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난 명기다!! -64부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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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난 명기다!! -6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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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포옹, 그리고 짧은 입맞춤.

혹시라도 마지막 섹스를 기대했을까? 온 몸을 쥐어 짜주기라도 할 듯, 터뜨려 주기라도 할 듯 그런 

쾌락적인 오르가즘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짧은 이별의 표현은 나를 더욱 애달프게 했다. 

약 6개월간의 동거,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엔 너무도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집안 청소부터 빨래, 먹을것, 그리고 귀가후의 적막감, 외로움,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 이틀이면 적응이 될 줄 알았던 생각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석민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잊어야 했다. 

 

[어? 여보세요?]

[혜미야~ 잘 지냈어?]

 

너무도 간만에 걸려 온 진호의 전화였다.
이제 내 옆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진호 뿐이었다.

염치없이 다른 남자를 좋아했었고 또 다른 남자에게 쾌락을 맡겨버렸던 내 몸뚱이를 저주하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한다.
또 진호에게 상처를 주기 싫다는 나만의 합리화가 시작되었지만 선택의 길은 없었다.

 

[자기야~ 왜 이렇게 간만에 전화했어]

[미안..
겨울이라 혹한기 뛰고왔어]

 

[그럼 이제 한가해 진거야?]

[혜미야!! 나 일주일 후에 병장휴가야..
벌써 병장이다 그치?]

 

벌써 병장이라는 말이 왜 그리도 아득하게만 느껴지는지 몸이 떨려왔다.
진호가 군대로 가고 난 후 나는 

너무도 가혹하고 혹독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의 불찰로 시작된 일이긴 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후회를 해도 나아질 것이 없었다. 

어느덧 승수라는 짐승보다 못한 놈은 잊은듯 했다. 

성현의 도움으로 그 지옥같은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석민과 함께한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악몽과 

다시 찾아 올 것 같은 불안함에 떨어야만 했다.

성현이 대신 때려주기는 했지만 따로 복수를 해야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 생각은 차라리 송두리째 파묻어 

버리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효진과 승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나 뿐 아니라 효진에게까지 고약한 짓을 한 것을 두고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울면서 그리고 그를 저주하면서 내린 결론은 그저 잊자는 말과 이겨내자는 말로 서로를

위로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말이 틀린말이 아닌듯 했기 때문이었다.

 

[우와! 진짜? 좋아좋아...
너무 좋아~]

[그치? 이번엔 어디갈까?]

 

[글쎄~ 자기 가고 싶은데로 가자~]

[아냐....
이번엔 우리 혜미가 가고 싶은곳으로 가자고!]

 

[며칠이나 나오는 거야?]

[9박10일...짱 좋지! 그치?]

 

[그래..짱 좋다! 그날 내가 태우러 갈께~]

[아냐..
나 병장 되서 애들 밥만 좀 사먹이고 갈꺼니까 집에서 깨끗히 씻고 기다리고 있어..흐흐]

 

진호의 입에서 저런 야한 얘기는 농담이거나 낚시성 멘트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나였다.
한 두번 당한 것도

아니고 바보가 아닌 이상 더이상 당할 내가 아니었지만 그런 그의 농담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깨끗히라는 말 자체가 '야잇! 더러운 년아!'라고 욕하는 것으로 들려왔다.

 

[치~ 또 속을 줄 알아?]

[흐흐...혜미야! 나 들어가 봐야겠다! 또 전화 할께~]

 

통화끊김음이 들리고 곧 휴대폰의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태연한척 진호의 전화를 받았지만 전혀 마음은 태연하지

못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 처럼 진호의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불편했고 그 불편함은 곧 나를 쥐어짜듯 괴롭혔다.

 

'진호야~ 내가 다시 널 사랑해도 되는걸까? 그럴 자격이 있는걸까?'

 

또 다시 드는 생각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복잡한 줄 알았더라면 아얘 시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단연 사랑이라는 감정일 것이었다.
누구나 싸우고 화해를 반복하며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그것이 깨질때도 있고 하나의 열매로 여물어 결혼이라는 평생의 약속과

함께 결실을 맺을때도 있다.
물론 그 결실마저도 깨지는 것이 무척 태연한 세상이 되었지만...

