년 묵은 여아홍을 다 마셔보다니!" 그가 가볍게 툭툭 쳤으나 석파천은 어깻죽지의 뼈마디가 마치 부서지 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정당은 깜짝 놀라서 급히 손을 뻗쳐서는 노인의 팔을 붙잡고 빌었다. "할아버지! 그를 해치지 마세요." 노인은 아무렇게나 툭툭 친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의 손에 칠성의 공 력이 실려 있었다. 본래 그는 한번 후려쳐서 석파천의 어깻죽지와 팔의 뼈마디를 모조리 부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손바닥이 석파천의 어깻죽지와 부딪치게 되었을 때 대뜸 그의 어깻죽지에서 웅후하기 이를 데 없는 내력이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그 내력은 비단 그의 몸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그 노인의 손바닥을 위로 퉁겨지도록 만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노인은 만약에 즉시 내력을 더 보태지 않았더라면 손바닥은 정말 위 로 퉁겨져 올랐을 것이 틀림없었으며, 그렇게 되면 노인은 대뜸 창피 한 꼴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인은 마음 속으로 놀람과 의아함을 정당 못지 않게 느끼면서 다시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아. 좋아. 이 녀석은 좋은 술을 마실만한 자격이 있구나." 그는 자기의 손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아, 술 좀 따라 올려라. 이 할아버지가 그에게 한잔 내는 것이다. 너에게 술을 훔쳤다고 탓하지 않으마." 정당은 크게 기뻐했다. 평소 그녀는 할아버지가 여느 사람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 무림의 고수들도 평소 그로부터 칭찬의 말을 듣기가 매우 어려 웠다. 그런데 대뜸 석파천에게는 같이 술을 마시며 대접하겠다는 아량 을 베푸니 그야말로 그녀에게 있어서는 뜻밖의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석파천을 벌써부터 사랑하고 있었다. 본래 그녀는 그를 이 세 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젊은 영웅호걸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의 할아버지가 석파천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 라고 생각했다.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의 할아버지는 당장에 손을 써서 석파천 을 죽일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얼굴을 대하는 순간 대뜸 말투가 달라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석파천이 젊고 준수하여 그녀의 할아버지마저도 넋을 빼앗기 게 된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사실 이와 같은 생각을 자기 멋대로 한 것이었고 석파천이 방 금 커다란 재앙을 당하여 저승 문턱에 갔다가 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은 상대방의 내력이 놀랍다 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는 이 꼬마 녀석이 준수하고 훤칠하다는 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 고 있었다. 석파천은 얼굴 모습이 추악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준수한 편이라고 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훤칠한 것과는 영 동떨어진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정당은 즉시 싱글벙글하며 선실로 들어가 두 개의 잔을 가져다가 먼 저 한 잔의 술을 따라 올리고 다시 석파천에게 한 잔을 따른 후에 자 기자신을 위해 또 다시 한 잔을 따랐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네 녀석이 우리 당아에게 잘 보인 것을 보니 반드시 어 떤 내력이 있을 것 같다. 너의 이름이 뭐지?" 석파천은 우물쭈물했다. "저는, 저는...." 그는 개잡종이라는 한마디가 사람을 욕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에 잘 아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낯선 사람에 게 말한다는 것은 약간 좋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외에 달리 이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는 우물쭈물하며 그저 저는, 저 는, 하고 연거푸 말했을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그런 그의 행동에 매우 불쾌한 듯 말했다. "네가 감히 이 할아버지에게 이름을 밝히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석파천은 가슴을 편 채 말했다. "감히 말씀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다만 저의 이름이 듣기에 아름 답지 못한 것이 탈이지요. 저는 개잡종이라고 한답니다." 노인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멀리까 지 퍼져나갔다. 어찌나 크게 웃는지 그의 허연 수염이 나불낄 정도였 다. 한참동안 웃다가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좋아! 네 녀석의 이름도 특별히 좋구나. 뭐, 개잡종?" 석파천은 그 말에 자기를 부른 줄 알고 대답을 했다. "예. 할아버지, 무슨 분부라도 계신지요?" 정당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석파천을 번갈아 쳐다보는 정당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 다. 그녀는 석파천이 자연스럽게 노인을 할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녀와 남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손바닥에 글을 써서는 장락방주라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자기의 말을 들어준 것과 방주의 존귀하신 몸인데도 개잡종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것은 바로 자기에 대한 정이 극도로 깊어서 그 자신을 격하시킨 것이 라고 생각했다. 한편 노인 역시 속으로 크게 기뻐서 잇달아 부르짖고 있었다. "좋다. 좋아!" 그는 자기가 개잡종이라 부르자마자 석파천이 즉시 대답했을 뿐만 아 니라 자기에게 뻣뻣하게 나오지 않고 매우 순종하고는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퍽이나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고 의기양양해진 것이었 다.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고 물었다. "당아, 할아버지의 이름은 너의 정랑에게 이야기했겠지?" 정당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매우 겸연쩍게 말했다.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노인은 안색을 굳혔다. "너는 도대체 그를 좋아하느냐? 아니면 좋은 척하는 것이냐? 어째서 자기의 신분내력을 그에게 설명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입을 열 었다. "그 아까운 여아홍을 갖다 먹이고 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현빙벽화주 를 그것도 몇 날 밤을 두고 이 녀석의 아가리 안으로 쳐넣었지 않느 냐?"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그 어조는 높아져 갔고 준험해졌으 며 매서워졌다. 현빙벽화주라는 말을 더욱 한자 한자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었으며 두 눈에서는 흉악한 광채가 빛났다. 석파천은 옆에서 그 모양을 보자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몸 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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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20편 (20/82)
정당은 몸을 옆으로 기울리며 기어서 할아버지 품 속으로 뛰어들더니 빌었다. "할아버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군요? 이 당아를 용서해 주세요." 노인은 냉소했다. "용서하라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