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다른 출중한 제자인 문만부(聞萬夫)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능소성에서 가늠하게 되었을 때는 각기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오늘 바깥 세상에 나와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 을 새삼 깨달을 수 있군요......"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백 사형,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한다면 그때가지 할일 이 없으니 백 사형이 여러 사람들에게 몇 수 가르침을 베풀어 주는 것 이 어떻겠소?" 여러 사제들이 이에 찬동했다. 백만검은 말했다. "우리 아버님의 여러분들에게 전수한 무공은 사실 따지고 보면 똑같 은 것이네. 조금도 그 누구를 두둔해서 좀더 가르치거나 한 것이 아니 지. 자네들이 봉 사형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부지런히 무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나보다 뛰어난 위치에 서게 되었네." 문만부는 즉시 말했다. "사부님은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만 우리 형제들이 너무나 우둔 해서 그 가운데의 오묘한 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백만검은 길게 탄식을 했다. "이번에 능소성으로 가는 도중에 만사가 태평스럽고 무사하리라는 보 장은 없으니 일 초의 검법이라도 더 배워두는 것이 유리하지......" 그는 호연만선에게 말했다. "호연 사제와 문 사제는 한 번 초식을 겨루어 보도록 하시오......" 그는 다시 다른 두 사람에게 명했다. "조 사제와 왕 사제는 바깥에 가서 망을 보도록 하시게. 어떤 동정이 보이기만 하면 즉시 알려야 하네." 조, 왕, 두 사람은 자기네들 사형인 백만검이 다른 동문들에게 검초 를 가르치는데 자기들은 망을 보아야 한다니 마음이 내키는 일이 아니 었다. 사형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고 해서 그들은 퉁명스런 표정을 하고 밖 으로 걸어나갔다. 문만부와 호연만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각기 장검을 들고서 마주섰다. 문만부는 아랫쪽에 서서 부르짖었다. "호연 사형, 공격을 해오십시오!" 호연만선은 검자루를 거꾸로 돌리고 백만검에게 두 손을 마주잡아 보 였다. "백 사형께서 잘 알아서 지도해 주시길 바라오." 백만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연만선은 검의 끝을 갑자기 위로 치켜 올리면서 비스듬히 문만부의 왼쪽 어깨를 찌르려 했다. 이는 바로 설산파의 검법 가운데 노지횡사(老枝橫斜)라는 절초였다. 능소성 안팎에는 매화꽃을 잔뜩 심어놓고 있었다. 과거 이 검법을 창 안한 설산파의 조사가 매화꽃을 유난스레 좋아하다 보니까 검법 가운 데 적지 않은 초식이 매화꽃이나 매화나무 가지 등의 형태를 본받아 창안하게 되었다. 표일하면서도 순박한 데가 있는 검법있었다. 매화나무의 가지는 앙상 해 보여야만이 귀한 것이라 여겼다. 반면에 매화는 무성하게 함께 모여 자라는 경향이 있는 것을 높이 샀 다. 그렇기 때문에 호연만선과 문만부 두 사람이 검법을 겨루게 되자마자 때로는 매우 단순하고도 소박한 초식을 펼쳤고 때로는 절묘하면서도 기이한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따라서 검법이 한번 펼쳐지자마자 눈송 이가 허공에서 난무하는 것 같았고, 삭풍이 획획, 몰아치는 것 같았 다. 두 사람은 매우 신속한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마치 매 화나무가 세찬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동시에 새외의 대사막에서 날아오르는 모래기둥과 낙타들이 달려갈 때의 모양이 두 사람의 몸놀림 가운데서 간혹 드러나기도 했다. 석파천은 이때 한쪽에 쓰러져 있었다. 그 누구도 그를 아랑곳하지 않 았다. 그는 너무나 무료해서 호연만선과 문만부 두 사람이 검법을 눈여겨 보았다. 그의 내력은 이미 상당히 정순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검법 과 권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일 검을 찌르고 받고 하는데 그 공세와 수비가 무척 교묘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 오묘한 이치를 그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으나 다만 서로 빈틈없이 돌아가며 싸우고 있는 것이 꽤 재미있다고 느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본 석파천은 두 사람의 장검이 장난 처럼 휘둘러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장검을 조그만 더 앞으로 내밀면 상대방의 손을 찌를 수 있겠 는데 언제나 기력이 다했는지 갑자기 멈춤으로써 그간의 공이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석파천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제 보니 그들 사형제는 검법을 연마하는 것이지 상대방을 죽 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때 백만검이 호통을 내질렀다. "잠깐!" 