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행(김용) - 52편 (52/82)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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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52편 (5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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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할아버지는 안녕하시오?] 정당은 그의 손등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나보고는 잘 있었냐고 묻지도 않고……아이구 망할 것!] 원래 석파천의 몸안 진기가 압력을 받자 그녀의 두 손가락을 퉁겨냈 던 것이다.
석파천은 웃으며 말했다.
[쟁그랑땡, 잘 있었소? 그때 나를 강물에 던졌을 때 다행히 어느 배 안에 떨어져 죽음을 면했소.] 그렇게 말한 그는 그 즉시 수아와 한 이불속에 나란히 눕게 되었을 때의 정경을 떠올리며 궁금하게 여겼다.
(수아는 어디로 갔을까? 어째서 그녀는 나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이 며칠 동안 그는 무공을 배우는데에 정성을 쏟다보니까 수아의 얼 굴이나 몸매를 간혹가다 한 번씩 뇌리에 떠올렸으나 금방 지우곤 했 는데 이제 정당을 만나게 되자 어떻게 된 노릇인지 마음속 깊숙한 곳 으로부터 떠오른 수아는 좀처럼 그의 뇌리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 다.
정당은 토라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다행은 무슨 놈의 다행이에요? 내가 일부러 그 배로 던졌는데 그것 도 몰랐단 말예요?] 석파천은 겸연쩍은 듯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잘 대해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그 런 걸 말하기가 좀 멋쩍어서……] 정당은 훗 하고 웃었다.
[천 오라버니와 저는 부부지간인데 뭐가 거북해요?]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걸터 앉게 되었다.
몸과 몸이 맞닿았다.
석파천은 그녀의 몸에서 사향과 같은 향기가 은은히 풍기는 것을 느 끼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수아가 지금 자기가 정당과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보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래는 정당의 어깨를 얼싸안으려고 내밀었던 손을 가볍게 한 번 정당의 어깨를 건드렸을 뿐으로 곧 움츠리고 말았다.
정당은 이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천 오라버니.
솔직히 말해줘요.
내가 예뻐요 아니면 그 새색시가 더 예뻐요?] 석파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에게 새색시가 어디 있소? 새색시라고는 당신……한 사람뿐이잖 소.] 그러나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수아가 자기의 색시가 된다 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녀가 자기의 색시가 되어 줄 것인지? 이때 정당은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더니 꿀밤 을 이마팍에 한 대 먹였다.
[왜 한숨을 쉬어요? 색시가 나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단 말 인가요?] 석파천은 심사를 간파당한 것 같아 그만 얼굴이 시뻘개지고 말았다.
이때 정당은 옆에서 살며시 그를 껴안았는데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 다.
밀어내자니 좀 아쉬운 감이 있었고 그녀를 껴안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당은 함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역시 수줍은 처녀였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석파천을 껴안고 볼에 입맞춤했지만 곧 부끄러움 을 느끼고 침대 모서리로 물러나 이불을 끌어당겨 자기의 몸을 덮었 다.
석파천은 잠시 주저하다가 불렀다.
[쟁그랑땡……쟁그랑땡……] 정당은 못 들은 척했다.
석파천은 탁자에 가 앉아 줄곧 수아만을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자연도의 숲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던 수아의 눈빛과 자 기를 오라버니로 부르던 뜻을 깨달았다.
(아, 수아는 나의 색시가 되고자 했구나.
아! 수아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이 들자 매우 기뻤으나 수아를 어디서 찾느냐 하는 문제를 떠올리게 되자 그만 한숨이 나왔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탁자에 엎드린 채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 이 들고 말았다.
정당은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자 마음속으로는 대견 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실망이라 할까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그를 찾아냈다는 안도감과 연일 쫓겨다녔던 터라 행복 감과 더불어 일시에 피로가 엄습해와 그만 잠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튿날 날이 밝게 되어 민유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옥아, 일어났느냐?] 석파천은 막 잠속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예, 어머니!] 그리고 그는 정당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당혹해 어쩔 줄을 몰랐다.
민유는 다시 불렀다.
[얘, 할 말이 있다.
문을 좀 열어라.] 석파천은 대답을 하고 망설이다가 문의 고리를 벗기려고 했다.
