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은 몸을 옆으로 기울리며 기어서 할아버지 품 속으로 뛰어들더니 빌었다. "할아버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군요? 이 당아를 용서해 주세요." 노인은 냉소했다. "용서하라구? 그렇게 수월한 일이 어디 있느냐? 현빙벽화주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너는 몰라서 함부로 없애고도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는 단 말이냐?" 정당은 애처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 당아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다시 만들겠어요." 노인은 냉랭히 말했다. "말은 수월히 할 수 있다만 정말 만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렇게 쉽게 만들수 있는 것이라면 이 할아버지가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 다." 정당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그가 갑자기 온몸에서 불타는 듯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가 하 면 곧 얼음과 같이 차갑게 변해서 온몸을 떨고 있는 것을 보고 할아버 지의 그 현빙벽화주가 음양을 조절하고 융합시키는 효력이 있다는 것 을 알고 훔쳐서 그에게 먹인 것이예요." 그녀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그 술은 효력이 정말 좋더군요. 한번 먹이자 금방 효력이 나타났어 요." 그녀는 슬쩍 다시 노인을 올려다가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한번 두번 주다보니 그만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어요. 그러 니 할아버지께서 약주 만드는 방법만 일러주시면 제가 훔치거나 빼앗 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몇 병 더 마련해 놓겠어요." 노인은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렸다. "몇 병이라고? 핫하하! 몇 병? 네 머리카락이 모두 허옇게 셀 때까지 찾아도 그 많은 진귀한 약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반 병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다." 석파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그제서야 황연히 깨달았다. 원래 자기의 체내에 한기와 열기가 교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정당이 매일 밤 그녀 할아버지가 가장 진귀하게 여기는 현 빙벽화주라는 것을 자기에게 복용시켜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 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은 바로 자기에게 목숨을 구해준 큰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닌가? 석파천은 노인이 정당을 그와 같이 심하게 다그치는 것을 보고 미안 한 생각이 들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그 술은 제가 마신 것입니다. 그러니 책임은 제게 있습니 다. 제가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서 만들어 드리든지 구해드리겠습니 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했다. "만약에 손에 넣을 수가 없더니 저를 마음대로 처리하시되 당누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노인은 해벌쭉 웃었다. "좋아! 좋아! 매우 뼈대가 있군. 그렇다면 그런대로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되겠군. 당아, 너는 어째서 자기의 신분을 그에게 이 야기 해주지 않았느냐?" 정당은 얼굴에 겸연쩍은 표정을 띄우며 말했다. "그는 나에게 한번도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거예요. 여게엔 다른 뜻이 없으니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노인은 냉소를 날렸다. "흥! 다른 뜻이 없다구?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걸? 내가 보기에 아 무래도 대단한 다른 뜻이 있을 것 같다. 네 녀석의 심사를 이 할아버 지가 모를 줄 알고?" 그는 연신 코방귀를 날리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그를 좋아하고 저녀석이 너를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원했 다면 너의 이름을 밝혀야 했다. 흥! 흥! 사실 이 할아버지의 성명을 밝혔다면 저 녀석은 깜짝 놀라 똥줄이 빠져라 도망쳤겠지. 그래서 여 태껏 속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노인의 이와 같은 말은 바로 정당의 심사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무공이 고강하고 사람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죽이는 사람이 엇다. 