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바로 단황이로구나.'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가개풍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제는 유방이 그토록 긴장을 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만일 단황이라는 인물을 한 번만이라도 보았다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긴장했을 것이다. 아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하고 벌써 달아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제껏 수많은 일을 겪어온 가개풍이었지만 이처럼 단순히 한 사나이가 나타남으로써 가슴이 답답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유방을 보았다. 유방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육각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었으며 두 손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시선은 무심하게 앞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가개풍이 보기에 유방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누가 손끝이라도 대면 땅, 하고 끊어질 것 같았다. 가개풍의 놀란 얼굴을 보았는지 선우향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나이를 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리면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누구보다도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발달되어 있는 선우향이 아닌가! 그녀가 가개풍도 느끼는 감정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단황이 심유한 눈을 들어 정자 위를 보았다. "날 기다리고 있었나?" 무심한 음성이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려왔다. 가개풍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그저 무의식중에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그의 탐스러운 수염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번거롭지 않게 되서 다행이군." 단황이 천천히 정자를 향해 걸어왔다. "큭!" "으악!" "억!" 합창처럼 비명이 터져나왔다. 가산 뒤에서 몇 개의 인영이 솟아오르더니 나무토막처럼 쿵 떨어졌다. 가산 뒤에 매복시켜 두었던 무인들이 허망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저, 저럴 수가!" 가개풍은 경악하여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술상이 엎어져 뒹굴고, 술이 선우향의 치마폭을 적셨다. 선우향은 치마폭을 감싸며 앉은 자세로 정자 후편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작게 축소된다. "크악!" "악!" 그런 중에도 비명은 연속하여 들려왔다. 이번에는 시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황금대장의 무인이 죽임을 당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단황은 여전히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개풍은 지금까지 단황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그의 철검은 여전히 땅을 가리키고 있었고 심유한 눈은 정자를 향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무수한 고수들이 연이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단황이 손을 쓴 것이라면 가개풍이 절대로 놓쳤을 리가 없다. 아무리 어둡다지만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할 거리는 아니다. "저자가 손을 쓴 것이 아닙니다." 유방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 침착하여 정신이 허공에 떠 있던 가개풍에게 안정감을 찾아주었다. "저자가 손을 쓴 게 아니라고?" "저자의 주위에 다른 고수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다섯은 되는 것 같군요. 하나같이 초절한 무공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들이 저자와 함께 이동하면서 매복을 파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절정고수가 다섯 씩이나!" 가개풍의 입이 벌어졌다. 턱밑으로 침이 흘렀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차앗!" "이놈, 죽어랏!" 요란한 기합과 함께 매복지에서 뛰어나온 고수들이 단황을 덮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에 질렸는지 동작이 평소보다 굼뜨게 보였다. "큭!" "허억!"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그들은 단황의 곁에 이르기도 전에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가개풍이 이 후원에 매복시켜둔 고수들은 일백에 가까웠다. 하늘을 나는 새라도 감히 넘보지 못할 완벽한 매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고수가 상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미,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 하지만 자네라면 저들을 이길 수 있겠지?" 놀라움이 지나쳐 허탈감에 빠진 가개풍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유방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유방의 눈에는 그가 희망을 걸 어떠한 빛도 찾을 수 없었다. "저도 초인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 그럼……?" "하나라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섯이나 되니 저는 이길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저 단황이라는 자는 이미 제 능력 밖에 있습니다." "그런가……." 멍청하게 유방을 바라보던 가개풍이 갑자기 밖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발악하듯 소리쳤다. "모, 모두 멈춰라! 그만 해라!" "이미 늦었다." 무심한 목소리. 그것은 바로 턱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단황이 정자 아래에 서 있었다. "명을 내리려면 조금 빨랐어야지. 이미 모두 죽은 후에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모두 죽었다고?" 그제야 가개풍은 후원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토록 처절하던 비명소리가 일제히 잠들었다. 괴괴한 적막이 가득할 뿐이다. "일백이나 되는 고수가 모두 죽었다고? 이럴 수가……." 