그는 천천히 걸어나가더니 호연만선의 장검을 받아들고서는 하나의 검식을 펼쳐 보이고 말했다. "이 일 초는 두 치 정도만 더 찌르면 벌써 이겼을 것이네." 석파천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백 대협의 말이 옳아. 두 치 정도만 더 앞으로 내찔렀다면 이겼을 것인데......호연 대협이 어찌해서 찌르지 않은 것일까?' 호연만선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제는 이 일 초 풍사망망(風沙莽莽)은 두 치를 남겨두고는 내력이 소모되어 반 치도 더 찌를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소이다." 백만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공은 일 조 일 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그러나 내력이 부 족하게 되면 검법의 변화로 보완을 해야 한다네. 본파의 내공 비결은 솔직히 말해서 뛰어난 점이 없네. 소림(少林), 아미(蛾嵋), 곤륜(崑 崙), 무당(武當)의 무공과 비교해볼 때 각기 장단점을 갖추고 있다지 만 설산 일파는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백 년간 전통을 지켜온 그들 커다란 문파와 견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본파의 검법은 기묘함에 있어서 천하에서 무적이라 할 수 있 으니 여러 사제들이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우리 설산검법의 장 점을 잘 살려 상대방의 결점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내력을 견주려 하지 말고 검초의 변화를 정묘하게 가해서 이 기도록 하게." 두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했다. '백 사형의 말은 정녕 우리 검법 가운데 가장 요긴한 점을 지적하고 있구나.' 사실 능소성의 성주이며 설산파의 장문인인 위덕선생은 어릴 적 부터 기연을 만나 희세의 영약을 복용하여 내공이 크게 증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이 오륙십 년간 연마한 내공을 짧은 기간안에 지니게 되었다. 본래 설산파의 내공은 평범한 것이었으나 백자재의 내력이 소림과 무 당의 고수들보다 뛰어난 점을 갖추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영약의 덕택이었다. 하지만 영약은 억지로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물건이 아 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덕선생 백자재의 내공은 제자들의 내력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위덕선생은 호승심이 강해서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결점을 말 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설산파는 능소성의 문을 닫아놓고 스스로 제 일이라고 뽐내었고 능소성이 설산파 제자들은 자기의 내외공을 절세의 무학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 중원에 나오자마자 잇달아 봉변을 당하게 되고, 또 백만검이 그와 같은 사실은 솔직히 말해주는 바람에 설산파의 제자들은 황연히 깨닫게 된 바가 있게 된 것이다. 백만검은 즉시 검법 가운데 절묘한 변화를 천천히 일 초 일 식 펼쳐 보이고 설명을 해주었다. 호연만선과 문만부가 초식을 겨룬 후 다른 두 명의 사제들도 무공을 겨루게 했다.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루게 된 이후 백만검은 호연만선과 문만부로 하 여금 밖을 지키게 하고 조, 왕, 두 사제를 불러들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설명을 듣게 되자 검법을 일 초라도 제대로 잘못 펼치게 된다면 즉시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같이 정신을 가다듬고서 초식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이제는 능소성에 있을 때 단순히 검법을 익힌다고 잘난 체를 할 때와 는 달라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초식을 겨루긴 했으나 펼치는 검법이 모두 대동소이했 다. 그렇기 때문에 석파천은 일곱 쌍의 제자가 초식을 겨루게 되었을 때 의 상황을 눈여겨 보았기 때문에 칠십이 초의 설산 검법을 대강은 알 게 되었다. 그는 초식의 이름이 운치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뜻을 이해 할 수 없어서 명칭을 외우지는 못했으며, 초식에 내포되어 있는 절묘한 변화 는 터득할 수 없었으나 검초를 펼쳤을 때 어떻게 해소시켜야 하고 또 어떻게 반격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대강은 알게 되었다. 설산파의 제자들은 검술을 익히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석파천도 설산 검법을 어느 정도 기억하기에 이르렀다. 갑자기 백만검이 장검을 내던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뭇사제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의아하게 여겼다. 