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가 눈길을 돌리거나 눈을 감는 순간 순식간에 번거로운 것들이 자기를 둘러싼다는 것, 그것도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것, 더구나 거기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넌 그렇게 미소만 짓고 있으면 만사태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녀는 엄하게 말했다. "애교만 부려서 사람을 잡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너의 큰 오산이라는 걸 알아야지!" 물론, 그녀는 좀더 명랑한 말의 선택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녀는 냉철한 진리를 알아낸 것이다. 그는 달래듯 말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여러 가지 신경을 쓸 일이 있어서 연습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다음 주에는 잘 할께요." 만약 무사하게 살아, 여기에 다시 올 수 있다면 말입니다 --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심장이 오므라들고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 9시가 다 됐군요. 선생님의 골치도 곧 나아질 거예요." "이번에는 네가 골치를 좀 썩혀야 할 차례인가 보다." 그녀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 -- 만일 그렇게 멍한 정신으로 쏘다니다가는 말이다. 또 뭐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만?" "네, 설탕을 좀 많이 타주세요." 그는 으스스한 밤에는 언제나 그녀의 부엌 스토브 위의 주전자 속에 코코아가 끓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고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코코아 잔을 들고 나온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와주지. 집에 갈 준비를 하거라." 하지만 9시까지는 몇 분 남아 있었고, 그는 약속한 시간보다 비록 1분이라도 먼저 거기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레슬리가 그의 편지 내용대로 했다면 경찰은 이미 골목 언저리에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시간보다 빨리 가면 그는 그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며,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버지가 달려나옴으로써 만사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이해심이 있는 아버지라 해도 자기의 권위를 짓밟고, 자칫하면 자식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 일을 용서할 리가 없다. 도미니크는 자신이 초래한 위험이 크다는 데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또한, 그 위험이 커야 일이 해결을 보는 것이다. 만일 아무런 위험이 없이 그냥 넘어간다면 그건 그의 추리가 엉터리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쓸데없는 소동만 벌인 것이 된다. 그리고 키티는 영영 혐의를 벗어날 길을 잃는다. 그렇지만 도미니크는 자기의 추리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따르는 위험을 결코 회피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 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가만히 앉아 그것이 자신을 덮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만일 도중에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허둥대다가는 그가 애써 무대를 꾸며 실증하려 했던 것을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자신은 저항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를 구출해 내는 일은 경찰에 맡기고, 다만 그들이 늦지 않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몸을 던져 미끼의 구실을 자청하는 것이다. "너 아무래도 오늘은 이상한 것 같다." 크레그혼 양은 그의 밤색 머리를 한 움큼 잡아 흔들며 말했다 "내가 비스킷을 먹으라고 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는구나. 너 같은 애는 오늘밤에는 저녁도 주지 말아야 할 텐데, 난 뭣하러 비스킷 같은 걸 갖다 주었을까? 도대체 왜 그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학교라고요! 세상사람들은 고작 그 정도밖에 생각지 못하는 걸까? 16살 사내아이가 고민을 하면 그 까닭이 학교에서 생긴 일인 줄로만 생각하거든. 어리석다고요, 정말로 ! "아뇨, 별로. 괜히 요 며칠 묘하게 기분이 산만해서 이렇답니다. 곧 괜찮아질 테니 걱정마십시오." "암, 그래야지. 자, 이걸 마셔라. 밖은 상당히 추울 거다. 그 고물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면 뜨거운 것을 마셔 몸속을 따뜻하게 해두어야 한다. 내가 늘 말하지만, 그 버스 정류장은 이 도시에서도 가장 바람이 센 곳이란다." 그는 천천히 9시 정각을 지날 때까지 코코아를 마셨다. 