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의 심장이 숨이 막힐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닫고는 경찰서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자꾸 느려지더니 마침내 돌계단 몇 미터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는 손을 앞으로 해서 꼭 쥔 채로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마치 앞으로 나갈 용기라도 찾아 헤매듯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때 가방을 겨드랑이에 꼭 끼고 나무 벤치에 굳어져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도미니크는 그녀의 눈길이 그에게 멎었을 때 그 눈길에 어떤 변화가 생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가 우연히 단 한 번 만난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다시 그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며, 아마 그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그런데 그녀의 눈이 눈부실 정도로 빛나더니 밝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녀는 방향을 바꾸어 그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의 고동이 온몸을 흔들어 그녀의 첫마디를 알아듣지도 못했다. "어머나, 도미니크! 여기에서 만나다니!" 그는 충족감과 도취의 구름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그녀의 손에 손을 잡힌 채로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그 깊은 곳의 빌로드 같은 어두움이 그의 얼굴 앞에 다가왔다. 그녀의 절망적이고 절박한 목소리가 말했다. "레슬리가 와 있다면서요? 거리의 소문으로는 마든 상회에서 그를 체포해 왔다던데? 그게 정말일까? 레슬리가 붙잡혀 온 게 사실이래요?" "그는 아버지와 함께 왔습니다. 불과 5~6분 전에." 도미니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 준 것과 자기를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모습이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가슴의 고동도 한결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건 그가 꿈꾸어 온 재회와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전에 보지 못했던 근심 어린 얼굴을 보고서, 자신의 실망감 같은 사소한 일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 그럼, 역시 체포된 거로군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체포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 " "당신 아버지와 함께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봐요, 나 당신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꼭." 그녀는 깊이 한숨을 들이마시더니 그의 손을 놓고는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시름에 잠긴 손길로 쓸어올렸다. 그녀는 지치고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형사들은 그걸 레슬리의 탓으로 돌리고 말 거예요. 이미 그는 시달림을 받고 있을지도 몰라요. 불쌍하게도......그에게 그런 고통을 받게 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털어놓고, 아무리 힘든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듯한 절실한 눈으로 도미니크를 바라보았다. "실은......내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어요." 제 8 장 도미니크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잠시 동안은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간신히 목을 넘어온 말소리도 이미 끝난 줄 알았던 변성기의 쑥스러운 목소리였으나, 키티는 그런 건 눈치챈 것 같지도 않았다. "그,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비록 당신에게 책임을 느끼게 할 만한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건 당신의 지나친 가책입니다.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일을 저질렀는걸요, 도미니크.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어제 저녁에 아마이저 씨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어요. '잠깐 레슬리 녀석을 쫓아버리고 올께.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그리고 나서 네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가 아니라 별채에서. 그곳이라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그 말썽꾸러기를 쫓아보내는 데 15분이면 충분하니, 그 뒤에 그리로 오도록. 내가 거기에서 기다릴 테니' -- 하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그대로 가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마음이 달라져 옆의 지름길로 구부러져 별채 뒤쪽 나무 그늘에 차를 세우고는 뒷길로 해서 가운데 마당으로 들어갔었던 거예요. 다시 한 번 내가 아마이저 씨에게 간청을 하면 아마이저 씨도 마음이 누그러져 레슬리와 화해를 하고 아들 내외를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지. 뭐니 뭐니 해도 부자간의 일이니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가 계속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보통 사람들의 경우 대개는 화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 보니 레슬리는 보이지 않고 아마이저 씨가 혼자 있었어요. 아마이저 씨는 기분이 좋아서 장래의 사업계획을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더군요. 샴페인 술병과 잔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말이에요. 아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도미니크. 그런 불결한 이야기를 그쪽에게 한다는 것은 -- " 도미니크의 입은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꽉 차고, 그의 심장은 가슴을 가득 메워 거의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키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께요."