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그는 즉시 여정평과 동패를 받았다. 장삼과 이사는 포권의 예를 했다. [여러분들이 응해주신데 대해 먼저 사의를 표하는 바이외다.] 그리고 그들은 석파천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형제, 우리들은 또 먼 길을 가야 하니까 오늘은 함께 술을 마실 수 없네. 유감이지만 이해하게.] 석파천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석 잔의 술쯤 마시는 것은 상관이 없지요. 두 분 형님께서 가지고 다니던 술호로는 어떻게 됐나요?] 장삼은 웃으며 대답했다. [버렸네, 버렸어! 그와 같은 술을 조합하려면 그야말로 무척 힘이 든다네. 두 개의 빈 호로를 들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좋 아, 둘째, 우리 형제 세 사람이서 석 잔의 술을 마시도록 하세.] 그러자 장락방의 방도들이 술을 따라서 올렸다. 장삼과 이사 그리고 석파천은 서로 마주보면서 석 잔의 술을 세 차 례에 걸쳐 다 비우게 되었다. 석청은 그들이 술을 다 마시자 한 걸음 다가서며 낭랑한 어조로 입 을 열었다. [불초는 석청이라 하며 현소장의 장주의 몸인데 안사람과 더불어 협 객도로 가서 한 그릇의 동지 팥죽을 먹었으면 하오이다.] 장삼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삼십여 년간 무림에서는 협객도라는 이름만 듣고도 모두가 간담이 서늘해져서는 꽁무니를 빼는데 오늘은 놀랍게도 스스로 가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희한한 일이로군.)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석 장주, 석 부인. 이번에야말로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료. 두 분은 상청관의 제자이고 따로이 문파를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만 큼은 좀처럼 그 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겠소이다. 양 노영웅과 다른 몇 분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때 백만검이 불쑥 입을 열고 물었다. [두 분은 멀리 가신다고 했는데……혹시 능소성으로 가시는 길이 아 니신지요.] 장삼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맞았소. 우리들은 바로 영존이신 백 노영웅을 찾아뵈러 가는 길이 오.] 백만검은 대번에 안색이 변하여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뿐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겨우 고 개를 끄덕였다. [좋소.] 장삼은 웃으며 말했다. [백 영웅이 빨리 돌아간다면 우리들은 능소성에서 다시 뵙게 될 것 도 같구려.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은 문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고삼 낭자는 그들의 등에 대고 욕을 했다. [후레자식같으니. 이까짓 것이 뭐야!] 그리고 왼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휙 하는 소리와 더불어 네 자루의 비도가 두 사람의 등심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물론 그녀는 자기의 비도로서는 협객도의 두 사자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끓어오르는 분 노를 좀처럼 풀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몇 자루의 비도나마 날려서 울분 을 풀어보자는 것이었다. 네 자루의 비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등뒤로 날아들고 있 었으나 두 사람은 여전히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석파천은 참을 수 없어 부르짖 었다. [두 분 형님은 조심하십시오!] 그러자 갑자기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두 사람이 앞으로 몸을 날려 서 바깥으로 달려나가는데 그 재빠름과 민첩함은 그야말로 형용하기 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뭇 사람들이 눈앞이 번쩍하고 느껴지게 되었을 적에 네 자 루의 비도는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문밖의 조벽(照壁)에 박 히고 장삼과 이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비도는 손으로 내던지는 암기였지만 두 사람의 경신법은 놀랍게도 암기보다 더욱더 빨랐던 것이었다. 군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안색이 변했고 모두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 표정들 짓고 있었다. 고삼 낭자는 그래도 욕지거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레자식같으니라구……] 그러나 그녀는 가슴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놀라움에 겨우 후레자식 이란 넉 자의 말을 뱉아냈을 뿐 그 다음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마침 이때 석중옥은 정당의 손을 잡고 정히 천천히 문쪽으로 나아가 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는 물론 뭇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대로 문밖을 향해 뺑소니를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삼 낭자가 네 자루의 비도를 두 사자에게 던지는 바람에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문가로 옮겨지게 되어 그가 정 당과 더불어 뺑소니를 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포착하게 되었다. 