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객지에서 이와 같이 만나게 되고 또 그 가운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라 진정 만감이 교차했다. 석청 부부는 아들이 거의 다 자랐고 몸도 튼튼한 것을 보고 기뻐했 다. 더군다나 석파천은 초췌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으나 영기발랄한 기상 이 엿보이는 젊은이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더욱이 눈동자에 형형한 신광이 빛나는 것이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더욱 더 기뻐 다. 석청은 아버지로서 무림의 여러가지 규칙을 생각하고 긴 한숨을 내쉬 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현소장 가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게 되어 차마 강호에 얼굴을 들고 돌아다닐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리 하여 이 몇 년 동안 그들 부부는 몰래 그의 종적을 찾아다니면서 무림 인들과 마주치는 것을 회피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아들이 부모를 보고도 앞으로 나와 인사하는 것은 고 사하고 오히려 무공을 겨루어 보겠다니 설산파에서 한 온갖 행동이 결 코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기가 막혔다. 그는 좀처럼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고 백만검의 앞인지라 끓어 오르 는 분노를 꾹 참고 가라앉혔다. 민유는 인자한 어머니의 본능으로 자식을 미워하는 마음보다 기뻐하 는 마음이 더욱더 컸다. 본래 그녀는 두 아들을 두었으나 둘째 아들은 원수에게 해를 입어 참 혹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홀로 남게 된 큰아들 석중옥에게 굳게 되었다. 한데 이번에 이런 사건이 발생하자 그녀는 남편에게 설산파에서 아무 래도 뭔가 잘못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와 같은 행동을 저질 렀을 것이라고 변명을 했다. 그러니까 십중팔구 백자재의 손녀가 총애를 믿고 아들을 괴롭혔기 때 문에 열두세 살밖에 되지 않은 그녀에게 외람된 짓을 했을 거라는 것 이었다. 수년간 아들을 찾아다니면서 눈물도 많이 흘렀던 그녀였다. 그러던 중 이제 아들을 대하게 되자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식이라 하지만 부 모인지라 모든 것을 용서해 주고 싶은 심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석파천이 검을 들고 나서는 발걸음이 힘차고 민첩할 뿐 아니라 몸놀 림마저 의젓한 것을 보니 속으로 흐뭇하고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아들을 껴안고 그 동안의 우여곡절과 깊은 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상당히 교활할 정도로 눈치가 빠르던 기 억을 되살렸다. 따라서 그 아들이 백만검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검술을 겨루겠다는 말에 반드시 어떤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혹 시나 남편이 화가 나서 아들을 꾸짖지나 않을까 가슴 조이며 입을 열 었다. "좋다. 우리 네 사람이 이대 이로 싸움을 벌여 무공을 한번 연마해 보자. 어찌 되었든 간에 상대방의 몸에 검이 닿는 것으로 싸움을 끝내 는 것이니 별 상관이 없겠지?" 그녀의 음성은 매우 부드럽고 자식을 사랑하는 정기 가득 서려있었 다. 다만 마음이 격앙된 듯 그녀의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석청은 처를 비스듬히 한번 쳐다보고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 다. 민유는 성격이 유순해서 무슨 일이든지 남편이 처리하는대로 묵묵히 순응했다. 간혹 그녀가 제의하는 말을 석청 또한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곤 했 다. 석청은 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첫째로 급히 아들의 무공이 어 느 정도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고, 둘째로는 백만검이 마음속으로 승복 할 수 있도록 패배시키고 싶은 생각에 순순히 응한 것이라고 보았다. 어린 나이의 석중옥은 총명하기는 하나 검법에 있어서는 쓰러져 있는 설산파의 그의 사숙뻘 되는 사람들보다 나을 리가 없고, 또 백만검을 도와 부모에게 대항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백만검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네 녀석이 설산파의 검법으로 나와 함께 손을 맞잡고 적에게 대항한 다는 것은 바로 설산파의 제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검을 겨룬 결과 가 어떠하든 간에 내가 너희들 집안 세 사람에게 살해를 당하지 않는 다면 설산파의 장문인의 영부(令符)를 꺼내 너로 하여금 나를 따라가 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겠다. 그래도 만약에 석청 부부가 막는다면 그 것은 바로 무림의 규칙을 깨뜨리는 행위가 되겠지.' 