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천객 - 3 - 12편 (12/17)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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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천객 - 3 - 12편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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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고도 뭐 짐작 가는 일이 없나?" 천품신성이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다리를 슬쩍 가리켰다. "그럼……." "맞았네.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당시 나는 하나의 무공을 익히다가 그만 실수하여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지." 천품신성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십오 년 전, 그의 돌연한 실종에 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이레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그 후 하늘이 도와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그만 이런 몸이 되고 말았네.
두 다리를 영영 쓸 수 없게 된 것이지.
그뿐만이 아닐세.
나는 무공을 전부 상실하고 말았네." "전부!" 만리추종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악대협께서 무공을 상실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완전히 무공을 잃은 것은 아니나 대략 구 할 가량의 무공을 잃었네.
그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타격이었지." 천하의 맹주 자리에 있던 천품신성이 아닌가! 그런 그가 무공을 상실하여 거의 폐인이 되었다는 건 지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기는 무공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일은 아닐세.
무(武)라는 것은 본래 무(無)에서 출발하였으니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고 해서 뭐 아쉬운 것이 있겠나? 그리고 걷지 못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약간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불행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일이네.
세상에는 나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걷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절망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다시없겠지." 천품신성의 말은 너무도 담담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절망하여 자결이라도 했을 커다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를 괴롭힌 것은 바로 천하의 안위였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 당시 단심백결회는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참이었네.
그런데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진다면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나겠나?" "하지만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만리추종이 강한 어조로 항변했다. "악대협께 닥친 재난은 곧 저희들의 재난입니다.
그 당시 저희들이 악대협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악대협을 위해서라면 한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약간의 재난을 당하였다고 해서 저희들을 버리시다니요.
설마 하니 저희들이 악대협의 재난을 틈타 딴마음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셨단 말입니까?" "자네들을 의심하고 있었던 건 아닐세." 천품신성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게는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었네.
그 당시 나는 통천삼십삼마 중 가장 중요한 십마가 죽지 않고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십마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지만 나만은 그들이 멀쩡하게 살아서 후일을 기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일세.
그런데 만일 내가 이런 몸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찌 되겠나.
그때는 십마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다시 들고 일어나지 않겠나.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게 그들을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천하가 다시금 깊은 혼란으로 빠져들 걸세.
나는 나 하나로 인하여 그 같은 사태가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았네." 작은 일보다는 대국을 먼저 생각하는 게 위인이다.
천품신성의 설명에 만리추종은 할말을 잊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요행히 내가 신비롭게 종적을 감추는 데 성공한다면 십마는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삼 푼 정도는 꺼리는 마음이 일어날 걸세.
내가 노린 건 바로 그 점이었지.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주효하여 십마를 지난 삼십 년간 붙들어 둘 수 있었네." 천품신성이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이 일을 위해 그간 얼마나 노심초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악대협……." 만리추종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번의 눈물은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정인군자인 척하기는 쉽다.
그러나 정말로 정도를 걷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품신성은 진정한 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난 삼십 년간 천하는 조용했네.
나는 그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단심백결회의 세력이 커져서 설사 십마가 다시 세상에 나타나더라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리고 단심백결회가 그런 힘을 키울 때까지 십마가 나타나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네." 천품신성이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그 후 삼십 년이 지나자 단심백결회는 내 기대대로 아주 거대해졌네.
그러나 그것은 외양뿐이었고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았네.
단심백결회는 공룡처럼 외양만 커져서 제 한 몸도 주체하지 못하는 이상한 형태가 되고 말았지.
모두들 자부심에만 사로잡혀서 현재에 안주한 결과이지.
그들은 미래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았네.
미래에 어떤 재난이 닥쳐올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
그것은 내게는 지극히 실망스러운 일일세." "부끄럽습니다." 만리추종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그러한 단심백결회가 싫어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동안 나는 십마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네.
후후, 따지고 보면 나는 속세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야.
이런 몸을 하고도 세상을 잊지 못하고 계속 기웃거리고 있었다니 부끄러운 일이지." "어찌 그것을 부끄럽다고 하십니까? 악대협의 그같이 높은 뜻을 받들지 못하고 오늘날 단심백결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나는 하나의 제자를 거두었네.
평생 제자를 거두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몸이 이 지경이 되니까 어쩔 수 없더군.
나 대신 십마의 종적을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그럼……." "은조가 바로 내가 거둔 유일한 제자일세." 천품신성이 말했다. "은조는 자질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아이지.
좋은 사부를 만났다면 그 아이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였을 것이네.
하지만 내 몸이 이 지경이 되다보니 그 아이에게 진정한 무예를 전수해 줄 수 없었지.
그래서 이십 년 가까이 노력했지만 그 아이는 나의 기대만큼 자라 주지 못했네." 천품신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탄식은 사실 부질없는 것이었다.
세상에 천품신성보다 뛰어난 사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실상 나의 목적은 십마가 다시 나타나고, 그들의 횡포를 단심백결회가 막아내지 못하더라도 능히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을 키우는 것이었다네.