백만검은 날카롭게 외쳤다. [네 녀석은 게 서라!] 그리고 그는 석청을 향해 말했다. [석 장주, 그대의 한마디를 듣고 싶소.] 석청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석가가 저와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백 사형, 우리 부부가 저 애를 데리고 능소성으로 가겠소. 그리고 백부 님에게 사죄를 올리겠소.] 백만검과 설산파의 제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가짜 아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 부부가 막상 아들이 나타나자 순순히 능소성으로 데려가겠다고 응락하는데는 무슨 딴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었던 것이다. 민유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마침 석청 역시 민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상대방의 안색이 처연한 것을 보고 안쓰러워 시선 을 옮기고 말았다. 그들 부부는 똑같이 자기네의 아들이 큰그릇이 못 되는구나 하고 한 탄했다. (장락방의 방주가 되겠다고 응락하고 큰 난이 들어닥치자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꽁무니를 빼다니, 아!) 며칠 석파천과 같이 있어 보았지만 큰 병을 앓고 난 뒤인지라 기억 력이 좋지 않았고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유치하고 가소로울 정 도였다. 그러나 석파천은 어질고 착한 가운데 의연한 기개가 엿보였 다. 두 부부는 그러한 석파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민유는 더욱 예닐 곱 살때 자기에게 의지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하기 이를 데 없이 기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새로 나타난 석중옥이 자기의 아들이란 것이 명백 해졌고 한 번 약속한 바를 저버린 비겁자임이 드러나게 되자 너무나 커다란 실망을 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유는 그래도 자기의 아들인데 하는 생각에 석중옥을 손짓 하여 불렀다. [얘야, 이리 오너라.] 석중옥은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웃어 보였다. [어머니, 이 몇 년 간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갈수록 아름다워지는군요. 누가 보면 불초의 누님이 라고 생각하지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민유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속으로 여간 씁쓸하지 않았다. (이 애는 여태까지 배운 것이 그저 침도 바르지 않고 비위를 맞추는 재주밖에 없구나!) 석중옥은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몇 년 전 한 쌍의 벽옥(碧玉)으로 된 팔찌를 구하게 되었 습니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친히 어머니의 팔목에 끼여 드리려고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노란색 비단 보따리를 꺼내더니 풀어 헤쳤 다. 한 쌍의 벽옥으로 된 팔찌와 한 송이 보석이 박힌 주화(珠花)를 꺼냈다. 그는 민유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팔찌를 팔목에 채워주었다. 민유는 본래 장식품을 좋아했다. 더군다나 옥으로 만들어진 이 팔찌 는 윤이 나고 고운 것이 마음에 들었고 또한 아들의 효성심을 생각하 게 되니 그만 노기도 사그러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가는 곳마다 계집애를 건드리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몸에 항상 진귀한 보석들과 장식품들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 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보석과 장식품들은 계집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준비된 것들이었다. 석중옥은 이때 몸을 돌리고 주화를 정당의 머리카락 위에 꽂아주며 나직이 웃었다. [이 한송이의 주화는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고와야만이 쟁그랑땡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용모에 어울릴 수 있지만 지금은 별 수 없으니 이것이라도 꽂도록 하구료.] 정당은 크게 기뻐서 나직이 말했다. [천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언제나 말솜씨가 그렇게 뛰어나군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머리카락 위의 주화를 쓰다듬으며 석중옥을 곁 눈질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빛으로 넘쳐흘렀다. 이때 패해석은 기침을 하여 뭇 사람의 시선을 모은 후 입을 열었다. [양 노영웅과 석 장주 부부 그리고 관동 사대문파의 여러 영웅들께 서 이렇게 왕림하신 가운데 여러가지 오해도 이제 풀리게 되었으니 다시 자리에 앉아 주연을 즐겨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오이다.] 