그는 장검을 쳐들고 말했다. "이제 이대 이의 싸움이라도 좋고 삼대 일의 싸움이라도 좋소. 이 백 만검은 어찌 되었든 현소쌍검의 손 아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를 해드리겠소."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만약에 석씨 집안 세 사람이 자 기를 포위 공격하고 핍박을 한다면 어찌되었든 간에 먼저 석중옥을 죽 여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아울러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면 석중옥 하나 쯤 죽이는 것은 문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파천은 백만검의 장검 끝이 가볍게 떨리면서 비스듬히 석청을 가리 키게 되자 그 검초가 바로 공격을 하는 듯하면서도 수세를 취하는 것 임을 알아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서둘러 공격을 해야겠구나.' 따라서 그는 역시 장검을 슬쩍 흔들며 석청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갔 다. 석파천이 일 초를 찔러내자 갑자기 검기가 크게 일었다. 그 일검이 찔러나가는 기세는 그렇게 급격한 것이 아니었으나 내력이 저절로 검 에 돋우어져 찍, 하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검초는 설산파의 검법이었지만 내력의 고강함은 백만검을 능가하고 있었다. 백만검은 고사하고 석청과 민유 부부도 이구동성으로 놀람에 찬 외마 디를 내질렀다. "어!" 백만검은 석파천이 일 검을 찔러내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얕보는 마 음을 갖고 있었다. '저 운횡서령(雲橫西嶺) 일 초는 오른팔을 높이 쳐들었으니 변화의 여유가 전혀 없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왼쪽 손가락의 부위도 완전 히 위치가 잘못되어 있어 손가락을 뻗쳐서 혈도를 짚을 수 있는 변화 를 내포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왼발을 너무나 앞으로 내밀고 있 으니 만약 적이 반격하게 되었을 때 왼발로 상대방의 허벅지를 찰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는 단번에 석파천의 그 일 초에 여덟 곳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파 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석파천을 앝보는 마음에서 어리둥절해 지는 놀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석파천의 그 일 초 검기의 위력은 그야말로 한평생 보기 드문것이었 다. 간혹 그의 부친인 백자재가 술에 취하여 몇 명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상대로 검법을 연마하게 되었을 때 찍찍, 하는 소리를 낸 적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도 삼사십 초를 겨룬 연후에 내력이 점차 모여 바람을 일 으키고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이지 대뜸 그와 같은 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석파천은 처음부터 그와 같은 날카로운 바람과 쇳소리를 일으키니 그 장검에는 혹시 피리와 같은 괴상한 물건이라도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잠시뿐이었 고, 그는 즉시 자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청 역시 어, 하는 소리를 내지르더니 검을 들어 막았는데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석청의 장검이 대뜸 두 동강으로 잘라지고 말았다. 더군 다나 부러진 검이 곧장 날아가 벽에 가서 푹 꽂히는데 서너 치 정도 깊이 박히는 것이 아닌가! 석청은 그 순간, 자기의 손아귀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어깻죽 지가 흔들거리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들고 있던 검자루 쪽의 반토막 도 하마터면 손에서 놓칠 뻔했다. 본래 그는 불칙한 자식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 을 익힌 사람들은 무공이 고명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불쑥 훌륭하다는 한마디를 던지게 되었 다. 석파천은 석청의 장검이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 고 말았다. "어이쿠!" 그는 즉시 검을 거두고 얼굴에 의아함과 미안함, 그리고 근심의 빛을 띄웠다. 이때 그의 얼굴은 촛불 쪽을 향하고 있어서 그와 같은 표정을 석청과 민유는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들 부부 두 사람은 똑같이 마음속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느낌 을 받았다. 석청은 곧 부러진 장검을 내던지고 발끝으로 한 자루의 장검을 가볍 게 차서 들어 올렸다. "꺼림칙하게 느낄 것 없다. 나의 일 초를 받아 보아라!" 획, 하니 일 검을 석파천의 왼쪽 다리를 향해 찔러갔다. 석파천은 검 술을 익힌 적이 없는 초보자였다. 