강호에서는 그의 이름만 듣고도 모두다 간담이 서늘해져서 그를 멀리 하고, 그와 교분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다른사람에게 다정하게 굴거나 상대방을 가까이 하려는 의도를 보이곤 하는데 그때 만약 상대방이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보인다면 가 차없이 살수를 펼치곤 했다. 정당은 매우 난처했다. 자기의 마음을 할아버지가 꿰뚫어보고 있으니 거짓말을 했다가는 더 욱더 화를 사게 될 것이고 수습할 수 없는 사태를 빚게 되겠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정말 할아버지 말대로 이름을 밝히게 된다면 십중팔구 석파천 이 놀라서 도망을 치거나 자기와 만나려고 하지 않을 것같았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삽시간에 근심과 공포에 사로잡히 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노해서 석파천을 죽일까봐 두려웠지만 석파천이 자기의 내력을 알면 여지껏 보여주던 아기자기한 애정이 물거품으로 화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석파천이 죽든 떠나든 그녀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는, 저는......." 노인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핫하하! 너는 그가 우리를 업신여길까봐 두려운 것이지? 핫하하하 하! 이 정가 늙은이는 강호에서 위세를 떨쳐 왔는데 내 손녀딸이 감히 할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기는 커녕 수치스럽게 생각하다니, 하하하! 이건 정말 너무나 우습구나." 그는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정당은 위기가 코앞에 닥쳤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평소 그토록 중히 여기는 그 현빙벽화주를 훔쳐서 석파천의 목숨을 구하느 라 현빙벽화주를 다 소비했는데도 할아버지의 이름을 들먹이지 못했다 는 것에 대해 할아버지가 크게 노하고 있고, 또 그와 같이 웃는 것을 보아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석파천에게 말했다. "천 오라버니, 우리 할아버지의 성은 정씨예요." 석파천은 말했다. "음, 당신의 성이 정씨이니 할아버지의 성도 정씨이겠지. 모두 정씨 가 되어 띵땅띵땅하니 퍽 듣기 좋구료." 정당은 쭈빗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함자는 불삼(不三)이라 하며 아호는 일일불과삼이라고 해요." 그와 같이 말하는 그녀는 석파천이 깜짝 놀라리라 생각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파천은 태연자약하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아호가 매우 듣기 좋구료." 정당은 속으로 흠칫했으나 곧 크게 기뻐했다. 혹시나 비웃는 말을 하 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물었다. "어째서 듣기좋다는 거죠?" 석파천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대답했다. "뭐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으나 꽤 듣기가 좋은데요? 하루에 셋을 넘겨서는 안된다, 재미있지 않소?" 정당은 곁눈질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때 정불삼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석파천의 어깻죽지를 다시 한번 툭 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도 기운을 쓰지 않은 일 장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내가 평생 바라던 지기일세. 좋아, 좋아. 내 아호인 일 일불과삼을 듣게 된 사람들은 가운데 비열한 자들은 칭송을 늘어놓고 간이 작은 자들은 전전긍긍하는가 하면 몇몇 건방진 녀석들은 나를 손 가락질 하며 크게 욕을 하기도 했었지."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유독 자네만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나의 아호가 듣기 좋다고 하니 좋아, 좋아! 이 할아버지가 자네에게 선물을 하나 주어야겠는데 무엇이 가장 좋을까 생각해 보아야 겠군" 그는 턱을 고인채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 이 노인 정불삼은 옛날 강호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관계로 나이가 들어선 개과천선한다는 뜻에서 사람을 하루에 세 사람 이상은 죽이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물론 그의 생각이지만 이렇게 되자 절제가 되었고 하루에 매일 같이 세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일년에 겨우 천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며칠간 사람을 죽이지 않을 때가 있고 또 죽인다 하더라도 지난번처럼 설산파의 제자인 손만년과 저만춘을 죽이듯 사람 수를 채 우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에 일일불과삼이라는 아호를 지은 것은 효과 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정불삼은 자기의 아호와 결심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 다. 