 

'만약 진호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나를 좋아할까? 사랑할까?'

'그럼..
나는? 나는 예전처럼 진호에게 당당하고 사랑스런 여자의 모습을 지켜갈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하던, 어떤 잘못을 짓건, 하다못해 불구가 된다고 해도 진호는 나를 사랑 할 것이라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매몰차고 차갑게 그를

버리고 뒤돌아 설수도 없었다.
진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먼저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석민에 대한 마음도 사랑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보다 그와 함께 생활을 하며 누렸던 편안함과 육체의 

쾌락 외엔 기억도 아련함도 별로 남은 것이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죽고 못살아 뒹굴었는데도 말이다.

점점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져가고 있는 나였다. 

딱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든든한 손길이 필요했다.

내 욕심만을 위해서라면 진호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미안하고 죄스러움을 떠나서...

 

 

>>>>>

 

 

비 온 다음의 땅이 더욱 굳는다는 말이 맞는듯 했다. 

사나흘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효진은 예전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도 다시 빛을 내고

있었고 두 번의 낙태로 상처입은 가슴도 효진만의 성격으로 치유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첫 번째의 실수는 효진의 잘못이 컸지만 두 번째는 재앙이라 할 수 있을만큼 짐승같은 놈에게서 받은 

평생의 흉터로 남아 그녀를 괴롭힐 것이었다.

 

겨울이지만 우울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녹여줄 만큼 따스한 햇살이 창을 비추고 있었다.
그윽하고 담백한 커피의

향이 몸을 휩싸고 커피를 뽑아내는 기계가 요란스레 돌아가고 있지만 소음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나와 효진같이

두명 또는 세명정도 짝을 이룬 여자들이 그 안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바쁘고 고된 사회에 여자들만의 휴식처

라도 되는양 온통 여자들 뿐이었다. 

 

"혜미야~ 너는 괜찮지?"

"뭐가?"

 

"그거...승수...."

"아~ 치료하면서 검사했는데 괜찮다고 했어"

 

"다행이다.
저번에 물어본다는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치~~ 몸은 좀 괜찮아?"

 

나와 효진은 동병상련의 고통을 같은 사람에게 겪고나서 더욱 돈독해진 우정을 과시했다.

미처 정신이 없어 묻지 못하던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보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뭐..
애 하나 낳은거라 다름없다는데 멀쩡해! 진짜 애낳고도 이정도면 100명은 낳을수 있겠다야~"

"미친년! 농담이 나오냐?"

 

"어쩔수 없잖아...잊고 살아야지.."

"낙천적인거니...
아니면 생각이 없는거니? 후훗!"

 

역시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지 모른다는 상상마저 하게 됐다.

효진의 웃는 얼굴이 더욱 슬퍼 보인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길하고 있지만 나 못지 않은 도려내고 싶은 아린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할 것이 마음 아팠던 것이다.

 

"혜미야~"

"왜?"

 

커피를 들고 곰곰히 생각을 하던 효진은 무엇가 결심이라도 한듯 말을 건내왔다.

표정은 비장했다.
절대 장난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는듯 했다.

 

"우리 이제...
걸레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볼까? 다른 여자들처럼 내숭도 좀 까고..
튕겨도 보고..
남자들

애도 좀 태워보고....이제 쉬운여자, 헤픈여자, 남자 사냥꾼 그만 할까?"

"치~ 기지배..."

 

남자 사냥꾼, 

남들이 들으면 우스울만한 타이틀, 나는 나의 성적 쾌락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남자를, 효진은 능력있고

돈 많은 남자를 엮어 보기위해 나름대로 사냥을 다녔었다.
토끼나 작은 들짐승 부터 감당해내지 못 할

호랑이나 곰같은 맹수를 만난적도 있었지만 그녀와 나의 표적이 된 사냥감들은 거의 포획을 당했었다.

