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제안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대답했나?" 조지는 대답을 재촉하듯 물었다. "거절했지요." 마침내 레슬리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모욕적인 앙갚음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분노를 되십고는, 그 울분이 원인이 되어 용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애써 감정을 억제하려는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지고, 그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어딘지 박력 있는 아마이저의 목소리를 연상시켰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위해 애써 준 셀레이 영감님이 내 화풀이를 받았던 것은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입장이 난처해져서 자기 돈이라도 빌려 줄 테니 받으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분은 상당한 수입을 갖고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그분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그분을 위로하다시피 해서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걸로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애석하니 가끔 들러서 우리가 몸 성히 지내고 있는 거라도 보고 싶은데, 그건 허락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누추한 곳이라도 괜찮다면 언제라도 들러달라고 했지요. 단, 이곳을 방문할 때의 주의사항 몇 가지를 그분에게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아래층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손님을 위해 일일이 현관에 나가는 것을 꺼려 해서, 집에 있을 때는 현관문을 젖혀만 둘 뿐 잠그지 않기 때문에 손님은 곧장 2층으로 올라올 수가 있습니다. 하기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집 욕심쟁이 할머니의 경망스러운 손님들이 가끔 이 집에 잘못 발을 들여놓는 일이 있어 아주머니가 늘 눈을 번뜩이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찾아왔을 경우에는 안에 들어와 기다릴 수 있게끔 방 열쇠를 숨겨두는 장소도 알려드렸습니다. 당신은 그런 이야기가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궁금해 하시는 모양이군요 -- " 레슬리는 조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크게 관계가 있답니다! 실은 엊그저께 오후, 아내가 밖에 나가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이 방에 들어와 아버지의 편지를 훔쳐간 겁니다." "편지를? 그 낡은 간판과 함께 보내온 편지 말인가? 누가 왜 그걸 훔칠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당신이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낸다면 정말 천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 간판을 되찾고 싶었던 겁니다. 셸레이를 보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아버지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그 간판이 탐났던 것입니다. 그건 500파운드 이상의 값어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에게 그것을 주었다는 유일한 물적증거를 없애버려고 한 것입니다. 그 편지만 없으면 소유권은 아버지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가 있으니까 -- 내가 아무리 아버지에게서 선물로 받은 거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아니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조지는 조리있게 말했다. "우선 해밀턴 양은 그 편지를 타이프로 쳤으니까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을 포장해서 이곳에 배달한 직원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자네의 주장이 전혀 증거의 뒷받침이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레슬리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당신은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직원들을 다루는지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다. 해밀턴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이니까 순순히 그런 내막을 당신에게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했을 겁니다. 그것이 그녀의 신분을 보장받는 기본조건이니까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불리한 일은 절대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을 것이며, 간판을 배달한 직원이나 운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유일한 증거인 그 편지만이 문제였던 거지요. 아버지는 그 간판을 되찾기 위해 500파운드를 썼지만 거기에 실패하자, 비록 내가 내놓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더라도 강제로 빼앗을 소지를 만들고자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셸레이 씨는 그 음모에 가담한 걸까?" "아니, 적어도 의식적으로 협조한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진상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에게 이용된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는 해요. 아버지는 상대방의 기분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을 때는 그분을 대역으로 내세우곤 했지요. 그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사람의 기분 같은 건 당사자가 아니고는 알 수 없습니다만, 자기가 대역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과연 조금도 깨닫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그것도 여러 해 동안에 걸쳐서 말입니다. 