이때 백만검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석파천을 한번 바라보더니 침울 하게 말했다. "저 녀석은 우리 문파로 들어온 이래 이삼 년도 되지 않아 본파 무공 의 절묘한 점을 터득하여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점은 십 년이나 이십 년간 연마한 사백이나 사숙들보다 떨어지지만 임기응변의 요령은 크게 더 뛰어나니......"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본파의 검법은 본래 날렵하고 변화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훌 륭한 제자를 얻게 되자 봉 사형은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장문인도 그를 매우 총애하여 본파를 크게 빛낼 수 있을 것이라 했거늘......" 그는 잇달아 세 번이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애석해 하는 표정을 얼굴 에 가득 떠올렸다. 기한서북 백만검은 무공이 고강하고 식견 또한 남달리 뛰어난 데가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십팔 명의 사제들에게 반나절 동안 검초를 연마하도록 지도를 했으나 하나같이 사제들의 자질이 평범하여 아무리 열심히 연 마한다 하더라도 대성을 거둘 것 같지가 않았다. 따라서 설산파의 뒤 를 이어 줄 사람이 없다는 데 크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석중옥은 본래 천 명이나 되는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있을까 말까 한 인재였다. 그가 좋은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릇된 길로만 내닫고 있었으니 백만 검으로서는 자기 문파에 인재가 없다는 사실과 석중옥이 또 그와 같이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데 대해 크게 마음 아파하게 되었던 것이다. 석파천은 이때 백만검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지극히 따뜻한 정 이 넘치는 것을 보고, 백만검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약간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토지묘 안은 일시 무거운 침묵에 휩싸이게 되었다. 잠시 후 백만검은 오른발로 땅바닥에 던진 장검의 검자루를 살짝 건 드렸다. 그 검은 허공으로 훌쩍 튀어올라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 아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백만검은 검을 잡고 천천히 마당으로 나서더니 낭랑히 외쳤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 아래로 내려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 설산파의 뭇제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장락방의 고수들이 달려왔나? 어째서 호연만선과 문만부 두 사람이 밖에서 지키고 있는데도 알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아무런 기척도 없 이 나타난 것인데 백 사형은 또 어떻게 알아차리게 되었을까?' 이때 싹, 하는 가벼운 음향과 더불어 마당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 냈다. 한 사람은 전신을 흑의로 감싸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부인인데 하 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부인은 허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있었고 머리에 빨간 꽃을 꽂고 있는 점으로 보아 상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남자의 검 자루에는 검은 수실이 나부기고 있었고 여인의 검 자루에는 흰 수실이 휘날리고 있었 다. 두 사람은 뛰어내릴 때 동시에 착지를 하면서도 별로 소리를 내지 않 는 무공을 지녔고 풍모 또한 뛰어나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게 만들었다. 백만검은 재빨리 장검을 거꾸로 잡고 포권을 하며 낭랑히 외쳤다. "알고보니 현소장의 석 장주 부부께서 오셨구료." 나타난 사람은 바로 현소장의 장주 석청과 그의 부인 민유였던 것이 다. 석청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포권을 했다. "백 사형이 폐장에 오신 것을 저희 부부는 마중을 하지 못했을 뿐 아 니라 지주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오이다." 석청 부부는 후감집에서 설산파의 제자들이 들려준 말을 아직도 기억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 그들 부부가 후감집에서 만난 설산파의 제자들은 장락방에 잡혀 있기 때문에 이곳의 설산파의 제자들은 백만검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알아 보고 속으로 켕켰다. '우리가 저네들 산장을 태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때 백만검은 단도직입적으로 설명을 했다. "우리들이 이번 서역에서 동쪽으로 나오게 된 것은 자제분을 찾기 위 해서인데 자제분을 찾지 못해 불초가 노한 김에 귀장을 불태우고 말았 소이다." 석청은 얼굴에 여전히 웃음을 띠우고 말했다. "폐장은 원래 훌륭하게 세우지 못했소이다. 백 사형이 눈에 거슬리는 것을 느끼고 이 형제를 대신해서 불질러 버린 것은 그야말로 시원스러 운 처사이지요. 