해밀턴 양이 클럽에서 약간 늦을 경우를 계산에 넣어, 조금 늦게 갈 생각이다. "엄마에게는 선생님께서 제 솜씨가 많이 늘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괜찮죠?" 그는 코트를 입으며 천연덕스러운 소리를 했다. "널 때려 줘야 되겠다고 말씀드려야 곧이들으실 텐데? 어쨌든 조심해 가거라. 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겠구나. 10월달이 되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리가 내리다니, 원!" "편히 쉬십시오." 그는 이미 현관문을 나서고 있었다. "잘 가거라, 도미니크!" 그녀는 천천히 문을 닫으며 말했다 -- 저 앤 왜 저럴까? 아무래도 무슨 고민이 있는 모양이야. 어머니에게 알려줘야 할까? 하지만 그 애는 사춘기의 나이인데다가 어머니에게는 쑥스러운 내막인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섣불리 고자질이라도 했다가는 한평생 원망할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겠는걸 -- 그녀는 TV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도미니크에 관한 일은 머릿속에서 잊어버렸다. 그는 골목 끝까지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 발걸음이 차츰 느려지는 데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끔 애쓰면서 -- 걸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나는 이미 마음의 짐을 떠맡긴 걸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 연극을 천연덕스럽게 하지 못하면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계획한 것이 진행중에 있는 것이다. 키티를 생각하라! 그녀를 머리에 떠올리자 갑자기 뜨거운 것이 가슴에 차오르며 그의 신경을 가라앉게 하고, 한결 긴장이 풀렸다. 위험 같은 게 겁날까 보냐! 너는 키티를 살려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개될 일은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 줄 것이다. 그는 용기를 복돋웠다. 위험이 닥친다고 해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결코 무릎꿇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물론 그녀가 -- 해밀턴 양이 -- 이 약속을 어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녀가 공정한 입장에서 생각을 고쳐 먹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가 약속대로 온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행동하여, 그가 건네주는 것을 받아 그를 안심시키고 아무 일 없이 그를 집에 데려다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난처한 입장에 빠져, 그녀를 시험대에 올려놓은 실례를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 것인가? 실패의 함정은 얼마든지 있었다. 많은 길이 실패의 가능성과 닿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택한 길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첫번째 골목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바람이 몰아치는 인기척 없는 골목길 어귀 가까이로 갔을 때, 서리가 내린 보도 옆에 세워져 있는 구식 라일리의 우아한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보도 쪽 문을 열어 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 부근이 밤이 되면 이렇게도 인적이 끊어지고 쥐죽은 듯 적막에 잠기리라고는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라일리 곁에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차 한 대가 길 한복판을 휭하니 지나갔을 뿐이다. 그것이 멀리 자취를 감추자 고요함은 더해지고 그의 구둣 소리만이 서리가 하얀 별하늘 아래 뚜벅뚜벅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서 타요, 도미니크." 해밀턴 양은 옆의 조수석에 놓여 있던 잡다한 물건들을 뒷좌석으로 옮기며 말했다. 스카프와 핸드백, 클럽의 통지서로 생각되는 종이 뭉치, 큼직한 손전등 중 몇 가지는 뒷좌석 발판에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아, 해밀턴 양, 일부러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말 폐를 끼쳐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저는 버스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말고 어서 타요." 그녀는 대범하게 말했다. "기껏해야 15분 정도 걸릴 테니 상관없어. 더구나 오늘밤은 추워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고역일 테니까." 그가 올라타자 그의 몸 앞으로 팔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잠갔다. "문이 허술해서 새 걸로 갈아야 할까 봐. 일일이 문을 잠그지 않으면 커브를 돌 때 문이 저절로 열리거든. 더구나 손님을 가끔 태워야 하니 위험천만이지." "오늘밤에는 아무도 안 태웠나요?" 그는 뒷좌석을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도중에서 두 사람을 내려주었지. 