혹시 그분은 그런 것에는 눈을 감고 그냥 일이 돌아가는 대로 체념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그분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현관은 잠겨지는 법이 없으며, 내 방 문의 열쇠는 문 옆 시렁의 윗선반에 숨겨둔다고 한다는 둥, 알고 간 사실을 의기양양하여 자진해서 보고했을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버지의 유도심문에 걸려들어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는 -- 또는 대역의 누군가가 -- 이곳에 와서 그 편지를 훔쳐간 것입니다." "해크니스 부인이 그 사람을 보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나? 그녀는 집에 있었을 텐데." "네. 아주머니는 집에 있었을 겁니다. 나갈 때는 현관문을 잠그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없는 사이에 찾아온 그 사람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아주머니에게 물어봤자 소용이 없을 게 뻔합니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우리를 찾아온 손님한테는 흥미 없다고 잡아뗄 뿐만 아니라, 아주머니가 늘 부엌문 틈으로 남몰래 엿보거나 엿듣는 걸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오히려 화를 낼 게 뻔합니다. 전혀 말상대가 될 분이 못되니까요." "그렇다면 별 소득이 없겠군. 그런데 또 하나 의문점이 있네. 자네는 간판 그 자체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만일 자네 아버지가 그 선물에 관한 문서상의 증거를 없애려 했다면, 편지뿐만이 아니라 그 간판도 가져갔어야 했을 텐데 왜 가져가지 않았지?" "훔쳐 가려고 해도 여기에는 없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간판에 흥미가 생겼거든요. 그 간판은 원래 그 밑판에 뭐가 그려져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몇 번이고 덧칠이 되어 있었고, 그 그림이나 구성도 19세기 이전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나는 그 그림에 금전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내력에 관해 알고 싶었고, 그 밑판의 그림이 상당히 흥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얘기를 버니 윌슨에게 하자, 그는 시내 저쪽에서 화랑을 경영하고 있는 잘 아는 화상(畵商)을 소개해 주며, 그 사람이라면 기꺼이 간판을 봐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간판을 그 화상에게 갖다주고 감정을 부탁했습니다. 따라서 그건 지금 거기에 있을 겁니다." "간판을 그 화상에게 건네준 것이 언제지? 편지를 도둑맞기 전인가? 셸레이 영감이 다녀가기 전이었던가?" 레슬리는 손가락을 꼽아 날수를 세었다. 볼에 핏기가 살아나며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군! 셸레이 씨가 여기에 온 것은 목요일 저녁입니다. 그리고 버니가 차로 간판을 가져간 것이 월요일 아침이었으니까, 그보다 사흘 전이 됩니다." "암시적이군." "절대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6주 동안이나 집에 두었는데도 그 동안 아버지는 전혀 그 물건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화상에게 맡기고서 바로 3일 뒤에 아버지는 갑자기 그것을 되찾으려고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간판이 상당한 값어치가 있다는 정보를 아버지는 화상에게서 들어 알게 됐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간판을 감정 의뢰했다는 사실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아버지는 아차 실수로 대단히 귀중한 것을 나에게 준 것이, 거꾸로 아버지 자신이 당한 꼴이 되었다고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었을 겁니다." 레슬리는 자신의 미묘한 입장을 깊이 자각하고, 말을 신중히 골라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 " 조지는 침착하게 이야기의 방향을 돌렸다. "편지를 잃어버린 다음, 어떻게 했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젯밤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따지려고 진에게는 아무 말 없이 그 개업식에 갔었던 겁니다. 아버지를 만나러 집으로 간다는 것은 꺼림칙했고, 어제 저녁에는 아버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쌓이고 쌓인 울분이 미칠 정도의 적개심을 부채질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광란 상태에 있었다는 건 아닙니다 -- " 레슬리는 조지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며 말을 바로잡았다. "나는 흥분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요. 10시 조금 전에 그곳에 도착해서, 그 보이에게 아버지를 잠깐 불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묵살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그 뒤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름을 댔다고 해도 만나 주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아버지는 기분이 거나해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 껄껄 웃으며 등을 툭 쳤습니다 -- 마치 아버지의 개업 축하연을 위한 여흥을 돋굴 연예인이라도 맞이해 들이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깐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나를 문 앞까지 데리고 가서, '별채에 가보려무나. 그 낡고 지저분했던 도깨비집이 얼마나 훌륭하게 탈바꿈했는가를 보면 놀랄 거다. 문은 잠겨져 있지 않으니까, 들어가 기다리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나는 조금 뒤에 거기로 갈 참이었거든.'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키는 대로 그리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심보로 나를 거기로 가게 하려는 것인지 짐작은 했습니다만, 아버지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바라는 바이기도 했거든요. 당신도 그곳에 가보셨을 테니까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개조를 했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아버지는 곧 커다란 샴페인 병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 들어오더니, '어떠냐, 놀랍지? 네가 탐내던 도깨비굴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을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랑을 한 귀로 흘려 버리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비열한 음모를 밝히고, 편지를 훔쳐낸 것을 따졌던 겁니다. 