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는 그의 방에 착수회춘 패의원이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저 녀석이 만약에 장락방 총단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을 때 우리가 찾 아내는 것도 결코 수월한 노릇이 될 수 없을 거란 말이다." 정당은 쌩긋쌩긋 웃으면서 석파천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다가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삿대를 들어서는 다리에 대고 밀었다. 배는 교각 사이로 흘러 내려갔다. 석파천은 정당에게 당신의 집으로 가느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다시 삼켜버리고 말았다. 냇물은 푸른 비단 띠처럼 뻗쳐 있었다. 달칩이 수면 위에서 반사되었 다. 정당이 삿대를 물속으로 집어넣자 냇물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조그만 배는 미끄러지듯 떠내려가고 있었다. 냇가에 무성하게 자라있는 풀들이 뱃전에 스치는 소리가 쏵쏵하고 들 리기도 했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정당과 석파천의 머리카락을 건드리기도 했다. 마치 부드러운 손길이 그들 두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듯 했다. 정말 아름답고 조용한 밤이었으며 꽃향기 또한 그윽했다. 석파 천은 그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조그만 배는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더니, 어느덧 두 번 째 다리 밑을 지나고 두 번째와 세 번재 교각 사이를 지나게 되었다. 구불텅거리며 한참동안 가다가 하얀 돌을 쌓아 올린 돌계단 옆에 닿 게 되었다. 정당이 배의 밧줄을 집어 들고 던졌다. 돌계단 위의 나무말뚝에 밧줄이 걸리게 되자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 리고서 석파천에게 웃어보인 후 몸을 날려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정불삼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자네는 교객(嬌客:사위)이 되신 귀한 손님이야. 자, 자, 어서 올라가자구." 석파천은 교객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어리벙벙해서는 정당의 뒤를 따랐다. 그는 그녀를 따라 흑칠을 한 조그만 문 안으로 들어섰 다. 그는 동그란 차돌을 깔아 놓은 길을 따라 월동문(月洞門) 안으로 들 어서게 되었고 곧이어 한 채의 화원이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런 연후에 그녀와 함께 한 채의 팔각정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정불삼은 정자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자, 귀하신 교객, 이쪽으로 앉게나." 석파천은 무엇때문에 교객이라고 자꾸 강조하는지 몰랐으나 정불삼이 앉으라고 하자 자리에 앉았다. 정불삼은 손녀 정당의 손을 잡더니 화원을 가로질러 어디론지 사라졌 다.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정자 밖의 꽃나무 그림자가 땅위에 길게 드리워지게 되었다. 미풍에 나무들이 사그락거리는 가운데 정자 옆의 그네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석파천은 왼쪽 어깨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매우 얼 떨떨해 있었다. 잠시후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두 중년 부인이 화원을 가로 질러 정자밖에 이르더니 약간 허리를 굽혀 보이고 미소를 띠운 채 말 했다. "교객은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도록 하세요." 석파천은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뜻을 잘 알 수가 없었 다. 다만 안으로 들어가 옷을 입으라는 말인가 보다고 생각하고 두 중 년 부인을 따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한 연못가를 지나 회랑을 따라 걸었다. 그리하여 그는 두 중년 부인 을 따라 한 상방에 들어서게 되었다. 방안에는 커다란 통에 뜨거운 물 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두 폭의 수건이 놓여 있었다. 한 중년이 부인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교객, 어서 목욕을 하세요. 워낙 시간이 촉박해서 새옷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형편에 따라 여전히 지금 입고 계신 옷을 그대로 입으시라는 할아버님의 말씀이 계셨어요." 두 중년부인은 킥킥 웃으면서 방에서 물러가 방문을 닫아주었다. 석파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름은 분명히 개잡종인데 어째서 방주라고 하고 천 오라버니 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석파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다고 하고, 이 번에는 교객이라고 하는구나.'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이왕 이곳에 온 것이니 마음을 편안 하게 갖자는 생각을 했다. 