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쿠! 야단났다. 띵땅, 그는......그는 혹시......죽은 것이 아닐 까?" 정당은 킥,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천 오라버니, 그 일 초는 정말 훌륭했어요. 하지만 너무나 당황하여 자세가 보기 흉하더군요......." 이어서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말했다. "그는 죽지는 않겠지만 병신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어요. 아 마도 두 손과 두 다리를 일년이니 이년간 못쓰게 될 거예요." 석파천은 문만부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정말......미안하게 되었소. 나는......당신을 해치고자 하는 생각 은 추호도 없었소......띵땅, 방법을 강구해서 이 사람을 치료해 줍시 다." 정당은 문만부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그가 고통당하는 것을 면해 줄려거든 단칼에 베어버리세요." 석파천은 재빨리 말했다. "안 돼요!" 호연만선은 이때 오른팔이 부러져서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그와 같은 말을 듣고는 분노하여 외쳤다. "이 요괴 같은 년놈들! 설산파의 제자들은 죽음을 당할 수 있어도 모 욕은 당할 수 없다. 오늘 우리 사형제가 너희들 손에 꺾이게 되었으니 울화통이 터질 소리는 작작하고 시원스럽게 우리 두 사람을 죽여라!" 석파천은 정당이 문만부를 정말 죽이게 될까봐 재빨리 그녀의 손에 들린 장검을 빼앗아 땅바닥에 푹 꽂고는 말했다. "띵땅, 빨리 돌아갑시다!" 석파천은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는 재빨리 배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정당은 비웃음에 찬 얼굴을 하며 말했다. "장락방의 석 방주는 수단이 악랄하고 사람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죽인다고 하던데 어째서 갑자기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사내가 되셨죠? 조금전의 일은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도록 하세요." 석파천은 대답을 했다. "좋소. 말하지......않으리다. 그런데 그 사람......그 사람은 정말 손과 발을 못쓰게 되는 것이오?" 정당은 담담히 말했다. "오라버니의 내력으로 두 곳 혈도를 움켜잡고 힘을 주었으니 그의 손 발이 병신이 안 된다면 우리 정씨 집안의 십팔 초 금나수법이 쓸모가 없는 것이 되겠죠." 석파천은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더러 할아버지를 그러한 수법으로 사로잡으라고 한 것이오?" 정당은 웃으며 말했다. "이 바보같은 낭군아, 할아버지가 어떤 인물인데 설산파의 저 밥통들 과 같은 자들과 견줄 수 있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있는 투로 다시 말했다. "당신이 만약 요행히도 할아버지의 두 곳 혈도를 움켜잡고 내력을 쏟 아낸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두세 시진 행동을 할 수 없게 할 뿐이지 할 아버지의 몸을 불구로 만들 수는 없을 거예요." 석파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문만부의 조금전 그런 모습 이 너무나 끔찍했던 것이다. 이날밤 석파천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야밤에 정당이 선실에서 부르짖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천 오라버니의 목숨을 용서해 주세요. 그를 죽 이지 마세요. 그를 죽이지 말라구요." 석파천은 벌떡 일어나서 선실 안으로 급히 뛰어들었다 몽롱하나마 정당이 정불삼의 상반신을 얼싸 안고서 연신 부르짖고 있 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천 오라버니를 죽이지 마세요." 석파천이 두 손을 뻗어 정불삼의 등을 움켜잡으려 할 때였다. 순간, 갑자기 문만부의 고통에 찬 끔찍스러운 표정이 머리에 떠올랐 다. '내가 두 손으로 힘주어 잡았다가 할아버지가 정말 그와 같은 모습이 된다면 너무나 불경스러운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는......결코 그럴 수는 없다.' 따라서 그는 살그머니 선실에서 물러나와서는 머리를 얼싸 안고 잠을 청했다. 정당은 석파천이 제때에 선실로 달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간 기쁘 지 않았다. 그러나 석파천은 잠시 주저하더니 그만 물러가는 것이 아 닌가! 그녀는 이를 보고 안타까움과 더불어 분노를 느꼈다. 석파천은 뱃고물로 돌아가서 누웠으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에 정당의 말이 들려왔다. "어마! 할아버지, 제가 어떻게 하여 할아버지를 안고 있죠? 저 는......조금 전에 할아버지가 천 오라버니를 죽이는 꿈을 꾸었나봐 요. 그래서 제발 그의 목숨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었던 모양인 데......할아버지는 응낙하지 않았어요. 천만다행히도 그것은 꿈이었 군요." 정불삼은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꿈을 꾸든, 잠꼬대를 하든 다 좋다. 날이 곧 밝을 것이다. 나와 약 속한 열흘 째가 되는 날이다. 그가 하룻동안에 백만검을 찾아 패배시 킬 것인지 두고 보겠다." 