가개풍은 기둥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축축히 젖어있는 것은 단순히 땀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단황이 유방을 보았다. "그대가 북경제일쾌라는 유방인가?" "그렇소." 유방은 기둥에서 몸을 떼고 반듯하게 서 있었다. 팔은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언제라도 반월도의 손잡이를 잡을 수 있는 자세였다. 하지만 단황은 그런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조금 의외로군.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유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소. 당신은 단황이오. 단황인 동시에 천하마주이기도 하오. 마의 이름으로 가장 위대한 자." 이번에는 단황이 고개를 끄덕일 차례였다. "놀랍군. 지금까지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는 없었다. 내가 그대를 너무 가볍게 본 것 같군. 그대는 어디서 내 얘기를 들었는가?" "그런 걸 알 필요가 있겠소?" "하긴……"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선두에 선 것은 쇠마였고 쾌마와 환마, 전마, 흑마, 백마의 모습도 보였다. 십마 중 무려 여섯이 동시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자 주위로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시립해 있었다. "그만 내려오지?" 단황이 말했다. "언제까지 나를 올려다보게 할 참인가?" "죄송하오." 유방은 천천히 정자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그는 조금도 상대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두 손도 한가롭게 흔들릴 뿐 발초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무방비를 가장한 방비가 아니라 실제로 그는 전혀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허점투성이의 모습인 것이다. "제법이군." 유방이 앞에 서자 단황이 하얗게 웃었다.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조금 전 나는 그대를 적어도 열 번은 죽일 수 있었다." "열 번을 죽일 수 있었다는 것과 열 번을 죽이는 것은 다르오." 유방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죽이고자 했다면 내가 아무리 방비를 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마찬가지로 당신은 나를 죽일 마음이 없으니 나는 방비를 하지 않은 것이오."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으리라 믿는가?" "그럴 것이오." "지나친 믿음은 언제나 화를 불러오는 법이지. 그대는 지금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고로 영리한 척하는 자들은 실수가 많은 법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이 순간만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오.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단황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누구를 앞에 두고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대를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그렇소?" 유방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것은 웃음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나 웃음치고는 좀 기묘했다. "그대가 나를 아는 것처럼 나도 그대를 안다." "그건 과히 놀랄 일이 아니오. 적어도 북경 사람들이라면 내가 누군지 다들 아니까." "그렇지 않다." 단황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유방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지는 유방이 아니다. 유방은 가공의 인물은 아니나 오래 전에 그대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그대는 지금 자신의 손으로 죽인 유방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유방을 죽였다고?" 두 사람은 서로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서 있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그 다정함 속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거 재미있는 말이로군. 내가 유방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이오?" "그대는 지금까지 진정한 이름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는 안다. 그대는 바로 섬전도다." "섬전도?" 놀란 외침을 터뜨린 것은 엉뚱하게도 정자 위에 있는 가개풍이었다. 그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방을 보았다. '섬전도라고? 유방이 바로 섬전도란 말인가?' 섬전도(閃電刀). 가개풍이 아무리 강호 사람이 아니라 하나 섬전도라는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섬전도는 바로 이십 년 전에 홀연히 나타난 희대의 살성이 아닌가. 이십 년 전, 그는 무려 일백이 넘는 고수들을 차례로 상대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다. 모두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섬전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살성.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까지 그와 싸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괴이한 살행을 저지르고 홀연히 모습을 감춘 섬전도가 지금 유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섬전도! 그대는 칠대공적 중에 가장 강하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그대는 나의 손에 꺾여야만 한다. 그대는 황금장주와 함께 내가 거둬들여야 할 열세 개의 흑주 중 하나니까." "나도 당신이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건 의심하지 않소." 유방, 아니 섬전도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무인은 결과를 직접 보기 전에는 결코 무릎을 꿇지 않소. 나도 무인이므로 예외가 될 수 없소." "그럴 줄 알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단황이 두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더니 철검을 들어올렸다. "시작하지." "가르침을 받겠소." 번쩍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 마른번개가 쳤다. 누구도 섬전도가 반월도를 쥐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어느새 반월도를 손에 쥐고 있었고 단황을 향해 짓쳐가고 있었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빠르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쾌도였다. 