그가 보기에 정불삼과 정당이 자기에게 악의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커다란 통에 담긴 물에서 향긋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상관하지 않기로 하고 옷을 벗고 그 커다란 물통 속으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 목욕을 다 하고 나니 정신마저 상쾌해졌다. 목욕을 하고 옷을 다 입었을 때 문밖에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새신랑은 대청으로 나가 천지신명(天地神明) 앞에서 예를 올려야 합 니다." 석파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예를 올 리라는 말과 새신랑이라는 말을 듣자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어렴풋 이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로부터 새신랑과 새색시가 천지신명 앞에서 예를 올 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으나 좀처럼 듣지 못한 낱말이었기 에 잠시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가 멍해져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남자가 다시 재촉하듯 물었다. "새 신랑은 옷을 다 입으셨소?" 석파천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렇소." 그 사람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붉은 비단 한 조각을 그의 목에다 걸어 주었다. 그 사람은 다른 한 조각의 붉은 비단으로 만든 꽃을 그의 가슴팍에 달아주고 웃으면서 말했다. "축하하오, 정말 축하하오." 그리고 나서 그 중년인은 석파천의 손을 부축하고서는 밖으로 걸어나 갔다. 석파천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중년인을 따라 낭하를 가로지르고 마당을 건너 대청에 이르게 되 었다. 대청에는 여덟 자루의 커다란 촛불이 켜져 있었고 한복판에 팔선탁자 가 놓여 있었는데 그 탁자 위에는 붉은 보자기가 씌워져 있었다. 정불삼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바깥쪽을 향해 서 있었는데 석파천이 들 어서자 낭하에 있던 세 남자가 일제히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석파천을 부축하고 걸어왔던 그 남자가 낭랑히 외쳤다. "새 색시 납시오!" 그러자 패물이 부딪히는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먼젓번의 그 중년 여인이 머리에 붉은 비단을 두르고 몸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을 부축 하고 나타났다. 그 몸매로 보아 정당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 여인는 석파천의 오른쪽에 와 섰다. 촛불이 눈부시게 빛나고 난초와 같은 사향이 은은히 장내에 퍼지고 있었다. 석파천은 꼭 여우한테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으며 두렵기도 하고 기 쁘기도 했다. 중년의 사내가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신(天神)에게 절을 하시오! 일배!" 석파천은 정당이 한복판의 마당을 향해서 큰절을 하는 것을 보고 잠 시 망서렸다. 그 남자가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시오." 그는 가볍게 석파천의 등을 밀었다. 석파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큰절을 해야겠구나.' 그는 무릎을 꿇고는 아무렇게 몇 번 절을 했다. 정당을 부축하고 있는 여인이 그가 당황해서 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다시 말했다. "지신(地神)에게 절을 하시오." 석파천과 정당은 몸을 돌려 안쪽을 향해 큰절을 했다. 중년의 사내는 다시 외쳤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시오." 정불삼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한가운데 섰다. 정당이 먼저 절을 했다. 석파천은 잠시 망설이다가 역시 큰절을 했 다. 중년의 사내는 다시 외쳤다. "부부가 맞절을 하시오!" 석파천은 정당이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자기에게 무릎을 꿇자 갑자기 맑은 정신이 들어 당혹한 음성으로 외쳤다. "할아버님 그리고 띵땅, 나는 정말 석 방주도 아니고 당신의 천 오라 버니도 아니오. 당신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으니 장래에 가서......나 를 탓하지 마시오......" 정불삼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멍청한 녀석 같으니, 이와 같은 마당에서도 농담을 다 하는군! 장래에 탓하기는 누가 너를 탓해? 영원히 탓하지 않을 것이 네." 석파천은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띵땅, 미리 말해두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와 같이 천지신명에게 절을 하는 것이 장난으로 하는 것이오? 아니면 진짜로 하는 것이오?" 정당은 이미 땅바닥에 꿇어 엎드리고 있었다. 머리에 붉은 비단을 두 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와 같은 질문을 당하자 웃으면 서 말했다. "그야 물론 진짜죠. 이런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누가 장난으로 하겠어요?" 