내력이 고강하여 공격을 할 때 그 위력이 발휘되었지만 석청이 펼치 는 허허실실의 공세를 당하게 되자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그만 손 발이 어지럽게 휘두르기만 했다. 그러나 석파천은 역시 사고력이 뛰어나고 행동이 기민해서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창송영객(蒼松迎客)이라는 일 초를 펼쳐 공세를 막았다. 석청은 장검을 약간 비스듬히 해서 검날을 어느덧 그의 다리에 갖다 댈 수 있었다. 만약에 눈앞의 사람이 자기의 친아들이 아니고 원수라면 일 검으로써 석파천의 오른쪽 다리를 두 동강으로 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한번 장검을 떨쳤을 뿐이며 곧 검을 거두어들였다. 민유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그만 식은땀이 등줄기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급히 부르짖었다. "청 오라버니!" 석파천은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바짓가랑이에 이미 한 치 정도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석파천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석파천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손에 사정을 두어서 고맙습니다. 저는 검법을 제대로 익히지를 못해 진정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군요." 그의 이 한마디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로서는 무심코 한 말이었으나 듣는 백만검은 또 달리 생각하고 있 었다. 백만검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네 녀석이 자기의 아버지에게 검법을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설 산파의 검법이 못하다는 결과밖에 더 되는냐? 자기가 잘못 배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마치 우리 설산파에서 제대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 은 것 같지 않은가? 이 백만검에게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이상 저 녀 석의 농락을 받을 수는 없지.' 한데 석청 역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매는 옥아가 설산파에서 사숙이나 사형들의 업신여김을 당했을 것 이라고 생각하나 제자로 받아들인 이상 결코 푸대접하지는 않았을 것 이 아닌가? 그러나 그가 펼치는 이 초의 검법을 보면 자세도 전혀 틀 려 있고 너무나 많은 실수가 엿보이니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적을 맞 아 싸우겠는가?' 그는 자기 아들 석중옥이 능소성에서 제대로 무공을 배우지 못한 모 양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일 검에 포함되었던 강맹한 기운은 설산파와는 전혀 관계가 없 는 것이다. 위덕선생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내력이 있을 것 같지 않으 니 반드시 달리 어떤 기우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는 이후 반드시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더 꺼리낄 것 없이 멋있게 한번 검술을 겨루어 보자꾸나." 그는 왼손으로 검결의 자세를 취하며 앞의 백만검을 향해 검을 찔러 갔다. 백만검은 검을 들어 피하면서 일 검을 반격했다. 민유는 검을 뻗쳐 석파천에게 천천히 다가갔는데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아들이 받아내기 쉽도록 했다. 석파천은 그녀가 전개한 일 검의 기세가 매우 느린 것을 보고 과거에 후감집에서 은자를 주던 정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라 히죽 그녀에 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그런 연후에 그 는 가볍게 검을 들어 막았다. 민유는 그의 표정을 보고 바로 자기 아들이 어머니에게 아는 체를 하 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더 흐뭇하게 여겼다. 이번에는 검을 빙글 돌 려서는 석파천의 허리께를 찔러갔다. 석파천은 생각했다. '이 일 초는 역시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그러면서 그는 설산검법 중의 일 초를 펼쳐 민유의 검을 막아냈다. 민유는 그의 검법이 생소하기 이를데 없고 초식을 펼치는 것이 느릿 하며 검을 내미는 수법 또한 풋나기의 솜씨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이 여간 괴롭지 않았다. '설산파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검법과 의협심을 지니고 있다하면서 나의 아들에게 이와 같은 엉터리로 검법을 가르치다니'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다시 초식을 변화시켜 그의 왼쪽 어 깨를 찔러갔다. 그녀가 일 초를 내밀 때마다 석파천이 해소법을 생각해낼 수 있도록 여유를 주었다가 펼쳐내곤 했다. 만약에 그가 일시 해소법을 몰라 주 저하면 그녀는 더욱더 느릿한 동작으로 검을 찔러감으로써 여유를 주 었다. 