그렇게 포획을 하고 사냥감을 쓰러뜨릴수록 나와 효진에겐 영광의 상처도 아닌 그저 쓰라린 상처만이 

남아 흉터를 남기고 그 흉터는 지우고 싶은 악몽같은 과거를 남겼다.

그런 타이틀을 버리자는 제안을 해 온 효진이었다.

사랑에 힘들어 지친 나와 두 번의 씻어내지 못 할 크나큰 아픔을 겪은 효진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것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남자의 품에 익숙해져버린 몸뚱이 였지만 그것 보다도 진호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서 그 사냥은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들겠지..
솔직히 우리만 손해 아니냐? 다른년들처럼 우리가 뭐 명품을 받길하냐 용돈을 받길하냐? 그저

늑대같은 놈들만 드글드글 끓기만 하고...
우리 이제 사냥꾼 그만 하자~"

"미친년..
넌 그래도 좀 받았잖아?"

 

"받긴 뭘 받어..
그냥 좋은놈 물어 시집 가려고 했던거지...헤헤"

"자신있어?"

 

"모르지...
해봐야지..
너랑 나랑 힘 합하면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매일매일 서로 감시해주는거야..어때?"

"감시? 음....
좋아! 대신 사귀는 남자랑은 해도 되는거잖아..."

 

"대신 100일이상 넘기기!"

"콜!"

 

"아씽~ 내가 더 불리해.."

"뭐가 또~"

 

"넌 진호 있잖아~"

"야! 너도 그럼 빨리 물어서 군대보내!"

 

"어흐~ 미친년!"

"헤헤"

 

너무 늦은 결심과 다짐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몇년만이라도 아니, 단 일년만이라도 빨리 결심을 했다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최고의 애인감이었을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버리긴 아깝고 갖고 있자니 너무 큰 짐이 되는 

것을 일깨워 준 효진의 제안이 귀에 박혀 들어왔던 것이다.

점점 뉘엿하게 넘어가는 해가 겨울의 석양을 내비치며 뒤늦은 결심을 한 우리를 축하라도 해주듯 붉게 비쳐준다.

 

 

>>>>>

 

 

'이 새끼! 또 왜 이렇게 안 와!! 오기만 와 봐! 주겨버리겠어!'

 

이미 화장과 몸치장을 다 마친지도 서너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딱히 어딜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호에게

만큼은 예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금방 도착을 한다던 진호의 전화는 또 다시 기다림을 가져다 주며 연락이

닿질 않았다.
오면 괴롭힘의 진수가 무엇인지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과연 예전같이 진호에게 웃으며 장난을 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어왔다.

또 깨질지도 모르는 약하디 약한 유리같은 의지속에 담긴 효진과의 다짐, 그리고 내 자신과의 다짐을 정성스레

온갖 솜과 포근한 포장지, 거기에 택배 상자안에 들어오는 뽁뽁이로 칭칭감아 다시 마음속 가장 잘보이는 곳에

넣어두었다.
두 번 다시 이 다짐이 깨지질 않기 기도하면서 말이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고 난 후의 개운한 마음과 머리였다.
누가 보면 단세포 동물처럼 무척이나 단순하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 스스로의 그런 결심은 진호에게 용서를 받은 것 처럼 가벼워진 마음이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해서 였을까? 

점점 마음이 편해지면서 먹을것도 땡기고 빠졌던 살이 점점 원상복구 되어 왔다.
거칠고 둔탁했던 피부도 다시 

기름지고 뽀얗게 생기를 되찾아가고 칙칙했던 낯빛도 며칠새에 몰라볼 만큼 좋아지고 있었다.

 

'이번엔 병장도 되고 했으니까 휴대폰이나 하나 사서 들여 보내야지!'

 

기다리는 것을 무척 싫어하던 내가 진호를 기다리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간간히 시계를 쳐다보고 짜증을 부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지만 나름 휴가기간에 할 일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으며 빈틈을 메꿔나갔다. 

테트리스 게임을 하듯이...

