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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 -4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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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진은 벌써 십 여분 째 말이 없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에게 남편과 사별한 여자와의 결혼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임을 형진도 알고 있었다.
특히 내년에 고3이 되는 딸이 있다는 말에 더욱 놀라는 어머니의 표정을 형진은 잊을 수가 없었다.

- 하나만 묻자 -

침묵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의 음성에 형진이 고개를 들었다.

- 네, 어머니... -

- 그 여자에게 책임져야 할 행동을 저지른 거냐? -

- 죄송합니다, 어머니 -

옛날분인 어머니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형진은 알고 있었고,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
형진의 대답에 형진 어머니가 형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

- 네 -

-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그 여자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딸아이는 더더욱 그렇고....
때로는 그런 이 에미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게다 -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

아들의 대답에 다시 아들을 한참이나 응시하던 형진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 전화해서 내려오라고 해라 -

- ........ -

어머니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형진이 놀라며 어머니를 응시했다.

- 애가 방학이라고 하니, 모레 같이 내려오라고 해라 -

- 저기, 어머니... -

- 시끄럽다, 그렇게 전해라 -

- ........ -

자리에서 일어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던 형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함께 일어났다.

- 지연씨 듣고 있어? -

- 응 -

형진의 물음에 지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형진의 어머니가 이토록 빠른 시간에 자신을 찾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미진이와 함께 내려오라는 말에 지연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 미안해, 어머니가 완강하셔서 어쩔 수 없이 전화했어 -

- 아냐, 괜찮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야 -

- 그런데 미진이는 어떡하지, 아무리 말씀 드려도 함께 내려오라고 하시는데 -

- 모르겠어, 미진이는...
일단 말은 해보겠는데 싫다고 하면 나 혼자라도 내려가야지 -

- 그냥 혼자 내려와, 미진이는 내가 어머니를 어떻게 하던 설득해 볼게 -

- 일단 미진이하고 이야기 먼저 해보고 다시 전화할게 -

- 후우...... -

핸드폰 너머로 형진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지연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 미안해, 형진씨..
괜히 나 때문에... -

- 아냐, 내가 오히려 미안해, 어머니를 잘 설득했어야 했는데 -

- 됐어, 내가 어머니 입장이라면 내 얼굴 보기도 싫을 거야, 그나마 얼굴이라도 보자고 하시니 그것만이라도 다행이야 -

- 지연아 -

- 응 -

- 우리 어머니 경우에 없는 분은 아니신데, 나에 관한 일이라 혹시 서운하게 말씀하시더라도 이해해 줘, 내가 자기한테 더 잘하면서 살게 -

형진의 말에 지연이 미소를 지었다.

- 그래, 고마워, 근데 그건 내가 자기한테 할 말인 것 같은데, 나 같은 여자 만나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자기가 불효자 된 것 같아서...
나야말로 자기한테 잘하면서 살게, 어머니가 허락해 주시면..... -

- 걱정 마, 잘 될 거야, 내가 최선을 다 할게 -

- 그래, 고마워 -

- 그럼, 일단 미진이하고 이야기해보고 전화 줘 -

- 알았어, 그럼 나중에 통화 해, 끊을 게 -

- 지연아 -

- 응 -

전화를 끊으려던 지연이 대답을 했다.

- 잊지 마, 나 너 없으면 안 돼, 알지? -

형진의 말에 지연의 가슴이 찡해졌다.
그리고 눈가가 살짝 붉어진 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 자기야 말로 잊지 마, 난 이제 자기 없이는 못 사는 자기 여자란 거 -

- 그래, 잊지 않을 게...
사랑해, 지연아 -

- 나도 사랑해, 형진씨 -

- 들어가 -

- 응 -

그렇게 통화를 끝낸 지연이 밀려나오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들고는 눈을 연신 깜빡거렸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을 나서고 있었다.

- 정말, 나도 오래? -

- ......... -

미진의 물음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와, 신난다 -

환하게 미소를 짓는 딸의 모습에 지연이 굳은 표정으로 미진을 응시했다.