그의 반월도는 이미 빛이 되어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진공상태가 되면서 그의 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버언쩍! 콰콰콰콰콰 바로 그 순간 단황의 철검도 움직였다. 그의 철검은 빛을 반으로 쪼개고 다시 그 반을 반으로 쪼개어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인간의 시력이라는 것이 그 엄청난 빠르기를 따라가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럴 수가…….' 오직 한 사람. 그들의 움직임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인물이 있었다. 쾌마였다. '믿을 수가 없다. 섬전도, 저자는 나보다도 빠르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빠른 쾌의 극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돌진하였고 순식간에 십칠초를 교환했으며, 이어 서로 떨어져 먼저의 자리로 돌아가기까지 단 한 호흡이었다. 하지만 그 한 호흡 동안 천지는 숨을 죽였고 달빛마저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섬전도의 반월도는 여전히 허리춤에 걸려 있었으며 단황의 철검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외견상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 중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단황의 그 강철 같은 몸에 두 줄기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설마 단황이 패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단황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는 너무나 맑고 고요한 것이었다. "섬전도, 너는 졌다." 너풀! 섬전도 앞가슴의 옷자락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맨살이 보이고 있었다. 섬전도는 그 갈라진 옷자락을 묵묵히 내려다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말이 필요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자 위로 오른 단황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술병은 비어 있었다. "이런, 술이 떨어졌구나." 단황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처럼 좋은 밤에 술이 없다니 가개풍, 너무 인색하지 않느냐?" "자, 잘못하였소." 가개풍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갑자기 다리에 맥이 탁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단황이 그에게 앉으라는 명을 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단황은 빈 술병을 든 채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열두 개의 흑주를 내 손안에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그것도 머지않아 내 손에 들어온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나는 천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열두 개의 흑주. 그것은 단황만이 아는 이름이었다. 섬전도. 황금대장주 가개풍. 무흔색투 유빈. 만대모. 적발수룡 예요. 동정화상. 천수벽뢰. 백아아. 좌우쌍마. 무독옹. 암혼. 단황은 문득 목구멍이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것은 거대한 웃음의 시발이었다.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유일인의 거대한 웃음. 어둠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 * * 둘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그들의 움직임을 보았다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눈이 부시도록 빠른 것이었지만 하는 동작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그저 주먹을 움켜쥐고 상대를 후려치려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초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좀더 안목있는 사람이 주의깊게 보았다면 그 웃음은 이내 놀라움으로, 그리고 극도의 경이로 변하였을 것이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그 주먹질이 상대의 몸에 닿을 즈음에는 기묘한 각도로 휘어지는데, 그것은 어떠한 동작으로도 피하기 어려운 절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서로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했기 때문에 승부는 쉽사리 가려지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애당초 승부 같은 것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유희를 즐기는 기분으로 자신들의 동작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런 잡생각도 없이 오직 한 동작에만 열중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운 유희라도 끝날 때가 있는 법이다. "후웅, 이제 그만 하자." 복청양이 헐떡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옷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고 얼굴에도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자 후웅이 아쉬운 얼굴로 손을 멈추었다. 만일 복청양이 그만두자고 하지 않았으면 그는 하루 종일이라도 계속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복청양과의 이 유희에 깊이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시내로 가서 젖은 몸을 씻었다. "이제는 아주 잘하는데. 나보다 나아." 후웅이 복청양의 등을 닦아주며 말했다. 복청양이 그에게 후웅권을 배운 지 벌써 두 달. 그 동안 복청양의 실력은 눈이 부시게 향상되어 어느새 후웅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너를 못 이겼어." "그야 나도 놀고 있는 건 아니니까." 후웅이 씩 웃었다. 그의 건강한 치아가 햇살에 반짝거렸다. 후웅의 말솜씨는 복청양의 후웅권 솜씨만큼이나 향상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자유자재로 생각한 것을 말할 수 있었는데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저 바깥 세상에 나가면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지난 두 달은 두 사람에게 다 같이 유익한 것이었다. 