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은 그렇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쪽은 마치 친구를 보듯 나를 바라보고, 조금도 피하려 하지 않는걸.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들으면 도망칠 거예요."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도미니크는 결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요, 그쪽은 그런 사람이 아닐 거예요. 그럼, 내 이야기를 들어봐요. 모두 이야기해 버리는 것이 속이 편할 것 같네. 더구나 이야기할 연습도 해두어야겠고. 요약을 하지 않고서는 밤새도록 해도 한이 없거든요." 이번에는 도미니크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그녀의 손가락이 얼마간 떨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아마이저 씨는 머리가 돌아버린 거예요." 키티는 약간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레슬리가 나와 결혼해서 회사를 합병할 생각이 없다면 아마이저 씨가 나서겠다는 거였어요. 즉, 자기 자신이 나와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글쎄! 샴페인을 준비하고 들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요. 내 마음 같은 건 무시하고 그런 말을 선언이라도 하듯 떠들어대니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요? 내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에요. 그가 별안간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하려 했을 때만 해도, 성적인 폭행이라기보다는 회사의 합병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고요. 나는 레슬리에 관해서 열심히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난 그만 화가 치밀어올랐지요. 기가 막히고 겁이 나서 -- 머리에는 그저 달아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나는 미친 듯이 그를 떠밀어 버렸지요. 우리는 계단 가까이의 테이블 옆에 서 있었어요 -- 테이블에는 샴페인 병과 잔이 놓여 있었고. 자세히는 몰라도 그는 뒤로 비틀거리다 계단 끝에서 발을 헛디뎌 '억' 소리와 함께 계단을 굴러서 계단 밑으로 나가떨어졌어요. 나는 정신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 그의 곁을 스쳐 입구 쪽으로 달려갔어요. 그가 다시 일어나서 나에게 달려들 것만 같아 정신이 없었거든요. 두렵다기보다는 그가 너무나 엉뚱한 소리를 해서, 더 이상은 그런 미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하지만 그는 엎어진 채 움직이지 않더군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살펴볼 정신도 없이 차로 달려갔지요. 그러니 말이에요 -- 내가 죽인 거라고요. 자수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나는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차를 달리면서도 그가 죽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걸요.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레슬리가 죄를 뒤집어쓰는 걸 그냥 볼 수는 없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도미니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참혹하고 파렴치한 고백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정당하게 평가할 만큼 어른스럽지는 못한 소년에게 이야기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상대는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남자였다. 조금 어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순간의 그는 틀림없이 그녀보다 의젓했다. 그는 그녀가 움츠리려는 손을 힘주어 잡고, 그녀가 피하려는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안해요. 난 참 몹쓸 여자예요. 그쪽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하다니!"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당한 일을 한 겁니다. 정말입니다. 그 이유를 말할까요? 당신이 아는 건 그것뿐이지요? 그게 전부지요? 당신이 그를 떠밀자 그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져 버렸다. 그것뿐이지요?" "그야......하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이 갔을 때 죽어 있었으니 어떡해요?" "네, 죽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인 건 아닙니다." 도미니크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 기쁨이라든가, 자기에게 매달린 그녀의 결백을 확신시켜 주는 보람에 앞서, 그가 이제 중대한 결심 끝에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를 한마디도 남에게 누설한 적이 없었다. 만일 잘못 그런 짓을 했다가는 그들의 생활의 동력원이 망가지고, 그것을 잃은 그의 장래는 암담하게 될 뿐 아니라 가장 친한 대인관계며 자기의 학업에까지 지장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규범을 깨뜨려야 하며, 또 물러설 수도 없었다. "키티, 그 까닭을 말씀드리지요. 아마이저 사건에 관해 신문에서는 그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었다고만 간단히 보도했지만, 그건 계단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게서 들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아마이저 씨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누군가가 샴페인 병으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려 짓이겼다는 겁니다. 아홉 번이나 말입니다. 병이 깨지지 않았다면 더 두들겨 팼을지도 모른다더군요. 설마 당신이 그럴 수는 없었겠지요?" 그녀는 놀라움과 안도와 공포로 멍해지면서 열린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를 냈다. "어머나 -- 그런 -- 그런 짓 나는 못해요 -- " "물론 당신은 할 수 없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여튼 당신은 그를 죽인 것이 아니고, 단지 떠밀어 기절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누가 나타나 그를 때려 죽인 겁니다. 