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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소설) 하얀 짬뽕 - 1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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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까지 대학에 가야만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학생이나, 그 중간에 끼인 학부형이나 그런 의문을 갖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써 의문을 당연하게 가져야 했지만 대학이라는 대 전제 앞에서는 어떤 것도 용서되지 않았다.

커피를 함께 마시고 초희와 나는 다시, 선 연습을 시작했다.
1타임 때의 경험 때문인지 초희는 1미리 만큼의 진전이 있었다.
누군가를 가르칠 때 가장 힘든 것은 학생이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봐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지점이 명확하지 않아 강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했다.
어느 선까지 지켜봐야하고, 어느 선에서 손을 대줘야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일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1타임 때처럼 5단 계를 모두 거치고 흰 화지를 까맣게 만든 뒤, 초희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연필의 움직임을 조금씩 수정해줬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초희는 잘 해나가고 있었다.
초희 같은 친구들이 차라리 편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설 미술학원에 오래 다닌 학생들 중엔 잘 못된 습관이 들어있는 채로 굳어져 버린 친구들이 많았다.
그것은 그 학생을 가르친 강사들의 잘 못이라기보다는 학생 스스로가 그 선생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 멋대로 했을 확률이 컸다.
아무리 돈에 팔려서 사는 용병이라도 잘 못 된 것을 가르치는 강사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잘 못된 습관이 몸에 밴 친구들은 뭔가를 가르치기 보다는 잘 못된 습관을 없애는 것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학생이나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만약, 강사가 모른 척 넘어가 버리거나, 학생이 강사의 지적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학생이 견디지 못하고 다른 학원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그 학생은 그 학원에서도 수업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뭔가를 비슷하게 그려내는 미술에서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은 스포츠나 국, 영, 수의 과목과 같아서 기초가 부실해서는 절대로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초희와 새벽 수업까지 모두 끝내고 오전 8시쯤 아침을 먹었다.
학송은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고, 초희와 나도 샤워를 하긴 했지만 밤을 샜기 때문에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초희엄마 만이 표정이 좋았고,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신기한 것은 이 큰 집에 세 사람 만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 사람이 살기엔 너무나 큰 집이었고, 공간의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그래요, 장 선생? ...음식이 안 맞나?”

“아닙니다...세 사람이 살기엔 집이 너무 큰 것 같아서요...”

“그렇지?...후우!~~ 나도 요즘 그런 것 같다니까...초희 위로 쌍둥이 오빠언니가 있는데...큰 놈은 군대에 갔고...
한 놈은 3학년 인데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보기가 쉽지 않아서...!...”

쌍둥이 오빠와 언니라는 것을 보니 이란성 쌍생아인 모양이었다.
초희가 무남독려 외동딸인 줄 알았는데, 여러 가지로 내 예상은 빗나가고 있었다.

“...요즘은 취업이 힘들어서 대학생도 고등학생들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내 말에 학송과 초희엄마가 약간 한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편해지긴 했는데...좋아진 것 같지는 않아 ...그렇지 여보?...그래서 늦둥이를...”

“어머!~ 이이가 또 그 소리네!~~ 참 내...!~~”

학송의 말에 초희엄마가 펄쩍 뛰었고, 그 모습을 보며 초희가 피식 웃었다.

“아, 뭐 어때서 그래?~ 경수자식도 늦둥이 보더니 아주 좋아서 죽더라! 연정씨도 얼마나 좋아하디?”

“아유, 몰라!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또 애를 낳아요?~~”

점점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인과 광호가 이런 식으로 다툴 때도 상당히 난처했는데, 그들보다 훨씬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학송부부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서 신기하면서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람 사는 모습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고 하더니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난 어제까지만 해도 초희와 그녀의 엄마는 학송의 기에 눌려서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학송부부는 광호, 상인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고, 정 원장과 유정의 모습도 보였다.
초희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학송 앞에서 그렇게 억눌린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쉽게 남을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장 선생, 생각은 어때? 이 사람 나이가 지금 마흔 다섯 밖에 안 됐는데 뭐 이상할 게 있나?”