정당은 크게 부끄러웠다.
예의를 지켰다고 하지만 한 여자와 한 남 자가 한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면 남들이 그런 사실을 믿어주지 않 을 것 같았다.
더구나 장래 시어머님이 될 사람이 들어와 본다면 나중에 멸시를 받 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달아나려 했다.
마침 석파천의 모습이 곁눈에 비쳤다.
대뜸 간신히 찾아낸 석파천과 다시 헤어지면 언제 만나게 될까 걱정 이 되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리를 벗기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석파천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어머니요.
상관없소.] 그리고 손을 고리로 가져갔다.
정당은 크게 난처해졌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의 어머니이까 더 야단이죠.] 그러나 다시 창문으로 도망치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감이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그녀였지만 이때만은 크게 당황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겸연쩍은 정황에서 시어머니가 될 사람과 상면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얼굴부터 화끈거렸다.
그리고 보니 석파천은 이미 저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려 하고 있지 않은가! 다급해진 그녀는 왼손으로 호조수를 펼쳐 석파천의 등심에 있는 영태혈을 잡고 오른손으로 옥녀점침의 수법을 써서 그의 현추혈 을 쥐었다.
석파천은 두 곳의 요혈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 순간 정당은 그를 안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었다.
민유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했다.
아들의 엇 하는 소리에 변고가 발생한 것을 알고 문을 어깨로 부수 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창문은 열려있고 사랑하는 아들은 온데간데 없지 않은가? 그녀는 석청을 소리내어 불렀다.
[사형, 빨리 와 보세요.] 석청은 검을 들고 달려왔다.
민유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옥이가……옥이가 사로잡혀 갔어요.] 그리고 그녀는 창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더이상 생각지 않고 창문으로 달려나갔다.
한 사람은 검고 다른 한 사람은 하얀 것이 두 마리의 커다란 새처럼 그 자세가 지극히 아름다워 침대 밑에서 본 정당은 속으로 갈채를 보 냈다.
본래 두 사람은 강호의 대가로서 쉽게 속아넘어갈리가 없었지만 관 심을 가지면 그만큼 어지러워진다고 아들이 보이지 않자 장락방이나 설산파의 고수들에게 사로잡혀 갔을 것이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방 안을 한 번 둘러보는 것도 잊고 달려나간 것이다.
더군다나 민유가 문을 깨뜨리고 뛰어든 것이 석파천이 엇 하는 소리 를 냈을 적과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 쉽게 쫓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 했던 것이었다.
석파천은 혈도를 정당에게 잡히기는 했으나 공력이 심후해서 즉시 막힌 혈도를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정당에게 안겨 있어서 어머니를 부르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석청 부부는 창문 밖으로 달려 나가버렸다.
침대 아래는 흙먼지가 쌓여 있어서 석파천은 그만 재채기를 세번이 나 했다.
그리고 정당의 손을 잡고 침대 아래서 기어나왔다.
정당은 여전히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 었다.
석파천은 겸연쩍게 말했다.
[아까 그분들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였소.] [벌써 알고 있어요.
어제 오후 당신이 그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님이 돌아오면 인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소?] [싫어요.
당신의 부모님은 우리 할아버지를 멸시해요.
자연히 나도 업신여길 것이 아니겠어요?] [그럼 어떻게 하지?] 이 며칠간 석파천은 부모와 함께 보내면서 그들의 언행을 몸소 보고 들었는지라 부모가 의협심이 강하고 광명정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정불삼의 사악한 행동과는 전혀 다른지라 그와 같이 물은 것이 다.
정당은 석청 부부가 곧 돌아오리라고 내다보고 제의했다.
[내 방으로 가요.] [쟁그랑땡도 이 객점에 머물고 있었소?] [야밤에 지아비를 잡으려는 마당에 이곳에서 묵지 않을 수 있겠어 요?] 그녀는 손짓을 하고 창문으로 나갔다.
마침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마당을 가로질러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간 석파천은 정불삼이 보이지 않자 크게 안심했다.
[그런데 당신 할아버지는?] [나 혼자 뺑소니쳐 온 걸요.] [왜?] 정당은 코웃음을 쳤다.