그러나 석청 부부와 백만검 및 범일비 등은 제각기 사색에 잠겨 있 었다. (장락방의 커다란 액난은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막게 되었지만 우리들 이야 무슨 심정으로 당신의 술을 먹겠는가?) 백만검은 먼저 입을 열었다. [협객도 두 사자께서는 능소성으로 간다고 했으니 불초는 반드시 돌 아가야 되겠소. 패 선생의 호의는 마음에 새겨두기로 하겠소.] 석청 역시 입을 열었다. [우리 세 사람은 백 사형과 함께 가야 되겠소.] 이에 범일비 등은 동지 팥죽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관동으로 되돌 아갔다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구실로 작별을 고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가 후사를 처리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군호들은 작별을 고하고 떠나게 되었다. 석파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패해석을 따라 손님들을 전송하게 되었는 데 마음속으로는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애당초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데 당매가 자꾸만 내가 그녀의 천 오라버니라고 우겼으며 석청 부부는 또 나를 자기들의 아 들이라 우겼거던.) 그러다가 그는 이 넓은 세상에 자기는 역시 외톨이에 지나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어 그만 서글퍼지고 말았다. (나의 진짜 어머니도 나를 버렸고 사부인 사 노파와 수아도 나를 마 다하고 떠났다. 더군다나 아황까지도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았는가?) 이때 범일비 등이 다시 그에게 지난번에 베풀었던 은혜에 치하했다. 백만검도 입을 열었다. [석 방주, 몇 차례 잘못을 저지른 것을 양해하구료. 석 방주께서는 호탕하신데다가 원한을 은혜로 갚았던 사실을 불초는 깊이 고맙게 생 각하는 바이외다……] 그리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비장한 어조로 말을 이었 다. [불초가 이번에 돌아갔다가 요행히 목숨을 부지한다면 반드시 석 방 주를 친구로 사귀겠소.] 석파천은 그저 네 네 하고 대답만 했다. 그러나 속으로 그는 통곡이 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석청 부부는 석파천과 고별을 하게 되었을 때 그의 안색이 처량한 것을 보자 그들 마음 역시 쓰라리기 이를 데 없었다. 민유는 본래 그를 수양아들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강남 대방의 방주이니 자기네 부부들보다 신분이 높다 할 수 있겠고 무공 도 그토록 뛰어난 형편이니 오히려 그와 같은 제의를 한다는 것은 외 람된 일인 것 같아 단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당부했다. [석 방주, 며칠전 우리 부부는 방주를 잘못 알아보고 방주에 대해서 불경스런 행동을 했는데 아무쪼록……아무쪼록 차후라도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바래요.] 석파천은 고개를 숙이고 끄덕여 보였다. [예, 그렇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뭇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멍하니 대문 밖에서 서서 바라 보고 있었다. 패해석은 석파천에 대한 감정은 부끄럽고도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 리하여 그는 벌써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좀처럼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방도들은 석파천이 동패를 받은 지금 곧 죽게 될 것을 알고 기 분이 나빠져서는 어쩌면 자기네들에게 화풀이를 할까봐 그 누구도 감 히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지 못했다. 이날 밤 석파천은 일찍이 침대 위로 올랐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막 잠이 들락말락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그 누가 창문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당이 지난날 두 번이나 야밤에 찾아오게 되었을 때도 바로 그와 같이 창문을 두드려 신호를 했던 것이다. 그는 불쑥 부르짖었다. [쟁그랑……]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야지, 쟁그랑땡은 이미 그녀의 천 오라버니를 따라 떠나갔을 것인데 어찌 또 나를 찾아왔겠는가?) 그런데 창문이 슬그머니 열리면서 날씬한 몸매의 사람이 훌쩍 뛰어 들며 킥하고 웃었다. 바로 정당이 아니고 누구인가? 그녀는 침대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어째서 나의 이름을 반토막으로 내었나요?] 석파천은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끼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어떻게 또 오게 되었소?] 정당은 방긋 웃고 말했다. [당신이 염려되어 보러 온 거예요. 왜? 귀찮으세요?] 석파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의 천 오라버니를 찾았는데 이 가짜를 또 무엇하러 찾아왔소?] 정당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 화가 나셨군요 천 오라버니, 낮에 당신을 한 대 때렸다고 해 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을 뻗쳐 그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석파천은 향긋한 냄새와 그녀의 매끄러운 손바닥의 감촉에 그만 마 음이 번거로워져 더듬거리며 말했다. [화가 나지 않았소. 