- 미진아 -

- 응 -

- 뭐가 신나? -

- 신나지, 나한테 할머니가 생기는데, 친구들이 시골 할머니에게 놀러가는 거 볼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는데... -

딸의 말에 지연이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 미진아 -

- 음 -

- 할머니 옛날 분이셔.. -

- 근데? -

- 어쩌면 엄마랑 선생님 사이 반대 할지도 몰라 -

- .......... -

엄마의 말에 미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 생각해 봐, 선생님을 여자 혼자의 힘으로 키우신 분이야, 그것도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그런 분이 엄마 같은 며느리 마음에 드시지 않을 거야, 더군다나 너처럼 큰 딸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실지 몰라 -

- 나 때문에 반대하신다고? -

딸의 말에 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너 때문이 아니라, 반대하는 이유 중에 네가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엄마 혼자 같다 올게, 넌 나중에... -

- 됐어, 같이 가 -

말을 가로막는 딸의 말에 지연이 물끄러미 미진을 응시했다.

- 나도 같이 오라고 했다며, 그리고 내가 가면 엄마한테 심하게 안 할지도 모르잖아 -

- 미진아... -

- 됐어, 나 갈 거야, 내가 가서 할머니한테 잘해서 엄마랑 쌤이랑 잘 되게 해 줄 거야 -

- 네 말을 고마운데, 넌 아무래도 다음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

- 엄마 -

- 응 -

- 쌤 사랑하지? -

- ......... -

딸의 물음에 지연이 그저 미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 나도 쌤 사랑해, 물론 엄마 같은 감정은 아니지만 나도 엄마처럼 쌤이 우리 가족이 됐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할머니도 우리 가족이 되어야 하잖아,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가 할머니의 말을 어겨봐, 할머니가 얼마나 섭섭하시겠어, 엄마 말대로 우리가 마음에 차시지도 않는데..
그러니까 엄마가 뭐라고 해도 난 갈 거야, 가서 엄마랑 쌤이랑 잘 되게 해달라고 부탁 할 거야 -

- .......... -

딸의 말에 지연이 사랑스런 눈길로 미진을 응시했다.
그러던 지연이 손을 들어 미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 우리 딸 다 컸네, 정말 고맙다, 우리 딸...
엄마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 -

- 오래전에 이미 다 컸어, 엄마랑 쌤만 나 애기 취급해서 그렇지 -

- ........... -

미진의 말에 미소를 지은 지연이 미진을 당겨 가슴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 고마워, 우리 딸..
이렇게 착하고 예쁘게 커줘서...
정말 고맙다 ]

그렇게 자신의 생각과 달리 훌쩍 커버린 딸의 존재를 느끼며 지연은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져 옴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형진의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에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 형진아 -

- 네 -

미진과 지연을 데리고 집으로 온 형진은 어머니의 부름에 대답을 하며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 너는 아이 데리고 잠시 나갔다 와라 -

- 어머니 -

- 내 말대로 해라 -

형진 어머니의 말에 형진은 물론이고 지연과 미진이 긴장한 빛으로 형진의 어머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 저기, 할머니.. -

그 순간 미진이 입을 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형진 어머니는 그런 미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 미진아 -

그런 미진을 보며 지연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미진은 말을 시작했다.

-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정말 죄송합니다.
할머니 마음 다 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떤 마음이신지는 알 것 같아요, 저희 엄마에게 제가 그렇듯, 할머니에게도 선생님이 전부일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우리 엄마 조금만 미워해 주세요, 저희 엄마도 편안 마음으로 선생님 만난 거 아닐 거예요 -

- 미진아, 너 그만 못하니 -

지연이 다시 한 번 미진의 말을 막았고 미진은 그렁거리는 시선으로 형진 어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어린애가 이런 말씀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가요 선생님.... -

죄송하다는 말을 마친 미진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자 형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고, 그 순간 지연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형진의 어머니가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 앉아 있어요 -

형진 어머니의 음성에 지연이 고개를 돌렸고 어딘가로 향하는 형진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지연이 입을 다물고 작은 툇마루에 조심스레 앉았다.

- ......... -

지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집을 살폈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시골집을 둘러보며 지연은 자신과 달리 형진 어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살림 속에서 힘들게 형진을 키워왔을 거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지연은 더욱 죄스러웠다.
아마도 자신이 미진을 생각하는 것보다 형진의 어머니는 형진에게 더욱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자식 하나만을 바라보고 모진 세월을 견뎠을 형진 어머니의 일생이 집안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진의 시골집을 둘러보며 더욱 자신감을 상실하던 순간 형진 어머니가 쟁반에 차를 들고 나오자 지연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형진 어머니는 말없이 쟁반을 툇마루에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지연도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형진 어머니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지연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형진 어머니의 물음에 지연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 서른여덟입니다 -

지연의 대답에 형진 어머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지연의 모습에서 최소한 아들과 외출을 했을 때 사람들이 수군거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다시 침묵이 이어지자 지연은 무거운 공기가 버거운 듯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 아이 이름이 미진이라고 했죠 -

- 네 -

지연이 짧게 대답을 했다.