[천 오라버니를 찾으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허락을 해야죠.] 석파천은 그녀의 말에 크게 감동했다.
[쟁그랑땡, 나를 그토록 생각해주다니 정말 고맙소.] 정당은 눈을 살짝 흘기며 웃었다.
석파천은 말했다.
[어제는 그런 말하기가 거북해할 것 없다고 당신이 말했잖소?] 그 말에 정당은 얼굴이 붉어졌다.
이때 마당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석청의 음성이 들렸다.
[이건 숙박비외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와 더불어 두 부부가 급히 말을 끌고 나가는 기 척이 들렸다.
석파천은 두어 걸음 따라나가려고 옮겼으나 곧 걸음을 멈추고 정당 에게 물었다.
[송강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그렇게 큰 지방을 누가 몰라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송강부로 은극 양광이란 분을 찾아가는 길이니 우리도 나중에 쫓아가면 되겠지.] 석파천은 뜻밖에도 정당을 만나게 되자 그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웠 다.
그래서 그는 잠시 후 쫓아가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당은 석파천의 말을 듣자 즉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멍청이같은 신랑은 길을 모르고 있다.
송강부로 가려면 동남쪽 으로 가야 하는데 나는 그를 데리고 동북쪽으로 나가야지.
그러면 그 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갈수록 멀어지게 될 것이고 길에서 다시 만나 게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그녀는 그만 의기양양해진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화사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는데 그 모습이 밝으면서도 요염하기 이를 데 없어서 석파천은 그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정당은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본 적이 없나요? 어째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요?] 석파천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쟁그랑땡.
당신은……당신은 정말 예쁘구려.
우리 어머니보다도 더 예쁘구려.] 그런 한편 그는 속으로 수아를 떠올렸다.
(쟁그랑땡과 수아를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욱더 예쁜지 모르겠구 나.) 정당은 이때 킥킥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천 오라버니.
당신도 매우 잘 생겼어요.
우리 할아버지보다도 훨씬 잘났다구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킥킥거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이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끝내 석파천은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서 제의를 했다.
[우리 어머님과 아버님은 나를 찾지 못하게 되자 틀림없이 걱정을 하고 계실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곧장 뒤쫓아 가도록 합시다.] 정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말 효성이 지극한 아드님이시군요.] 그리고 그녀는 숙박비를 치루고 객점을 나섰다.
객점의 주인과 점소이는 석파천이 석청 부부와 함께 투숙을 했다가 혼자서 투숙을 하게 된 아리따운 소저와 함께 방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오는 것을 보자 그만 혀를 끌끌 차며 희한한 노릇이라고들 했 다.
그리고 석파천과 정당이 떠나간 이후에 침을 튀기면서 여러 손님 들에게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십여 일 동안 많은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이 일을 떠들고 논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두 젊은 남녀를 외설스럽게 묘사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매우 그 럴싸하고 화려하게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는 등 그야말로 억측이 난무 하다시피 했다.
얼마 후 석파천과 정당은 용구진을 나와 동쪽으로 나아갔다.
세 갈래 길에 이르게 되었을 때 정당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대뜸 송 강부와 반대 방향인 동북쪽으로 꺾어돌았다.
석파천은 정당이 길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걸으면서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님은 준마를 타고 가셨으니까 객점이나 주루에서 식 사를 하며 기다려 주지 않는 한 우리들은 따라붙을 수 없을 것이오?] 정당은 방긋 웃고 말했다.
[송강부의 양씨 댁으로 찾아가면 만나게 될 것인데 뭐가 걱정이에 요.
설마 어른들이 길을 잃겠어요?] 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길을 갔다.
부모와 함께 보내면서 세상 물정을 상당히 많이 알게 된 석파천은 정당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정당은 이제 멍청한 기운이 가셔지고 한 번 가르치면 잊어버리지 않 는 석파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강호의 규칙과 인정의 좋고 나쁨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직도 해가 서너발이 남아있을 즈음 두 사람은 어느 조그만 고을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정당은 한 반점을 찾아서는 석파천과 함께 대당(大堂)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대당에는 세 개의 커다란 백목(白木)으로 만들어진 탁자 옆 에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모퉁이 쪽의 한 조그마한 탁자 옆에 자리를 잡 고 앉았다.