석파천은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천 오라버니라고 오해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오. 그 러니 나중에 후회를 하고 나의 귀를 잡아당기며 어깻죽지를 깨무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러자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정당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으며 나직이 속삭 였다. "결코 후회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대한다면 나는 당신 의 귀를 잡아당기지도 않고 어깨죽지를 물어 뜯지도 않겠어요." 정불삼은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여편네가 남편의 귀를 잡아당기는 것은 자고로 행해져 왔던 일인데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겠는가? 여보게, 사위! 당아가 오랫동안 무릎 을 꿇고 있는데 자네는 어째서 맞절을 하지 않는가?" 석파천은 재빨리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무릎을 꿇고 반례했다. 두 사람은 붉은 비단 위에서 다 시 몇 번 맞절을 했다. 중년의 사내는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부부가 교배하여 혼례를 이루었으니 동방으로 듭시오. 새신랑과 새 색시는 백년화합하고 자손대대로 부와 수를 누리기 바라오." 대뜸 피리소리가 크게 일었다. 그러자 중년부인이 손에 한 쌍의 붉은 촛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를 하게 되었고, 다른 한 명의 부인은 정당을 부축했다. 그 중년의 사내는 석파천을 부축했으며 붉은 비단으로 두 사람을 매 어 한 칸의 방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가구들도 별로 화려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붉은 촛불만이 가느다랗게 춤을 추고 있었다. 동쪽의 벽에는 한 조각의 붉은 비단이 걸려 있었고 서쪽의 벽에는 한 장의 붉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촉망지간에 대강 격식을 차려 붙인 것 이긴 하나 동방화촉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 다. 몇 사람들이 부축하여서는 석파천과 정당이 침대가에 걸터앉도록 하 고는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잔에 술을 붓고 일제히 말했다. "두 분에게 축하드립니다. 이제 합환주(合歡酒)를 드십시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히히덕거리며 물러서더니 방문을 닫아 주었다. 석파천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일을 잘 몰랐으나 이와 같은 혼례가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어머 니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정당과 이미 천지신명에게 절을 하고 부부가 된 것을 깨달은 것 이다. 그는 정당이 단정히 앉아 있으며 머리에 쓴 그 붉은 비단을 두른 패 꼼짝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간신 히 말했다. "띵땅, 머리에 쓰고 있는 그 물건이 답답하지 않소?" 정당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답답해요. 풀어주세요." 석파천은 두 손가락으로 붉은 비단폭의 한쪽을 잡고 가볍게 풀었다. 화장을 한 정당의 얼굴과 입술은 촛불에 비쳐지자 발그레한게 매우 요염했다. 석파천은 놀람과 기쁨에 휩싸여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예쁘구료." 정당은 방그레 웃었다. 그러자 왼쪽 빰에 조그만 보조개가 파였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정불삼은 방밖에서 크게 외쳤다. "오늘밤은 우리 손녀딸이 혼사를 치룬 길일인데 어디서 온 친구인지 모르지만 내려와 술을 한잔 마시는 것이 어떠하오?" 다른 한쪽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락방주 좌하의 패해석이 삼가 정 셋째 나으리에게 인사를 드리오. 이 깊은 밤중에 찾아와 폐를 끼치게 된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석파천은 나직이 말했다. "아! 패 선생이 왔구료." 정당은 이때 아름다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식지를 입술로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쉿!" 정불삼은 이때 소리내어 웃더니 말했다. "하하하...... 나는 어디서 좀도적이 왔는가 했더니 장락방의 사람들 이었구료. 당신들은 잔치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큰소리로 떠들지 마 시오. 우리 손녀사위와 손녀딸의 동방화촉의 촛불이 꺼지려 하는 판이 외다." 그 말투는 매우 오만무례했다. 패해석은 그래도 성을 내지 않고 마름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 오늘밤은 정 셋째 나으리의 손녀딸께서 출가를 하는 좋은 날이 었구료. 우리들이 그만 바쁜 길이라 예물을 갖추지 못해 실례 된 점 용서하시구료. 훗날 다시 찾아 뵙고 축하를 드리며 잔치 술을 얻어마 시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설명을 했다. "그런데 폐방에서는 지금 매우 급한 일이 있어서 친히 페방의 석 방 주를 만나뵈어야 하겠으니 정 셋째 나으리가 수고스럽지만 안내를 해 주신다면 고맙겠소이다." 