정당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천 오라버니가 백치가 아닌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왠일로 정불삼은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그는 양심이 있지. 참 착해. 양심이 좋은 사람은 바로 바보 이고 백치이며 죽어 마땅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계속 이었다. "아! 호조수로 영태혈을 움켜잡고 옥녀첨침으로 현추혈을 거머쥐게 하다니, 정말 좋은 묘책이지, 좋은 묘책이야! 그러나 애석하게도 백치 의 양심이 착해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말았으니 그렇기 때문에 바로 백치이고, 백치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야." 이 말을 듣게 되자 정당과 석파천은 서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우리들의 계책을 알게 되었을까?' 정당은 온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알고보니 할아버지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구나. 그리고 암암리에 어 떤 방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천 오라버니가 조금전 손을 쓰 지 않은 것이 화인지, 아니면 복인지 모르겠구나' 천성이 착한 석파천은 여전히 정불삼이 자기를 죽이겠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이 들어버렸다.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언덕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다!" "바로 이 배다!" "늙은 요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해라!" 석파천은 우렁찬 함성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언덕에 십여 명 의 사람들이 등과 횃불을 들고 뱃가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앞장을 선 너댓 명의 사람이 뱃머리로 오르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늙은 요괴는 어디 있느냐? 사람을 해치는 늙은 요괴는 어디로 도망 을 쳤느냐?" 정불삼은 선실에서 나오며 호통을 내질렀다. "누군데 이른 아침부터 소란을 피우느냐?" 한 사내가 앞으로 성큼 나서며 호통을 질렀다. "바로 이 자다! 바로 이 자야! 빨리 끼얹어." 등뒤에 있던 두 사람이 대나무로 만든 통을 정불삼에게 겨누고 핏물 을 홱 내쏘았다. 뭇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검둥 개의 피가 늙은 요괴에게 뿌려졌으니 이제 도망칠 수 없게 되 었다." 정불삼이 그들이 끼얹는 핏물을 가만히 맞을 리가 만무였다. 그는 그 피가 쏟아지는 순간, 몸을 솟구쳐서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그는 속으로 대노했다. '어디서 온 놈들인데 함부로 망발인가? 노부를 요괴라 모함하고 검둥 개의 피를 뿌리다니!' 다른 사람이 그를 건드리지 않아도 그는 마음에 이상한 동요가 일면 사람을 죽이는 습관이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그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그의 성미를 건드리는데 그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는 땅에 내려서려는 순간에 두 발을 일제히 들어올리며 손에 대나 무통을 쥔 두 명의 사내를 걷어찼다. 곧이어 앞장을 선 대한을 후려쳐 일 장 밖으로 떨어져 나가게 했다. 그들 세 사람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인데 강호의 절정 고수의 손과 발 에 얻어맞게 되었으니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뱃머리에서 그대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앞장을 섰던 그 대한은 허공에서 선혈을 분수처럼 토해내며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었 다. 정불삼은 다시 발을 들어 나머지 사람들을 향해 곧장 걷어차려고 하 였다. 이때 갑자기 정당은 그의 등뒤에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 하루에 셋을 넘길 수 없었요." 정불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극심한 분노에 쌓이게 되자 그는 자기가 과거에 맹세했던 것을 저버 릴 뻔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발은 뱃머리에 선 다른 사내와 한 자 정도의 간격을 남겨 두고 있었으나 억지로 발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뭇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부르짖었다. "늙은 요괴가 무섭다. 빨리 도망쳐라! 빨리 도망쳐라!" 삽시간에 그들은 꽁지가 빠져라고 사력을 다해 도망쳐 버리고 말았 다. 사람들은 등과 횃불을 강물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세 구의 시체 만이 뎅그라니 남게 되었다. 정불삼은 뱃머리의 시체를 강물에 차넣으며 사공을 향해 말했다. "빨리 배를 띄우도록 하게, 다시 사람들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죽일 수 없네." 