그는 마음속으로 강호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아호 에 얽인 그와 같은 오묘한 이치를 모르고 자기를 나쁘게만 평하고 있 다고 괘씸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이날 석파천이 자기에게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아첨도 하지 않는 태 도에 그는 매우 훌륭한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아호를 듣고 매우 좋아하지 않는가? 내 나이 육십 이 넘은 만큼 별별 사람을 다 겪어 보았기에 진실과 허위는 한 눈에 분간할 수 있다. 저녀석이 노부의 아호가 듣기 좋다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이 할아버지에게 세 가지의 보물이 있다. 하나는 현빙벽화주인데 이 미 네가 마셔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네가 갚아야 할 것이니 너에게 준 것이라고 할 수 없지."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두 번째는 이 할아버지의 일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이다. 네가 배우 게 된다면 큰 잇점이 있다. 그리고 세번째는 바로 나의 손녀딸 당아이 다. 이 두가지의 보물 중에 한가지만 너에게 줄 수 있다. 너는 나의 무공을 배우겠느냐? 아니면 당아를 차지하겠느냐?" 이와 같은 질문에 정당과 석파천은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정당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일신 무공은 당금 무림에서 적수가 없는 형편이다. 석파 천이 만약에 할아버지의 신공을 전수받게 된다면 이후 강호 무림에서 크게 활약하여 위세를 떨칠 수 있을 것이고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했으나 곧 그녀는 불안해졌다. '가만 있자. 꼭 그런 건 아니겠는데? 그는 사내대장부이고 강호 대방 파의 방주인만큼 공명을 중시하고 남녀의 애정문제를 가볍게 볼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석파천은 나를 버리고 무공만 배우려고 할 것이 다.' 그녀는 조바심이 북받쳐 석파천을 몰래 바라보았다. 그런데 석파천은 온 얼굴 가득히 의혹의 빛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정당은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천 오라버니는 평소 풍류적인 데가 있다. 한평생 얼마나 많은 여자 들을 상대했지는 모른다. 이 반년간 나에 대해서 특별히 기세를 올리 며 다정하게 굴었지만 역시 나는 끝내 우리들 사이의 애정이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걱정을 해왔다. 더군다나 할아버지는 무림에서 명성이 그토록 나쁠 수가 없다. 장락방의 석파천의 명성이 좋지 못하 지만 할아버지와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나의 신분 내력을 알게 된다면 그가 어찌 나를 원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그만 마음이 쓰라려서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 다. 정불삼은 망설이는 석파천을 향해 재촉을 했다. "빨리 말해라. 일거양득을 보려고 생각했다가는 큰코 다칠 것이다. 먼저 나의 무공을 배우고 다시 당아를 맞아들이겠다고 생각하거나 당 아를 맞아들인 후에는 자연히 무공을 전수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 에도 하지도 말아라.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내 너에게 말해두지만 어느 누구도 이 정불삼 앞에서 수작을 부리지 못한다. 네 녀석은 이것을 차지하고 저것도 차지할 생각은 말아라. 그 렇지 않을 때 너의 목숨마저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서 빨리 말해 라." 정당은 사태가 긴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석파천이 할아버지의 무공을 배우겠다고 말한다면 자기는 그에게 시 집을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할아버지, 솔직히 말씀드리겠어요. 그는 장락방의 석파천이예요. 무 림에서도 상당히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구요." 정불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 그가 장락방의 방주라구? 이렇게 멍청한 녀석이 장락방의 방주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데?" 정당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이예요. 할아버지! 그의 나이는 비록 어려도 장락방의 뭇영웅들 이 그에게 승복하고 있어요. 그의 방에는 착수회춘 패의원인가 뭔가 하는 사람까지도 무공이 그렇게 높은데 그의 명령을 받들고 있어요." 정불삼은 말했다. "패 의원도 그의 말을 듣는다구? 그럴 리는 없겠지." 정당은 재빨리 말했다. "아니예요. 제가 친히 보았어요. 절대 거짓일리가 없어요. 할아버지 의 무공이 고강하지만 장락방의 방주가 할아버지께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는 패해석의 무공이 할아버지 못지 않는데 어찌 석 방주가 할아 버지에게 무공을 배우겠느냐, 역시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 상식에 맞다 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차마 그런 말을 하 수는 없었다. 