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원익의 아들이다. 나이 30세에 음보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으나 양근(지금의 양주) 군수로 있을 때 치적이 뛰어나 인조로부터 표리(옷감의 안감과 겉감)를 하사 받았으며, 벼슬이 자헌대부로 완선군에 습붕되어 80세를 살았다. 그의 아들 수천군은 87세를, 다음 세대 청기군은 83세를, 그 다음 세대 성천군은 84세를 살았다. 오리 이원익은 88세요, 완선군은 80세요, 그의 아들 수약은 79세를 살았으니 270년 동안 7대가 이렇듯 골고루 수를 누린 집안은 실로 드물다.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고 경고한--정유성 정유성(1596__1664)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덕기, 호는 도촌이다 포은 정몽주의 9세손이다. 그는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고 손자 정제현이 숙휘공주에게 장가 들어 인평위에 봉해졌지만, 정유성은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고 생활을 더욱 검소하게 하였다. 하루는 손자며느리인 공주를 보고 말하였다. "공주는 이 시할아버지로 하여금 손자와 함께 오래 같이 살게 해줄 수 없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공주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뒤따르는 법이오. 우리 집은 대대로 청빈한 집안인데 공주의 씀씀이를 보니 과한 듯하오. 부디 절약하도록 하시오." 얼마 후에 손자 인평위가 죽자 방안에 들어가 궁중에서 내사한 의복 둥을 보고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저렇게 사치하고서야 내 손자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구나."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옳다고 한--허적 허적(?__?)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여거, 호는 묵재 또는 휴옹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부수찬을 지낸 뒤 평안 감사를 두 번 역임하고 북경에 세 차례나 다녀왔으며, 1671년엔 영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숙종 6년(1680), 서자인 견이 역모로 사형되자 허적은 성 밖에 나가 왕명을 기다렸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권하였다. "이제 공은 체포되어 죽는 것이 시간문제이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식을 잘못 두었으니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극형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공경함이 아니다." 한숨을 돌린 다음 허적은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길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복장이 너무 사치하여 상인의 신분에 맞지 않기에 잡아 가두고 그 죄를 물었다. 구 뒤에 웬 여자가 와서 욕지거리를 한다기에 그 여인을 가두고 보니 그 연인은 바로 청년의 아내였고 복색 역시 사치스러웠으므로 두 남녀를 모두 곤장을 심하게 때리도록 하였더니 남녀가 다 장살되고 만 일이 있었지. 우리 아이 견이 태어나던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네. '몇 년 전에 청년 부부를 장살한 적이 없느냐?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어찌 법을 알 리 있겠느냐? 반드시 죄를 주어야 될 입장이라면 차라리 그의 부모를 벌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냐? 남의 외동아들과 외동딸을 한꺼번에 죽이다니! 그러고도 어찌 복 받기를 바라느냐? 하늘이 너에게 벌을 내리려고 못된 자식 하나를 주어 너의 집을 망치게 할 것이니 너는 그렇게 알라!' 이런 나쁜 꿈을 꾸고 난 나는 처음에 아이를 기르지 않으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허왕한 꿈을 믿고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는가 하여 그럭저럭 오늘까지 온 것이다 오늘 당하는 이런 재앙은 다 내가 이미 지은 업보로 받은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금관자 대신 쇠뿔로 된 관자를 한 재상--송시열 송시열(1607__1689)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 호는 우암이다.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꿈에,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소자를 성뢰라 하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사사하여 율곡의 학문을 간접적으로 전수받았으며, 또 주자의 저서를 많이 읽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청과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성을 나왔다. 지평 벼슬에 두번째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 진선, 집의, 승지, 찬선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며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효종과의 사이는 특별히 긴밀하여 모두들 한소열과 제갈량의 관계에 비유하였는데 불행하게도 효종이 죽자 효종과 의논하던 긴밀한 뜻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숙종 15년(1689)에 제주도로 귀양가는 도중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으니 이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그가 죽기 전날 밤에 백색의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또 그날 밤에 규성(이 별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함)이 땅에 떨어졌으며 붉은 기운이 지붕 위에까지 뻗쳤다고 그 고을 사람들이 전한다. 우암이 생전에 겪은 일인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양양 물치란 마을을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정립이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보니 그 집 기둥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씌어 있었다. 