초희는 밥을 먹다말고 깔깔대고 웃어버렸고, 난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못하고 냉수를 마셨다.

“이이가 정말, 아침부터 주책이야!~~”

학송은 초희엄마가 어깨를 때리는데도 살짝 피하며 나를 보고 능글맞게 껄껄거렸다.

아침을 다 먹고 초희는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학송과 나는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초희엄마는 서재에서 나오더니 내게 시디를 건네주었는데 보니까 어제 들었던 이베트 지로의 음악이었다.

“뭐야?...뇌물이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학송이 초희엄마에게 물었다.

“하하...이이가 오늘 아침부터 자꾸만 시비네...장 선생님이 이베트 지로를 좋아하셔서 드리는 거야...!...”

“어이구!~~ 그 청승맞게 웅어얼~ 우엉얼~ 대는 게 뭐가 좋다고...난 말이야!~ 그저 뽕짝이 좋더라.
안 그래, 장 선생?”

“저도 뽕짝, 좋아합니다...”

내 말에 초희 엄마가 나와 학송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초희엄마에게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나는 학송의 차를 타고 학원으로 가서 내린 뒤 내 차를 끌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원룸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초희의 집으로 가서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수업을 할 것이었다.
수능이 끝날 때까지 매주 이런 식의 수업을 반복될 것이었고, 내겐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긴 했지만 좀체 잠이 들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주인집 쪽을 보니 창문이 모두 닫혀있었다.
불과 하루 전에 이 방에서 난 자살을 하려했었고, 주인여자와 그런 일이 있었지만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오래 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 정말로 나는 자살을 할 수 있었을까? 주인여자가 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까?

머리에 피가 잔뜩 몰리면서 또 다시 예민해져버렸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여서 짜증이 났고, 갈증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적막함에 귀까지 먹먹해지는 것 같아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노트북을 킨 나는 시디를 이것저것 뒤지다가 그만두고는 초희엄마가 준 이베트 지로의 시디를 아트 백에서 꺼내 들었다.
시디에는 이베트의 노래 말고도 살바토레 아다모의 노래도 있었는데, 초희엄마의 글씨는 여자들 글씨답지 않게 힘 있게 느껴지면서도 세련돼 보였다.

창문을 모두 닫고 커튼도 쳐 버리자 방 안이 어둑해졌고, 머리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디를 컴퓨터에 넣은 뒤 침대에 무거운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나른한 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방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스키하면서도 힘 있는 아다모의 ‘그대를 사랑해’라는 노래가 끈적끈적하게 나왔다.
아다모의 흐느끼는 소리는 내 귀 속 안으로 들어와 뇌를 자극시켰고,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다.

오후 2시부터 초희와의 두 번째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엔 쓰지 않던 핸드폰의 알람기능을 사용해서 12시쯤 일어났다.
아예 지키지 못 할 것 같으면 약속을 하지 않았지 이렇게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기계에 의지한 적은 없었다.
대학 수업에서도 지각은커녕 난 한 번도 결석을 한 적이 없어서 괴물로 통했었다.
‘태미네이터’...이게 대학 동기들로부터 불리는 내 별명이었다.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하도 신경 쓰여서 종석이에게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자식은 어떻게 알았는지 하필이면 하정과 인영을 처음 만난 날, 내 소개를 할 때 그 별명을 말해버려서 정말로 난처했었다.

요란하게 소리를 내는 핸드폰을 보자 어이없기도 했지만 뭔지 모르게 내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유림, 경화, 희정은 나의 변한 모습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 원장과 유정도 그랬다.
경숙도 다른 사람들처럼은 반응하지 않았지만 내가 변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광호와 상인의 엉뚱한 계획 때문이었을까?

