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북궁후의 눈이 짧게 번뜩였다. 잠시 후, 철일령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사실 궁주께선 행방이 묘연하시고 은일령주님마저 아직 폐관 중이신지라...." "그 말을 수하들 사이에 소요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 까?" 북궁후의 담담한 반문에 철일령주는 움찔했다. 그의 이마에 어느 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북궁후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북궁후는 더이상 추궁하지 않은 채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며 잔 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계획은 간단하오. 새로 탄생될 본궁의 첫번째 일은 우선 당금무 림에서 암류를 구성하고 있는 신비문파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오!" 북궁후의 너무도 어이없는 말에 다섯 명의 철기령주들이 눈을 부 릅떴다.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신비문파들을 모조리 제거하라니 실로 광오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던 것이다. 허나 바로 그 순간 북궁후의 전신에서는 대자연(大自然)조차 거역 치 못할 위엄이 밀려나오고 있어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어 반 문할 수 없었다. 풍운(風雲)! 그렇다! 전 대륙이 엄청난 혈풍에 잠길 풍운이 이렇 게 시작되고 있었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 ① 곤륜산(崑崙山), 청해성(靑海省) 최종단에 사방 수만 리에 걸쳐 험준한 거봉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산. 이 곤륜산 양대거봉(兩大巨峯)인 관천봉(觀天峯)과 비학봉(飛鶴 峯) 사이에는 깎아지른 듯한 단애(斷崖)가 있었는데 바로 망우곡 (忘憂谷)이었다. 뇌신(雷神)의 도끼(斧)로 내리찍은 듯, 나는 새도 접근치 못하는 험악한 망우곡은 언제나 짙은 농무(濃霧)에 잠겨 있었다. 여명이 움터오는 시각, 짙은 안개 저쪽으로 붉디 붉은 적륜이 걸 리는 순간 문득 망우곡이 내려다 보이는 계곡 위에서 나직한 음성 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망우(忘憂)라,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군. 좋다, ㅋ!" 동시에 돌연 새벽 안개를 뚫고 희미한 인영 하나가 망우곡 안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왜소한 인영, 약 십칠 세 가량 된 소년이었다. 엉성한 빗자루 눈썹에 쏙 빠진 쥐턱, 얼핏 원숭이 같은 우스운 용 모였다. 게다가 몸에는 화려한 화복을 걸치고 있어 괴상한 몰골이 더욱 돋보였다. 헌데 그는 바로 금릉 태화루의 점소이 승소진이 아닌가! "이 망우곡에 나 승소진보다 더 해박하다는 괴짜 늙은이가 있다 지?" 그의 입가에 걸려있는 자조 띤 괴이한 웃음은 여전했다. 헌데 기이하게도 지금 그에게선 전혀 다른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귀신도 속인다는 귀계(鬼計)의 대가(大家), 지금 이 순간의 승소진에게서는 진정 천하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 고 희롱할 귀지(鬼智)와 무서운 담력이 은근히 배어 나오고 있었 던 것이다. 승소진은 백무에 가려진 망우곡 입구를 쏘아보며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ㅋ! 천하에 나 승소진이 모르는 것은 없다. 허나 여의괴노(如意 怪老)는 나보다 단 한 가지를 더 많이 알고 있다." - 여의괴노(如意怪老). 이른바 천상천하만사무불통지(天上天下萬事無不通知)라 자처하는 인물. 실로 천하에 그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가 모르는 것은 하늘도 몰랐다. 허나 그의 더욱 무서운 점은 바로 그가 천하를 아는데 천 하는 그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후, 승소진이 곡 안으로 진입해 들자 백무가 더욱 짙어져 시 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한치 앞도 꿰뚫어 볼 수 없을 지 경이었다. 승소진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괴소가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ㅋ! 예상했던 일이다. 여의괴노는 가공할 괴절진을 곡 입구에 펼 쳐놓고 방문객을 희롱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지? 허나 그는 나 승 소진에 대한 대우가 약간 소홀했다. 아마 그는 내가 귀조만학보록 을 익혔다는 사실을 몰랐겠지." 이어 그는 여유있게 웃으며 백무 속에 감춰진 진식을 하나씩 파해 해 나가기 시작했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2 ━━━━━━━━━━━━━━━━━━━━━━━━━━━━━━━━━━━ ② 세외기경(世外奇景), 망우곡 안은 그야말로 선경(仙景)을 이루고 있었다. 온갖 희귀한 화초(花草)와 수목(樹木)들, 뛰노는 야생의 동물들. 