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그중에서도 화만자만은 비교적 낯이 익어서 그나마도 더듬거리 며 입을 열게 되었다. "당신들은 마치 화 만자 여협처럼 매우 값어치가 있으며......많은 은자가 나가는 값어치가 있지요......" 설산파의 아홉 명 제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들의 눈 앞에 푸른 광채가 번쩍였다. 여덟 자루의 장검이 일제히 검집에서 뽑혀진 것이었다. 백만검 한 사 람을 제외하고는 여덟 명이 모조리 장검을 뽑아서 반원을 그리듯 하고 석파천 앞을 가로막고 섰다. 왕만인은 손가락질하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이 석가야, 더러운 말을 함부로 하다니! 정말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 수가 있지. 우리 설산파의 제자들은 용담호혈속에 갇혀 있다하더라도 그와 같은 언행은 참고 견딜 수가 없다!" 석파천은 그들이 노기충천하여 화를 내자 아리송하기만 했다. '나는 분명히 좋은 말만 했는데 어째서 화를 내는 것일까?' 그는 정당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띵땅,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이오?" 정당은 남편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화만자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전 혀 화만자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녀는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는 참인데 석파천의 질문을 받게 되자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도 화 소저는 많은 은자의 값어치가 나가지 않는지도 모르지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화 여협이 값어치가 없는 , 천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라하더 라도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소?" 장락방의 군호들은 그 소리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군호들은 방주가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설산파와 일전을 불사하 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때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비싸면 내가 살 수 없지만 싸다면 흐흐흐...... 그런대로 한번 데리 고 놀 만하군......" 이때 푸른 빛이 번쩍하는 순간 쩡, 하는 소리가 났다. 원래 왕만인이 크게 노해서 석파천의 가슴팍에 일 검을 찌르려고 했 던 것이다. 그런데 백만검이 대뜸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잽싸게 뽑아들어서는 가볍게 왕만인의 장검을 밀쳐버린 것이다. 왕만인은 손목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고 하마터면 장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백만검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사람은 우리들과 깊은 원한이 있다. 그런데도 일 검으로 해결이 날 것 같은가?" 그는 검을 검집에 다시 꽂고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석 방주, 도대체 당신은 나를 알고 있소?"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당신은 설산파의 기한서북 백만검 백대협이 아니시오?" 백만검은 싸늘히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 인정을 하겠소? 못하겠소?" 석파천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이라면 물론 인정을 해야지요," 백만검은 말했다. "그렇다면 내 당신에게 묻겠는데 능소성에 있을 때 당신의 이름은 무 어라고 했고?" 석파천은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능소성에 있었다구요? 언제 내가 능소서에 갔었댔소? 아! 그렇 군. 어느 해 산을 내려와 엄마와 아황을 찾게 되었을 때 여러 마을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소. 그러나 나는 그 마을의 이름을 전혀 모르니 그 가운데 아마도 능소성이라는 곳이 있었던 모양이오." 백만검은 싸늘한 안색을 하고 한자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지 마시오. 당신의 진짜 이름은 석파천이 아니 지요?" 석파천은 빙그레 웃었다. "맞았소. 맞았소. 나는 본래 석파천이 아니오. 모두들 잘못 알고 있 소. 역시 배 대협은 훌륭하시군. 내가 석파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백만검은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시오!" 왕만인은 노갈을 터뜨렸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겠습니까? 개잡종이지!" 이번에는 장락방의 군호들이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투어서 호통소리와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그리고 십여 명의 고수들이 무기 를 뽑아들었다. 왕만은 이미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는 판이었다. 