- 애가..
엄마를 닮아서 이쁘게 컸네, 나이에 비해 생각도 깊은 거 같고.. -

형진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돌린 지연이 형진 어머니를 응시하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 여자 혼자서 애 키우기 힘들었죠? -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지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런 지연을 형진 어머니가 잠시 응시하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래도 형진이는 남자라 크게 손이 가는 일이 없었어요, 공부도 혼자 열심히 했고, 착하기도 했고..
하지만 딸은 다르겠지, 걱정도 많이 되고, 손도 많이 가고, 아마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

- 아니에요, 고생은 우리 아이가 했죠, 제가 워낙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몰라서, 옆에서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고.... -

말을 잇지 못하는 지연을 형진 어머니가 가만히 응시했다.

- 그래요, 그 말을 들으니 그쪽도 무슨 사정이 있었나보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게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

고개를 돌린 형진 어머니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형진이가 누나 이야기는 안 하죠? -

- ....... -

형진 어머니의 말에 지연이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형진에게서 누나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자신은 형진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지연은 형진에게 누나가 있다는 말에 혼란스러웠다.

- 형진이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삼 년 뒤에 형진이 누나가 세상을 떠났어요 -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에 형진 어머니의 말에 지연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교통 사고였어요, 신호를 위반한 트럭에 변을 당했지, 그때 그 애 나이가 열일곱이었어요.
하루 종일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날 대신해서 집안일도 챙기고, 형진이도 챙겨야 했어요, 형진이는 그런 누나를 끔찍이 아꼈어요, 가끔 내 말을 안 듣다가도 자기 누나가 말하면 두말 않고 들을 만큼 정말 누나를 따랐어요, 아마 엄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누나를 통해 느꼈을지도 몰라요 -

- ........ -

- 그러던 누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형진이는 한동안 말을 잃었어요, 밥도 먹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학교도 가지 않았어요, 그러는 형진이를 보면서 저러다 형진이까지 잃을까봐 난 너무 무서웠고요 -

지연이 눈물을 훔치는 형진 어머니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 그래서 약을 먹었어요, 형진이까지 그렇게 된 게 다 내 책임 같아서...
그때 형진이가 날 살렸어요,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던 형진이가 날 업고 병원으로 뛰면서 그랬어요, 엄마 죽으면 나도 따라 죽는다고............. -

말을 멈춘 형진 어머니가 눈물을 훌쩍이자 지연의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

- 형진이 오른 발을 보며 발등에 상처가 있어요.
그때 날 업고 뛰다가 뾰족한 무언가에 움푹 파인 상처에요,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나에게 화가 나요, 나 같은 에미 만나서 우리 애들이 고생만 한 건 아닌가 해서... -

- ......... -

- 형진이..
나한테 그런 아이에요, 그쪽도 아이를 키워봐서 알거에요, 내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자식이란 걸..... -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지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형진에 대한 자신의 마음에 적지 않은 자신감을 잃었다.
특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형진 누나에 대한 이야기는 지연으로 하여금 한없이 위축되게 만들었다.

- 죄송해요, 저 같은 여자가 이런 자리에 앉아 있어서.......... -

말끝을 흐리는 지연을 바라보던 형진 어머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죄송할 거 없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무슨 죄가 되겠어요 -

형진 어머니가 다시 시선을 하늘로 향했고 다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묻는 물음에 지연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에 형진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연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란 거 압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던 어머니에게 저란 여자는 한없이 모자란 여자겠지요, 하지만 어머니...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형진씨에게 약속했어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시더라도 제 마음만은 절대 숨기지 않겠다고...
죄송해요.... -

지연은 다시 고개를 숙였고, 형진 어머니는 그런 지연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어요 -

- ......... -

생각지 못한 형진 어머니의 말에 지연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고, 지연과 시선이 마주친 형진 어머니가 엷은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 말했잖아요, 형진이 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이라고..
그런 내 자식이 마음에 담은 여자를 내가 왜 싫어해요, 싫어하지 않아요 -

- 어머니..... -

- 내가 그쪽을 보자고 한 건, 혹여 내 자식이 자기감정에 휩쓸려 성급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해서 보자고 한 거예요.
그쪽은 내 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형진이만 성급하게 그런 건 아닌가 걱정도 됐고... -

- 아니에요, 어머니...
오히려 제가 더..... -

지연의 말에 형진 어머니가 다시 시선을 돌렸고 지연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형진 어머니가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 다행이네, 우리 아들이 바보짓을 한 건 아니라서..... -

- .......... -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형진 어머니의 말에 지연이 가느다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형진 어머니가 지연의 손을 잡았고, 지연의 시선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거친 형진의 어머니 손으로 향했다.