이 반점은 본래 그렇게 큰 곳이 못되는지라 점소이(店小二)는 세 커 다란 백목의 탁자가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음식을 나르느라 두 사람 에게 주문을 받으러 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당은 그 커다란 백목으로 된 세 개의 탁자가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약 십팔구 명이나 되었고 그 안 에 세 명의 여자도 있었는데 나이는 모두다 젊지 않은 편이었으나 자 색은 평범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는 각기 무기를 지니고 있 었고 말씨는 모두다 요동(遼東) 지방의 사투리였다.
그런가 하면 그 들은 커다란 그릇으로 밥을 퍼먹고 커다란 덩이의 고기를 우악스럽게 입으로 가져가서 씹는 등 그 표정들이 무척 호탕하게 보였다.
(이 강호의 친구들은 표국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녹 림의 호걸들인 것 같구나.) 몇 번 눈여겨 주의를 하던 정당은 더 아랑곳 하지 않고 지금 자기의 처지로 생각을 돌렸다.
(나와 천 오라버니가 이와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길을 가고 있으 며 또 같은 탁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니 얼마나 좋으냐? 한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정말 즐겁기 이를 데 없겠다.) 따라서 점소이가 그들에게 다가와서 접대를 하지 않아도 그녀는 별 로 성을 내지 않았다.
바로 이때 갑자기 문입구 쪽에서 그 누가 입을 열었다.
[좋았어.
술이 있고 고기도 있구나.
이 할아버지께서는 정히 배가 고프던 참인데 잘 되었다.] 석파천은 그 소리가 귀에 매우 익은 것을 느끼고 눈을 들어 바라보 았다.
그러고 보니 한 늙은이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는데 바로 정불사가 아니고 누구인가.
석파천은 깜짝 놀라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구나.) 그리고는 재빨리 얼굴을 돌리고 감히 그를 마주 쳐다보지를 못했다.
정당은 나직이 석파천에게 속삭였다.
[우리 작은 할아버지예요.
그러니 당신은 그를 바라보지 말아요.
나 는 가서 변장을 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석파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뒷쪽으로 살그 머니 사라졌다.
정불사는 대당으로 들어서게 되자 네 개의 탁자 곁에 모두 사람이 앉아 있으나 석파천이 앉아 있는 탁자 곁에 빈자리가 있었지만 탁자 위에 젓가락이나 그릇도 없고 더더욱 음식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보 고는 즉시 중간의 백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에 놓여 있는 하나의 기 다란 걸상 위에 앉으면서 왼쪽 어깨로 옆에 앉아 있는 한 대한을 슬 쩍 밀었다.
그 대한은 크게 노해서는 힘주어 정불사 노인을 어깨로 떠밀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와 같이 떠민다면 그 노인으로 보이는 정불사가 문밖으로 나가떨어지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의 어깨가 정불사의 몸에 닿게 되었을 때 즉시 한 가닥 강 맹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이 되퉁겨오는 것을 느끼고 대뜸 제대로 앉아 있지를 못하고 엉덩이가 걸상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곧 이어서는 비스 듬히 바닥에 자빠지게 되었다.
그 순간에 정불사는 왼손을 슬쩍 들어 잡아당기며 시큰둥하게 말했 다.
[너무 겸손해 할 것 없소.
모두 함께 앉읍시다.] 그와 같이 대한을 한 번 붙잡아주자 그 대한은 가까스로 나자빠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만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어떻게 할바를 몰 라했다.
정불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떠벌였다.
[자, 자, 여러분들.
너무 겸손해 할 것 없소이다.] 그리고 그는 술잔을 들고서는 목을 젖히고 술잔의 술을 다 비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젓가락을 들어서는 한 조각의 커다란 쇠고기를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 맛있게 먹었다.
세 개의 탁자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정불사에게 밀린 그 대한의 무공이 약하지 않은 데도 그에게 밀려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한 것을 보고 늙은이의 내력 이 대단하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불사는 그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을 뿐이며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머리까지 흔들흔들해가면서 매우 기분이 좋은 듯했다.