설사 난도질을 당해 갈기갈기 찢겨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개잡종이라고 후련하게 욕을 한 이상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석파천은 뜻밖에도 소리내어 껄껄 웃으면서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그렇군, 맞았소! 나의 본래 이름은 개잡종이라고 하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소?" 그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져 서로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패해석과 정불삼, 그리고 정당 등 몇 사람만이 그가 자기의 이름이 개잡종이라고 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으 나 나머지 사람들은 놀람과 의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백만검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녀석은 정말 교활하고 간악하지만 대단한 놈이군. 그와 같은 욕 지거리도 태연히 받아들이다니. 신중을 기해서 상대해야지 그렇지 않 는다면 큰코 다치겠는 걸' 왕만인은 이때 앙천대소했다. "하하하......알고보니 당신은 개잡종이었군. 정말 가소롭군, 가소로 워!" 석파천은 의아하여 말했다. "내가 개잡종이라고 해서 뭐가 가소롭다는 것이오? 그 이름이 좋지는 않지만 과거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에게 개잡종이라고 불렀다면 역시 개잡종에 지나지 않소!" 왕만인은 노갈을 터뜨렸다.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그는 다시 장검을 쳐들고서 비사주석(飛沙走石)이라는 일 초를 펼쳐 내력을 검끝에 돋우고 싸늘한 한기를 허공에 뿌리며 석파천의 가슴팍 을 찔러왔다. 백만검은 석파천이 이 몇 년 동안 어떤 기이한 무공을 배웠는지 알고 싶었다. 기이한 무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젊은 나이에 일방의 우두머 리가 되고 수많은 부하들이 복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이번에는 막지 않고 나직이 외쳤다. "왕 사제, 함부로 손을 쓰면 안되네." 그는 의자에서 막는 자세만을 취했을 뿐 왕만인이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쳐 검과 한 덩어리가 되어 덮쳐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석파천은 상승의 내공을 연마하는데 성공했으나 손을 써서 싸운 경험 은 전혀 없었고 권격은 배워보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일 검을 찔러 들어오자 어떻게 피해야 할지, 또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당황하여 손발을 허우적거리면서 자연히 두 손을 바깥쪽으로 뻗 쳐내어 휘젖게 되었다. 한데 그는 장포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두 소맷자락이 휘둘러 지면서 장검을 후려치게 되었다. 그 순간, 우직끈, 뚝, 하는 소리와 더불어 휙, 하니 왕만인의 몸이 갑자기 위로 붕 떠서 날아가더니 쿵, 하니 대문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 가! 설산파의 제자 아홉 명이 호맹당에 들어온 이후 장락방의 무리들은 대문 밖에서 나무기둥으로 빗장을 질러 놓고 있었다. 만약서로 싸우게 되었을 때 독안에 든 쥐를 잡듯 탈출구를 미리 봉쇄해 놓으려는 것이 었다. 호맹당의 대문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배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거 기다가 쇠조각을 박아놓고 있었다. 그와 같은 대문짝에 왕만인이 꽝, 하고 부딪치는 순간, 퍽퍽, 하는 가벼운 음향과 더불어 토막이 난 그의 검이 그의 어깻죽지에 박히고 말았다. 원래 석파천은 소맷자락을 휘둘러 그의 수중에 들린 장검을 두 토막 내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다가 왕만인의 그의 내력의 세찬힘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전신의 공력도 깡그리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상대방이 휘휘 내젖는 손길에 따라 부러진 두 토막의 단검이 뒤로 날아가서는 자기의 어깻죽지에 박힌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그만 축 늘어져서는 땅바닥에 주저앉게 되었고 손 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깻죽지의 상처에서는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삽시간에 하얀 옷자락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가만균과 화만자가 급히 달려와 그의 콧김과 맥박을 확인하고 짚어 보았다. 다행히 석파천의 내력이 강하긴 했으나 그것을 응용할 줄을 몰라 내 력을 모두 내쏟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만인은 외상만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설산파의 제자들은 놀람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고, 장 락방의 군호들은 흐뭇하기도 하지만 내심으로는 의아함을 금할 수 없 게 되었다. 