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5편 (5/16)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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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2 - 5편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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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원년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지평, 장령이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현종 원년(1669)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론이 일어나자 송시열 등이 주장하여 채택한 기년설(만 1년)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과 정권다툼이 치열하였다.
동해에 해일이 있을 땐 수해가 있어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는데 허묵이 동해를 찬미하는 비석(일명 동해척조비라고 부름)을 세운 뒤로부터 해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숙종 1년(1675) 왕명으로 연천에 집을 지어 살게 하자 허묵은 그 집에 은거당이란 편액을 달았다.
전서체는 신우비를 본으로 삼았는데 필력이 매우 굳세다는 평을 들었다.
어느 날 판서 이정영이 허목에게 전서체를 그만 쓰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허목은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침해가 동상에 떠오르니 연기와 노을이 창문에서 모락모락 저 창문 바깥일은 알 수가 없고 갈필로 과두문자만 쓴 다오.
허목이 죽기 2, 3일 전 밤에 이상한 짐승이 내려와 지붕에 누워 있었는데 그 짐승이 눈에서 나오는 불빛이 멀리까지 비추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허목이 죽던 날 어떤 사람이 그를 조려에서 만났는데, 초립을 쓴 시종이 따른 것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지만 허목이 이상한 짐승을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날이 바로 허목이 죽은 날임을 그 뒤에 알았다고 한다.
원혼들로부터 철저히 복수 당한--김석주 김석주(1634__1684)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사백, 호는 식암이다.
잠곡 김육(1659__1658)의 손자다 효종 8년(1662) 증광문과에 장원하였다.
서인 중의 한당에 가담하여 집권 세력인 산당의 미움을 사서 중용되지 못하였다.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인 허적 등과 손잡고 송시열, 김수항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 도승지 등 요직에 등용되었다.
남인들의 세력이 강화되자 이번엔 산당과 손잡고 남인 제거에 앞장섰다.
허적이 유악사건으로 실각한 틈을 타서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남인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일등에 청성부원군이 되었다.
김석주가 죽은 지 6년 뒤에 남인들의 그의 훈작은 삭제되고, 아들 김도연은 자결하고, 부인 황씨는 변방으로 떠도는 불운을 겪었다.
그런데 우상에 청성부원군이란 훈작을 받은 김석주의 집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은 김석주가 죽자 김석주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평안도 무인 모갑에게 붙어서 전에 받은 원한을 철저히 복수했다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신분이 천한 무인에게 큰 교훈을 얻은--정재숭 정재승(?__?)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자고, 호는 숭와다.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다.
효종 1년(1651)에 진사가 되고 현종 1년(1660)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숙종 11년(1685)에 우의정에 올랐다.
정재숭이 산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무인 최씨를 만났다.
이 최씨는 신분이 미천한 무인이지만 가정의 법도가 엄하기로 이미 소문이 나 있던 터였고, 어릴 적에 한번 안면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가정을 다스렸기에 마을 선비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정도인가 그 내력을 알고 싶던 차였다.
마침 비가 연일 오고 그와 한방에서 묵게 되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대는 활쏘기와 말타기로써 발신한 몸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을 터인데 마을 선비들로부터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는가?" 그 무인은 즉시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소년 시절의 일입니다.
산골에 사는 종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다른 사람은 없고 종매 혼자 있었습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저를 안았습니다.
제가 그 때 벌떡 일어나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종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못생긴 덕이었으며, 만약 그 여자의 자태가 요염했던들 저는 그 때 틀림없이 짐승같이 욕망을 채웠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마음 한쪽에 늘 부끄러운 구석이 있었는데, 언젠가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있는 서당 옆에서 화살을 만들고 있을 때 귀에 들려온 서당 훈장님의 말씀이 저를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무슨 뜻인가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남녀가 같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것이므로 아예 어릴적부터 남자와 여자는 엄격하게 구분해서 앉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진작 이런 말을 들었던들 혼자 있는 종매의 집에 가지 않았을 터인데'하고 크게 속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즉시 그 훈장님께 간청하여 그 말 언문으로 받아 와서 집에 붙여 두고 그대로 집안을 다스렸습니다." 유응부의 계시를 받은 숙종조의 충신--오두인 오두인(1624__168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원징, 호는 양곡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나이 겨우 열 살에 시를 지어 명나라 사신 정룡을 놀라게 했다.