이어 그는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일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이 깊은 밤중에 아무리 당돌하기로서 니 정 셋째 나으리의 처소에 뛰어들지는 못했을 것이외다." 정불삼은 오만하게 말했다. "패 의원, 당신 역시 무림에서는 선배 고인으로 꼽히는 양반이니 이 정 셋째에게 겸손해 할 것은 없소. 당신은 석 방주를 찾고있는 모양인 데 아마도 내 손녀사위가 된 개잡종을 두고 하는 말인것 같소. 그렇지 않소? 그는 당신네들이 사람을 잘못 알고 있다면서 만나보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그만들 돌아가시오." 패해석을 따라온 장락방의 제자들은 여덟 명이니 되었다. 미횡야와 진충지 등도 그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정불삼이 그들 방주를 개잡종이라 욕하자 이들 몇 사람들은 화가 나 서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패해석은 석파천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개잡종이라 일컬었던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지라 정불삼이 켤코 모욕을 하자는 것이 아님 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주가 정불삼이라는 노마두의 손녀사위가 된 데 대하여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으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 셋째 나으리, 폐방의 일은 너무나 급박하오. 반드시 방주님에게 알려야 할 일이오. 우리들 방주께서는 농담을 좋아하시어 그와 같은 말을 종종 입에 담지요." 석파천은 패해석의 어조가 매우 초조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마천애에서 한기와 열기가 맞부딪쳐 주화입마의 경지에 이르렀 을 때 다행히 패해석이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었고 또 그 후에도 수차 자기의 건강에 십분 관심을 보여준 정을 생각할 때 지금 다급해하는 그를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창문 앞으로 다가가서 창문을 열어 젖히고 큰소리로 외쳤 다. "패 선생, 나는 여기에 있소. 여러분들은 나를 찾고 있는 것이오?" 패해석은 크게 기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속하들은 긴급한 사태에 대해서 방주에게 의논하 고자 이렇게 급히 찾아왔습니다." 석파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개잡종이지 당신네들의 방주가 아니외다. 당신네들이 나를 찾 는다면 몰라도 당신네들의 방주를 찾는다면 그런 사람은 없소!" 패해석은 얼굴에 한가닥 겸연쩍은 표정을 띄우고 말했다. "방주께서 또 농담을 하시는군요. 방주께서는 어서 나오셔서 저희들 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주십시오." 석파천은 즉시 반문했다. "나보고 나오라는 것입니까?" 패해석은 대답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정당은 석파천의 등뒤로 다가가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천 오라버니, 나가지 말아요." 석파천은 의지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그와 분명히 해두어야겠소. 나는 즉시 돌아오겠소." 그는 창문으로 기어서 나갔다. 마당 서쪽에는 패해석이 서 있고 그의 등뒤와 지붕 위에는 모두 여덟 명의 대한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한 그루 밤나무의 커다란 가지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바로 정불삼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흔들하는 바람에 그의 몸도 아래 위로 부침하고 있었 다. 정불삼은 말했다. "패 의원, 당신은 나의 손녀사위에게 할말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옆 에서 들으면 안되겠소?" 패해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얼버무리려고 했다. 사실 무림에서는 남의 방파의 비밀을 듣는다는 것은 실례된 일이었 다. 정불삼이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런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패 의원은 소문대로 행동이 형편없는 정불삼이로구나 생각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일에 관해 불초로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소이다. 방주께서 이 곳에 있으니 방주가 결정을 해야지요." 정불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좋아. 이 일에 관해 내 손녀사위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면 내 가 물어보지......" 그는 석파천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이보게, 개잡종. 패 의원은 자네에게 할말이 있다는군. 내가 옆에서 듣고 싶은데 어떤가?" 