그야말로 이 모든 광경은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라 하지 않을 수 없 을 정도였다. 계곡 서쪽에는 폭포수가 장관(壯觀)을 이루며 장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화림 속에 아담한 모옥 한 채가 있었다. "클클!" 문득, 가래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옥의 문이 열렸다. 이어 한 명의 육순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나왔다. 한 마리 늙은 원숭이라고나 할까? 누구나 처음 이 노인을 본 순간 에 그런 착각을 일으킬 것이다. 작달막한 삼척단구(三尺短軀)에 두 팔이 유난히 길어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게다가 작은 얼굴은 온통 쭈글쭈글한 주름살로 축 쳐져 있었다. 영락없는 늙은 원숭이를 방불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움푹 패여 있는 두 눈에서는 강렬하면서도 유현 한 신광이 끊임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노인은 손에 호미를 들고 나서던 참이었다. "으잉?" 돌연 그의 눈이 커졌다. 그의 발치께에 왜소한 그림자 하나가 우 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가 채 상대방의 모습을 발견하기 전에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ㅋㅋ! 안녕하시오, 여의괴노!" 음성과 함께 한 인형이 모습을 나타냈다. 승소진이었다. 여의괴노는 문득 뚫어져라 그의 모습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클클, 웃기게 생긴 아이로고." 여의괴노는 그새 자신의 몰골을 잊은 걸까? 여의괴노의 말에 승소진은 마치 주제파악이라도 하라는 듯 마주보 며 미소를 떠올렸다. 돌연 여의괴노는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승소진!" "왜 왔느냐?" "여의괴노를 만나러." 승소진은 시종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태도 또 한 태연하기 이를데 없었다. 여의괴노는 잡아 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허나 진정으로 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굳어졌던 그의 얼굴이 다시 풀리며 의미심장한 미소가 입가에 맺히기 시작했다. "마음에 든다. 클클 나랑 닮았기 때문이다. 말해봐라. 너는 노부 에게 무엇을 배우러 왔느냐?" 여의괴노의 질문에 승소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 다. "칠십 년 전에 은거한 천하만사무불통지 여의괴노가 천하에 모르 는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가 나 승소진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지. 나는 그걸 알기 위해 왔소, ㅋ!" 어찌 들으면 실로 광오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여의괴노는 조금도 불쾌해 하는 기색을 떠올리지 않은 채 오히려 고개를 끄덕 이지 않는가. '고놈! 꼭 어릴 때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볼수록 마음에 든다!' 무자비(?) 하도록 괴퍅하다는 여의괴노는 평생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가 평생 보고, 듣 고 배운 것은 그의 머리통 속에 꽉 차 있을 뿐, 단 한 가지도 밖 으로 흘러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만은 그 자신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기이하게 도 승소진을 대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여의괴노가 승소진을 바라보며 계속 곤혹스러운 표정을 머금고 있 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었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3 ━━━━━━━━━━━━━━━━━━━━━━━━━━━━━━━━━━━ ③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방(房). 가구라곤 대나무로 짠 침상과 다 낡아 흔들거리는 의자 한 개가 고작이었다. 여의괴노는 승소진을 허름한 방으로 안내한 후 낡은 침상에 걸터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엇을 알고 싶으냐?" 'ㅋ! 원숭이와 나란히 앉혀 놓아도 어느 쪽이 원숭이이고 어느쪽 이 사람인지 구별하려면 하루종일 걸리겠구나!' 승소진은 침상 위에 움추리고 앉아 있는 여의괴노를 보며 내심 실 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의괴노가 갑자기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클클, 노부에게 우월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꼬마야, 너는 늙으 면 최소한 노부보다 열 배는 더 원숭이답게 생겨질테니까." '뭐, 뭐야!' 승소진이 울상을 머금었다. 