난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면서 계속 상인과 그런 관계가 되기 전으로 상황을 소급시켜서 생각을 했다.
내 눈에 상인의 몸이 들어오기 전 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떠올려보니 종석이 녀석이 다녀간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종석이야 지가 안 바쁠 땐 새벽에도 기습적으로 방문하는 놈이라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날 녀석은 갑자기 결혼할 것이라는 말을 해서 놀라긴 했었다.
일찌감치 고시를 패스한 녀석은 변호사로 그럭저럭 잘 나갔는데, 평생을 그렇게 즐기면서 살아가다가 50 넘어서 스무 살 차이 나는 영계랑 결혼할 것이라는 탄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클럽에서 꼬신 여자와 잤는데, 그만 그녀가 임신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날 종석은 술에 취한 채 연신 좆 물렸다면서 서럽게 울었었다.
더군다나 녀석과 결혼할 여자는 우리보다 한 살이 많은 29살이었는데, 종석이 녀석은 그것이 더욱 억울한 모양이었다.
나야 그런 문화를 잘 몰라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예상하기도 어려웠지만, 나름 선수라고 자부하던 녀석이 영계와 노계도 구분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콘돔을 착용하지 않고 섹스를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종석이 녀석이 우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나도 모르게 깔깔대고 웃고 말았다.
발정 걸린 개새끼처럼 이 여자, 저 여자를 섭렵하면서 지가 마치, 카사노바나 돈주앙이라도 된 냥, 깝치던 놈이 드디어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사실이 통쾌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마누라 될 사람이 연상 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로 재밌는 것은 장모될 사람과 종석의 나이가 정확하게 스물 살 차이라는 것이었다.
48살 이면 종석의 장모는 딸을 19살에 낳았다는 것이었다.

[종석이 때문에 내가 변한 것인가?]

그러고 보니 난 녀석을 만나면 편했다.
어떠한 경계심도 없었고, 나도 모르게 종석이 놈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됐었다.
서울대 미대는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모두들 가족처럼 지냈지만 난 이상하게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었다.
내 나이가 동기들보다 어려서 그렇지는 않았다.
어차피 미대는 다른 단과대와는 다르게 학원에서의 경험 때문에 보통 동기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많으면 형이나 누나, 혹은 오빠라는 호칭을 어렵지 않게 썼었다.

난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중학교 때도 그랬고, 잠깐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도 그랬었다.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물과 기름처럼 지냈는데, 이상하게 종석이와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접근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미 내게 경계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여자든 남자든 누구와도 10초 만에 친해 질 수 있는 종석이 녀석이 나는 부러웠던 것인지도 몰랐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은 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강한 햇살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확,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시선을 고르다가 주인 집 창문을 보니 굳게 닫혀있었다.
한번도 주인 집 창문이 닫힌 것을 본적이 없었던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나를 향하던 주인여자의 마음의 문이 닫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강간하려 했던 새벽에도 그랬고, 어제 광호의 가게에서도 주인여자는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녀는 이제 나와 가졌던 어떤 조그만 인연을 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나는 근처 빵집에 들려 샌드위치를 사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커피에 샌드위치를 먹은 뒤 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잖아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전화 잘 하셨어요, 태복씨>

“아, 그러셨어요? 어제는 연락도 못 드리고 죄송했습니다...과외를 하는데 제가 늦잠을 자버려서요...”

<태복씨가요? ...어머!~ 하하하!~~>

보연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동안 나를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을 할 리가 없었다.
하도 보연이 길고 요란하게 웃어서 내가 좀 멋쩍어져 버렸다.

<죄, 죄송해요...너무 신기한 일이라서요..후후...아, 참! 내 정신 좀 봐! 저기 다음주에 제가 일이 좀 생겨서요...수업을 목요일부터 하려고 하는데...괜찮으시죠?>

“예,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일이신 것 같은데, 일 잘 보시고 목요일 오전에 나가겠습니다...예...예...안녕히 계세요...예...”