클럽이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고......" 그녀는 운전석에서 자리를 고쳐 앉으며 웃음띤 얼굴을 그에게로 돌렸다. 그것은 그의 어린 티도, 극단적으로 예민한 감수성도, 오늘 오후의 흐느낌과 눈물도, 그런 걸 잊어달라던 그의 애원도 모두 계산에 넣은 웃음으로 생각되었다. "그래, 그건 갖고 왔니?" 그녀는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면, 생각이 달라져서 아버지께 드렸니? 그렇게 했다면 역시 잘한 일이야. 네 마음은 내가 잘 아니까. 그리고 그건 네 자유고." "아니, 갖고 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 내게 맡기도록 해. 내가 적당히 처리할 테니까. 그리고 나서 너는 그 길로 잊어버리면 그만이야. 난 두 번 다시 네가 그런 걸 생각나게 하지도 않겠고, 또 나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물론, 너는 장갑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 안했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됐어. 이젠 신경쓸 거 없어, 알겠지? 키티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곧 풀려날 테고. 됐지?" "네, 물론입니다." 그는 악보 가방에서 작게 접어 플라스틱 포장지로 둘둘 만 것을 꺼냈다. 포장 방법이 서툴러서 모서리 쪽으로 검은 가죽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해밀턴 양에게 건네주고는 그 큰 눈에 신뢰의 빛을 모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벗어 시원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눈은 단 한 번 그의 얼굴에서 벗어나, 받아든 작은 포장으로 옮겨졌으나 곧 대시보드를 열어 그 속에 그걸 챙겨넣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걸 여기에 넣어둔 채 잊어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불안스러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맡은 한, 절대로 안심해도 돼. 다시는 볼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까. 단, 장갑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돼. 몇 번이고 말했지만. 알겠지?" "감사합니다!" 그녀는 비로소 시동을 걸었다. 그때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스러운 폭음을 내고 지나갔으나, 순식간에 멀리 사라져 갔다. 노신사가 한 사람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는 종종걸음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해서 사람이 뜸한 세계, 겹쳐진 소리도 없는, 서리가 소리 없이 내리는 밤의 세계에 도미니크는 있는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아서는 안되었다. 그의 머리는 자꾸 옆을 살펴보려 했고, 눈은 등뒤에 잠복해 있을 경관들을 찾아보고 싶었으며, 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동을 건 엔진 소리를 들으려고 긴장해 있었으나, 그는 주위를 둘러볼 수도 없었고, 둘러볼 기색을 나타내는 것조차 참아야 했다. 순진하며 전혀 의심을 품지 않는 백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만남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으로 끝까지 시치미를 떼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가정 아래 그녀가 무거운 짐을 내려준 지금, 과연 어떤 일에 생각을 집중해야 할까? 그렇다. 자동차다. 그것은 얼마간 그의 관심사이기도 하거니와 16살짜리 소년이라면 어떤 걱정거리가 있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거기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차 같은 것에 정신이 팔린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도미니크는 그녀의 익숙한 손놀림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미끄러지는 쾌적한 움직임의 한 순간을 틈타 물었다. "이 차는 몇 년형인가요? 구식이라는 뜻이 아니고요." 그 차는 구식이기는커녕 2~3년밖에 되지 않은 신형차였다. 그녀는 그의 질문을 받고, 거기에 대답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은 소년의 철없는 관심사를 쾌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함께 나누면서 그런 것에 몰두할 수 있는 소년의 위치를, 멀리 지나가 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 같은, 은밀하면서도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지켜보는 어른의 억압되고 관대한 웃음이었다. 그것은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성에게는 특히 어울리는 미소였기에 그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몇 가지 암시를 얻어낼 기회는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신중하게 포장한 것을 그녀가 흘끔 보았을 때에, 만일 엉뚱한 추측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 그것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면 그녀의 눈이 무엇인가를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날카로운 빛 하나 스치지 않았고, 이마에는 주름이 깊이 패이지도 않았다. 