아버지는 낄낄 웃으며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무슨 필요가 있어 내 자신의 편지를 훔쳐?'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나는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터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만족을 바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악랄한 사기꾼이라고 소리지르며, 그 간판에 관한 것은 물론 그 밖의 모든 일로 끝까지 싸우겠다고 떠들어댔습니다." "그리고 그 약 30분 뒤에 아버지는 살해되었다?" 하고 조지는 의미심장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진이 가만히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레슬리의 손등에 겹쳤다. 단지 그뿐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불꽃 같은 것이 방안의 모든 것을 뒤흔든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입니다. 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레슬리는 한결 가라앉은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회랑으로 올라가 바의 선반에서 잔을 꺼내기에, 나는 부자간의 마지막 결별의 축배라도 들거냐고 악을 썼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건 너에게 줄 술이 아니다. 좀더 귀중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그 준비를 하는 거야.' 라고 빈정대더군요. 그래서 나는 홱 등을 돌려 기운이 넘치는 아버지를 그곳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주차장의 차가 불과 한두 대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 아직 돌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니까 10시 반도 안되었을 겁니다.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는 화가 풀리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걸음이 빨라져서 11시 10분쯤에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자네가 그곳에서 나오는 걸 본 사람은 없나? 돌아오는 길에서라도 좋아. 그 시간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글쎄요......" 레슬리는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 "설마 그런 확증이 필요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그럴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손을 써두는 건데. 나는 그냥 울분을 삭히기에 골몰했거든요." "레슬리가 돌아온 시간은 제가 똑똑히 기억해요." 진이 그렇게 말하며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이 골목 저쪽에 교회의 차임 시계가 있는데, 레슬리가 돌아오기 2~3분 전에 15분 전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아무튼 돌아오는 걸 누가 보았을지도 모르니 수소문해 보지요."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증인이 있다고 해도 아마이저는 아들이 그 댄스 홀에서 떠나기 전에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찰의의 검시보고에 의하면 그는 빠르면 10시 15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지 않던가. "해크니스 부인이 자네가 들어올 때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겠지? 자네도 열쇠를 갖고 있을 테니까." "네. 그리고 내가 돌아온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주머니는 일찍 자고, 또 침실은 구석진 곳에 있으니까요." 그는 자기에게 불리한 모든 상황을 남이 밝혀내기 전에 스스로 제공해서, 마치 스스로를 궁지에 몰고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네 -- " 조지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일이 먼저야. 만일 자네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면, 사실을 숨기거나 실없이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는 거야, 알겠나?" 조지는 나오는 하품을 삼키며 윗도리의 단추를 채웠다. 커피가 일시적으로는 잠을 쫓아 주었지만 졸음이 밀려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당분간은 연락에 차질이 없도록 이 집을 떠나지 말아 주게." "네, 그러지요." 레슬리는 갑자기 되살아난 공포심으로 목이 메어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마지막으로 조지가 계단을 다 내려가지 않은 곳에서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눈에 보인 것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과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근심스러운 눈, 그리고 마치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세상에 대항하듯 두 사람의 몸을 서로 얽어매고 있는 두 개의 팔이었다. 제 7 장 "레슬리의 이야기는 믿어도 될 것 같아." 조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커피잔 옆의 메모지를 보며 아내인 밴디에게 말했다. "아마이저는 그를 별채로 가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더군. '문은 잠겨져 있지 않으니까, 들어가 기다리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나는 조금 뒤에 거기로 갈 참이었거든.' 하고 말이오. 그리고 처음부터 내 골치를 썩게 한 샴페인 말인데, 아마이저는 그에게 이러더라는 거야. '이건 너에게 줄 술이 아니다. 좀더 중요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거든.' 이라고. 이건 정말일 거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지고. 만일 아마이저가 아들 앞에서 그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샴페인을 가져갔다면 당연히 마개가 뜯겼어야 하거든. 그런데 실제로 마개는 그대로였어. 따라서 레슬리가 말한 대로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아. 아마이저는 누군가 다른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그 사람과 축배를 들 준비를 한 것이지, 아들에게 마시게 할 생각은 없었던 거야. 