여의괴노가 정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 빨리 말해라. 무엇때문에 노부를 찾아 왔느냐?" 여의괴노가 정색하자 승소진 역시 얼굴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을 얻고자 하오." 순간 여의괴노의 전신이 굳어졌다. 그는 크게 놀란 듯 승소진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그야말로 파도를 만난 듯 물결치고 있었다. "노부가 강호명숙대실록을 완성한 것이 불과 사흘 전의 일이거늘 그 사실이 벌써 천하에 알려졌단 말이냐?"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승소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ㅋ! 천하의 판도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는 내가 그것을 모를 리 있소?" "천하의 판도? 네가 말이냐? 클클! 너는 그럴만한 그릇이 못된다. 누구냐? 너를 보낸 인물이?" 여의괴노의 이어지는 음성은 사뭇 험악하기조차 했다. 승소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기랄, 내 그릇이 어때서? 귀신같기는 둘다 마찬가지군!' 승소진은 내심 투덜거리며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여의괴노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소야, 그의 이름은 바로 소야요. 나더러 노선배가 강호명숙대실 록을 완성했으니 그것을 얻어오라 했소. 그게 사흘 전이었소." 순간 여의괴노의 두 눈이 번쩍 기광을 뿌렸다. "소야, 클클, 역시 그 아이였군." "아니! 소야를 알고 있소?" "클클, 그를 모른다면 노부의 별호를 바꿔야지." 여의괴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의기양양해 하는 태도같았 다. 허나 이 순간 사실 그의 내심으로는 경악성이 발해지고 있었다. '으음, 역시 그 아이였다. 그 아이는 이미 내가 강호명숙대실록을 기술(記術)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기 재(奇才)다. 천하제일신동이 탄생함을 듣고 주목해온 것이 수 년 여, 헌데 오히려 노부가 그 아이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한 꼴이었 다니...!' 잠시 후, 여의괴노는 마음을 가라앉힌 듯 차분한 눈길로 승소진을 직시했다. '이 녀석도 천하의 기재이다. 소야의 곁에 이런 기재들이 있다면 그는 능히 천하를 넘볼 수 있을 것....' 헌데 기이하지 않은가! 문득 여의괴노의 얼굴에 긴장과 불안의 빛 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긴 장탄식이 터 져 나왔다. "소야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 인물이 모를 리 없을 터, 이제 이 늙은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군." 그의 탄식어린 말에 승소진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씀이오?" "클클, 곧 알게 될 것이다. 당금 무림에는 한 명의 영웅(英雄)과 두 명의 무서운 효웅(梟雄)이 있지! 길이 너무 험해. 또한 너무도 멀고...." 여의괴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 노부를 따라 오너라. 시간이 없다." 그의 손이 침상 모서리를 눌렀다. 놀랍게도 침상이 어떤 기관장치 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구구궁! 하는 음향과 함께 침상에 면한 석벽에 네 자 크기 의 구멍이 생기며 시커먼 지하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라!" 여의괴노는 지하 통로 안으로 황급히 들어가며 승소진을 향해 재 촉했다. 기이하게도 그는 몹시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고?' 승소진은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면서 여의괴노 의 뒤를 따라 지하통로 안으로 뛰어 들었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4 ━━━━━━━━━━━━━━━━━━━━━━━━━━━━━━━━━━━ ④ 지하서고(地下書庫)는 제법 넓었다. 사방 십 장여에 달하는 넓이 인 것이다. 그 지하서고의 사면 벽은 모조리 서가(書架)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예의 서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책자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 다. 천하에 찾아보기 힘든 진본기서들이었다. "끙끙!" 지하서고에 들어선 여의괴노는 진땀을 빼며 서고 한쪽 구석에서 한아름의 책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줄잡아 열 권 정도의 분량이었 다. 놀랍게도 그 많은 분량의 서책이 단 한 권의 책자였던 것이 다. 그것은 바로 여의괴노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기술한 방대한 무림 정보의 비서(秘書)인 강호명숙대실록이었다. 여의괴노는 숨을 씩씩대며 말했다. "소야와 네가 빠르긴 했으나 그 역시 기회를 놓치는 게으른 인물 이 아니다." 