지금 새삼스럽게 그것을 살펴 생각해 본다는 것은 때늦은 일이었다. "이 차의 컨디션이 늘 이랬으면 좋겠네요." 그가 아주 자연스러운 투로 말했다. "고마워. 그래야겠지." 그녀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도로가 다소 좁아지면서 갑자기 가로수가 끊겼다. 벽돌담이며 판자 울타리가 듬성듬성해지며 밭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미러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되었지만, 정말로 경찰이 미행하고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쓴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 "강기슭 쪽의 길로 가야겠다. 그 길이 가까우니까." 해밀턴 양이 말했다. "너는 아직 운전 안 배웠지?" "네, 그게 어렵더군요. 마땅한 연습장이 있어야 말이죠. 도로에서 할 수도 없고. 기껏해야 차고 앞을 5~6미터 왔다갔다해 볼 뿐입니다. 학교에서 자동차 운전 과외수업을 해주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 학교 운동장은 넓어 운전연습에는 안성맞춤인데." "그거 좋은 생각이네. 학교에서 한다면 쉽게 배울 수도 있고, 또 사회생활에서도 운전기술은 중요한 교육과정 중 하나이니까." "하지만 학교측에서는 화단이 망가질까 봐 망설이는 모양이에요. 장미가 더 중요하다는 거겠죠." 도미니크는 불안과 긴장과 격심한 심장의 고동으로 타는 듯 목이 마른데도 그런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신을 놀랍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가로등 불빛 속에 떠오른 그녀의 옆얼굴을 흘끔 엿보았다. 콧날이 뚜렷한 냉엄한 얼굴, 입가에 남은 알 수 없는 미소, 검은 머리의 광택, 목 둘레에서 크게 소용돌이치는 리드미컬한 머리카락...... 이윽고 그들은 숲속의 어두운 길로 접어들었다. 헤드라이트가 전방의 어두움 속으로부터 차례로 크고 작은 나무등걸을 뽑아내어, 그것이 하프의 현처럼 팽팽한 빛의 선화를 그리며 다시 등뒤의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길 오른쪽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흐르는 강이 서리에 언 별빛을 받아 나뭇가지 사이로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 부근은 여름 한철에는 길가의 풀밭에 차를 세우고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꿈속을 헤매기도 하고, 숲속을 산책하거나 강둑에 눕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계절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영화관 뒷자리가 한결 더 포근했고, 카페의 연기가 자욱한 테이블에도 두 사람만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밤처럼 차디찬 바람 속에 이런 곳에 찾아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얼빠진 연인은 없을 것이다. 젊은 연인들이 오지 않는다면, 이곳은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적적한 길이다. 예상한 일이 벌어진다면 이곳이다 --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숲을 빠져 나가기까지의 약 반 마일이 문제다. 그는 발작적으로 접고 젖힐 수 있는 좌석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무사하게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살의에 찬 일격이, 아니면 총탄이 나를 향하여 날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 몸을 피하거나 상대방의 손을 붙잡고 매달리지 않고 그냥 그 위험에 몸을 맡겨야 한다면 누구라도 무사하리라는 자신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주물렀다. 시트의 가죽 벨트를 힘껏 쥐고 있어 손가락이 저려온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다. 강인한 신체가 있었다. 몸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목격자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 대한 음모를, 그 현장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말로만은 불충분하다. 한편, 비록 그들이 미행해 오지 않거나 그들의 도착이 때를 놓친 경우라고 해도, 그의 신상에 일어난 일이 키티의 결백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도 있다. 그 이유는, 키티로서는 오늘밤의 살인사건에 관한 한 손톱만큼의 혐의도 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감옥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 양은 왼손을 뻗어 대시보드를 열고는 잡다한 물건 속에서 담뱃갑을 더듬어 꺼냈다. 차의 속도를 늦추고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그녀는 담뱃갑을 흔들어 한 개비를 나오게 해서는 그것을 입술 사이에 물었다. 