- 우리 형진이 잘 부탁해요, 나야 머지않아 세월이 지나면 없어질 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 형진이 곁에는 그쪽 밖에 남지 않아요, 그때 우리 형진이 잘 지켜줘요, 저 녀석 겉으로는 씩씩해 보여도 상처가 많은 아이에요, 그러면서도 남의 눈치 때문에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그런 놈이에요, 그러니까 그쪽이 잘 살펴줘요, 이제는 나를 대신해서...... -

- ......... -

지연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형진 어머니의 눈가가 젖어 있는 것을 보자 입술을 떨며 굵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형진 어머니는 그런 지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지연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형진 어머니의 손등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어머니....
흐으흑....
정말 고맙습니다...
흐흑... -

- ......... -

지연이 설운 울음을 울자 형진 어머니가 손을 들어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고는 엎드려 우는 지연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주고 있었다.

- 돌이켜보면 그쪽이나 나나 박복한 삶을 산 사람이겠지, 그런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어찌 보면 하늘이 우리를 가엽게 여겨서 서로 의지하며 살라고 맺어 준지도 모르겠네... -

- 흐흑...
흐흐흑...
흐흑.... -

지연의 울음은 더욱 커지고 있었고 형진이 어머니가 시선을 내려 오열하는 지연의 등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그래, 울어요...
오늘만 울고..
내일 부터는 웃으며 살아요, 이제껏 울며 살아온 날이 얼마인데, 또 울며 살기에는 그쪽이나 나나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요 -

형진 어머니가 다시 시선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여전히 울고 있는 지연의 등에는 고단한 삶을 살아온 형진 어머니의 거친 손이 지연을 위로하듯 토닥거리며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 저기, 할머니.... -

밥을 먹던 미진이 조심스레 형진 어머니를 불렀다.

- 오냐, 왜 밥 더 줘 -

- 그게 아니고,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

- 뭔데? -

형진 어머니의 물음에 미진이 쉽사리 대답을 하지 않자 지연과 형진도 미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 저기, 오늘...
저 할머니랑 자면 안 돼요? -

미진의 말에 형진과 지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형진 어머니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안 될까요? -

- 늙은이들은 몸에서 냄새 난다 -

- 상관없어요 -

미진이 말을 가로채고는 미소를 짓고 있자 형진 어머니가 잠시 미진을 응시하다 시선을 내렸다.

- 그래라, 그럼... -

- 와, 정말이죠? -

- 오냐 -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을 한 어머니를 형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엄마, 미진이랑 주무시면 난 어디서 자요, 셋이 자기에는 방이 너무 좁아요 -

- 너는 미진이 에미랑 자면 되잖아 -

- 엄마... -

어머니의 말에 형진이 화들짝 놀라며 어머니를 불렀고 지연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얼굴도 들지 못하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 할머니, 정말 엄마랑 쌤이랑 같이 자도 돼요? -

- 왜, 넌 싫으냐? -

- 아뇨, 아뇨, 전 상관없어요 -

- 야, 임마... -

형진이 미진이를 보며 눈을 부라렸고 그 순간 형진 어머니가 형진을 노려보았다.

-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다 큰 애한테 임마가 뭐야 -

- 아니...
그게.... -

- 한번만 에미 앞에서 그렇게 부르기만 해 -

- ....... -

어머니의 말에 형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미진이 그런 형진을 보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 역시, 할머니가 최고야, 이래서 할머니가 꼭 있어야 돼, 근데요, 할머니..
쌤이..
나보고 못생겼다고 놀렸어요, 꼬맹이라고 하면서요 -

- 눈이 삐었나보다, 이렇게 큰 꼬맹이가 어디 있다고... -

- 그죠, 할머니..
거 봐요, 할머니는 내가 이쁘 다잖아요 -

- 이쁜 애들 다 죽었나보다 -

- 저 봐요, 할머니..
맨 날 나 보고 못생겼데요 -

- 네 애비가 눈이 삐어서 그런가보다 -

- ........... -

형진 어머니의 말에 미진은 물론이고 형진과 지연도 형진 어머니를 놀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애비라는 말이 너무도 쉽게 형진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미진이 다시 할머니에로 시선을 옮겼다.