시장에 호랑이 나왔다는 거짓말도 세번째는 사람들이 믿기 마련 벌떼에 쏘일까 치마 걷어 쓴 것인데 지아비는 정조를 의심한다네 세상 공명이란 모두가 나무 기러기처럼 하찮은 것 웃고 떠드는 좌석에서도 항상 입조심은 해야 한다네 그런데 이 시의 윗구는 바로 썼는데 아래구는 거꾸로 붙여 있었다. 누구의 시냐고 주인에게 물으니, 이 시를 쓴 사람이 떠날 때 한 말이, 내년에 이 날이 돌아오면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어느 외서(유가: 경전 이외의 책)에 나타난 입조심의 출처는 이렇다. 어떤 해동 사람이 신비한 거북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거북이 하는 말이, 이 세상 나무를 다 불태워서 물을 끓인다 해도 나를 삶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한 도인이, '마른 뽕나무로 불을 때도 네가 죽지 않는단 말이냐'고 다그치자 거북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시인했다고 한다. 오늘 이 좌중에서 담소하는 여러분들도 이 거북 이야기에서 입조심하는 경계심을 배워야 한다. 화양동 초당에 매화나무가 많았는데 숙종 15년(1689) 봄에 다 말라죽었다가 1694년 봄에 다시 살아나 잎이 나고 꽃도 피었다고 한다. 우암은 재상을 지낸 신분인데도 금관자를 달지 않고 쇠뿔로 만든 관자를 달고 있었다. 문인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초야에 있으니 초야에 맞는 복색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문인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벼슬할 때는 왜 그리 하셨습니까?" 우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는 나의 위아래 옷이 맞지 않은 때문이었지. 그 때 나는 명주를 살 돈이 없어서 면포로써 관복을 만들었으니 면포에 금관자가 맞을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금관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하사하신 금관자를 받는 일은 예에 속한 일이므로 공손하게 받아서 망건에 달아 두었다가 사례가 끝난 뒤엔 즉시 떼어 낸 것이다. 우암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쇠뿔 관자를 쓰고 있더라. 언젠가 동월이 우리나라 풍속을 기록한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관자로써 신분을 구분하는 우리의 풍습을 비웃는 내용이었지." 그제야 문인들은 우암이 금관자를 쓰지 않고 쇠뿔 관자를 쓰는 까닭이 바로 중국의 제도를 옳게 본뜬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태어날 때 천인이 산구를 보내 온--송준길 송준길(1606__1672)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인조 2년(1624)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우복 정경세의 딸에게 장가 들어 우복의 사랑을 받았다. 1630년에 세마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65년에 대사헌이 되고 또 원자보양관이 되었다. 이웃집에 한 벼슬아치가 살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꿈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사람이 산구를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인인데 이 산구를 송씨 집에 전하려고 내려왔노라'고 하더라." 어릴 적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어쩌다 선생이 무슨 일로 그 날 공부를 가르치지 못하게 되면 송준길이 오히려 선생에게 가르쳐달라고 청하였으며, 그 날 공부를 못하게 되면 밤중이라도 반드시 배우고서야 잠을 잤다고 한다. 또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글씨로 이름이 있는 죽창 이시직이 그의 글씨를 보고, '네 글씨는 이미 나보다 낫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이 때 준길의 나이 열 살 정도밖에 안 된 때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소학"과 "가례 고증"등을 배웠다. 숙종 13년(1687)에 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법도에 맞게 상례를 치러 칭찬을 들었으며, 혹 예에 대하여 조그만 의문이 있어도 반드시 스승인 김장생에게 물었으므로, 앞으로 예학에 대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효종이 이원(여승방) 두 채를 헐자 이를 축하하고 또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옛날 주자도 절을 헐어 서당을 지으면 일거양득이라서 좋다고 하였습니다. 뜯은 헌 재목과 기와로 북학 서당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효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성균관의 동재와 서재를 지었다. 67세를 살았고 시호는 문정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산적 두목으로부터 목숨과 재물과 여인을 얻은--이완 "마침 사냥을 나가고 없는데 밤이 깊어야 돌아올 것입니다. 손님과 내가 한방에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 둘은 단칼에 죽을 것입니다. 나야 어차피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만 손님이야 보아하니 어느 댁 귀공자 같은데 무엇 때문에 헛된 죽음을 자초하려 하십니까? 속히 이곳을 피하여 끔찍한 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인의 말에 이완이 답하였다. "죽을 때 죽더라도 허기나 면해 봅시다. 배가 몹시 고프니 찬밥 덩이라도 있으면 좀 주시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은 부엌으로 달려나가 밥을 짓고 고기를 장만하여 밥상을 차려 내왔다. 술병도 함께 내왔다. "그렇게 시장하신 줄도 모르고 저는...." 여인은 얼굴에 약간의 홍조마저 띠고 상머리에 앉아 반주를 권했다. 이완은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고기도 밥도 실컷 먹었다. 술기운이 돌자 이완은 여자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그는 여인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조금 전과는 달리 여인은 매우 행복한 얼굴이었다. 이완은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당겼다. "이러시면 안되는데...."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렵소? 우리가 아무 일이 없다고 해도 그것을 누가 믿어 주겠소? 또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간단하게 죽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시오." 