복청양은 절기를 하나 배웠고 후웅은 말을 익혔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한 복청양은 후웅과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 그 사이 그는 근 백여 장 가까이 동굴을 뚫고 있었다. 동굴 밖에는 안에서 끌어낸 돌무더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시작해 볼까?" 복청양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석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의 암석은 다른 것보다 두 배는 커보였다. 그러나 그 앞에 우뚝 버티고 선 복청양은 그다지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동안 복청양의 공력은 거의 두 곱절로 늘어나 있었다.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날마다 먹는 버섯이나 아니면 희뿌연 물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지금의 복청양에게는 이런 정도의 암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핫!" 그의 입에서 짧은 기합이 터져나왔다. 꽝! 콰르르 암석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파편이 되어 날았다.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돌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한동안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다. 이윽고 돌먼지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음의 일격을 준비하며 주먹을 움켜쥐던 복청양은 맥없이 주먹을 늘어뜨렸다. 구멍이었다. 암석 뒤에 손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구멍 저쪽은 어둠이 잔뜩 고여 있었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것은 동굴 특유의 습하고 탁한 바람이 아니라 외부의 기운을 머금은 싱그러운 것이었다. 복청양은 갑자기 목구멍이 아리아리해 오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당연히 벅찬 흥분을 느껴야 하건만 어째서 이토록 허탈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마침내 외부로 나가는 통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이 동굴을 뚫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고, 계곡에 들어온 지 석 달 만이었다. "후웅, 난 너를 이해할 수 없다." 복청양이 우울한 눈으로 후웅을 보고 있었다. "힘들게 이해하려고 하지마." 후웅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여기가 좋다. 그뿐이야." "네가 여기가 좋다고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복청양이 말했다. "나도 여기가 좋으니까. 여기는 정말로 좋은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여기를 떠나지 않겠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저 바깥 세상에는 여기보다 좋은 곳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함께 가자." "난 가지 않아." 후웅의 태도는 의외로 완강했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나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넌 가고 난 여기에 남는다. 난 여기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야. 여기가 내 고향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어디를 가겠니? 난 여기서 원숭이들과 사는 것이 좋다. 생각 같아서는 너도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지만 너는 저 밖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다. 넌 가라. 하지만 난 여기에 남는다." "정말이냐, 후웅?" "그래." 후웅의 고집스러운 턱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어떠한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복청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웅, 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도 그래.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후웅이 두 팔을 벌리더니 복청양을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은 넓고 따뜻했다. "잘 가라.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와라. 난 여기에 있을 테니까." "그러겠다, 후웅. 난 다시 온다. 반드시……." 복청양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아마도 눈물이리라. 그러나 그는 그게 무엇인지 구태여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 돌이 치워졌다. 복청양은 후웅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후웅도 복청양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은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만 서로의 가슴으로 느끼기만 하면 된다. 복청양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동굴 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생각처럼 깊지는 않았다. 복청양은 걷고 또 걸었다. 간간이 돌무더기가 무너져 앞을 막았지만 언제나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복청양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버섯을 뜯어먹었고 목이 마르면 바닥에 고여있는 물을 마셨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앞을 환히 볼 수 있었다. 하기야 어둠에 익숙해 있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공력은 어둠 속을 가는 데 지장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동굴은 평탄하게 앞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밑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어떤 곳은 그 통로가 너무 좁아 반듯이 누워서 발끝으로만 움직여 나아가야만 했다. 물이 무릎까지 차도록 고여있는 곳도 있었고 종유석이 화살처럼 삐쭉삐쭉 솟아있는 곳도 있었다. 동굴은 길고 길었다. 동굴을 걸으며 복청양은 어쩌면 이 동굴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긴 동굴이라도 끝은 있게 마련이다. 마침내 동굴의 끝이 복청양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눈부신 햇살과 함께 있었다. 복청양은 밖으로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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