그 능란한 솜씨는 그녀가 지금까지 같은 동작을 몇 천 번이나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를 찾는 모양이었으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핸드백 속에 넣었지." 그녀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급히 차를 세웠다. "핸드백을 집어주지 않겠니, 도미니크?" 그는 뒷좌석에 흐트러진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핸드백은 손전등과 더불어 발판에 떨어져 있었다. 이 낡은 차의 내부는 상당히 널찍해서 앞과 뒷좌석 사이의 공간도 넓었기에 핸드백까지 손이 미치려면 완전히 몸을 뒤로 돌려 좌석 위에 무릎을 꿇다시피 해야 한다. 그는 어떤 예감에 바르르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대로 했다. 몇 백 번이고 생각하고 치밀하게 계산해 낸 그 예감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려는 것이다. 그는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허우적거리려는 자신의 육체를 필사적으로 억제하면서, 그리고 공포와 맞싸우면서도 앞으로 몸을 굽히고 팔을 곧장 뻗어 자신의 밤색 뒤통수를 다소곳이 그녀에게 내주었다. 아아, 하나님, 그녀로 하여금 빨리 해치우게 하소서! 더는 이대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다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아아, 키티......아냐, 하나님은 몰라도 됩니다 ! 어떤 강렬한 충격이 그의 머릿속에서 새까만 어두움을 폭발시켰다. 그는 순간 뒷좌석으로 거꾸러졌다. 고통과 공포에 의한 두 번째 쇼크로 숨이 막혔다. 곧이어 암흑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진공 속으로 몰려들더니 작열하는 빛을 순식간에 지우고,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 텅빈 구덩이 속으로 그를 잡아끌더니 그 속으로 그를 밀어넣었다. 그는 한없이 떨어져 내려갔다. 마침내 낙하가 멎었을 때 거기에는 고통도, 공포도, 노여움도, 숨막히는 불안도, 번민도, 무력한 사랑도, 아무것도 없었다. 제 16 장 "무엇을 찾으려는 것인지 우리 자신이 모르고 있으니 곤란해요." 진은 버니 윌슨의 베드퍼드 밴의 앞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대다시피 하고 두리번거리며, 헤드라이트가 미치는 범위 안을 살폈다. "차라고 해도 한두 가지야지. 택시일지도 모르고, 다른 차라면 차종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아무튼 택시는 아니야." 레슬리는 단언했다. "도미니크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록 손을 써두었다'고 했는데, 그건 1대 1의 대결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구나 그들이 과연 이 길로 올지도 확실치 않잖아요. 간선도로일지도 모르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이 없지 -- 어쩌면 그들은 어느 길도 택하지 않을지 모르니까. 어쨌거나 경찰은 두 갈래로 나누어 수색하기로 했으니까, 그쪽은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우리는 어느 쪽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돼. 이쪽 길이 한결 통행이 뜸해서 적적하니 -- 아, 저기 헤드라이트가 보이네! 잘 살펴봐." 이쪽으로 달려오는 그 헤드라이트는 아직 구불구불한 커브 두서너 개 저쪽의 듬성듬성한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으나 상당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차가 춤추듯 첫번째 커브를 돌자 그 차와의 사이에는 두 개의 커브가 남았는데, 두 번째 커브를 돌았을 때 시야를 가리는 것은 사라지고 그 차와 마주 보고 달리게 되었다. 레슬리는 헤드라이트를 하향 조정하지 않고 약간 속도를 줄인 채 길의 중앙선 쪽으로 차를 가까이 했다. 저쪽 차 운전사의 눈을 부시게 해서 속도를 줄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차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방은 예의바르게 불빛을 낮추었으나, 레슬리의 차가 그대로 달려오자 다시금 눈부신 불빛을 던져서 그의 교통법규 위반을 경고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 차의 앞 유리창 너머로 초점을 모았다. 거기에는 얼굴이 하나 보였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분간할 수는 없었다. 밝은 길이었다면 가능했을 텐데. 상대방 차는 스쳐 지나가며 항의의 경적을 울렸다. "아, 실례!" 그는 무의식중에 그런 말을 하고 차를 길가로 붙였다. 상대방 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데 왜 그런지 긴급한 일로 서두는 감이 역력했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 비슷한 글
현재 20편 →
21편부터
21편
죽음과 즐거운 여자 - 엘리스 피터스 - 21편 (21/23)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던데요." 진은 그렇게 말하며 정신이 아찔해져서 계기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남편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것이다. "어머나, 레슬리, 왜 그래요!" 그가 어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