군호들은 방주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방주로 모시게 된 것은 그들을 대신해서 액겁을 때워 달라는 데 있었다. 거기다가 패해석이 전력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뭇사람들은 패 해석을 두려워하니만치 석 방주에게 공손하게 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석 방주의 내력이 그토록 강맹한 것을 보자 모두 혀 를 내두르게 되었고 패해석만이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근심과 기 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때 백만검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 "석 방주, 우리들은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며 무림에 몸을 담 고 있는 사람들은 배분을 크게 따지오. 아랫사람이 윗어른에게 죄를 짓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추살해야 마땅하다고들 하며 하루를 사부로 모셨다면 한평생 어버이로 섬겨야 한다고도 했소." 그는 눈을 부라리며 석파천을 바라보고 다시 말했다. "당신이 우리 설산파의 문하에서 무공을 배운 이상 저 왕 사제는 어 찌 되었든간에 당신에게는 사숙이 되는데 당신이 독수를 쓰다니! 이게 무슨 짓인지 변명을 듣고 싶소......" 이어 그는 다그치듯 다시 외쳐 물었다. "천하의 일이란 모든 것이 이치에 부합되어야만 하오.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하더라도 천하의 삼강오륜을 한손으로 말살할 수는 없 는 것이 아니오?" 석파천은 망연해졌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소. 내가 언제 설산파의 문하에서 무공을 배웠다는 것이오?" 백만검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니 정말 몰염치하군. 당신 스스 로 개잡종이라 일컫은 것으로 보아, 흐흐흐......당신 스스로 비열한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니 더 말해 소용이 없겠지만 당신의 부모는 강호에서도 명성이 쟁쟁한 의협이며 영웅이오......" 그는 언성을 높히고 다시 다그치 듯 말했다. "당신의 부모의 영명을 욕되게 할까 두렵지 않소? 사부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부모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석파천은 크게 기뻐했다. "당신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시오? 그렇다면 잘 되었소. 백 대 협, 나에게 이야기해 주시오. 우리 어머님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우 리 아버님은 누구요?" 그는 몸을 일으켜 백만검에게 깊이 읍을 하는데 그의 표정과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 백만검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가장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 었다. 그는 재빨리 궁리를 했다. '이 녀석은 너무나 간악한 놈이라 상리(常理)로써 헤아릴 수 없군.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부모마저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개잡 종이라고 일컫다니......' 이와 같은 생각과 더불어 그는 많은 감회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훌륭한 천품을 타고난 당신이 훌륭한 사람을 본받아 배우는 것을 마다하니 한스럽고 탄식할 노릇이구료." 석파천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백 대협, 한스럽고 탄식할 노릇이라니, 우리 어머니와 아버님이 어 떻게 되셨다는 것입니까?" 그러는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백만검은 그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것을 보고 결코 연극을 하는 것 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버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그리운 정이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양 심은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군......"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부모님은 검법이 뛰어나고 영웅호걸이라 명성이 자자한 분들 이오. 그들 부부 두 사람은 강호에서 손을 잡고 활약하고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다는 것이오?" 장락방의 군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망연해졌다. '방주의 신세내력에 대해서 우리들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알고 보니 그의 보모님은 강호에서 이름난 인물이었구나. 무림에서 백만검 에게 칭찬을 들을 만한 부부라면 몇 사람 되지 않는데 누구일까?' 패해석은 대뜸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현소장 흑백쌍검의 아들이란 말안가? 이......이거 귀찮게 되었는걸.' 