보연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엔 수업이 없었다.
웬만해서는 이렇게 수업을 뺀 적이 없는 보연이 이럴 정도면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면 보연도 나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그녀도 시간에 늦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생리 중에도 특별하게 티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를 끌고 초희의 집으로 달려갔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못 느꼈는데 초희의 집은 정말 그림 같았다.
엄마와 아버지가 돈을 못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집에서 산적은 없었다.
주로 아파트에서 살았고 두 사람을 떠나서는 조그만 원 룸에서 살았는데, 그것이 훨씬 더 아늑하고 좋았다.
아파트라고 해도 30평이 넘었기 때문에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아버지와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 내려와서도 정 원장이 마련해 주겠다는 넓은 오피스텔을 거절하고 지금의 원룸에서 사는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초희가 내게 인사를 했고, 학송과 초희엄마는 스포티한 차림을 한 채로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초희엄마는 흰색 티에 푸른 색 카디건을 팔에 걸친 채 청바지를 입었는데, 키도 커보였고 늘씬 한 것이 너무나 젊어보였다.
학송도 흰색 티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그 티는 초희엄마의 티와 같은 것이었다.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초희에게서 신경 끄라고 말이야.
그래서 우린 데이트하러 나가니까, 우리 초희 잘 부탁하네!”

학송의 말에 초희가 맑게 웃었고, 그녀의 엄마도 환하게 웃었다.
가족이란 이런 것인가? 처음 이들이 학원에 상담하러 왔을 때의 그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화목한 가족에게 입시란 불청객이 찾아와서는 그런 절박함을 안겨준 것이란 생각이 들며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학송부부는 그렇게 전에 없이 환한 얼굴로 나갔고, 나와 초희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초희는 나보다 앞서서 내려가더니 싱크대 앞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커피 드실래요?”

초희는 어제와는 다르게 표정이 밝았다.
이제야 초희가 부자 집 막내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초희는 커피 한 스푼을 넣은 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았다.
내가 테이블 앞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자 초희가 두 잔을 들고 다가와 옆에 앉았다.

“선생님은...커피 한 스푼만 타는 것 맞죠?”

환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하는 초희의 모습이 너무나 싱그러워 보였다.
잔을 들고 맛을 보니 내가 탄 것과 똑 같았다.
어제 내가 커피를 타서 마시는 것을 유심히 관찰한 모양이었다.
내가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자 초희가 어린 애처럼 웃으며 자기도 커피를 마셨다.
나는 초희에게 왜 미대를 선택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그것은 내가 알 필요가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궁금했다.
왜 초희는 갑작스럽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까?

“선생님, 혈액형이 뭐예요?”

뜬금없이 초희가 그렇게 물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학생들은 혈액형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했고, 끊임없이 내게 물었다.
난 그때마다 O형이라고 말했지만 녀석들은 믿지 않았다.
그리고는 지들 멋대로 내 혈액형을 AB형으로 바꿔버렸다.

“O형 인데...왜?”

“어머?~ 선생님, AB형 아니셨어요? 음...AB형 같은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여자애들은 왜 그렇게 남의 피를 함부로 바꿔버리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하도 많아서 어쩔 땐 내 피가 AB형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범죄형이라고 안 해줘서 고맙다...자, 이제 수업 시작하자.
갈 길이 엄청 멀다~”

내 말에 초희가 피식, 웃으며 의자를 들고 이젤 앞으로 가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초희는 연필을 미리 깎아놓고 있었다.
좋은 태도였다.
입시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해서는 학생 스스로가 스트레스 상황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입시생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착각은 입시생이 된 자신들의 상황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상황이라고 느낀다는 것이었다.
고등교육을 12년 가까이 받은 것들의 생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6시까지 선 연습을 하고, 저녁을 먹은 뒤 연속해서 다음 수업에도 선 연습을 했다.
초희는 내가 하는 모습을 참고로 하면서 잘 따라왔고, 어제보다 5미리쯤 나아졌다.
그리고 밤 10시부터는 처음으로 물체의 스케치를 시작했다.
스케치는 일단, 사람의 손 인쇄물을 보고 했다.
보통은 구나 원기둥 등의 기하도형부터 시작했지만 사실, 그런 방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기하도형을 하는 목적은 분명했지만, 기하도형 자체가 초보자들에겐 익숙한 물체가 아니어서 교육 효과가 거의 없었다.