잘 했소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더군다나 백 사형께서는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장원 사람들을 모조 리 밖으로 내보낸 점,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외다." 백만검은 정중하게 말했다. "귀장의 하인이나 장정들이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는데 어찌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 있겠소이까? 오히려 민망스러울 뿐이외다." 석청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설산파의 여러분들은 불초의 못난 자식에 대해서 여러모로 돌보아 주셨는데 어리석게도 그 녀석이 좋은 것은 배우지 않고 막무가내로 못 된 짓만 일삼아 백 노선배님과 봉 사형, 그리고 백 사형의 기대를 저 버린 점 저희들 부부로서는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오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백 노선배님은 안녕하시며 백 노부인께서도 안녕하신지요?" 그는 민유와 함께 정중히 허리를 굽혀 예를 했다. 바로 백만검 부모 의 안부를 물은 것이었다. 백만검은 허리를 굽혀 반례했다. "가친은 덕택으로 편안히 잘 계십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석 장주의 자제분 때문에 지금 능소성에 계시지 않소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수심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석청은 침착하게 말했다. "노부인께서는 이번 일로 인심도 구경하고 바람도 쐴 겸, 여러모로 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백만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석 장주 말씀대로 어머님이 무사하기를 빌 뿐이지요. 하지만 저의 어머님은 이미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강호의 풍상을 견디어 낼지 자식 된 도리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석청은 말했다. "그건 백 사형의 효성이지요.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 고 부모된 자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소이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자녀들이 설사 못된 짓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부모된 사람은 마음을 아파하는 것이 상례이지요. 또한 데려가서 매섭게 가르칠 수 밖에 다 른 도리가 없는가 하오이다." 백만검이 들을 때 이 말은 어쩌면 그의 아들을 두고 하는 말인것 같 기도 했다. 백만검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입을 열었다. "석 장주 부부께서 존경을 받는 분들이외다. 더군다나 현소장의 대청 에 걸려 있는 현판은 흑백분명(黑白分明)이라고 씌어 있더구료. 이 한 가지를 보아도 석 장주 부부께서 시비를 명찰하고 올바른 일을 지켜나 갈 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소이다." 석청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우리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은 시비곡절을 가려 야 할 때 조금도 애매한 태도를 짓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오이다. 그 런데 흑백분명이라고 쓰인 현판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요?" 백만검은 태연하게 말했다. "불초가 불태워버렸소이다." 석청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하셨소이다. 저희들 부부 자식놈이 설산파의 문하로 들어가 귀파 의 문규를 어겼다면 귀파의 어른들이 처벌을 하여 죽이든 살리든 우리 로서는 간섭을 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은 본래 무림의 규칙이 아니겠 소이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저희들 부부는 그날 후감집에서 흑백쌍검을 귀파의 사람 손에 넘겨 주었습니다. 자식놈을 붙잡았을 때 능소성으로 데리고 가 쌍검과 바꾸 기로 한 것인데 그 일은 알고 계시겠지요?" 백만검은 경만종과 가만균 등을 만나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날 경만종 등은 쌍검을 빼앗기자 처음에는 석청 부부가 수작을 부 린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낭패한 꼴로 도망쳐 돌아오는 한 떼의 관졸과 가마꾼들을 발견하게 되고 자세히 물어본 결과 가마 안에 탄 사람이 한 늙은이와 한 어린애인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듣게 된 설산파의 제자들은 곧 그 거지와 마 천거사 사연객임을 알게 되었다. 