 

'우선 오늘밤은 찐한 밤...예약!'

'내일은 쇼핑과 서울구경하고~ 아! 휴대폰도 하나 사주기로 했지'

'그담 날은 1박2일? 너무 짧나? 2박3일로...음 겨울 막바지니까 보드타러 갔다가..'

'아~ 진호 집에도 가야지? 그럼 3일만 보내주고!'

'올라오면...
뭐하지? 뭐하지? 아잇~! 그 담부터는 진호 하고 싶은거 하지 뭐'

 

'암만 계획을 짜면 뭐하냐고...진호가 와야지~'

 

차려 놓았던 밥상 앞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수저를 들었다.
차게 식은 국과 반찬들이 입속으로 들어 갈 때 마다 

내장까지 얼게 만들듯 차갑게만 느껴졌다.
밥알을 세 듯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던 나는 결국엔 절반도 비워내지 

못하고 다시 식탁을 치워나갔고 다시 소파에 무릎을 모아 쪼그린채 얼굴을 그 위에 올리고 애꿏은 시계만 자꾸 

쳐다 볼 뿐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까지 해가며 진호와의 휴가 계획을 세우던 나는 점점 좋았던 기분이 가라 앉아가고 있었다.

일정하고 정확하게 초침이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까지 12시에 맞춰지고 12시면 변해

버리는 신데렐라처럼 기대감은 실망으로 들뜬 마음은 초조함으로 변해갔다.
마지막 통화 후 벌써 여섯시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는 진호였다. 

새삼 기다린 시간이 꽤나 많이 지나간 것을 느꼈다.
늦어도 아홉시면 올 줄 알았던 진호는 새벽이 지나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다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사람이나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혹시'라는

녀석 때문에 애간장을 끓이기 일쑤였고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벌써'라는 녀석때문에 다급함이 찾아온다.

때론 혹시라는 것을 이겨버리는 녀석도 있었다. 

 

걱정과 초조함, 괘씸함과 불안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화장실도 가고 싶지 않았고 뻐근해지는 허리를 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성영화처럼 화려하게 색을 

변신 시켜나가는 음소거 상태의 티비 화면만이 어둠속의 나를 비쳐내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오늘이 아닌 내일이 휴가 나오는 날인가?'

'꿈인가?'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팔뚝을 꼬집어 보는 나였지만 꿈은 아니었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속에 드리운 검은 기운은 더욱 어두워만 지고 있었다.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을 쳐다보며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화장대로 가 보통 때 보다 조금 짙게 

되었던 화장을 지워나갔다. 

커다란 한숨이 퍼져나오자 화장대 위에 놓여진 얼굴을 반쯤 내민 티슈가 몸을 날려갔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런 마음만이 나의 손을 떨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몸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를 느꼈을땐 욕실이었다.
굳이 샤워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자연스레 욕실로 들어와 있는 나였다.
평소보다는 더 뜨거운 물을 맞아내고 있는 나였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아내고 싶지 않았다.
점점 김이 가득 욕실을 메우고 점점 시야가 사라질때쯤 됐을때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날이 밝고 어두워졌다. 

또 날이 밝아 햇살이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진호에겐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샤워를 마친 내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예쁘게 셋팅을 한 후에 천천히 화장품을 발라 나갔다.
꼬박 이틀간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화장이 들뜨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초화장을 마치고 파운데이션을 발라낸다. 

이곳저곳 물과 기름같이 들뜨는 화장이지만 컨실러로 작은 점까지 커버해나가고 마스카라로 긴 속눈썹을 말아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은 진한듯한 립글로즈를 발라내고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왜 기다리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서 못오는 거겠지~'

'일이 생겼으면 전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너무 나쁜 생각하지마~ 진호 그런 남자 아니잖아..'

 

한 줄기 눈물이 힘 없이 흘러내렸다. 

무엇때문에 흐르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배신감? 괘심함? 아니면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 모두 다 였다.