이는 검법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사부가 제자에게 초식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십이 분 인자한 정을 발휘하고 있었고 또한 참을성을 극도로 발휘하고 있었다. 십여 초를 겨루게 되자 석파천은 점차 자신이 생기 데 되었다. 좀더 검식을 해소시키는 법이 차츰 빨라지게 되었다. 민유는 속으로 기뻐했다. 매번 그가 일 검을 제대로 펼쳐내게 되었을 때 고개를 끄덕여 칭찬의 뜻을 표했다. 석파천은 그녀가 자기에게 검술을 어떻게 펼치고 어떻게 막는 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에 민유가 그 일초가 고 개를 끄덕여 좋다는 표시를 하지 않으면 다시 한번 그 일 초를 펼치고 자 했다. 그는 민유가 그 일 초가 뛰어나지 않다는 눈치를 보이면 여전히 세 번 씩이나 똑같은 초식을 펼쳐 반격을 해보였으며 어쨌든 간에 초식을 펼치는데 있어서 어긋남이 없도록 한 후에야 다른 초식으로 바꾸어 갔 다. 이때 석청과 백만검은 세 차례 겨루게 된 셈인데 두 사람은 이미 상 대방 검초의 장단점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더욱더 상대방의 검법을 소홀히 부지 못하게 되었는데 수초 를 겨루게 되자 두 사람은 어느덧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되었다. 주위의 변고에 대해서 듣지도 보지도 않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민유와 석파천이 겨루는 초식이 정말 싸우는지, 누가 이기고 누가 지 고 있는지 등을 돌볼 여유도 없거니와 알아보고 싶은 심정도 아니었 다. 이와 같은 실날 같은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싸움에 있어서는 전혀 마음을 흐트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상처를 입게 되거나 죽게 되는 것이다. 민유는 석파천에게 검법을 가르치면서 여유있게 백만검과 남편이 싸 우는 것을 틈틈히 눈여겨 보기도 했다. 그녀는 남편의 숨소리가 아직도 여유있는 것을 보고 여전히 내력이 충분하여 설사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패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이때 석파천은 설산파의 검법을 펼쳐내는데 칠십이 초의 검법 가운데 이십여 초를 깜박 잊고 있었다. 그녀는 석파천이 펼치는 검법의 추세에 따라 잊고 있던 검법들을 유 도해 내어 시험해 보도록 해 주었다. 석파천이 두 번째 칩십이 초의 검법을 펼치게 되었을 때 처음 펼쳤을 때보다 훨씬 위력이 있었다. 더군다나 간혹 그 기세를 그대로 빌어서 반격을 하기도 하고 해소를 하는 초식도 한결 빨라져있었다. 근근히 석파천이 그가 알고 있는 사십여 초의 검법을 두 번째로 펼쳐 내게 되었을 때 민유는 남편과 백만검이 여전히 결투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다음 칠십이 초가 끝나면 내가 뛰어들어 도와야겠다. 백만검과 계속 이런 싸움질을 할 필요없이 옥아를 데리고 여기를 떠나야지.' 그때 마침 석파천이 일 검을 찔러왔다. 그녀는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곧이어 그녀는 일 초를 반격했는데 일 초의 해소법을 석파천이 알고 있는 터이라 충분히 해소시키리라 생 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졌다. 원래 대전 안에 켜놓았던 촛불이 모조리 다 타버리면서 불이 꺼지고 만 것이었다. 민유는 일 검을 뻗쳐냈다가 촛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즉시 초식을 거 두어들였다. 석파천은 한번도 대전 경험이 없었던 터라 눈앞이 캄캄해지자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마주나가 민유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고 자기에게 검법을 가르쳐준 은덕에 사의를 표하려 하였다. 그가 한 걸음 갑자기 내딛게 되었을 때 그만 미처 거두어 들이지 못 한 민유의 검끝에 부딪치고 말았다. 민유는 그 순간, 이미 자기의 검끝이 상대방 몸을 찌르게 되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검을 뒤로 급히 던져버 리고 어둠속에서 팔을 뻗쳐서는 석파천을 붙잡고 놀람에 찬 어조로 부 르짖었다. "어디를 찔렸느냐? 응! 어디를 찔려어?" "......" 그는 잇달아 기침만 했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저......" 민유는 급히 화섭자를 꺼내서 불을 켰다. 석파천의 가슴팍이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본래 그녀는 침착한 여인이었으나 이때만은 크게 놀라 멍청히 쳐다보다가 당황한 음성으로 석청을 불렀다. "사형, 이를......어떻게 하죠?" 석청과 백만검은 어둠속에서도 여전히 상대방과 검세를 일으키는 바 람소리로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유가 화섭자에 불 을 밝힌 후 슬픈 어조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석청은 힐끗 민유를 바라 보았다. 석파천이 상처를 입고 있는 것과 놀람에 차 있는 처를 보자 역시 아 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그의 마음이 약간 흐뜨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바로 그 순간, 빈틈을 보이게 되고 백만검의 장검이 재빨리 석청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왔다. 