이완의 손은 이미 여인의 젖가슴을 매만지고 있었으며, 남녀의 얼굴은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몸으로 전달되었다. 순간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는 죽었네요. 이렇게 하지요?" 여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완은 더욱 태연한 목소리로 우선 여인부터 안심시킨 뒤에 바깥을 힐끔 쳐다보았다. 한 사나이가 잡아온 짐승들을 뜰에 내려놓고 이제 막 허리를 펴고 방문 쪽으로 다가서는데 키가 8척은 되어 보이는 우람한 체격이었다 벌컥 방문을 열며 들어서는 사나이를 보니 털이 수북하고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리에 누운 채 사나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치민 도둑은 성난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너는 웬 놈이냐?" 겁내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짐승을 쫓아 산으로 들어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여기까지 온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마시오." "이놈 봐라,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그래 길을 잃고 집을 찾아 들어온 놈이라면 저 바깥 사랑방에 있어야지 남의 안방에 들어와 남의 유부녀와 간통을 한단 말이냐? 또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주인이 들어오는데도 인사 한마디 없이 자빠져서 남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단 말이냐? 이놈이야 말로 간 큰 놈이 아니냐!" 험상궂은 얼굴은 더욱 험악해지고 칼을 잡은 오른손에 힘을 불끈 주면서 이완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완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미소까지 머금고 조용하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설령 사랑방에 있다고 한들 깊은 밤 산 속에서 남녀가 한집에 있었는데 설령 피차 모두 결백하다고 한들 당신이 믿어주겠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 뭐 그렇게 겁낼 게 무엇이요. 내 목숨은 그대 손에 달려 있으니 처분대로 맡기겠소." 도둑은 킬로 치지 않고 두선 새끼줄로 이완을 꽁꽁 묶어 천장 대들보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안주와 술을 갖고 오라고 시켰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서 있던 여인은 부엌으로 나가 고기를 굽고 술상을 차려서 내왔다. 도둑은 목이 탔던지 우선 술항아리에서 술 한 사발을 들이마시더니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째 삶아 온 노루의 뒷다리를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칼끝으로 뭉텅 베어서 씹어 먹다가 말고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곧 죽을 놈이지만 곁에 두고 혼자 먹으니 술맛이 나야 말이지." 그는 칼끝에 고기 한 점을 찍어 들보에 묶여 있는 이완의 코앞에 바짝 들이댔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고기를 받아 먹으랴 싶어서 한 행동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완은 얼른 입을 벌리고 고기를 맛있게 받아먹고는 술도 한 잔 달라는 것이 아닌가! 이완의 대담성에 놀란 것은 도둑이었다. 도둑은 이완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과연 장사로군!" 이완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죽을 사람 앞에 웬 농담이시오. 옛적에 항우가 번쾌를 보고 장사라고 했다더니 이제 공은 그 말을 네게 써먹는 것이오? 내가 번쾌라면 당신은 초패왕이란 말이지요?" 도둑은 '우하하...' 하며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한바탕 웃고 나서 땅바닥에 칼을 놓고 벌떡 일어나 이완의 결박을 풀어 주고 손까지 잡으면서 말했다. "천하의 기남자를 몰라보고 내가 너무 무례했네. 장차 나라의 간성이 될 재목을 내가 어떻게 해치겠나? 어처구니없는 몇 마디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그대를 이미 나의 지기로 여기고 나의 남은 재산을 모두 그대에게 양도하니 그렇게 알게나. 남자가 무슨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니 나의 청을 거절하지 말게."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이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실로 어색한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도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여자 말인데, 나와 정식 혼례를 치른 사이도 아닐 뿐 아니라 공과 이미 만리장성을 쌓았을 테니, 내가 데리고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 이제 한잔 술로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지!"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가자 두 사나이는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누구의 제의로 맺어졌는지 두 사람은 어느새 결의 형제가 되어 형님 동생 하면서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하였다. "이봐 동생! 먼 후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내 목숨이 동생 손에 달려 있을 때가 반드시 올 걸세. 동생! 설마 그 때 오늘의 내 부탁을 잊지는 않겠지? 동생! 그럼 잘 있게." 이 말을 남기고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도둑은 훌쩍 떠났다. 이완도 그의 말대로 그가 남긴 재산들을 모두 정리하여 여자를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완은 무관으로 출세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포도대장이 되었다 어느 날 산골로부터 산적 두목이 잡혀 왔는데 자세히 보니 지난날 결의 형제를 맺은 바로 그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장 이완은 그와의 지난날의 인연을 효종에게 자세히 아뢰고 특별한 윤허를 받았다. 