따라서 당신은 경찰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장갑에 대한 것은 아마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레슬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좀더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녀는 도미니크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되찾아준 자유와 해방감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볼에 되살아난 핏기와 눈에 깃들기 시작한 희망의 빛이 도미니크로 하여금 지금껏 맛보지 못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내가 진짜 살인범이 아니라는 건가요, 도미니크? 어제 아침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내 심정 이해가 가요?" "네,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 경찰에 갈 것도 없습니다." "아니에요. 말을 해야 해요. 그쪽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겠지만, 이젠 괜찮아요 -- 내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러니 더더욱 레슬리를 위해 경찰에게 이야기를 해야 해요. 별채에서 그가 돌아간 뒤에도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해요 -- 아마이저 씨는 아들을 돌려 보내고 나서 나를 만났으니까." 그녀는 도미니크가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멈칫했으나 결심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런 내막을 안 이상 더더욱 뒤로 물러설 수는 없어요. 그쪽 덕분에 모르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레슬리를 위해 힘을 써줘야 한다고요." "안됩니다." 도미니크는 일어서려고 하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당신이 그 별채에 있었던 극히 짧은 시간 동안은 그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되돌아왔다고 생각할 여지도 충분히 있잖아요. 그것이 누구든 당신 다음에 거기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니까요. 또한,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한 그대로를 경찰에게 말하면 그들은 아마도 당신이 마지막 부분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 당신이 달아나기 전에 기절한 그의 머리를 난타한 걸로 말입니다." 키티의 눈이 둥그래졌다. "왜죠?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그쪽은 내 말을 믿죠? 그런데 경찰은 못 믿다니." "그들의 일은 믿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어쨌든 당신은 그걸 어떻게 증명할 셈인가요?" "증명할 수야......" 그녀는 다시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어요. 내 일은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요. 그쪽은 나에게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어요. 고마워요, 도미니크." 만일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 또한, 그녀가 갑자기 그의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면 --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류하고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볼을 매만진 그녀의 손길은 그의 목으로부터 숨길을 거두어가고 혀까지 마비시켰던 것이다.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 뒤돌아보고 말했다. "그쪽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말아요." 그는 하마터면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천만에 --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라고요 --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 나에게 가장 소중한 건 당신인데 -- 왜 이런 심정을 몰라주는 걸까 -- 아아 -- 키티,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 하고 그녀를 향해 소리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갔다. 어두운 정면 현관의 복도가 그녀의 모습을 삼켜 버렸다. 이젠 그녀에게 소리칠 수도 없다. 그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쌌다. 이윽고 마음이 가라앉으며, 지금까지의 과정에 섞여 들어가 있는 엄청난 의미가, 마치 마술사가 트럼프 다발 속에서 에이스 한 장을 빼내는 것처럼 별안간 그 냉혹하고 엄연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그녀에게서 모르고 말할 수 있는 해명의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 아닌 그 자신이 ! 만일 그녀가 그를 만나지 않고 곧장 경찰서로 들어가, 그에게 말한 그대로를 진술했다면 그들은 곧 그 조리에 맞지 않는 자백을 일소에 붙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흉기나 머리의 부상 상태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을 것이고, 원래의 그녀라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며, 그녀의 그런 어정쩡한 표정은 그들에게 진실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알려 주고 만 것이다. 그녀는 결정적인 신빙성을 지닐 무기를 보여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녀는 도미니크에게 피해가 미칠까 봐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해명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마이저의 죽음에 대한 진짜 원인을 알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입 밖에 낸다면, 그들은 그녀가 거기에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신을 굳힐 것이 뻔하다. 죽음의 진짜 원인은 공표되지 않고 극히 제한된 범위의 관계자들과 범인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도미니크는 결과적으로 그녀를 혐의를 짙게 받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 부듯하게 느껴졌던 보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급히 그녀를 뒤쫓아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 정보를 그녀에게 누설한 사실을 솔직히 고백해야 했으나 그럴 용기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움츠러드는 것이다. 