하지만 은조는 그런 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네.
그것은 그 아이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의 기대가 너무 큰 까닭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지금 은조는 십마 전부는 고사하고 그 중 두 명만 맞이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네." 십마 중 두 명과 싸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천품신성은 크게 미흡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십마를 얼마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족한 대로 은조가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된 건 불과 삼 년 전이었네.
그리고 지난 삼 년 동안 은조가 내게 가져다 준 소식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지.
단심백결회는 그 힘을 키우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지난날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렸네.
단심백결회는 비록 덩치는 커졌지만 그 커진 덩치를 주체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야.
단심백결회가 그렇게 된 원인은 나보다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단심백결회는 지난날 그 어떤 흑도방파보다도 거만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그것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단심백결회에 대한 불만이라면 누구보다도 많은 만리추종이었다.
그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불만을 뱉어냈다. "자네 말대로일세.
무릇 어떤 단체이든간에 힘을 지니고 그 힘을 백분 발휘하자면 만인의 존경을 받아야만 하네.
그런데 단심백결회는 그러지 못했어.
그것이 자멸로 가는 지름길인데도 그걸 깨닫지 못했지." 모든 정열을 다 바쳐 이룩한 단심백결회가 무너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 안타까움.
천품신성은 그런 서글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야.
기어이 내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게 문제이지.
걱정은 하고 있었으면서도 영원히 그게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던 일.
바로 십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말일세." 십마의 준동.
그것은 언제나 천하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천품신성에게 커다란 고뇌를 안겨 주었다. "나는 십마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했네.
그 하나는 십마가 나를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없다고 여기고 세상에 나온 것이야.
이 경우라면 그다지 두려워할 게 못 되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네.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두 번째의 가능성인데, 그것은 십마가 더 이상 나를 꺼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야.
그리고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일세." "십마가 악대협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은……?" 만리추종은 천품신성이 언급한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아직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만일 천품신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진실로 무서운 일이다. "십마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닐세.
그 중에 지마는 특히 영리하지.
그들은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을 거야.
지난번에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 충분히 분석한 뒤에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두었을 거란 말일세.
그리고 이러한 나의 예상은 불행히도 그대로 들어맞았네.
십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운 인물을 키워냈어.
그들은 지난 삼십 년 동안 결코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닐세." "십마보다도 두려운 인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천품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실로 두려운 인물이라네.
불행히도 나는 십마가 그런 자를 키워낼 줄은 예상치 못했지.
그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몸이 떨리네.
내가 이런 지경이 되지 않고 지난날과 같은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일세." "그렇게 두려운 인물이라면……." 만리추종은 지난날 쇠마의 장원에서 얼핏 보았던 인물을 떠올렸다.
비록 잠깐의 스침이었으나 그는 만리추종에게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맹세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토록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자의 이름은 단황이라고 하네." 천품신성이 조용히 말했다. "그자는 십마의 공동전인이지.
지난 삼십 년 동안 십마는 전력을 다하여 그를 키워냈네.
그리고 그자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자 어이없게도 그의 수하로 들어가 버렸지." "사부가 제자의 수하가 되었단 말입니까?" 만리추종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적어도 그런 일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품신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일세.
십마는 그를 천하마주라고 부르지.
그리고 그는 그런 명칭을 듣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인물일세.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은조의 말만 듣고도 그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알 수 있었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십마가 그러한 인물을 키워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그 누구도 단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가 없다는 점일세.
십마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러 있지만 그들의 뒤에 단황이라는 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없네.
유일하게 철궁도주 남궁격이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지만 그는 단황의 존재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악대협, 저는 단황이 그토록 무서운 인물이라는 말에 승복할 수 없습니다.
어찌 십마보다도 무서운 인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천품신성 어르신의 말씀은 아마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복청양이 입을 열었다. "저도 백소저를 통해서 그녀가 섬기고 있는 주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 주인을 극도로 존경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는 듯하더군요.
그리고 그 주인은 십마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백소저라니…… 백아아 말인가?" "그렇습니다." 만리추종의 물음에 복청양이 대답했다. "흥, 그 교활한 계집의 말을 어떻게 믿어? 그 계집은 지마와 한통속이 되어 우리의 혼란을 노리고 있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전에는 그 계집을 제법 반듯한 인물로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그 계집이 지마와 손을 잡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백소저는 지마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단황이라는 인물의 수하로 들어간 것입니다." "너의 말이 맞다." 천품신성이 복청양을 거들었다. "단황은 천하마주로서 새로운 수하들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그 대상은 처음에는 칠대공적이었으며 그들을 손에 넣자 그보다 더 비중있는 인물들에게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백아아도 그 중에 하나며 가개풍도 그 중의 하나다." "가개풍이라니? 황금대장주 말입니까?" "비단 황금대장주뿐만이 아닐세.
제마옥에서 탈출한 좌우쌍마도 이미 그자의 수하로 들어갔고 무독옹도 그자의 수하가 되었네.
그들은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자들이지." "무독옹까지……." 강호에 대한 견문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에 젖어있는 만리추종이었다.