인조 26년(1648)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또 장원하였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원자정호 문제로 남인이 송시열 등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한 일)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오두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하였다. "내가 조정의 은혜를 입고 벼슬이 경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어찌 자리에 연연하여 입을 다문단 말인가!" 오두인은 박태보, 이세화와 함께 반대 상소를 하여 국문을 받고 의주로 압송되기 위해 의금부에서 출옥하자, 사람들은 충신의 얼굴을 보겠다고 장안 길을 메웠다.
의주로 가는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유응부라고 쓴 쪽지를 받고 그를 만났는데 그는 오두인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감도 오래지 않아 우리 있는 곳으로 올 터이니 그 때 만납시다." 친국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한--이세화 이세화(1630__1701)의 본관은 부평이고 자는 군실, 호는 쌍백당 또는 칠정이다.
이이재의 아들로 이희재에게 입양되었다.
효종 8년(165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등 5개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때 오두인 등과 함께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친국을 당하고 정주에 유배되었다.
친국받을 때 반대 상소문을 누가 썼느냐는 질문에 이세화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박태보는 붓만 잡았을 뿐이고 내용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 말에 숙종은 진로하여 고문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이세화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여 항변하였다. "신은 평소에 항상 죽을 땐 국사를 위해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원을 풀게 되었으니 여한은 없사오나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신의 죄가 비록 크지만 담당 옥리에게 맡겨 다스려도 충분할 터인데 이렇게 밤에까지 친국을 하시니 옥체에 해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를 형간(고문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함)이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이세화는 정주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1694년 갑술옥사롤 이세화는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서 호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공의 힘으로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칭송받은--박태보 박태보(1654__1689)의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사원, 호는 정재다.
박세당의 아들이다.
숙종 3년(1677) 알성문과에 장원한 뒤 전적, 예조 좌랑 등을 역임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마침 파직되어 집에 있던 박태보는 오두인, 이세화와 더불어 반대 상소를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친국을 받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살이 찢기고 피가 흘렀으나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 이르러 숨이 끊어졌다.
이때 박태보의 나이 겨우 36세였다.
박태보는 윤선거의 외손으로 유생 시절에 올린 상소문에서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를 호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송시열에게 원한을 사고 있었는데,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가 목숨을 잃자 송시열은, '공의 힘을 입어 윤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면했다'고 찬탄하고 이미 써 놓았던 자신의 글 가운데 박태보에 관한 것은 모두 삭제하였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달리는 '말'로도 못 따라 잡는다고 한--이현조 이현조(1654__?)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계상, 호는 경연이다.
영상을 지낸 이성구의 손자다.
숙종 7년(1681)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 대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이현조는 궐문 밖에서 자리를 깔고 목놓아 울면서 폐위 중지를 호소했으며 그가 정청할 때 재신 민종도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폐위의 일을 목숨을 걸고 간쟁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맞는 일인가?" 이현조는 민종도의 말에 화를 내며 말했다. "한번 입에서 나온 말은 달리는 말도 못 따라잡는 법이오! 말하기 쉽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오.
군부가 허물이 있으면 신자된 도리에 어떻게 간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이현조는 승지를 거쳐 강원 감사를 지냈으며 통천 임소에서 죽었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던--윤휴 윤휴(1617__1680)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희중, 호는 백호다.
효종 때 재학과 행의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 자의, 종부시 주부, 지평 등 여러 벼슬이 재수 되었으나 교지를 모두 반려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이유태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윤휴의 고고한 자세를 우려하였다. "윤휴가 고고함을 굽히지 않고 교명을 모두 반려한 것을 보면 이 세상을 온통 벌레처럼 가볍게 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송시열이 윤휴의 집에 들르면 며칠씩 묵으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담소하였다.
그것을 안 윤휴의 어머니는 아마도 송시열이 보통 손님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문틈으로 엿보고 나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들을 불러 신신당부하였다. "내 그 사람을 보았는데 심술궂고 엉큼하며 그 말씨 또한 안정되어 있지 않고 아마도 속마음이 어질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조심하여라!" 그러나 어머니의 염려를 이해 못한 윤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손님은 큰 선비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염려는 적중하여 윤휴는 사문난적(유교의 교리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비난받은 사람)으로 몰렸으며, 허견의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끝내 사사되기까지 송시열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을 안 뒤에야 사람들은 윤휴 어머니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경신대출척(1680년 허견의 역모 등으로 남인이 실각한 사건) 때 남인들이 서리를 만나 대거 몰락하게 되었으며, 이 때 윤휴의 형제들 중 다섯은 유배되고 한 명은 배소에서 죽었다.