이때 늙은 사공은 너무나 놀라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사공은 삿대를 들 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정불삼은 삿대를 들고서 배를 언덕에서 밀어냈다. 검둥개의 피는 정불삼의 몸에 뿌려지지 않았으나 선실에 뿌려져서 피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정불삼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당아, 왜 이런 수작을 부렸지?" 정당은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는 성미가 아니에 요?" 정불삼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내가 언제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드냐?" 정당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좋아요. 열흘이란 기간이 차게 된다면 천 오라버니가 백가를 패배시 키지 못했을 때 할아버지는 천 오라버니를 죽인다고 했어요. 오늘이 바로 그 열흘째인데 할아버지는 이미 세 사람을 죽인거예요." 정불삼은 흠칫했으며 노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이 계집애야, 너무나 간계가 많구나. 알고보니 이 할아버지가 너의 수작에 말려들었구나!" 정당은 득의에 찬 표정을 짓고는 방글방글 웃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할아버지는 약속을 지켜야 해요. 할아버지는 열흘 째 되는 날 반드시 저 녀석을 죽이겠다고 했지만 일일불과삼(日日不過 三)이라고, 오늘 세 사람을 죽였으니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수 없어요. 그러니 오늘이 열흘째 되는 날인데 오늘이 지나가면 천 오라버니를 다 시는 죽일 수 없어요. 제가 보기에 할아버지의 손녀사위는 진짜 백치 가 아니에요. 그의 몸이 점차 회복된다면 무공이 크게 증진될 것이고 절대로 할아버지의 명성과 체면에 먹칠을 하지 않을 거예요.." 정불삼은 발로 뱃바닥을 세차게 내려찼다. 뱃바닥에 구멍을 뻥 뚫어 놓고 그는 노해 부르짖었다. "안 돼! 안 돼! 정불삼이 너같이 조그만 계집애의 손아래 굴복한데서 야 체면이 말이 아니지!" 정당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의 손녀딸이에요. 모두 한 집안 사람이니 체면을 따질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이번 일은 제가 소문을 퍼뜨린 것도 아닌데 뭘 그러세요?" 정불삼은 성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지게 된다면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게 되어 기분이 좋을 때가 없다. 그런데 왜 상관이 없다는 것이냐?" 정당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이긴 것으로 하세요." 정불삼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면 지는 것이고, 이기면 이기는 것이지. 내가 그 못난 넷째 할아 버지와 어찌 같을 수가 있느냐? 그는 어릴 적부터 나와 싸움을 자주 벌여 왔는데 지고서도 자기가 이겼다고 했거든." 석파천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제서야 황연히 깨달은 바가 있 었다. 조금전 그 사람들은 정당이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맞아죽도록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닌가! 정당은 정불삼이 사람을 죽이되 하루에 셋을 넘기지 않는다는 규정을 따라 다시 석파천에게 손을 쓸 수 없도록 그와 같은 계책을 꾸민 것이 었다. 석파천은 정불삼이 순식간에 세 사람을 죽이는 흉악한 태도로 미루어 자기를 죽이겠다는 말도 거짓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때 정당은 방긋 웃으면서 고물로 다가왔다. 석파천은 나직한 어조 로 그녀에게 물었다. "띵땅, 당신은 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들 었소. 그것은......너무 잔인한 짓이 아니오?" 정당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당신이 해친 거예요. 그런데 어찌하여 오히려 나를 탓하는 거예요?" 석파천은 망연해져서 물었다. "내가......해친 것이라고?" 정당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죠. 어젯밤 계획대로 손을 쓸 것이지 왜 손을 쓰지 않았느냔 말이에요? 손을 썼더라면 우리 두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칠 수 있었 을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될 게 아니 에요?" 석파천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시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자기 정불삼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핫하하......됐다! 됐어! 석가 녀석의 두 눈을 뽑고 두 팔을 잘라버 리겠다. 그렇게 되면 죽지는 않겠지만 불구가 되겠지. 