그는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승소진은 기묘한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여의괴노는 낡디 낡은 누더기 소매를 걷어붙이며 간단히 대답했 다. "서문유허!" "서문유허?" "천하에 가장 무서운 너의 적수이지, 그 역시 천하를 입안에 넣고 굴릴만한 계교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승소진의 눈빛이 은은히 푸른 청색으로 짙어갔다. 그것은 그가 염 두를 굴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서문유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략과 모계의 대가라고." 여의괴노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 필생의 보물을 네게 주었다만, 너는 어찌할 작정이냐? 이것을 읽는 데만도 한 달은 걸릴 것이다." 승소진은 피식 웃었다. 그는 책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노선배께선 계속 나 승소진을 얕보고 계시구료. 이 방대한 내용 중에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단 한 장 뿐이오." 여의괴노의 눈이 커졌다.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상천하만사무불통지를 자처하던 그 자신이 평생동안 천하를 주 유하며 천 명의 기웅(奇雄)들을 선별해낸 후, 하늘도 모를 그들의 비밀스런 내력을 파헤쳐 수록한 것이 바로 강호명숙대실록이 아니 던가. 헌데 그것이 눈 앞의 아이 앞에서 거의 대부분이 무용지물 에 가깝다니 실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허어... 이 아이가 벌써 그 정도였단 말인가?' 여의괴노는 혀를 내두르며 지하서고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승 소진에게 강호명숙대실록을 읽을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5 ━━━━━━━━━━━━━━━━━━━━━━━━━━━━━━━━━━━ ⑤ 여의괴노가 사라지자 승소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차분히 강호명숙대실록의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백도상인(百刀上人), 개봉부(開封府) 출신, 백이십 년 전 실종된 불허자(不虛子)의 수 제자, 암기력(暗記力)과 오성(悟性)이 당세제일이라고 평가됨. 독 문절기 파천유엽비도진결(破天柳葉飛刀眞訣)을 살짝 바꿔 우내삼 기(宇內三奇)에게 팔아먹은 적이 있음.> 백도상인이라면 당세무림의 거웅(巨雄)이다. 허나 그의 신상에 관 해서는 철저히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의 괴퍅한 성격과 잔인무도한 손속 때문에 누구나 그에 대하여 알려 들지 않았다. 허나 그 백도상인조차 강호명숙대실록에는 그야말로 십대조상까지 모조리 밝혀져 있었다. 강호명숙대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천 명의 기웅들은 모두 각파의 장로급 이상의 신분에 있거나 강호를 뒤흔드는 초절정 고수들이었 다. 헌데 일천 명에 대한 모든 비밀스런 내력들이 이처럼 적나라 하게 파헤쳐져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승소진은 감탄의 빛을 약간 보였을 뿐 별로 놀라지 않았 다. '여의괴노, 과연 일세 기인(奇人)이다. 허나 모두 내 머리 속에 있다. 나는 다만 한 인물에 대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승소진은 이어 무서운 속도로 책자를 넘기기 시작했다. 단 한 명, 단 한 명의 진정한 신분을 알아내기 위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의괴노는 돌연 질린 표정으로 다시 지하서고 안으로 뛰어 들어 왔다. 마침 승소진은 강호명숙대실록을 덮던 참이었다. "이크! 소진, 드디어 그들이 왔다! 하여간 네가 알고자 하던 것을 찾았느냐?" "그렇습니다." 승소진이 고개를 끄덕이 자 여의괴노는 다급히 재촉했다. "놈들이 만상환허진(萬想幻虛陣)을 깨고 있다. 어서... 으왁!" 갑자기 그의 입에서는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의 눈은 어느새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화르르르! 강호명숙대실록, 강호명숙대실록이 승소진의 장심에서 일어난 화 염에 불타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의괴노의 표정이 안타까움, 은근한 분노, 허탈감으로 복잡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는 헛소리하듯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걸 놈들에게 넘겨줘야 이 늙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텐데." 승소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놀랍게도 이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어 린아이답지 않은 압박감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노선배께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길 원하시오?" 