과거 급제를 기뻐하다 장인으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은--권변 권변(1623__1726)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이숙, 호는 수초당이다.
숙종 7년 (168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하필 창방일(합격자 명단을 붙이고 발표하는 날)이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 날이었다. "대과에 급제한 기쁨을 안고 그의 장인 되는 소두산에게 인사를 갔으나 문전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소두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데, 기껏 한다는 짓이 중궁이 폐위되는 슬픈 날 자네는 과거 합격의 기쁨을 즐기다니, 그래서야 어찌 사군자의 처신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날 내가 자네를 만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일세." 이 말에 충격을 받은 권변은 즉시 달려가 문밖에 꿇어앉아 사과하였다. "장인의 말씀을 듣고 이미 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이제부터는 벼슬길에 결코 나가지 않고 근신하는 일로 일생 동안 지킬 법으로 삼겠습니다." 소두산은 그제서야 비로소 권변의 문안인사를 받고 엄하게 한번 꾸짖은 뒤에 '수당초(처음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라는 뜻)'이란 글자 석자를 써 주었다.
권변은 그 당부를 일생 동안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조정에서 부제학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결심을 굽히지 않고 살았다.
시호는 문정이다.
꿈에 생사당을 가느라고 임금 앞에서 졸았던--이민서 이민서(1633__1688)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이중이다.
영의정 이경여의 아들이다.
효종 1년(1650)에 진사가 되고 2년 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숙종 14년(1688) 동경연(동지경연사)으로서 야강에 참여했는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면서 졸기 시작했다.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석한 대신들이 황공하여 그를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뜻밖에도 숙종은 그를 깨우지도 못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본시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니 술이 취했을 리는 없고....
어쨌든 졸게 된 사연을 먼저 본인에게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밤이 깊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이민서는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땅에 엎드려 벌을 청하고 자초지종을 임금께 아뢰었다. "신이 지난해 정사년(1677) 광주 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인 박광옥의 사당을 중수하고 김덕령을 함께 제향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갑자기 피곤해지면서 졸음이 덮쳐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신이 광주에 초청되어 갔습니다.
새로 지은 사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신은 그들에게 후한 음식 대접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숙종은 평소에 그가 지방 수령으로 나가면 선정을 베푼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즉시 그 날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명하였으며 조금 후에 그 보고가 올라왔다.
예측했던 대로 광주 사람들이 그가 목사로 있을 적에 베푼 선정을 잊지 않고 그를 위해 생사당(지방관이 선정을 했을 때 그 지방민이 은혜를 잊지 않고 그가 죽기 전에 세운 사당)을 세웠다는 보고였다.
이민서가 사국(실록청)에 있을 때 영유 군수로 있는 백씨, 중형인 죽서(이민적의 호)와 함께 동산에 올라가서 놀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곳을 학사대라고 불렀다.
또 신정은 서하옹(이민서의 호)을 설봉고송(눈 덮인 봉우리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이라면 그의 고고한 인품을 평하였다.
한쪽 다리가 잘린 뒤 더욱 출세한--윤지완 윤지완(1653__1718)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숙린, 호는 동산이다.
판서 윤강의 아들이요 좌의정 윤지선의 아우다.
효종 8년에 사마시, 현종 3년(1662)에 증광문과에 그의 형 윤지선과 나란히 합격하였는데 형보다 윗등급인 을과로 급제하였다.
윤지완이 여덟 살 때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눈이 나리니 온 산천이 하얗고 하늘이 높다라니 해와 달이 밝구나 글재주를 본 어른들은 그의 장래에 기대를 걸었다.
언젠가 중국인 점쟁이에게 점을 치니 그 점괘 풀이로서 단지 '무족가관(발이 없어야 볼 만하다는 뜻)' 이라는 네 글자만을 써 주었다.
그의 재주가 그렇듯 높은데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병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자른 뒤에야 비로소 현달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했으며 청백록에 기록되었다.
시골 선비에게 속아 급제시킨 상사관--김진규 김진규(1658__1716)의 본은 광산이고 자는 달보, 호는 죽천이다.
김만기의 아들이자 인경왕후의 오빠다.
비가 오는 어느 날 김진규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 광성부원군이 우의와 말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김진규는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어서 돌아왔다.