초보자들이 처음부터 실제 입체 물체를 보고 평면의 화지에 옮기게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먼저 이런 식으로 인쇄물을 보고 선으로 형태를 잡아가는 훈련을 시켰고, 학생이 어느 정도 선에 의한 형태에 익숙해졌을 때에서야 기하도형을 그리게 해서 입체감을 느끼게 했다.

사람의 인체, 특히 손은 상당히 어려운 물체에 속했지만 인쇄물로 접하게 되면 인쇄물 자체가 평면이기 때문에 초보자가 접근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고, 교육 효과도 상당했다.

나는 초희를 내 옆에 앉히고, 천천히 물체의 형태를 선으로 잡아가는 순서를 3단계로 나눠서 설명했다.
그렇게 설명을 한 뒤 1단계부터 3단계를 연속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다행히도 초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처음, 중간, 끝이라는 것이 형태를 그리는 하나의 과정으로 합해지자, 비로써 초희가 스케치에 대한 감이 온 것 이었다.
만약, 초희가 이해를 못했다면 5단계로 끊어서 설명을 해야 했고, 그것도 안 되면 10단계로 늘려서 보여줘야 했다.

아무튼 이때가 가장 중요했다.
모처럼 학생이 감을 잡았을 때 좀더 몰아쳐야 했다.
감을 잡았더라도 금방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더라도 손이 따라주지 않는대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감을 잡았을 때 미친 듯이 반복, 또 반복해야했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각인을 시켜야만 했다.

나는 다시 초희 앞에서 1단계를 밟아갔고, 그녀는 내 뒤에서 나를 보며 연필을 움직였다.
초희가 1단계를 마치면 다음 단계를 밟았고, 그런 식으로 같은 인쇄물을 다섯 장을 끝내고 보니, 벌써 12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주의 과외수업이 끝이 났다.
1층 거실로 올라가니 초희엄마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장 선생님.
초희도 고생 많았다~”

초희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초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초희는 갑자기 자기 엄마에게 안기며 응석을 부렸다.
모녀의 친근한 모습을 보던 나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상인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동안 상인이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더 이상은 집착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니까 오히려 더 상인이 보고 싶었다.
수업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수업이 끝이 나고 어둠 속에 있다보면 상인이 더욱 그리워졌다.
몇 번을 핸드폰을 쥔 채로 망설이다가 기어코 상인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열 번쯤 신호가 가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난 거칠게 끊어버렸다.

먹고 싶을 때 못 먹고,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광호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가질 수 있는 상인과 살면서 나를 끌어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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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일지라도 깨어질 것이지만…" 단언하고 있었다. 변황지존후(邊荒至尊后) 태양여왕(太陽女王)! 대륙이여 아는가? 변황의 오지(奧地) 속에서 수천 년을 잠 속에 빠져 있던 변황최후의 신화가 깨어졌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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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왕(火龍王)] 와룡강 - 8편 (8/36)
천풍혈! 그것은 천상삼사 천풍사만이 지녔던 바람의 혈맥(天風血脈)이었다. 천림! 그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 초극이도 불완전한 기인의 집합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미린. 그 분의 얼굴을 보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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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왕(火龍王)] 와룡강 - 9편 (9/36)
(놈들은 나 천세잠룡을 노릴 것이고. 천림의 진정한 힘을 저울질할 것이다!) 하후미린의 입가로는 싸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 때에 철화와 벽하의 초인지경에 이른 것은 다행스런 일이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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