화장이 번질새라 서둘러 티슈를 뜯어 눈가를 닦아냈다.
그리고 또 다시 거실로 나가 어제도 그랬듯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모아 올렸다. 

 

'오늘은 올꺼야...아마....'

 

확신없는 바람을 바라며 진호를 기다렸다.
무슨일이 있어서건 오늘이라도 와 준다면 웃으며 반길 수 있을것 

같았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이다. 

또 다시 점심시간이 다가왔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벌써 몇끼니를 굶었는지 배가 홀쭉해져 있었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다시 밤이 됐다.
밤과 새벽의 사이에서 확실히 구분짓지 못할 정도의 그런 애매한 시간이...

 

'오늘도 안 오니?'

 

쓰러질 것 같았다.
기절해 버릴것만 같았다.

하지만, 졸리지만 잠은 오질 않았고 설사 잔다해도 주체못할 두려운 악몽이 기다리고 있을것만 같아 겁이 났다.

몸이 떨려오고 검었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때 쯤이었다.

 

/삑..삐.............삐....삐리비리.../

 

현관문의 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한 글자 한 글자 너무도 텀이 길었다.
그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 무척 더디갔다.

 

/삑! 삑!........삐...../

 

비밀번호를 계속 틀린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든 나는 기다리던 진호일지도 모르는데 아니 확실한데 반갑게

뛰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던 나는 비디오폰을 켜 밖을 내다 봤다. 

군복, 주체 못 할 만큼 술을 많이 마신 진호가 잔뜩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진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제서야

급하게 뛰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과 진한 술냄새가 한번에 풍겨져 들어오며 커다란 덩치의 진호가 비틀대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지..진호야~"

 

비틀거리던 진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군화의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냥 신발처럼 벗으려다 실패하고 저절로

주저 앉게 된 진호는 허공과 바짓단을 허우적거리며 끈을 찾는듯 했다.

 

"아이...씨발! 왜 안돼는거야!"

"내...
내가 해줄께~"

 

신발장에 상체를 기댄 진호에게 다가가 군화의 끈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저번 외박 때 한 번 해봤다고 

쉽게 숨은 끈을 찾아낼 수 있었다.
투박하고 차가운 군화의 느낌이 손에 와서 닿자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너 누구야~ 아~~~~~ 혜미구나? 내가 제일 사랑하는 혜미구나!!!"

".........."

 

진호는 뒷말에 힘을 주어 소리치듯 외쳐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혜미!! 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하는 혜미!!! 씨발...
좆나 사랑하는 혜미.."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먹었어~"

 

잔뜩 취해 혀가 꼬부라진 진호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해 갔다.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많이 마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좋은 일보다는 나쁜일로 인해 마셨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군화의 끈을 다 풀은 나는 신발을 벗기고 진호를 안아 부축을 하려 했지만 내 힘만으로는 역부족

이었다.

 

"하하하하...큭! 워커 다 풀었네? 언제 풀었지? 우리 예쁜 혜미가 풀어줬구나? 그래?"

"어흐~ 일어나봐~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들어가자 응?"

 

"일루 와 봐 혜미야...
우리 사랑하는 혜미 얼굴 좀 보자~"

"일단 들어가서...응?"

 

"일루오라구!"

"어맛!"

 

잡고 있던 손을 단번에 끌어당긴 진호에게 쓰러지듯 안긴꼴이 된 나였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힘없이 끌려가는 내 모습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의 양 볼을 받쳐잡은 진호의 찬 손에 느껴졌다.

차갑고 투박했다.
풀린 눈동자가 점점 촛점을 찾더니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호는 울음이라도 쏟아낼 듯 

촉촉한 눈망울을 만들었다.
슬퍼보였다.

 

"아하하...우리 혜미 맞구나! 너 혜미 맞지?"

"그래...
맞어...맞다고! 일단 들어 가자니까!"

 

"그래..
일단 들어 가자!"

"으잇차!"