쟁그랑땡, 나를 다시 찾아올 필요는 없소. 당신 들이 사람을 잘못본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당 신은 내가 사기꾼이 아닌 것만 알아주면 그만인 것이오.] 정당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정말 사기꾼이었다면 오히려 내가 당신을 좋아할지도 몰라 요. 천 오라버니, 당신이야말로 이 천하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정인 군자(正人君子)예요. 나는 당신과 혼례를 올렸지만 시종……시종 나 를 당신의 것처럼 여기지 않았어요.] 석파천은 전신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며 대답했다. [나는……나는 정인군자가 못되오. 나는 그런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다행히 우리들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 뿐이 오. 그렇지 않았더라면……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오.] 정당은 한 걸음 물러서서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두 손을 갑자기 얼 굴로 가져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석파천은 어쩔 줄을 몰라서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정당은 울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정인군자라는 것을 의심치 않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 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이제 나는 황하에 뛰어든다 하더라 도 누명을 벗지 못해요. 그 석중옥은……내가 당신과 혼례를 올리고 동방을 차렸다고 해서 내가 싫다고 했어요.] 석파천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그러면……어떡하면 좋소?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오. 내가 그 를 찾아가서 당신의 순결함을 증명하겠소. 정말 우리들 사이는 깍듯 하게 손님을 대하듯 했다고……] 정당은 훗 하고 웃었다. [그와 같은 말은 진짜 부부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말이예요.] 석파천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또 말을 잘못했군. 고삼 낭자가 그와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구료.] 정당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 했다. 그리고 가볍게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는 당신을 증오하고 있어요. 당신이 그에게 침이 마르도록 설명 을 한다고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거예요.] 석파천은 속으로 은근히 좋아했다. 그가 정당을 마다한다면 자기가 정당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한 것이 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말을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딴 말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모든 게 내 잘못으로 당신에게 누를 끼치게 되었구료.] 정당은 울면서 말했다. [그는 당신과 아무런 연고 관계도 없고 또 당신이 그에게 아무런 은 혜도 베풀지 않은 처지예요. 그러한 당신이 나와 혼례를 올리고 동방 화촉을 밝혔으니 어찌 당신을 증오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몸서리를 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가 당신에게 범일비와 여정평 등의 사람들처럼 은혜를 입 었다면 그는 아마 당신의 무슨 말이든지 들을 거예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료. 쟁그랑땡, 정말 미안하구료. 우리들은 어찌 되었든간에 다시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합시다. 아! 당신 할아버지에게 설명을 하면 어떨까?] 정당은 발을 구르며 울었다. [소용없어요. 천 오라버니는 며칠 내로 목숨이 없어지게 될 텐데요. 지금 당장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언제 찾아내어 구해달 랠 수 있겠어요?] 석파천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며칠 후에 목숨이 없어진다고?] 정당은 침중하게 말했다. [설산파의 백만검은 당신이 석중옥인 줄 알고 잡아간 적이 있지않아 요? 다행히 할아버지와 내가 당신을 구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 다면 능소성으로 잡혀간 당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거예요. 기억 나세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기억하고 있소? 아! 참, 이번에는 석 장주와 백 대협이 또 그 를 능소성으로 데려갔는데 야단났군!] 정당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설산파에서는 그를 뼈속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고 있어요. 그가 일단 능소성으로 끌려갔다면 어찌 목숨을 부지하겠어요?] 