레슬리는 그 손님이 오기까지의 막간을 메꿀 뜻밖의 희롱거리였던 거라오. 무대는 그 뒤에야 막이 올라가게 되어 있었던 거지. 따라서 만일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아마이저가 방해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은 레슬리와 만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또 하나의 손님을 만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아들을 지분거리는 것을 누가 본다고 신경쓸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누가 봐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를걸." "하지만 당신 이야기로는 키티 양이 아마이저 씨가 15분 가량 뒤에 돌아오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시간이 좀 촉박하지 않을까요?" 아내가 의문을 던졌다. "그건 그래. 하지만 그 아가씨는 별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 해밀턴 양이나 셸레이 씨의 이야기로는 그는 다시 돌아올 테니 될 수 있으면 기다려 달라고만 말했다고 하니까. 어쨌든 그 아가씨의 기억이 반드시 정확했다고는 할 수 없고, 아마이저 자신도 상당히 막연한 표현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거든. 더구나 아무리 중요한 만남이라도 15분 내에 끝날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가령 레슬리가 10분 전 11시에 집에 돌아왔다면 아버지를 살해할 시간이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그는 차도 없었고 버스도 끊어졌으니까 걸어서 돌아온 건 확실할 거예요. 아무리 빨리 걸어도 20분은 걸릴 테니까, 늦어도 10시 반에는 현장을 떠났어야 해요." 그녀는 그런 식으로 끼어드는 게 허용되었을 때도 조지의 추리의 실마리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남편 머릿속의 자료를 일깨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끌어내 주기도 했다. "아냐, 그럴 시간은 있었어. 물론 촉박하기는 했지만. 의사의 보고로는 사망 추정시간이 10시부터 11시 반으로 되어 있거든." "하긴 병으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고 달아나기만 한다면 별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요." "그게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가 않았어요. 일격으로 그를 숨지게 한 게 아니야. 적어도 아홉 번 뒤통수와 왼쪽 머리를 난타한 거라오. 두개골에는 뼈가 부서지고 깨진 곳이 여러 군데 있거든. 그리고 오른쪽 관자놀이와 뺨에 상처가 있었는데, 그건 처음의 일격으로 넘어질 때 바닥에 부딪혀 생긴 것이겠지. 그때 그는 기절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네 번째에는 숨이 끊어졌겠지. 인간의 머리를 그렇게 묵사발로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겠지만, 아무튼 일격에 살해하고 달아나는 것보다야 몇 배나 시간이 걸렸을 거야. 만일 레슬리가 한 짓이었다면, 급히 서둘러야 했을 테지." "더구나 피투성이가 되었을 텐데." "응, 그 점은 소홀히 하지 않았지. 존슨의 보고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만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었소. 그건 범인이 범행 뒤에 피범벅이 된 장갑을 어딘가에 버렸을 거라는 점이야. 샴페인 병이나 잔에는 아마이저의 지문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것은 없었고, 부서진 석고상에서는 전혀 지문이 채취되지 않았거든. 또한, 실내 여기저기에 묻은 지문은 모두가 아마이저와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것이라는 것도 밝혀졌지만,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이 둘 가량 남아 있고. 문의 손잡이에는 클레이턴의 지문이 있었지만, 그밖의 장소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어. 그 문에는 다른 사람의 지문도 남아 있었는데, 곧 레슬리의 지문과 대조해 보게 될 거야." 그는 메모지를 챙기고 토스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과장이 허락해 준다면, 나는 이제부터 간판을 조사해 볼 참이오.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거든." 도미니크는 책가방을 옆에 낀 채 방 입구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그의 모습에 눈길이 멈추기를 기다리면서 아까부터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는 아버지의 추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만사가 잘 풀릴 것만 같았고, 부모님의 이야기 중에는 키티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밖의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키티가 대상에서 빠진 것만은 기뻤다. 마침내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도미니크가 말했다. "저, 오늘 자전거 타고 가지 않아도 되죠? 아버지는 출근 안하실 건가요?" "아, 곧 나가자. 데리고 가 주지. 5분만 기다려 주겠니? 준비를 할 테니까." 도미니크는 아버지가 운전 중에 행여 속에 있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자기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경찰서가 있는 길모퉁이에서 헤어질 때까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도미니크로서는 물어보고 싶은 말을 꾹 참는다는 것이 어렵기는 했지만, 수사의 방향이 명백히 키티를 벗어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호기심을 누르는 것이 훨씬 쉬웠다. "집에 갈 때도 함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전 럭비 연습으로 좀 늦어질 것 같은데. 5시 15분쯤은 어떨까요?" "그때까지 일이 끝나면 같이 갈 수 있겠는데......하여튼 들러 보려무나. 아마 경찰서에 있을 테니까." 조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멀어져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미니크는 요즘 들어 부쩍 키가 커서 어른의 키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직 어깨가 좁고 가느다란 몸집이었다. 하지만 키는 더 이상 자라기는 어려울 테고, 차차 우람한 어른의 몸으로 변해 가겠지. 그 나이에서는 어째서 그토록 무럭무럭 자라는 걸까? 매일 보면서도 석 달에 한 번쯤은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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