여의괴노는 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승소진의 전신에서 흘러 나오는 기이한 압박감에 주눅이 든 것이다. 허나 그는 돌연 발을 꽝 구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나, 나는 살고 싶단 말이다. 이놈아!" 승소진은 궁둥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노선배, 목숨은 내가 보장해 드리겠소!" "네, 네가? 흠흠, 그렇다면 빨리 살려줘라!" '빨리 살려달라고...?' 승소진은 여의괴노의 해괴한 말에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어 그들 둘이 모옥 밖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일진의 굉렬한 폭음과 함께 곡 전체가 무섭게 뒤흔들리기 시작했 다. "츳, 이젠 나 여의괴노의 시대도 끝났군. 내가 설치한 진이 저토 록 어이없게 깨지다니!" 주름살 뒤덮인 여의괴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헌데 그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순간 어느새 망우곡 입구쪽으 로부터 십여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검은 화살처럼 쏘아져 오지 않 는가. 그 가공스러운 신법은 여의괴노와 승소진조차 눈을 부릅뜨게 했 다. 열 명의 인물들의 복면 사이로 뿜어지는 안광(眼光)들은 거암(巨 岩)도 꿰뚫을 듯했다. 제각기 전신에서 폭출되는 강맹한 기도와 살기(殺氣)는 흑포를 찢 고 쏟아지는 듯했다. '무서운 인물들이다!' 승소진이 전음으로 물었다. (저들은 누구요?) (만류교, 당금무림의 사대신비세력으로 불리는 집단이지.) 이때였다. '부자지간의 원숭이?' '우습다.' 여의괴노와 승소진을 번갈아 쓸어보던 복면인들의 눈은 터져나오 려는 웃음을 참지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허나 곧 그들의 눈에는 은은히 짙은 광망이 어렸다. 가운데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의 인물이 여의괴노를 향해 성큼 다 가섰다. ■ 검 1권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6 ━━━━━━━━━━━━━━━━━━━━━━━━━━━━━━━━━━━ ⑥ "당신이 여의괴노요?" 여의괴노는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마치 무공을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그렇소만." "본교에서는 특별히 귀하를 초청코자 왔소." "본교라니?" "그건 알 것 없소." 여의괴노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 하지만 난 이 조용한 생활이 좋은데." 흑의복면인의 눈에 뭉실뭉실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흐흐, 그렇다면 책자라도 내놓으시지." 일순 여의괴노의 얼굴이 아연하게 일그러졌다. "강호명숙대실록이라면...." 흑의복면인의 눈이 번쩍 했다. "그렇다. 우린 그걸 가지러 왔다!" "그건 이미 가루가 되버렸는데." "빌어먹을!" 흑의복면인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돌연 살광어린 눈으로 여의괴노 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그 늙은 머리통이라도 가져갈 수밖에, 그 속에 들어 있 을테지!" 그는 번개같이 여의괴노를 덮쳤다. 그 신법은 기쾌무비하고 교묘하기 그지 없었는데 단숨에 여의괴노 를 제압할 작정인 것 같았다. (어구구! 이놈 소진! 네놈이 내 목숨을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느 냐?) 여의괴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어설프게 몸을 피하며 전음으로 소리쳤다. 허나 승소진은 태연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역시 전음으로 소리쳤다. (ㅋ! 엄살 그만 떠시고 어서 도망이나 치시오.) 순간 여의괴노의 안색이 확 변했다. '헉! 저놈은 내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인가? 그 럼 내 본래 정체도 알고 있었군!' 여의괴노의 감춰진 또 하나의 신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순간 그는 이미 귀신같이 신형을 미끄러뜨리고 있었다. 그 어설프고 둔해 보이는 동작은 상대의 공세를 교묘히 젖혀내지 않는가? 그것은 무학이 입신지경(入神之景)에 이르지 않고는 위장할 수 없 는 기막힌 술수였다. 이때 흑의복면인들의 눈빛이 일제히 기광을 뿜었다. "흐흐, 이제보니 만사무불통지라는 여의괴노가 절세고수였군!" "일제히 공격하라!" 열 명이 한꺼번에 공격해 들어오는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주위 암석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땅이 움푹움푹 패여 나갔다. 소용돌이치는 강풍(强風) 속에 수백 갈래 검광이 허공을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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