이때 왕만인은 가만균과 화만자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한숨 을 돌릴 수 있어서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석파천은 그의 신음에 고통의 빛이 가득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무척 근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저 소협께서는 어째서 갑자기 뒤로 날아가게 되었소? 대문에 부딪쳐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패 선생, 저 소협의 상처가 깊지 않은지 살펴 보구료." 이 몇 마디의 말은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 때 비웃음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장락방의 군호들은 반수 이상이 소리내어 웃었 다. 장락방의 사람들은 한마디씩 내뱉었다. "저 사람의 상처는 깊다고 할 수는 없으나 결코 가벼운 상처는 아니 지." "설산파의 고수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와 야밤에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 대단한 재간이 있을 줄 알았더니, 흐흐흐......과연 명불허전(名 不虛傳:명성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님)일세." 백만검은 그들의 조롱을 못들은 척하고 입을 열었다. "석 방주,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찾아 온 것은 당신과의 사사로운 일 때문이지 결코 다른 친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설산파의 제자들은 남과 쓸데없는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소......" 이어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석중옥(石中玉), 내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는데 인정을 하겠 소? 인정하지 않겠소?" 석파천은 의아하여 물었다. "석중옥이라니? 누가 석중옥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나더러 무엇을 인 정하라는 것인지요?" 백만검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당신의 사부 풍화신룡은 당신의 비열한 악행으로 한 팔을 잘리게 되 었소. 당신 사부인 봉(鳳) 사형으로 말하면 당신에게 태산같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당신은 추호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오?" 이 몇 마디의 말은 매우 진지하고도 간곡했다. 그의 양심을 되찾게 해서 죄를 뉘우치도록 하자는 뜻에서 백만검은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석파천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다시 물었다. "풍화신룡은 또 누구란 말씀이오? 어째서 나의 비열한 행동 때문에 그가 한 팔을 잘리게 되었다는 것이오? 내가......도대체 무슨 비열한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이오?" 백만검은 그가 시종 자신의 말을 부인하자 자기의 딸이 수치를 당하 게 되고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자결을 하게 된 참혹한 사건을 자기 입 으로 말하도록 자기를 다그치는 태도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크게 울화가 치밀었다.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그는 획, 하니 검을 뽑아들고 손목을 한번 떨쳤다. 곧이어 탁, 하는 소리가 났을 때 장검은 검집에 꽂혀지게 되었다. 이어 그는 기둥에 나타난 여섯 개의 검흔(劍痕)을 가리키며 낭랑히 말했다. "여기에 계신 친구들! 우리 설산파의 검법은 별 것 아니오. 하지만 본파의 조사께서 창안하시어 전해 내려오는 검법으로 상대방에게 상처 를 입히게 되었을 때 종종 눈송이의 육각형 모양의 자국을 내게 되는 데 본파는 바로 그와 같은 데서 이름을 얻게 된 것이오." 중인들은 일제히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칠을 한 기둥에 여섯 검의 자국이 나 있었는데 그 자국들은 모 두 모여 여섯모 꼴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 하나의 검자국도 눈송이의 형태를 닮고 있었으며 또 매우 정교 했다. 조금전 그가 검을 뽑고 다시 검을 검집에 꽂는 행동은 눈깜짝할 사이 에 일어난 일에 불과했다. 그는 그 순간에 기둥에다가 잇달아 여섯 번의 검을 찌른 것이었다. 거기다가 손목을 떨침으로써 여섯모의 형태를 이루도록 했으나 실로 빠른 검세였다. 뭇사람들은 왕만인이 석파천의 내력에 나가떨어지게 된 후 설산파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그러나 백만검의 그와 같은 절묘한 검법이 무림에서 보기 드문 재간인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존경심이 우러났고 어떤 사람들은 감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백만검은 포권을 하고 말했다. "여러 친구들 가운데 검법에 있어서 백모를 능가하는 사람들은 얼마 든지 있을 것이오. 그런데 이 백모가 어찌 자만심을 앞세워 귀방의 총 타에까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겠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다만 한가지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증인이 되어 주십사고 청하는 것이외다. 