그를 그런 비겁자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직업과 지위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수사과의 경찰관은 수사 중의 사건에 관해 자기의 가족이라 해도 누설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미니크의 가정은 예외여서, 결속이 단단하고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가족간의 결속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도미니크는 그걸 깨뜨린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사태가 일어나려 하고 있는가? 그의 아버지에게 큰 누를 끼칠 단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미니크 자신이 위기에 몰아넣은 키티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로서는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만 은밀히 털어놓는 것이 가장 무난해 보였다. 어쩌면 키티의 무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타나, 그의 고백을 아버지 이외의 사람들에게까지 알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사직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지는 않을는지...... ? 그는 한시바삐 그 무서운 고백을 끝내고 싶어 아버지가 나오기를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 뒤에야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고, 그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올려다보았을 때 그곳에 나타난 것은 안도의 기쁨에 찬 표정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나오는 레슬리 아마이저였다. 그가 그림 도구 등을 챙겨두는 마당의 헛간에 페인트를 칠하고 나서 버린 장갑에서는 크레오소트나 역청질(아스팔트)의 도료 및 그림 물감과 래커 등이 검출되기는 했지만, 한 점의 핏자국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심문이 시작되고 나서 곧 장갑이 문제가 된 것을 알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런 불확실한 물건 때문에 공연히 불안에 떨어야 했었던 것에 화가 치밀었다. 하기야 그의 입장이 전보다 나아지거나 못해진 것은 없지만, 이번 일로 그의 신용을 한층 높여 준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그 스스로에게 끼친 심리적 효과는 뚜렷한 것이어서, 그 해방감은 그 동안의 두려움을 없애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지 펠스 부장형사는 심문 도중에 면회인이 왔다고 해서 자기 방으로 갔지만, 레슬리로서는 그 면회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 리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의혹이 풀린 자유로운 몸으로 그는 진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조지가 나와서 아들에게 말을 건 것은 그로부터 10분 가량 지나서였다. 더구나 그는 일이 상당히 늦어질 것 같으니 버스를 타고 먼저 집에 가라는 말만 전하고 되돌아가 버렸다. 도미니크가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도미니크는 참담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무런 뾰족한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건성으로 몇 마디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침묵에 잠겼다. 그는 어머니가 갖다 준 홍차를 홀짝거리다가 피하듯 자기 방에 틀어박혀 교과서를 펼쳐 보았으나 걱정이 앞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감기 기운이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그런 생각으로 열을 재보려고 했지만, 도미니크는 그 손을 홱 뿌리쳤다. 어머니는 자기의 진단이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다. 아들에게 어떤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다. 더구나 그 애가 자기를 상대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지가 돌아온 것은 9시 40분이 지나서였다. 피로에 지쳐 입도 열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 터득한 암호로 해석하건대 남편에게도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곧 그것이 표면에 나타나리라 짐작하고 그녀는 모르는 척 식사를 준비했다. 아닌게아니라 식사가 끝나갈 무렵, 조지는 기지개를 켜며 자못 싱겁다는 듯이 말했다. "사건은 끝났어. 용의자가 체포됐거든. 범인은 키티 노리스." 접시를 치우던 밴디의 놀라는 말소리가 도미니크의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에 지워졌다. 도미니크가 벌떡 일어서며 부르르 떨었다. "아니에요, 아버지! 틀려요!" 그는 그렇게 외치고 나서 절망적인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그 일에 관한 거예요. 아주 중요한 -- " 그리고 그는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어머니를 돌아보며 입술을 떨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 " "그래, 알겠다." 밴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릇을 치우며 대꾸했다. "엄마는 접시를 닦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너그러운 어머니의 태도를 보자 도미니크에게는 새삼스럽게 어머니도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대결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밴디는 테이블 위를 치우고는 개어놓은 테이블보로 도미니크의 귀를 간질이듯 스치며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식탁에 남은 도미니크와 조지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가정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직감했다. 조지 역시 도미니크와 마찬가지로 불안에 사로잡혀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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