- 할머니 -

- 왜 -

- 방금 전에 하신 말....
쌤보고 애비라고 하신 거...
그 말 아빠라는 말이랑 같은 거죠? -

- 오냐 -

형진 어머니의 대답에 세 사람은 다시 놀라고 있었고, 그 순간 미진이 갑자기 형진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 할머니 감사합니다 -

- 아이고, 힘들어... -

- 할머니 최고... -

- 얘가, 왜 이래, 징그럽다 -

자신을 끌어안은 미진이 볼에다 뽀뽀를 하자 형진 어머니는 얼굴을 뒤로 뺐지만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고, 형진과 지연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 많이 좁지? -

방안을 둘러보는 지연에게 형진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황급히 고개를 돌린 지연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너무 포근하고 좋아 -

- 앉아 -

형진의 말에 지연이 자리에 앉았고 형진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형진이 지연의 손을 마주 잡았다.

- 걱정 많이 했지? -

- 아냐 -

- 그래도 너무 다행이다.
어머니가 쉽게 승낙해 주셔서...
자기 내려오라고 했을 땐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

- 어머니 쉽게 허락하신 거 아냐 -

- 무슨 소리야, 그게? -

- 난 알아, 자기한테 내 이야기 듣고 어머니가 얼마나 고심을 하셨을지, 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우릴 반대하고 싶으셨을 거야 -

-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알아 -

- 나라도 그럴 테니까 -

- .......... -

지연의 말에 형진이 입을 다물었고 지연이 그런 형진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 만약에 우리 미진이가 애가 있는 이혼한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자기는 뭐라고 할 거 같아? -

- 글쎄....

- 분명히 반대 할 거야, 나도, 자기도... -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우리를 허락하셨어, 왜 그러셨는지 알아? -

- 아니... -

- 어머니는 자기를 사랑하시는 거야,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너무나 깊고, 크게 말이야 -

- 깊고 크게? -

- 그래, 어떤 사랑도 비교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숭고한 자식 사랑...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 아들에 선택을 믿어 주신거야, 자기 마음에는 차지 않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원하는 것이기에 양보하신거야, 이제껏 아들을 위해 그 고달픈 삶을 인내하시고도 또 다시 당신 아들을 위해서........ -

지연의 눈시울은 다시 붉어졌다.
낮에 있었던 형진 어머니와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누나 이야기는 모른 척 해요, 언젠가 때가 되면 형진이가 먼저 말할 거예요,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형진이 잘 부탁해요, 내가 못해준 거, 내가 다 전하지 못한 사랑, 그쪽이 마저 채워줘요, 늘 형진이 곁에서..
알았죠 ]

- 자? -

- 아니 -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탓인지 지연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 지연아 -

- 응 -

대답을 한 지연이 형진을 향해 돌아누웠다.

- 우리...
그거 안 되겠지? -

형진의 물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 챈 지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미쳤어, 여기가 어딘데 -

- 아니, 잠도 안 오고 내 방에 자기랑 둘이 누워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

- 참아, 나중에 집에 가서 하면 되잖아 -

- 후우, 자기랑 마음 편하게 섹스 한 번 못하는 구나, 아줌마가 퇴근하시거나 미진이가 늦게 들어와야 어떻게 서둘러서 한 번 하는 게 다니..
아니다...
요즘은 내가 망치는구나.. -

형진의 마지막 말에 표정이 굳어졌던 지연이 이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 피, 기운 차리면 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만들 거면서... -

- 글쎄, 그랬으면 좋겠다 -

형진의 씁쓸한 음성에 지연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지만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자기는 언제 날 제일 안고 싶어? -

- 음, 특별한 건 없어, 아니다, 있구나 -

- 언젠데? -

- 자기가 나 보면서 살짝 웃을 때, 그땐 정말 장소 안 가리고 자기 안고 싶어져.. -

- 피, 거짓말 하지 마 -

- 거짓말 아냐 -

- 알았어, 믿을게 -

- 자기도 나랑 하고 싶을 때 많아? -

- 당연하지 나는 뭐 사람 아닌가, 나도 자기한테 안기고 싶을 때 많아 -

- 언제? -

- 그냥 둘이 있을 때도 그렇고, 밤에 혼자 침대에 있을 때도 그렇고, 가끔은.... -

- 가끔은? -

지연이 말끝을 흐리자 형진이 되물었고 지연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자기가 집에 없고 자기 보고 싶을 때면 더 생각나 -