석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설산파의 사람들은 두 번 세 번 나를 잡아가려고 했소. 그 러나 그들이 석 장주 부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당신의 천 오라버니를 몇 마디 꾸짖을 뿐 설마하니 죽이기야 하겠소?] 정당은 이빨을 깨물었다. [정말 수월하게 생각하시네요. 그들이 꾸짖기만 한다면 이곳에서도 충분히 꾸짖고도 남음이 있었을 거예요. 왜 하필이면 멀리 있는 능소 성으로 그를 데리고 가겠어요? 더군다나 설산파에서는 그를 잡으려다 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단 말이에요.] 석파천은 그만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설산파에서 이번에 강남까지 내려오는 동안 많은 제자들이 살생을 입은 것은 사실이었다. 석중옥이 능소성에서 저지른 일이 아무래도 매우 심각했던 것 같았 다. 강남에서 있었던 일만 하더라도 결코 몇 마디의 꾸중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정당은 다시 말했다. [천 오라버니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는 자기 한 목숨만 버리면 그만이지만 가장 애석한 것은 석 장주 부부와 같이 인자하고 의협심이 많은 분들도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거예요.] 석파천은 뛸 듯이 놀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뭐 뭐……뭐라고 했소? 석 장주 부부가 목숨을 잃게 되다 니!] 석청과 민유 두 사람은 요 며칠간 그에게 더할 수 없는 정을 보였 다. 사람을 잘못 보아 그랬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자기를 가장 잘 대해주고 아끼는 사람이 석청 부부 두 사람 이라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석청 부부에게 목숨을 잃게 될 위기가 들이닥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만 크게 걱정이 되었던 것이 다. 정당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석 장주 부부가 바로 천 오라버니의 부모가 아니예요? 그들이 천 오라버니를 능소성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설마 죽으라고 보내는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정당은 그럴싸한 설명을 했다. 그 설명에 의하면 석 장주 부부가 석중옥을 데리고 함께 능소성으로 데리고 간 것은 설산파의 장문인 백자재 영감에게 아들의 목숨만 구 해달라는 부탁을 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백자재 영감은 응락하지 않고 석중옥을 반드시 죽이려고 할 것이다. 반면에 석 장주 부부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를 보아야 할 순간이면 반드시 무공으로 싸우려 들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능소성에 는 고수들이 벌떼처럼 많은데 석 장주 부부 두 사람이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결국에는 설산파의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하 는 것이 정당의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정당은 석 부인이 그동안 석파천에게 대해서 얼마나 잘 대 해 주었던가 하는 사실을 상기시켜며 흐느껴 울었다. 석파천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전신의 피가 끓어올랐다. [석 장주 부부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능소성에 아무리 큰 위험이 도 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쫓아가 구원을 해야겠소.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목숨을 그곳에서 버릴지언정 그냥 있을 수 없소. 쟁그랑땡, 나는 먼저 가겠소.] 그리고 나서 그는 성큼성큼 방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당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물었다.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밤을 이용해 그들을 뒤따라 가야겠소. 석 장주 부부와 함께 능소성 으로 올라가야겠소.] [위덕 선생 백영감의 무공은 대단해요. 거기다가 백만검이 있고 풍 화신룡이라는 고수 등이 있어요. 더군다나 능소성에는 기관장치가 되 어 있어 잘못 함정에 빠져들었다가 배가 고파서 목숨을 잃게 될 거예 요.] [그런 것 저런 것 따질 때가 아니오.] [일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능소성으로 오른다고 석 장주 부부를 구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죽어버린다면 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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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행(김용) - 61편 (61/82)
살지 못할 거예요.] 석파천은 갑자기 그녀의 다정한 말에 그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니,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이토록 잘 대해주시오? 나는 당신의 천 오라버니가 아니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