그는 천품신성이 거론하는 인물들이 어떠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단 말인가.
단황이라는 자가 어느새 그 정도까지 세력을 키웠단 말인가.' 단황이 그처럼 세력을 키우는 동안 자신들은 과연 무엇을 했단 말인가.
기껏해야 단심백결회의 회주 자리를 놓고 암투를 벌여 오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면 만리추종은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뿐만이 아닐세.
단황은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에 흑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마물들을 하나로 규합해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네.
지난날 통천삼십삼마가 가공할 세력을 지니고도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그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졌기 때문일세.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 반대가 되어버렸네.
그들은 하나로 뭉쳐서 힘을 모으고 있는데 반해 단심백결회를 주축으로 하는 백도는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네.
이래서는 절대로 그들을 이기지 못하네." 천품신성의 말은 만리추종이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을 찌르는 비수나 다름이 없었다. "단황의 두뇌는 지마가 맡고 있네.
그리고 지마는 모종의 계획을 진행중이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계획의 목적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네.
그것은 바로 단심백결회를 무너뜨리고 천하의 패권을 손에 쥐자는 것이지." "당연히 그렇겠지요." 만리추종이 기운없이 말했다. "확실한 것은 모르나 지마의 계획에 천노살성이 중심에 들어있는 것만은 분명하네.
내가 너를 이리로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비로소 천품신성의 입에서 복청양의 이야기가 나왔다.
제 25 장 십방대동(十方大同) 천품신성 악자량이 뜻깊은 눈길로 복청양을 바라보았다. "얘야, 너는 복가장이 혈겁을 입은 게 지마의 계략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았느냐?" "본인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복청양은 백아아의 안내로 지마와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만일 남궁격의 방해만 없었다면 그는 지마와 생사결판을 내었을 것이다. "그랬구나……." 천품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가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한 것도 지마의 흉계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럼 너는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아직은 뚜렷한 계획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지마를 찾을 생각입니다." "찾아서는?" "사정이 허락한다면 복수를 해야겠지요.
지마에게서 받아내야 할 혈채가 너무 많습니다." 복청양은 사부인 천산오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구차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방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그가 지마의 사주를 받은 천산오조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에 대한 오해가 더욱 깊어질까 우려되었다. "얘야, 그 일은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천품신성이 어린 손자를 타이르듯이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모든 일이 지마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해서 지마 한 사람을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 좁게 세상을 보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머리가 아둔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너는 알 것이다." 천품신성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은 속세를 초월한 달관자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어서 그의 웃음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처음 천노살성이란 자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나도 너를 오해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너를 십마가 그 동안 키워낸 아이로 여겼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는 좋은 아이다.
세상에 너처럼 반듯한 아이는 흔하지 않다.
네가 지금까지 숱한 어려운 일을 겪어오면서도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천노살성이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만리추종은 얼떨떨하여 복청양과 천품신성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천품신성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으며 복청양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도저히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저자가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본 일이 없다.' 그가 복청양의 뒤를 따라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천노살성이 별호처럼 그처럼 잔인한 자였다면 그는 지금까지 복청양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복청양은 적어도 그가 보는 앞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어쩌면 악대협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만리추종은 처음으로 자신이 복청양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소문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복청양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는 지금까지 복청양을 천노살성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소문에 현혹당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얘야,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지마가 그런 일을 벌인 게 무엇 때문이겠느냐? 만악(萬惡)의 뿌리는 지마가 아니다.
지마는 그저 악이라는 나무에 달린 작은 가지일 뿐이다.
그러니 지마 하나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럼 만악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제가 아직 본 적도 없는 단황이란 자입니까?" "그렇지 않다.
단황도 악의 한 부분일 뿐 그 근본은 아니다." 천품신성이 다소 의외의 말을 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만악의 근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악(惡)의 근본은 바로 선(善)의 근본과 같다.
원래 선과 악은 한 뿌리에서 파생된 두 개의 이질체(異質體)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바로 네 가슴속에 만악의 근본이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의 근본이 같다고?' 천품신성의 말은 선문답(禪問答)과 같아서 복청양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것은 천품신성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나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네가 선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이 바로 선이고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선과 악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여야만 한다." 천품신성은 복청양을 보는 게 아니라 허공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에게 하는 얘기와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았는지 천품신성이 복청양을 똑바로 보았다. "얘야, 네가 지마에게 복수심을 품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다.
그리고 복수는 언제나 피를 부르고 피는 다시 더 많은 피를 요구하는 법이므로 이 일이 너 하나의 개인적인 원한에 국한된 일이라면 나는 이 자리에서 너에게 복수심을 버리고 지마를 용서하라 했을 것이다." "악대협!" 이번에는 만리추종이 소리쳤다.
천품신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도 엉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품신성은 만리추종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이번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 너 하나만의 사사로운 원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개인의 원한을 생각하기에 앞서 대국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지마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십마, 그리고 그들이 받들고 있는 단황이 천하만민에게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물론 지금 그들은 그늘에 숨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해악도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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