- 정말이야? -

- 응, 그럴 때면 자기한테 전화해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고 싶어져 -

- 자기도 그렇구나, 나만 그런지 알았더니.. -

- 말했잖아, 나도 사람이라고,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난 이제 자기 없이 못사는 자기 여자라고.. -

- 그 말은 조금 야한데 -

- 뭐가 야해? -

- 내가 안아주지 못하면 못 참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마치 내거 없이는 못살겠다 이러는 것처럼 말이야 -

- 뭐, 사실이야 -

형진의 말에 웃으며 대답을 한 지연이 형진에게 다가가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고 이내 자지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시 확인하는데, 이거 자기 거 아니다.
내 거야, 내 몸에 있는 게 자기거야, 알았어? -

- 아, 그런가 -

- 응, 이건 내거야, 한 지연 거라고... -

- 그래 -

형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함께 미소를 지은 지연이 어느새 한껏 커진 자지를 쥐고는 아래위호 천천히 훑어가고 있었다.

- 오늘은 이걸로 참아,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 계시는데 그건 좀 그래, 그리고 자기가 안아주면 나 신음 못 참는 거, 자기도 알잖아 -

- 후훗, 알았어, 대신 내거는 만지고 잘 거야 -

- 나중에, 나 먼저 내거 실컷 만지고... -

- ........ -

다가온 형진이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자 지연이 고개를 들어 입술을 내밀었고 형진이 짧은 입맞춤을 하고 물러나자 행복한 미소를 지은 지연이 형진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연의 손은 한껏 부푼 자지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 ........... ]

- ........ -

불이 환하게 밝혀지자 눈이 시린 듯 얼굴을 찡그리던 지연이 이내 잠들어 있는 형진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형진을 보며 지연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입가에는 행복 가득한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다.

- .......... -

그렇게 형진을 응시하던 지연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고, 조심스레 이불을 걷자 형진의 발이 보였고 몸을 움직여 발쪽으로 다가가 앉은 지연의 시선이 형진의 발등으로 향했다.

[ 형진이 오른 발을 보며 발등에 상처가 있어요.
그때 날 업고 뛰다가 뾰족한 무언가에 움푹 파인 상처에요,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나에게 화가 나요, 나 같은 에미 만나서 우리 애들이 고생만 한 건 아닌가 해서... ]

- ......... -

정말로 형진의 발등에 커다란 상처가 눈에 들어오자 지연은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이제까지 형진과 그토록 뜨거운 섹스를 나누면서도 형진의 발등에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 한 지연, 넌..
이 사람의 겉모습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거야, 이 사람의 몸에 마음에 그처럼 커다란 흉터가 있음에도 넌 너만의 행복에 빠져서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어, 그저 이 사람이 더 많은 사랑을 주었으면 하고 바랬을 뿐이야... ]

- ........ -

그렇게 일렁이는 시선으로 형진의 발등을 바라보던 지연이 천천히 상체를 숙여 형진의 발등에 입맞춤을 하고는 몸을 세웠다.
그리고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형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 형진이에게 누나가 있었어요.
그때 그 애 나이가 열일곱이었어요.
하루 종일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날 대신해서 집안일도 챙기고, 형진이도 챙겨야 했어요, 형진이는 그런 누나를 끔찍이 아꼈어요, 가끔 내 말을 안 듣다가도 자기 누나가 말하면 두말 않고 들을 만큼 정말 누나를 따랐어요, 아마 엄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누나를 통해 느꼈을지도 몰라요 ]

[ 그러던 누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형진이는 한동안 말을 잃었어요, 밥도 먹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학교도 가지 않았어요, 그러는 형진이를 보면서 저러다 형진이까지 잃을까봐 난 너무 무서웠고요 ]

- ........ -

형진의 어머니가 해준 말을 떠올리던 지연이 눈가가 젖어오자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내고는 다시 형진을 응시했다.

[ 이제 알 것 같아, 자기가 수영씨 교통사고에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 솔직히 그런 자기가 조금은 미웠어, 서운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 수영씨가 스스로 차에 뛰어들던 그 모습이 자기에는 어떤 충격이었는지...
겁이 났던 거지...
또다시 예전처럼 아무것도 못했던 자신의 무기력함이 끔찍이 싫었던 거지...
죽을 만큼 말이야...
그래서 이제는 수영씨가 고마워, 만에 하나 그때 수영씨가 잘못됐으면 자긴 또 그렇게 자기를 책망하고 어둠속으로 자신을 가뒀겠지, 내 옆에서..
말도 없이,, 그렇게 혼자서 말이야... ]

- ........... -

지연은 천천히 형진에게 다가갔고 잠들어 있는 형진의 뺨을 아주 조심스레 어루만져갔다.