석파천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띵땅은 사람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석파천이 아닙 니다." 정불삼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석파천이 아니라구? 그럼 너는 누구냐?" 석파천은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장락방의 방주가 아닙니다. 그리고 띵땅이 말하는 천 오라버니 도 아니구요. 저는 개잡종이란 말입니다. 개잡종......개잡종이라구 요. 이 이름은 듣기에는 거북하나 틀림없는 나의 이름입니다." 정불삼은 그만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웃음을 멈 추고 입을 열었다. "좋다! 내 너에게 한 가지 보물을 주려고 하는 것은 네가 방주라는 것 때문도 아니고 당아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로지 이 정 불삼이 너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힘주어 다시 말했다. "네가 개잡종이어도 좋고, 후레자식이어도 좋다. 이 정불삼이 너를 마음에 두게 된 이상 노부는 보물을 한가지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 고, 너또한 받지 않을 수 없다." 석파천은 정불삼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정당을 바라보았다. '띵땅은 나를 그녀의 천 오라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짜 그녀의 천 오라버니는 얼마 후 반드시 돌아 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그녀를 속이고 그녀의 천 오라버니마저 속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닌 가? 그렇다고 그녀를 마다하고 무공을 배우겠다고 말한다면 그녀의 마 음을 상하게 할 것이니 나는 어느 한가지도 갖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와 같은 생각에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이미 현빙벽화주를 마셨습니다. 저는 그 은혜를 일 시 갚을 수도 없으니 어르신께서 그것을 저에게 주시는 보물이라고 생 각해 주십시오." 정불삼은 안색을 굳혔다. "안돼! 현빙벽화주는 나중에 만들어 갚는다고 했으니 갚아야지. 자네 는 어거지를 쓸 텐가?" 그는 다그치듯 다시 말했다. "그래 자네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나? 당아를 가지겠는가? 아니면 나 의 무공을 전수 받겠는가?" 석파천은 정당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당 역시 그에게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급히 시선을 피했다. 정당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안색마저 창백해져서는 눈동자에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아니, 그 이슬은 방울져서 흘러내리 고 말았다. 평소 그녀의 교만한 성격대로 한다면 석파천의 귀를 잡고 쥐어 뜯을 듯 비틀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적어도 자리를 박차고 떠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할아버지가 있는 앞에서 그와 같이 기세등등하게 나올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와 같이 급박한 상태에서 남의 귀를 잡아당기고 화를 낸 다는 것은 석파천으로 하여금 무공을 선택하게 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 을 것이니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녀의 마음은 그야 말로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쓰리고 아팠으며 가슴 속에는 울화 마저 치밀었다. 석파천은 다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는 것을 보고 측은한 감이 느꼈다. "띵땅, 솔직히 말하지만 당신은 정말 사람을 잘못본 것이오. 만약 내 가 당신의 천 오라버니라면 선택할 필요조차 없지 않겠소? 그야 물론 당신을 달라고 할 것이고, 무공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오." 정당은 진주와 같은 눈물을 주루루 흘리며 입가에 억지로 웃음을 띠 었다. "당신이 천 오라버니가 아니라구요? 천하에 천 오라버니가 두사람이 라도 있다는 것인가요?" 석파천은 처연히 말했다. "아마도 나의 얼굴 모습이 당신의 천 오라버니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 기 때문에 여러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같소." 정당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부인하나요? 좋아요. 이 세상에 용모가 비슷한 사람은 더러 있는 일이예요. 그런데 금년 년초에 내가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마구잡이로 나의 손을 잡았죠. 그 당시 나는 당신을 몰랐기 때 문에 냅다 일장을 후려치려고 하지 않았어요?" 석파천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할 바를 몰랐다. 정당은 얼굴에 다시 불쾌한 빛을 떠올리고 뾰루퉁하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큰 병을 앓고 난 이후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이예요? 