석파천은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듣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정불삼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어, 착하지. 정말 착한 손녀사위야. 패 의원, 할말이 있으면 빨리 이야기하시오? 오늘밤은 일각이 천금과 같은 때이오. 내 손녀딸이 동방화촉을 밝히는 이 순간에 당신네 늙은이가 이곳에 와서 떠드니 그야말로 살풍경한 노릇이 아니겠소?" 석파천은 말했다. "나으리는 말해 보세요. 무슨 일인가요?" 패해석은 말했다. "방주, 총타에 설산파의 손님이 와 있소이다." 석파천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정불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설산파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석파천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설산파? 화만자, 화 여협 그들인가요?" 무림에는 수십 개의 방파가 있었다. 석파천이 알고 있는 것은 설산파뿐이었고, 설산파 사람도 수백에 달 했으나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은 화만자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 문에 그는 불쑥 그녀의 이름을 들먹이게 된 것이었다. 패 의원을 따라온 여덟 명의 장락방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우리 방주는 정말 풍류를 즐기는 호색한이군. 오늘밤 이곳에서 신부 를 맞이하면서도 설산파의 아리따운 소저를 잊지 못하는가 보구나!' 패해석은 말했다. "화만자 소저도 있소이다. 그리고 다른 몇 사람이 더 있죠. 그런데 그들 우두머리는 기한서북(氣寒西北) 백만검(白萬劍)입니다. 이 사람 외에도 아홉 명의 그의 사제가 따르고 있는데 모두 설산파의 고수인 것 같소이아." 정불삼은 불쑥 입을 열었다. "백만검이 뭐가 대단하다고? 설사 백자재(白自在) 늙은이가 친히 달 려온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것이냔 말이야? 패 의원, 당신의 오행육합 장 재간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백만검이라는 녀석이 온 것을 보고 당 황해하다니 너무 수선을 떠는 것이 아니겠소?" 패해석은 그가 자기의 오행육합장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자 속으로 약 간 흐뭇해졌다. '이 마두는 자부심이 매우 강한데 나의 오행육합장을 잘 알고 있구 나.'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불초의 그까짓 무공이야 입에 담을 만한 가치가 있겠소이까? 우리 장락방은 조그만 방파에 지나지 않지만 무림의 어느 문파도 두려워하 지 않소이다. 다만 설산파와는 평소 아무런 교분이 없는데 기한서북 백만검이 기세등등하게 찾아와서는 방주님을 뵈옵자고 하길래 내일까 지 미루다가 되지 않아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외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어떤 오해가 있는지, 우리들이 방주에게 여쭈어 보려는 것이고 해결방침을 의논하려는 것이지요." 석파천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는 듯 말했다. "어제 화 여협이 총타에 뛰어 들어왔다가 진 향주에게 사로잡히게 되 었소. 오늘 아침 그녀를 놓아보냈는데 그들 설산파는 아마 그 일 때문 에 성이 난 모양이군요." 패해석은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일도 약간 관계는 있습니다만 진 향주에게 물어보니 방주는 시종 화 소저에 대해서 예의를 지켰으며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고 하 더군요......"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정불삼을 바라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가 떠날 때 연와탕을 먹이고 은자까지 주려고 하셨다니 설산파 의 체면을 크게 세워준 것이라 할 수 있소이다. 그런데 기한서북 백만 검의 안색을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연이 있는 것 같았소이다." 석파천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패해석은 매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방주의 명령에 전적으로 따를 뿐이지요. 방주님께서 문(文) 의 방법으로 대하라 하면 좋은 말로 상대를 할 것이고 약간 꾸짖어 주 겠으나, 만약 무(武)의 방법으로 대하라고 한다면 그들이 우리 총단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주지요......" 그는 단호한 어조로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들이 방자하게시리 장락방에 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우리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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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방주께서 친히가서 형편을 보아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더욱 좋지요." 석파천은 아름다운 정당과 한 바에 있는 것이 기분이 좋기는 했으나 여간 겸연쩍지 않았다. 마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