 

진호의 몸통을 끌어안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그를 붙잡아 부축을 했다.
병장이 되고 나서 시간이 남아 운동을

한다더니 훨씬 탄탄하고 좋아진 몸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술에 취한 진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취하게 만들었는지는 몰랐지만 왠지 머리부터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좋지 않은 느낌은 장난을 칠

구실도 며칠동안 그를 기다리며 쌓였던 짜증도 그저 잊고 속으로 삭여내야만 했다. 

 

"아음....취한다! 취해..."

"어디서 이렇게 술을 많이 먹었어~ 걱정했잖아..
전화라도 좀 해주지"

 

"기다렸어?"

"그럼..잠 한숨 못자고 기다렸잖아!"

 

침실에 들어와 침대가 보이자 마자 들어눕는 진호였다.
이렇게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술을 먹고 어떻게

집까지 찾아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진호는 정신을 못 차릴정도 였다.

거친 군복이 불편해 보였다.
이미 술에 취한 진호는 허우적거림을 멈추고 곤히 잠든것 같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대신 거친 숨과 함께 지독한 알콜냄새만 풍겨내고 있었다.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 상의를 벗겨내자 

카키색의 보드라운 런닝셔츠가 드러났고 풀어내기 힘든 허리띠까지 풀어내 바지를 벗겨내고 양말까지 벗겨내고 나서야 나도 한숨을 돌렸다.

 

'뭘 까? 뭐가 도대체 진호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걸까?'

 

눈을 감은 진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찡하져 오는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였다.
허리를 감싸오던 진호의 팔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그의 팔은 옭아매듯 강하게 부여잡고 자신쪽으로 잡아끌고 있었다.

 

"왜..
왜이래!"

 

크진 않지만 적당히 거부감을 나타냈다.
아무리 섹스 앞에선 물불가리지 않는 나였지만 그런식은 싫었다.

하지만 진호는 한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 한 다른사람인양 나의 몸을 만져왔다.

거친 진호의 손길이 브래지어 안을 파고 들어 오더니 둥근 유방을 가득 움켜쥔다.
너무도 아픈 손길이었다.

진호를 밀어내며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지만 결코 쉽게 놔주지 않는 그였다.

 

"지..진호야~~ 왜 그래! 응? 왜 그래~~"

 

거의 찢기듯 상의가 벗겨져 나갔다.
그렇게도 온순하고 나를 먼저 생각해주던 진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이를 악문 진호의 표정은 무서웠다.
술을 먹으면 모든 남자가 짐승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말해주듯 진호 역시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었다.

 

"하지마! 나 이런거 싫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외엔 듣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교시절의 그 악몽같은 기억, 그리고 승수에게 당했던 처절했던 기억이 떠올라서가

아닌 전혀 상상도 못했던 사람, 아니 다 변한다고 해도 그럴것 같지 않은 진호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

던 것이다.

 

"하...지마....하지 말라고..."

 

브래지어 마저도 찢기듯 튕기며 어깨끈이 팔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고 있었던 반바지와 팬티도 엉덩이를 내려와

무릎에 걸쳐져 점점 발목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아무리 밀고 벗어나려 해도 꼼작을 하지 않는 진호의 몸에 깔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베개로 떨굴 뿐이었다.

 

"흐..흐윽!..
왜 그래..
도대체 왜 그러냐고!"

 

몸에 힘이 빠져나가며 점점 도망의 의지마저 꺽여지고 있었다.
어느새 몸 위로 올라온 진호가 몸부림을 치듯 

자신의 팬티를 벗어 내려갔다.
뭉클하고 까칠한 그의 자지와 털이 허벅지에 느껴지고 서서히 눈을 뜨는 진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숨이 찬지 헐떡이는 진호의 거친 호흡이 볼에 느껴지며 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진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울고있는 나에 대한 불쌍함인지 아니면 우는 여자에게 

성욕이 떨어졌는지 흔들리는 눈을 피한 진호가 한 줄기 눈물을 주륵 흘려내고는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바로 등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내왔다.