너의 목숨을 빼 앗지 않는다면 나는 하루에 셋을 넘길 수 없다는 규칙을 어기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 정당과 석파천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일시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정불삼은 더욱 더 득의에 찬 표정으로 씨부려댔다. "과연 묘책이다. 묘책이야. 백치야, 나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러 나 너를 사람도, 도깨비도 아닌 흉칙한 모습으로 만들어 주겠다. 당 아, 그렇게 된다면 관계 없겠지?" 정당은 일시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구차하게 말했다. "아직 열흘이 지나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우리들이 백만검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며 천 오라버니가 그를 패배시킬지도 모르지 않아요?" 정불삼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그렇다. 우리들은 공평하게 해야지. 할아버지는 오늘 밤 삼 경이 되어서야 손을 쓰겠다." 산 넘어 산이었다. 정당은 그만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제 또 무슨 방법으로 석파천으로 하여금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석파천은 화가 곧 머리 위로 떨어지게 된 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물었 다. "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이오?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정당은 뾰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도 못했어요? 할아버지는 당신의 눈을 뽑고 두 팔을 자른다고 했잖아요." 석파천은 웃으면서 말했다. "할아버지는 농담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느라고 그러는데 당신은 진담 으로 받아들이다니, 할아버지가 나의 눈을 뽑고 두 팔을 자른다고 무 슨 득이 있겠소? 내가 그 분에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 않소?" 정당은 그만 또 화가 치밀었다. '이 사람은 정말 맹추이구나. 멍청하게시리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지 도 못하다니. 한평생 내가 이 자를 따라보았자 아무런 재미도 없겠다. 할아버지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못 본 척하고 내버려 두자.' 그러나 할아버지가 그의 두 눈을 뽑고 두 팔을 자른 후에 마음이 달 라져서 자기에게 짝을 지어준다면 자기는 한평생 눈도 없고 팔도 없는 불구의 남편을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쭈뼛하 였다. 어느덧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정당은 뱃고물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석파천의 모습이 나란히 강물속에 비춰졌다. 마치 물 위을 헤 엄치는 것처럼 배를 따라 파도가 넘실대는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당은 몸을 돌렸다. 석파천은 등을 자기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뻗쳐 그의 등심에 있는 혈도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오른손을 호조수의 수법으로 석파천의 등뒤에 있는 영태혈을 움켜잡고 왼손으로는 옥녀첨침이라는 수법으로 그의 현추혈을 거머쥔 것이다. 석파천은 전혀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갑지기 뒤에서 두 곳의 혈도를 잡는 바람에 그만 전신이 시큰 하고 맥이 빠져서는 움직이지를 못했다. 그런데 정당은 그 순간, 석파 천의 내력의 반탄력에 그만 몸이 뒤로 붕하니 퉁겨나게 되었고 하마터 면 강물 속에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그녀는 배의 선실 윗쪽에 있는 오봉(烏峯)을 붙잡고 내려서며 화를 냈다. "할아버지가 당신이 두 눈을 뽑고 두 팔을 자른다고 했는데 그 같은 병신을 이 세상에 남겨 무엇 하겠어요? 설사 할아버지의 체면을 깎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정당은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없게 될 것이에요. 그러니 할아버지가 손을 쓸 것이 없이 내가 먼저 당신의 눈을 뽑아내 야 되겠어요." 그녀는 고물에서 긴 밧줄을 끌어내어서는 석파천의 두 손과 두 발을 묶었다. 그런 후 밧줄을 다시 어깻죽지에서부터 발쪽으로 꽁꽁 동여 매었다. 적어도 수십 번을 두고 칭칭 감기게 된 석파천의 꼬락서니는 정녕 솔 잎에 쌓인 송편을 연상시켰다. 본래 그와 같은 상황에서 두 혈도가 금나수법에 의해 제압된 이상은 보통 고수로서는 두 시진 정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석 파천의 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후했다. 사지를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입을 열고 말을 할 수는 있었다. "띵땅, 지금 무슨 장난을 하는 것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당의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를 보자 그는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따라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 애걸하는 빛을 띄우게 되었다. 