[ 형진씨...
나...
이제 욕심 버리기로 했어, 자기를 위해 한평생 고달팠던 삶을 사셨던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 모든 욕심을 버렸듯이 나도 이제 욕심을 버리기로 했어, 그냥 자기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며 살 게..
진심으로..... ]

뺨을 어루만지던 지연이 형진에게 다가가 뺨에 입맞춤을 하고는 형진 옆에 조심스레 누웠다.
그리고 형진의 옆을 파고 든 지연이 엷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눈을 내려 감고 있었다.

[ 사랑해, 자기야..
내 목숨보다 더...
그러니까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리던 나에 대한 사랑 변하지 말아 줘...., 내가 내린 결정....
자기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야, 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그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을 거란 믿음 때문에 말이야, 이런 내 맘 이해해줘, 알았지..... ]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고 있는 지연이 조금씩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연의 눈가에선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기쁨의 눈물인지 아니면 아쉬움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 똑..
똑... ]

- 네 -

언니 주영의 대답에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온 여자에게 시선을 던지던 순간 함께 시선을 돌리던 수영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고 있었다.
지연이었다.

- 어떻게 오셨어요? -

- 안녕하세요, 한 지연이라고 합니다.
수영씨 친구에요 -

- 수영이 친구? -

지연의 말을 곱씹으며 주영이 동생을 돌아보았고, 동생이 당황한 얼굴로 지연을 바라보자 다시 시선을 지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살짝 미소를 지은 지연이 수영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가볍게 목례를 하자 수영도 엉겁결에 답례를 했다.

- 몸은 좀 어때요? -

잠시 침묵을 깨고 지연이 먼저 입을 열자 수영이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많이 좋아졌어요 -

수영의 말과는 달리 수척해진 얼굴과 다리와 팔에 기브스를 하고 있는 수영은 누가 봐도 큰 사고를 당한 환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 내가 와서 많이 놀랐죠? -

- ....... -

지연의 말에 수영이 천천히 지연을 응시했다.

- 형진씨 일이라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다시는 형진씨.. -

- 아직 형진씨 많이 사랑하죠? -

- ......... -

말을 가로막는 지연의 질문에 수영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고 지연이 먼저 침묵을 깼다.

- 오해하지 말아요, 수영씨를 탓하거나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에요 -

- 그런데 왜 그런 걸 묻죠? -

- 수영씨의 본심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아직 형진씨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

지연의 물음에 다시 입을 다문 수영이 잠시 지연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 그게 왜 중요하죠, 제가 형진씨를 아직 사랑하던 아니던, 이제는 상관없잖아요 -

- 있어요, 상관... -

- .......... -

- 수영씨가 어떤 대답을 해주냐에 따라 내가 할 말이 달라지니까요 -

수영은 결국 지연이 자신을 책망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 만에 하나 제가 아직 형진씨를 사랑하면요 -

수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고 순간 지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지 말고 본심을 말해줘요, 정말 본심을 알아야 나도 수영씨에게 내 본심을 말 할 수 있으니까요, 부탁해요 -

지연의 말에 수영이 다시 지연을 응시했고, 지연도 수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영은 느낄 수 있었다.
지연의 눈빛이 자신의 본심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말이다.
수영은 그런 느낌이 들자 지연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랑해요, 아직..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어요 -

- ......... -

수영이 천천히 말을 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지연이 잠시 수영을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 수영씨 -

- ........ -

지연의 부름에 수영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지연은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 나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형진씨에게 누나가 있었데요 -

- ........ -

수영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 누님분이 형진씨에게는 아마 어머니 같은 존재였나 봐요, 어린 형진씨를 엄마처럼 돌봤다고 하니까, 엄마처럼 느껴졌겠죠 -

지연의 시선이 다시 수영에게로 향했다.

- 그러던 그 누님분이 형진씨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데요, 교통사고로... -

- .......... -

마지막 교통사고라는 단어에 수영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지연은 수영의 놀람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래요, 수영씨가 생각하는 대로 그 사고에서 형진씨가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아마 누님의 일을 떠올렸겠죠,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지만 마음엔 커다란 상처가 생겼어요.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말이에요, 잠이 들면 악몽을 꾸고...
또.... -

지연이 말끝을 흐렸다.
차마 자신과 섹스를 하는 도중 있었던 형진의 변화를 이야기 할 수 없었다.