세 탁자가의 십팔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젓가락을 멈추 고 음식을 들다 말고서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정불사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당신은 왜 술을 마시지 않소?] 그리고 그는 한 명의 키가 작고 비쩍 마른 늙은이 앞에 놓인 술대접 을 들더니 꿀꺽꿀꺽하면서 반사발의 술을 들이키고는 수염을 쓱 쓰다 듬으며 다시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했다.
[이 술은 약간 시큼한 것이 좋지 않군.
그렇지 않소?] 그 비쩍 마른 늙은이는 억지로 노기를 참고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시오?] 정불사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당신이 나의 성명을 물으니 그 재간도 알 만한 것 같군.] 그 늙은이는 차분한 어조로 성질을 누르고 자기를 소개를 했다.
[우리는 줄곧 관동(關東)에서 밥을 빌어먹었기 때문에 관내(關內)의 영웅호걸들의 명호를 잘 모른다오.
불초는 요동학(遼東鶴) 범일비(范 一飛)라고 하오.] 정불사는 웃었다.
[당신의 그 거무틔틔한 몰골을 보니 백학(白鶴)을 닮은 것이 아니라 까마귀를 닮았군.
오히려 요동아(遼東鴉)로 칭하는 것이 더 묘할 것 같소.] 범일비는 대노해서는 탁자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큰소리로 호 통을 쳤다.
[우리가 일면일식도 없으나 당신의 그 허연 수염을 높이 사서 당신 에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째서 그토록 무엄하게 이 나으리를 놀리려고 하는 것이오!] 다른 한 탁자의 키가 큰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혹시 장락방의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구려.] 석파천은 장락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자 속으로 섬칫했다.
이때 정당이 머리에 전모(氈帽)를 쓰고 몸에 잿빛 무명옷을 입어 마 치 반점의 점소이처럼 꾸미고서 탁자곁으로 돌아왔다.
석파천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창졸지간에 그녀가 어디서 그와 같은 옷차림을 할 수 있는 옷을 구했을까 하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당은 방그레 웃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내가 점소이의 혈도를 짚어 쓰러뜨리고 그의 옷을 빌린 거예요.
넷 째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지 않도록 해야 해요.
천 오라버니, 우리 함께 얼굴에 검은 칠을 좀 하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는 두 손으로 석파천의 얼굴을 한번 문질렀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석탄 찌꺼기가 잔뜩 묻어 있어 대뜸 석파천의 얼 굴을 새까맣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한 차례 문질렀다.
반점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차 있었으나 하나같이 정불사에게 시선 이 집중되어 있어 그 누구도 그 두 사람이 하는 수작을 주의하지 못 하고 있었다.
정불사는 키가 크고 허우대가 큰 사내를 곁눈질로 보더니 미미하게 냉소를 띄웠다.
[당신은 금주(錦州) 청룡문(靑龍門)의 문하가 아닌가? 대단한 녀석 이군.
한 자루 구절연편(九節軟鞭)을 두르고 시건방지게 중원에 모습 을 드러내다니, 정말 살기가 귀찮아진게로군.] 이 사내는 바로 금주 청룡문의 장문인인 풍량(風良)이었으며 구절연 편은 바로 그의 집안 대대로 전해져오는 무기였다.
그는 정불사가 자기의 문호 내력을 들먹이자 오히려 속으로 약간 기 분이 좋아졌다.
(저 늙은이는 나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구절연편을 보고 나의 가문 을 알고 있구나.
우리 청룡문의 명성이 중원에까지도 적지 않은 사람 에게 알려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그리하여 그는 수인사를 했다.
[불초는 금주의 풍랑이며 청룡문의 문파를 이끌어가고 있답니다.
나 으리께서는 존성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는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퍽이나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정불사는 탁자를 두드려 소리가 나도록 하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울화통이 터져 죽겠군! 울화통이 터져 죽겠군! 울화통이 터져 죽겠 군!] 그는 세 번이나 울화통이 터져 죽겠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사 발을 들더니 다시 술을 들이켰는데 그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하니 조금도 화를 낸 모습이 아니라 옆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울화통이 터 져 죽겠다는 뜻이 무엇을 가르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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