이 일 초는 그야말로 요혈을 제압하는 검초여서 석청이 이를 해소시 키려 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백만검의 장검이 어느덧 상대방의 가슴팍과 여덟 치 밖에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고, 곧이어 검이 거둬들여졌다. 조금전 민유가 검으로 백만검의 요혈을 겨루었다가 곧 거두어 들였던 것처럼 그 빚을 갚은 셈이 되었다. 석청은 아들이 상처가 염려되어 그와 같은 문제를 따지고 들 여유가 없었다. 재빨리 그는 석파천의 상처를 살폈다. 가슴팍에서 선혈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원래 민유는 검의 끝이 인체에 부딪치는 느낌을 받게 되었을 때 재빨리 검을 움츠려들이고 곧바로 뒤로 던져 버린 것 이었다. 석청과 민유는 그제서야 약간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이때 한 자루의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장검이 석파천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는 바로 백만검이었다. 백만검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제분이 나의 딸을 욕되게 하여 내 딸이 어린 나이에 벼랑 위에서 몸을 던져 자결을 하고 말았소이다. 나는 이 원한을 갚지 않을 수 없 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두 분이 이 애를 데리고 능소성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면 적어도 두 달 동안은 목숨을 부지하겠으나 억지를 쓴다면 이 일 검에 요절을 내고 말 것이외다." 석청과 민유는 서로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민유는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백만검이 반드시 자신이 한 말을 실천 하는 사람인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만검이 일 검을 찌르게 될 쯤에 그들 두 사람이 합심해서 그를 죽 인다 하더라도 아들의 신상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석청은 눈짓을 하고 손을 뻗쳐 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대전 밖으로 달려나갔다. 민유는 대전문을 나서게 되었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이때 석파천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아들을 바라보는 민유의 눈초리는 부드럽 고 온화했으나 또한 처량한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누 깜짝할 순간 그 녀의 손에 들려졌던 화섭자의 불이 꺼지면서 대전안은 다시 칠흑과 같 은 어둠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백만검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석청 부부의 발검음 소리가 멀리 사라 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그들 부부가 반드시 그대로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차후 능소성으로 가는 도중에 반드시 무수한 풍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조금전 검법의 대결을 돌이켜 보았다. 실로 한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위험한 순간들이 아닌가? 만약에 그 촛불이 반치 정도 더 길었더라면 석중옥을 반드시 그의 부 모에게 빼았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뻗쳐 품속의 화섭자를 꺼내려고 했다. 한데 품속을 뒤지게 되었을 때 그는 장락방의 총타에 들어서기 전에 사제 문만부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싸움을 벌이게 되었을 때 방해가 될까봐 사제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그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제의 품속을 뒤져 화석과 화지(火紙)를 꺼내서는 불을 겼다. 한 자루의 초를 찾아 불을 켜려다가 그는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발 아래에 있어야 했던 석중옥이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그는 경악한 나머지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석중옥이 없는 것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지경이었고,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도깨비 장난인가?' 도깨비 장난이 아니라면 다친 몸으로 석중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종 적도 없이 어떻게 사라졌느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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