- 어쨌든 수영씨의 사고로 형진씨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누님의 일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더군다나 이번엔 자신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진 사고니까..
더더욱... -

- ......... -

자신을 바라보는 지연의 시선을 피한 수영이 살며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형진이 또 다른 상처를 받았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아니 무서웠다.
수영은 무거운 표정으로 계속 말이 없었고, 그런 수영을 바라보는 지연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제게 와서 하는 거죠? 제가 형진씨에게 사과하기를 바라는 거라면 이미... -

- 아뇨,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

지연이 말을 가로챘고 수영이 천천히 지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그럼 뭐죠? -

수영의 물음에 지연이 잠시 입을 다물다 말을 이었다.

- 이 상태대로라면 형진씨는 영원히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어쩌면 이번 사고로 억지로 눌러 놓았던 누님에 대한 기억이 형진씨를 다시 괴롭힐 거예요, 수영씨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

- 그럼, 어떻게... -

- 풀어야죠, 최소한 수영씨에 대한 죄책감만이라도, 그리고 그걸 풀 수 있는 사람은 수영씨가 유일하고.... -

- 그게 무슨 말인지...
잘... -

- 형진씨를 아직 사랑한다고 했죠 -

수영은 대답대신 지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나도 형진씨를 사랑해요, 내 목숨만큼이나... -

- ......... -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수영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형진씨 곁에 수영씨가 남아 있기를 바라요 -

- 네? -

- 수영씨가 형진씨 곁에서 사고에 대한 상처를 씻어주기를 바란다는 말이에요 -

- 그 말은 설마 지연씨가... -

- 아뇨, 난 그 사람 절대 떠나지 않아요, 말했잖아요, 내 목숨만큼 사랑한다고...
내 말은.... -

지연이 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고, 그런 지연을 응시하던 수영의 표정이 점점 놀라는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그걸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혹시...
아니죠.. -

- 무슨 생각으로 묻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수영씨의 생각이 맞을 것 같네요 -

- 지연씨.... -

- 알아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우리가 형진씨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나나 수영씨나 그 사람 사랑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

- 아무리 그렇다고...
그럴 필요까지... -

- 선택은 수영씨가 하는 거예요, 난 이미 결심을 했어요, 형진씨를 위해서 욕심을 버리기로..... -

- ........ -

수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지연이 했다는 것에 대해 수영은 지연이 형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수영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런 여자에게서 형진을 뺏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나마 생각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형진이 아니더라도 세상 어떤 남자가 이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 미안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서, 하지만 도와줘요, 그 사람 지금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어요..., 아직은 겨우 버티고 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 거예요 -

- 하지만..
형진씨가 지연씨를 위해 이겨 낼 수도 있잖아요 -

수영은 처음으로 지연을 위해 말을 건넸다.

-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무너지면요, 수영씨의 욕심과 내 욕심으로 그대로 방치하다 그 사람이 무너지면, 그때는 어떻게 하죠? -

- 그래도..
이건... -

- 그래서 물었잖아요, 아직 사랑 하냐고...
수영씨 말대로 아직 사랑한다면 도와줘요,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

- ......... -

지연의 마지막 말에 수영은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몸을 한탄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연이 없는 어딘가로 나가서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육신을 한탄하며 수영은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미안해...
형진씨...
정말 몰랐어...
자기 마음에 그런 상처가 있는 줄...
그리고....
그리고...
미안해요..
지연씨...
정말 미안해요.... ]

수영은 비로써 자신이 형진은 물론이고 지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릇된 선택 하나로 인해 형진은 물론이고 지연에게까지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수영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것이 형진을 위하는 것인지, 그리고 지연을 위하는 것인지도 함께 말이다.

- .......... -

그런 수영의 망설임을 눈치 챈 듯 지연이 손을 뻗어 수영의 손을 가만히 잡고는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 어쩌면 이게 모두 형진씨를 사랑하기에 짊어져야 하는 짐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수영씨나 나나 그 짐을 벗어버릴 수 없다는 걸 잘 알잖아요, 수영씨나 나나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니까, 이런 우리를 세상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목숨을 버려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했던 수영씨나, 이런 선택을 해야 했던 나 자신도 스스로 떳떳하면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을 사랑했기에 우리가 선택한 삶이라고 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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