칠년 전에 폐파에 사람답지 않은 제자가 있었소. 이름은 석 중옥이라 했는데 당돌하게도 불초의 요 사숙과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 우리 요 사숙이 그의 버릇을 가르쳐 놓기 위해서 그의 외쪽 허벅지 에 여섯 검을 찔렀소. 매 일 검이 눈송이 모양으로 여섯 모의 꼴을 이 루었었소......" 이어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재차 설명을 했다. "본파의 검법은 평범하고 기이한 점이 없으나 천하에서 그와 같은 꼴 의 상처를 남기는 재간은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오......." 여기까지 말하던 그는 고개를 돌리고 석파천을 한번 노려 보더니 싸 늘한 어조로 말했다. "석중옥, 자네가 뭇사람들을 기만하려고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스스 로 드러낼 용기가 없다면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려 여러 친구들에게 보 여주게. 도대체 자네 허벅지에 그런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 면 알게 될 것이네." 석파천은 의아하여 물었다. "나의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이 오?" 백만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네. 만약 자네의 허벅지에 그와 같은 상처가 없다면 이 백모 는 눈이 멀게 된 것이고 귀방에 와서 소란을 피운 점 방주에게 큰 절 을 올려 사죄하겠네......" 그는 매우 단호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그러나 만약 자네의 허벅지에 그와 같은 자국이 있을 때 그때 는......어떻게 하겠는가? 말을 해보게." 석파천은 웃으면서 말했다. "만약 나의 허벅지에 그와 같은 여섯 개의 상처자국이 있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와 같은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을까요?" 백만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매우 자신에 찬 말에 속으로 의아한 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저 녀석은 석중옥이 틀림없을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 었으니 풍모도 변하고 행동거지도 변하기는 했지만 얼굴 모습만은 변 함이 없지 않은가? 화 사매가 이곳으로 잠입해서 살펴 본 후 단정했으 니 우리 모두가 잘못 보았을 리 없겠지?' 그는 일시 생각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했다. 이때 진충지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우리 방주의 허벅지에 있는 상처를 보려고 하는 반면에 우리 방주는 귀파의 화 소저의 허벅지에 난 상처 자국을 보고 싶어하오. 그 러나 이곳도 사람이 많고 불편하니 차라리 두 분이 함께 내실로 들어 가서 서로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자세히 보도록 말이외다." 이 말이 떨어지자 장락방의 무리들은 배꼽이 빠져라 하고 웃어댔다. 백만검은 극도의 분노에 나직이 코웃음을 쳤다. "흥, 몰염치한 작자들!" 그는 몸을 빙글 돌리더니 대청 한복판에 우뚝 서서 호통을 내질렀다. "석중옥,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허벅지의 상처자국을 내보이지 못하 겠다면 나를 따라 능소성으로 올라가 죄를 받도록 해라!" 그는 획하니 검을 뽑아들었다. 석파천은 말했다. "백 대협, 화를 낼 필요가 어디 있소이까? 백 대협께서는 나의 허벅 지에 상처자국이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허벅지에 그런 상처가 없 소이다. 백 대협께서 이 확인하시겠다면 보여드리겠소이다." 그는 왼쪽 다리를 호피교의 팔걸이 위에 들어올리고 바짓가랑이를 걷 어 올렸다. 그러자 허벅지가 드러났다. 대청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별안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석파천의 외쪽 다리 바깥쪽에 아니나 다를까 여섯 점의 상처자국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여섯모 꼴을 이루고 있었다. 살갗에 난 상처 자국은 기둥에 난 자국같이 또렷하지는 않았으나 여 섯 모 꼴을 이루고 있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놀란 사람은 석파천 자신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 여섯 점의 상처자국을 어루만져 보았다. 정말 자기의 허벅지에 상처자국이 나 있지 않은가! 결코 거짓이 아니 었다. 그는 눈을 부비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허벅지에 난 여섯 점의 상처자국은 기둥에 난 자국과 똑같았다. 설산파의 아홉 사람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석파천은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린 채 이마에서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깻죽지와 허벅지에 이와 같은 상처자국이 있는데 어째서 나는 몰 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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