드디어 산적은 석방되고 무관의 한 직책을 맡아 일하게 되었으며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얼마 뒤엔 무과에 대비하여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마침내 합격하고 나중엔 병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완이 효종의 신임을 받고 북벌에 대한 깊은 생각을 주고받을 때의 일이다. 국가 간성지재를 구할 목적으로 무예가 뛰어나거나 기골이 장대한 사람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건 조정에 추천하던 시절이었다 이완이 훈련대장이 되어 수분(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일)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훈련대장의 행차가 용인 어느 주막에 다다랐을 때였다. 주막 마루에 키가 10척, 얼굴이 한 자나 되어 보이는 수염이 텁수룩한 청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옷은 남루하고 살은 없이 바싹 말랐지만 기골은 장대하고 번쩍이는 두 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탁주 한 동이를 꿀꺽꿀꺽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이완은 말에서 내려 사람을 시켜 그 청년을 불렀다. 불려 온 그 청년은 이완 대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돌 위에 거만스레 걸터앉아서 이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례는 탓하지 않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였다. "자네 성명이 뭔가?" "박탁입니다." "무엇 하는 사람이냐?" "본시 사족인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자랐으며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서 팔아 그것으로써 노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술을 더 마실 수 있느냐?" "아, 남아가 되어서 어찌 잔술을 사양하겠습니까!" 이완은 돈 100문(1돈에 상당함)으로 술 한 동이를 사서 자신이 한 사발만 마신 뒤에 나머지는 모두 박탁에게 주니 '벌컥벌컥' 순식간에 술 한 동이를 다 마셔 버렸다. "너 혹시 이완 대장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내가 바로 이완이다. 지금 조정이 널리 인재를 찾는 길이니 너는 나를 따라 한양으로 가겠느냐?" "노모가 계시니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겠구나! 그러면 내가 너의 모친을 만나 볼 터이니 앞장서서 너의 집까지 길을 인도하라." 이완은 박탁을 따라 시골길 10여 리를 가서 낡은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이완은 박탁이 사립문 밖에 깔아 주는 자리에서 아들을 따라 나온 그의 어머니의 인사를 받았다. 입은 옷은 초라했지만 말씨나 행동은 양반집 아낙의 품위를 잃지 않은 60세쯤 되어 보이는 단정한 부인이었다. "저는 훈련대장 이완이란 사람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자제를 만났는데 첫눈에 인걸임을 알았습니다. 훌륭한 자제를 둔 것을 경하합니다." 부인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옷깃을 여미고 대답했다. "개돼지처럼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그토록 과찬해 주시니 이 촌부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조정에서는 인재를 널리 구하는 중입니다. 이번에 자제를 우연히 만나 보고 그냥 두고 가기는 너무 아까운 인재 같아서 한양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 부인께서는 허락하실는지요?" "저 아이가 독자로 태어난 후, 남편을 사별하고 오직 모자가 외롭게 서로 의지하여 살아왔습니다. 황송한 말씀이지만 장군의 명에 따를 수 없습니다." 부인의 거절이 완강하자 이완은 재삼 간청했다. 이완의 간곡한 청에 감동되었는지 드디어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포부와 뜻을 품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물며 장군의 간곡하신 권고가 이러한신데 아녀자의 구구한 사정에 얽매여 장군의 말씀을 저버리겠습니까?" 이완은 부인의 용단에 감사한 뜻을 표하고 박탁을 데리고 발길을 한양으로 돌려 대궐로 향하였다. 이완은 효종은 박탁을 대면하고 몇 마디 물었다. 임금 앞에 나온 박탁은 절도 하지 않은 채 앉았다. 효종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몸집은 그렇게 큰데 어찌 그렇게 말랐느냐?" "대장부가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안 그럴 수 있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래, 그 말이 맞다. 네 대답이 마음에 드는구나." 효종은 박탁과의 첫 대면에서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이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에게 무슨 벼슬을 내려야 마땅하겠느냐?" "우선 신이 데리고 가서 대략 가르친 뒤에 직책을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그 날부터 이완은 박탁을 가까이에 두고 좋은 음식과 옷을 주고 병법과 무예를 하나하나 가르쳤다. 또 예의 범절도 가르쳤다. 어찌나 머리가 영리하던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성과를 보였다. 또 효종의 관심도 매우 높아 박탁의 무예 공부를 자주 물었다. 혹 이완이 북벌에 대해 박탁에게 상의하면 이에 응답하는 박탁의 지모는 매우 우수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1년이 되어 가는 어느 날 국상이 났다. 효종이 승하한 것이다. 1659년 5월 4일의 일이었다. 효종의 인산이 끝나자 박탁은 작별을 고하러 왔다. 이완은 깜짝 놀라 만류하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나와 너 사이는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정의는 부자간과 같은 사인데 네가 어떻게 차마 나를 버리고 떠난단 말이냐?" "제가 여기에 온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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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돕지 않아 갑자기 국상을 당했으니 이제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할일 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옷과 밥만 축낼 뿐이며 이런 낭비는 결코 옳지 못합니다." 박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