그 꼴을 본 아버지가 까닭을 물었다. "아비가 보내 준 말과 우의는 어떻게 하고 지금 너의 그 꼴이 무엇이냐?" 김진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신 것이 너무 사치스러워 저의 신분엔 맞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아버지 김만기는 오히려 자식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진규는 시관으로도 이름이 나 있었으므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는 거자(입시 지만생)들에게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고향으로 성묘를 갔다가 회시(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보는 과거, 복시라고도 함)가 임박하여 그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오는 길인데, 말을 타고 줄곧 책을 보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시골 선비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김진규가 점심을 먹기 위해 주막에 들렀을 때도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시골 선비를 만났다.
책을 그렇게 열심으로 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누구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저는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인데 과거운이 없는지 아무리 열심으로 공부하여도 번번이 낙방이어서 참으로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보고 있는 그 책은 무슨 책이기에 줄곧 손에서 떼지 않지요?" "제가 지은 글의 초고인데 요즈음 제 정신이 흐려져서 잘 잊어버리므로 늘 보아야 합니다." 김진규가 양해를 얻어 그 책을 펴 보니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공부가 이런 수준인데 여러 번 낙방을 하였다니 이것은 전적으로 유사 (담당 시험관)의 책임이오." "예.
하도 여러 번 낙방을 하고 나니 이제는 과거 공포증이 생겨서 과장(시험장소)에만 들어가면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모두 잊어버리므로 이렇게 항상 눈에 익혀 두어야만 한답니다.
사실은 이번에도 저는 응시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노친의 청이 간절하시어 부득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선비의 말을 들은 김진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한 번만 더 노력해 보시오 공든 탑이 무너질 리 있겠소?" 그들은 길을 재촉하여 서울에 당도했으며 선비는 과장으로 들어가고 김진규는 상사관을 맡았다.
그 선비의 시권을 훑어보니 그 가운데 글자를 잘못 쓴 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김진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 선비의 것이다.' 김진규는 상시관으로서 다른 시관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이 시권을 살펴보니 늙은 선비의 글솜씨가 분명하다.
이번에 우리 시관들이 적선 한번 합시다." 다른 시관들의 동의를 얻어 김진규는 그 사람을 발탁하였다.
방을 붙이기 위하여 봉한 부분을 뜯어보니 나이가 별로 많지 않았다. '혹시 내가 엉뚱한 사람을 뽑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속으로 의아해 하다가 신은례(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ㅊ아다니며 하는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물어 보았다. "여러 차례 낙방 끝에 이렇게 급제한 것을 거듭거듭 축하하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그의 말이 전과 달랐다.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응시하였는데 요행으로 급제한 것입니다." 김진규가 다시 말하였다. "이제 양친 봉양을 잘하게 되었으니 무척 다행일세 그려!" "아닙니다.
저는 양친이 다 안 계십니다." 지난번 길에서 만났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대답이어서 김진규는 불쾌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어찌하여 지난번엔 나를 속였느냐?" 그때서야 그는 머리를 숙여 사죄하였다. "이번 회시에 대감께서 상시관을 맡을 것이라고 짐작되어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급제를 급제를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그만 저지른 일입니다.
저의 죄를 잘 알겠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명을 듣고 난 김진규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어설프게 웃고 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기생들로 하여금 누추한 이름을 남기게 한--한지 한지(1675__?)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석보, 호는 월악이다.
집의 한태동의 아들이다.
숙종 25년(1699)에 생원이 되고, 170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한지가 충청도 감사로 있을 때 공무로 청주에 간 적이 있는데 천주에서 묵은 지 3일째 되는 날 밤이었다.
자다가 손끝에 뭉클하고 부드러운 물체가 와 닿는 감촉을 느꼈다.
표동표동한 여인의 살결이었다.
재색을 두루 갖춘 천주 관기 강도가 감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더니 그날 밤에 몰래 이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강도는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사또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만약 감사 나으리의 사랑을 입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한다고 하시기에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이렇게 들어온 것이어요." "아, 그러냐? 그것 어려울 것 없다.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오면 될 것 아니냐." 그 날부터 13일 동안 한 이불 속에서 잤지만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한지가 일을 마치고 청주를 떠나던 날, 기생 강도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느냐? 아직도 나에게 정이 남았느냐?' 강도는 눈물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감사 나으리와 무슨 정이 있겠습니까? 명색이 기생으로 끝내 깊은 인연 한 번 맺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속이 상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니까 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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