 

"누나! 아니....혜미야~ 미안해...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 미안"

 

한참을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 후로는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그였다.
몇 번 코를 훌쩍이더니 술 기운을 빌어

점점 잠으로 빠져드는것 같았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은 여간해선 멎질 않았다.
지금까지 아픔에 흘린 눈물보다

더 뜨겁고 더 가슴이 아파왔다.
평소같은 모습의 진호였다면 그런 모습의 진호가 반강제적으로 덮쳐왔다면 귀엽게

받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짐승같은 몸사위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또 다시 생채기를 가득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자자!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몰라...
자자!'

 

잠이 올 리 만무했다. 

그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기립박수에 절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미 이틀밤을 지새운

나였지만 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헝클어진 몸과 마음으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눈은 물기가 잔뜩 마르채로

뻑뻑해져 벌겋게 충열이 되있고 드라이를 하고 고데로 예쁘게 셋팅했던 머리는 헝클어져 산발이 되있었다.

거의 찢겨진 속옷과 옷에 쓸려버린 자국도 몸 여기저기 생겨 피빛의 상처를 머금고 있었다.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옷을 갈아 입었다.
두꺼운 도끼 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단장했고 다시 진호 옆으로 가

그를 바라봤다.
변함없는 진호였다.
생김새도 낮은 코골이를 하는 잠버릇도...

기절을 해 버릴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버텨 줄 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만 둬야만 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부터 살피는 나였다.
잠이 들기 전까지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물론 기분은 한결 나아 졌지만 며칠간 깨졌던 리듬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는지 몸 이곳저곳이 뻐근했다.

가뜩이나 컨디션도 좋지 않았는데 진호의 강제적 몸짓에 발버둥을 치느라 더욱 그런것 같았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티비를 보고 있던 진호와 눈이 마주쳤다.
진호를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일어났어? 나 어제 술 많이 취했지...미안~ 나 어제 뭐 실수한거 없었어?"

"어? 어....
없어..
근데 어디서 그렇게 술을 많이 먹고 온거야?"

 

머뭇거리는 내게 먼저 말을 건낸건 진호였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진호는 모르는척 말하고 있었지만 기억을 하고 있는듯 했다.
나도 진호도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모습들이었다.

 

"아~ 고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그럼 전화라도 좀 해주지~"

 

"기다렸어?"

"그래! 곰탱아!!"

 

그런 분위기가 싫어 먼저 깨보려 한 나였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좀처럼 풀려나가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처럼...
겨울이 가기전엔 아무리 

따스한 햇살로도 녹여내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누나~ 밥먹자...
배고파"

"그래..
조금만 기다려~"

 

밥을 차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어젠 도대체 왜 그랬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국을 불 위에 올리고 반찬들을 덜어내는 순간에도 서로의 어색함은 풀려나가지 않았다.

이어진 식사시간도 그리고 식사를 마친 그 후도 불편함의 기운은 여전히 건재했다.

 

"나, 집에 갔다 올께~"

"언제?"

 

"지금 갔다가 며칠 있다 올께..."

"그...그래~"

 

말을 마치고 욕실로 들어간 진호는 다른 사람같았다.
이다지도 무뚝뚝하고 차가운 느낌의 사람인지 처음 느끼는

중이었다.
진호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최악의 휴가기간이 되고 있었다.
차라리 속 시원히 가슴속에 담아둔 것을

꺼집어내줬으면 좋겠지만 진호는 왠만해서는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만 툭툭

내뱉을뿐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왜 저럴까?'

 

기분이 나쁜 것 보다 걱정이 됐다. 

씻고 나와 다시 군복을 차려입은 진호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말도 이어가질 못했고 궁금한 이유마저도 묻질 못했다.

 

"나 간다..
문단속 잘하고 있어"

"언제 와?"

 

"글쎄..."

"알았어~ 잘 갔다와..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애정의 척도가 스킨십이 될 수는 없지만 차갑기만한 표정의 진호는 따뜻한 손길마저 거부한채 현관을 빠져나갔다.

진호와 같이 있던 집도 조용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가 나가자마자 온몸을 휘감아오는 허전함과 아스라한 허망

함이 느껴지며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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