정당은 발을 뻗쳐 그의 허리께를 세차게 걷어차며 외쳤다. "흥! 누가 장난을 쳐?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 는군. 이런 바보 멍청이를 내가 천갈래 만갈래 칼질을 해서 갈갈이 찢 어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군." 획, 하니 그녀는 유엽도를 뽑아 들고 석파천의 뺨에 갖다대고 이리저 리 두어 번 문질러서 칼을 가는 시늉을 했다. 석파천은 놀라 전신을 떨면서 말했다. "띵땅, 이후부턴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듣겠소. 당신이 날......날 죽이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단 말이오." 정당은 증오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해도 당신은 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는데 누구를 원망해요?" 그녀는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지금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당신을 죽이 고 말 거예요. 흥! 당신은 나의 남편이에요. 그러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어요." 석파천은 재빨리 말했다. "나를 용서해주면 내 다시는 당신에게 남편 노릇을 하지 않으리다." 그가 이와 같은 말은 하는 것은 애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 남에게 빌지 않는 성미였 기 때문에 제발 비오니 살려 주시오 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정당은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계속 앙칼지게 말했다. "천지교배도 끝났는데 어떻게 내 남편이 안 돼요?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다면 단칼에 당신의 개같은 머리통을 잘라버리고 말 테예요." 석파천은 끔찍스러워 더이상 입도 뻥긋 못했다. 이때 정불삼은 웃으 면서 말했다. "좋아. 좋았어, 정말 멋있다. 그래야 이 정불삼의 귀여운 손녀딸 자 격을 갖출 수가 있지. 시원하게시리 한칼에 두 토막을 내도록 해!" 늙은 사공은 정당이 다시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려는 것을 보자 전신 을 와들와들 떨며 키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 바람에 배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나아가게 되었다. 마침 이때 한 척의 조그만 배가 강물을 따라 이쪽으로 쏜살같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따라서 두 척의 배는 서로 부딪칠 것 같았다. 맞은편 조그만 배 위에 사공이 이것을 보고 황급히 외쳤다. "빨리 한쪽으로 배를 몰아요. 배를 몰아!" 정당은 칼을 들고 있었는데 서산으로 기울어지면서 쏟아놓는 석양의 햇살을 받아 칼날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석파천은 그 칼의 광채에 두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별안간 정당이 칼을 내려쳤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배가 약간 기 울어지는 바람에 유엽도는 석파천의 머리 옆에 있는 뱃전을 후려치게 되었다. 그 순간, 정당은 칼을 내던지고 두 손으로 석파천의 몸뚱아리를 잡는 가 싶더니 휙, 내던지는 것이 아닌가? 이때 두 배가 스칠 듯하면서 지나치게 되는 순간이라 바로 맞은편 조 그만 배의 선실쪽으로 석파천은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정불삼은 손녀딸이 갑자기 간계를 펼치는 것을 보고 노해 부르짖었 다. "너는......무엇하는 짓이냐?" 그러면서 선실에서 달려나와 손을 뻗어 석파천을 잡으려 했다. 그러 나 애석하게도 한 걸음 늦고 말았으며 강물이 너무나 세차기 때문에 두 척의 배는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뚝 떨어지고 말았다. 정불삼의 경공신법이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때 몸을 날려서 저 쪽 배로 건너뛸 수는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려 냅다 정당의 따귀를 한번 후려치고는 큰소리 로 외쳤다. "키를 돌려! 키를 돌려서 쫓도록 해!" 그러나 양자강 물결은 거세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떻게 순식간에 배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조그만 배는 매우 가볍고 날렵해서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었다. 정불삼이 급해 배를 돌려세워서 쫓으려고 했을 때 이미 그 배는 종적 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한편 석파천은 허공에서 한바퀴 재주를 넘으며 얼굴을 아래로 하고서 떨어지게 되었는데 떨어지고 보니 몸에 부딪치는 것이 매우 부드러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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