백만검은 평소 사연객의 무공이 지극히 높고 또 일정한 거처가 없다 는 소리를 들은 바가 있어서 흑백쌍검을 되찾아 온다는 것은 매우 어 려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석청 부부의 말을 듣고 백만검은 그만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소이다. 귀하 부부의 쌍검은 지금 이곳에 없으니 이후 찾아뵙고 드리기로 하겠소이다." 석청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백 사형의 그 말씀을 이 석모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모르겠구료. 흑백분명이라는 네 글자는 이 석모 부부만이 지키려는 것이 아니오이 다. 사형들이 불초 자식을 붙잡아 놓고도 이 석모 부부의 무기를 압류 한 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무림의 규칙이오?" 백만검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석 장주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석청은 말했다. "대장부의 일언 중천금이라고 했소이다. 어린애를 압류하려면 검을 압류할 수 없는 것이고 검을 압류하고 있으면 사람을 잡아둘 수 없는 일이겠지요." 백만검은 본래 무림에서 명성이 쟁쟁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고, 신의 에 밝은 사람이었다. 흑백쌍검을 자기네들 문파 수중에서 잃게 되었으니 석청 부부에 대해 서 실로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치로 보아서는 다시 변명할 여지가 없겠으나 그는 석청 부부와 사 연객 사이에 어떤 결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억측을 하게 되었다. 석중옥이 자기의 외동딸을 죽게 만들었고, 이제는 그 석중옥을 사로 잡은 마당에 상대방의 한마디에 사람을 내놓을 수는 없는 심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불초로서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소이다. 석 장주께서는 용서를 하시구료. 그리고 석 장주 부부의 쌍검은 이 백만검이 책임을 지고 돌려드리겠소이다. 만약에 백모가 무능하여 흑백쌍검을 내놓지 못할 때 귀장으로 찾아가 불초의 머리를 잘라 사죄를 올리기로 하지 요." 매우 단호한 말이었고 굳굳한 어조였다. 석청은 그의 신분으로 볼 때 말을 한 이상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을 멀건히 뜨고서 외동아들이 흙바 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그냥 돌아갈 수가 았겠는가? 민유는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줄곧 석파천에게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과 헤어진 지 퍽 오래 된 처지였다. 지금 객지에서 갑자기 아들을 만나게 되자 당장에 달려들어 껴안고 싶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으며 금방이라도 두 빰을 타고 주루륵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지금 그녀의 귀에 백만검의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다만 그녀는 평소 남편의 주장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석청이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석청은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백 사형, 너무나 과분한 말씀이시오. 저희 부부의 두 자루의 보검이 어찌 백 사형의 목숨과 견줄 수 있겠소이까? 그러나 우리들은 강호에 서 생활하는 사람들인만큼 모든 일에 도리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설산파의 검법이 강하고 사람들이 많기는 하나 많은 사람들의 수를 믿고 사람을 업신여길 수 없는 것이외다. 검을 수중에 넣은 이상 사람 마저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백 사형, 저 애 는 오늘 우리 부부가 반드시 데리고 가야겠소이다." 말을 끝내면서 그는 오른쪽 어깨를 약간 움직였다. 그것은 바로 자기 처에게 검을 뽑고 함께 공격을 하자는 신호였다. 싸늘한 광채가 번쩍하는 순간, 석청과 민유 두 사람은 두 자루의 장 검을 일제히 뽑아 들고 백만검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두 자루의 장검은 백만검의 가슴팍 앞 한 자쯤 되는 곳에 이 르러 갑자기 멈추어지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사지가 굳어진 듯 한 자세였다. 석청은 곧이어 입을 열었다. "백 사형, 손을 쓰시지오." 그들 부부는 암습을 가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백만검이 검을 뽑아 싸우려고 하지 않는 이상 그 검을 앞으로 찌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이기도 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25편 →
26편부터
26편
협객행(김용) - 26편 (26/82)
백만검은 두 자루의 검끝을 바라보며 앞으로 반 걸음쯤 나섰다. 석청이 사용하는 것은 본래 한 자루 흑색 장검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청강검(靑鋼劍)에 지나지 않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