아니면 괜히 멍청한 척 가장하고 시치미를 떼려는 거예요?" 석파천은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분명 사람을 잘못 본 것이오. 내가 어떻게 당신의 천 오라버 니와 당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소?" 정당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당신이 억지를 쓴다 하더라도 뜻을 이룰 수 없을 거예요. 그날 나는 두 손을 당신에게 붙잡히게 되어 그만 다급해진 나머지 어쩔 줄을 모 르고 있는데 히히덕거리고 웃는 당신을 입을 내밀고......나의 얼굴 에...... 뽀뽀를 하려고 하기에 내가 얼굴을 돌리고 당신의 어깻죽지 를 깨물어서 피가 나도록 만들었죠. 그제서야 당신은 손을 놓고 옷을 풀어보았는데 왼쪽 어깨에 물린 상처가 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매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면 그와 같은 상처는 없을 거예요. 그 상처는 매우 엄중해서 없애기 힘드니까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당신은 나를 물어뜯은 적이 없소. 그러니 나의 어깨죽지에 그 와 같은 상처가 있을 턱이 없지." 그러면서 그는 옷자락을 풀고 왼쪽 어깨를 드러냈다. 그순간, 그는 움찔했다. "어! 이게......이게......" 그는 큰소리로 놀람에 찬 소리를 부르짖었다. "이것 참 이상하군!" 세 사람은 그의 왼쪽 어깨에 두 줄의 동그랗게 난 이빨자국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자국은 앵두와 같이 조그마한 입술 모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빨 자국이 흉터가 되어 울퉁불퉁했다. 틀림없이 사람의 이빨에 물린 것이 분명했으며 다른 상처라면 켤고 그와 같은 현상을 이룰 수 없는 상처 였다. 정불삼은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이 꼬마 녀석이 억지를 쓰려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군. 내가 자네에게 말하지만 산 위에 자주 오르게 된다면 끝내 호랑이를 만나는 법이지. 네 녀석이 도처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끝내는 여인에게 꼬투리를 잡혀 여인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 격이군."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히히덕거리며 다시 말했다. "이와 같은 일은 이 할아버지도 젊었을 적에 당한 적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어떻게 당아의 애비가 생겨났으며 당아가 태어났겠 는가? 다만 나의 못난 동생인 정불사만은 그 나이가 되도록 마누라를 맞아들이지 못하고 늘그막까지 흐리멍텅하게 온종일 울상을 짓고 있는 꼴이 정말 영웅이 아니라 구웅(狗雄)같은 몰골이지."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 이제 됐다. 쓸데없는 잔소리는 그만하기로 하고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자네는 당아를 요구하게 되겠군?" 석파천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언제 자기의 어깻죽지에 사람의 이빨에 물린 상처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가 없었다. 이빨자국을 볼 때 매우 심하게 물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처를 자기가 입게 되었다면 그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요즘 며칠 동안 그는 괴이한 일들을 많이 겪기는 했으나 그 모든 것 이 사람을 잘못보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유 독 이 일만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정신을 빠뜨리고 있었고 정불삼이 묻는 말을 하나도 듣 지 못하고 있었다. 정불삼은 그가 대답을 하지 않고 얼굴에 매우 괴이한 표정을 떠올리 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자신의 거짓이 탄로나자 젊고 얼굴이 여려서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 하기가 겸연쩍은 나머지 그러는 모양이라 생각한 그는 소리내어 웃으 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당아, 삿대를 들어라. 집으로 돌아가자." 정당은 놀람과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떨렸다. "할아버지, 그를 데리고 우리집으로 돌아가자는 건가요?" 정불삼은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나의 손녀 사위가 아니냐? 그런데 왜 집으로 데려가지 못한단 말이냐? 만약 정신을 판 사이에 그가 뺑소니라도 치게 된다면 이 정불 삼은 이후 어떻게 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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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는 그의 방에 착수회춘 패의원이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저 녀석이 만약에 장락방 총단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