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던 천주 목사가 한 마디 거들었다. "강도는 누추한 이름을 남기었고 감사는 꼿꼿한 이름을 남겼도다." 한지는 수많은 기생들의 시중을 받았지만 한 사람의 기생도 범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 한가한 날 막장을 불러 조용히 물어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보아라. 자네는 객고를 풀기 위해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있느냐?" 그 막장이 이실직고하자 한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 몸이나 단속해야지, 내가 무슨 수로 다른 사람까지 막겠느냐. 다만 지나친 것만 삼가라!" 남을 돕는 일로 즐거움을 삼은--임준원 임준원(?__?)의 자는 자소다. 인품이 잘나고 기상이 늠름하며 말솜씨가 있었으나 살림은 가난하고 부모는 연로하여, 오랜 생각 끝에 뜻을 꺾고 내수사(궁중에서 쓰는 물자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말아보던 관아)의 벼슬아치가 되어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수천 냥 부자가 되자 임준원은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내 재산도 이만하면 부모를 봉양하고 조상 제사를 모시는 데 충분하니 이제 이 자리를 떠나자!" 임준원은 그날로 그 벼슬을 그만두고 들어앉아 읽고 싶었던 글도 읽고 친구들과 사귀면서 자신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친구들을 보면 유찬홍, 홍세태, 최대립, 최승태, 김충렬, 김부현 등이었는데 유찬홍은 바둑과 시로 유명했고 호는 춘곡이며, 홍세태는 시로 이름이 나 있었고 호는 창랑이다. 나머지 다른 친구들도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유찬홍은 술을 즐겨 마셨고 주량이 두어 말은 되는 대주객이었고, 홍세태는 양식이 자주 떨어지는 가난한 살림을 하였다. 임준원은 유찬홍을 자주 불러 술을 양껏 대접하였고, 홍세태에게는 굶지 않도록 양식을 대주었다. 또 좋은 날 좋은 경치는 빼놓지 않고 친구들을 초청하여 시를 짖고 읊조리며 풍류를 즐겼다. 임준원의 생활은 남을 위해 베푸는 일에 즐거움을 찾으면서도 본인은 항상 모자람을 느꼈다.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은 혼사나 장례를 치를 때는 으레 임준원의 도움을 믿게 될 정도였다.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숙종15년 서인과 남인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에서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정호 문제를 계기로 중전 민씨가 폐위되었으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유배, 사사되고 서인이 대거 축출되어 남인 정권이 등장하였다 경종 취임직후인 신축년과 임인년에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을 보호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 및 추대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노론의 당인들이 정권을 획득하여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파를 축출하여 당쟁이 국에 달하였다. 일본 땅에서 제주 귤을 먹은--신유한 신유한(1681__?)의 본관은 영해이고 자는 주백, 호는 청천이다. 숙종 39년(17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제술관으로서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1719년에 일본에 갔다. 신유한은 일본의 접빈관인 아메노모리 호슈(일본의 대학자로서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조손 사신의 접대를 전담했음)와 마주 앉아 귤을 먹으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나라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귤이 나지요. 특히 제주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맛은 이 귤만 못합니다. 귤에도 좋고 나쁜 종류가 있나 보지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맛이 좋고 나쁜 것은 그 나라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나라 남도에 조선 선박이 표류하여 떠내려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배에 탔던 사람과 물건은 거의 침몰되고 거의 침몰되고 귤 한 상자와 문서 하나가 갑판 한쪽에 남아 있어 그 귤이 바로 제주 목사가 대궐로 보내는 공물임을 알았지요. 그 섬사람들은 그 귤이 외국산이라고 귀하게 여겨 그 씨를 받아 퍼뜨리고 제주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귤이 바로 그 제주귤이랍니다." 이처럼 신유한은 이웃 일본과의 교유와 문물에 밝았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신유한이 지은 촉석루 시에 다음과 같이 시구가 전한다. 천지는 임금을 위해 삼장사를 보내었고 강산은 나그네를 위해 여기 촉석루를 남기었네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배나무를 안고 통곡한--유혁연 유혁연(?__?)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회보, 호는 야당이다. 어릴 적부터 출중하여 뒤에 장인이 된 당시 병마절도사 남이흥의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에 해미에 살 때였다. 동네 앞에 큰 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 제단이 있었는데 항상 그 제단 위에 올라앉아 마치 대장처럼 아이들을 지휘하곤 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대자의 명을 어겼다고 군령을 집행한다며 그 아이를 낫으로 혼내 주려는 것을 본 아버지가 깜짝 놀라 그 낫을 빼앗았다. 유혁연은 독서도 좋아하여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와 "악무목전"(송의 충신인 악비의 전기)을 읽을 때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 또한 남달라 큰 베개를 만들어 함께 사용하였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유효걸이 안주에서 전사하자 형제가 함께 출전하여 싸웠으며, 남한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집에 돌아와 집 뒤에 있는 배나무를 안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배나무를 '유혁연 나무'라고 불렀다. 이듬해 세자가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자 유혁연은 모화관(조선조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집)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남겼는데, 사람들은 이 시를 읊조리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서쪽 강에 내리는 부슬비는 군신간의 눈물이요 대궐 위에 모여 있는 구름은 부자간의 정일세 인조 22년(1644)에 무과에 급제, 덕산 현감을 거쳐 선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유혁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나운 북풍이 눈을 몰고 새벽에 닥치니 살을 저미는 추위가 앓아 누운 이불 밑으로 스며드네 아침에 기를 쓰고 일어나 활을 잡고 앉았으니 적병을 모조리 잡는 사냥 오직 그 마음뿐이라네 삼도수군통제사, 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대거 축출될 때 영해로 유배되고, 이어서 대정으로 옮겨 위리 안치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상복 차림으로 밭을 간--최신 최신(1642__1708)의 본관은 회령이고 자는 자경 호는 학암이다. 민정중이 함경도 감사로 있을 때 육진을 순회하다가 상복 차림으로 들에서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를 불러서 이야기해 본 뒤에 그를 발탁하였다. 최신은 민정중의 주선으로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더욱 학문을 익혔으며 그 인연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중국의 곽임종과 모계위의 관계에 비유했다. 최신은 시골 출신으로 부모상을 맞아 성심껏 예를 지킨 연유로 민정중에게 발탁되어 인재로 성장했으니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일이다. 최신은 현감으로 있을 적에 윤휴의 작용에 의해 유필명과 더불어 의금부에 하옥되어 형신을 받고 사천에 유배되었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되자 풀려 나와 제릉 참봉, 사옹원 직장, 광흥창 주부를 역임했다. 숙종 15년91689)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제기되자 윤휴의 당 김몽양에 의해 송시열의 심복으로 단죄되어 광양에 유배되었다. 숙종 20년(1694)에 석방되었는데 이 때 최신은 고향 회령을 떠나 남쪽으로 아예 집을 옮겨왔다. 숙종 31년(1705) 송시열의 문인 유필명의 말을 듣고 남에게 변무하는 글을 의뢰하였는데 그 사람이 변무문에 중국의 고사인 태정과 태갑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준 것을 그대로 유필명에게 준 일이 있었다. 유필명이 이 변무문으로 말미암아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는 도중에 최신을 끌어들인 때문에 최신은 변무문 사건에 연루되어 가혹한 추국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유필명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광주에 은거했다. 서북인 출신으로 최초로 충청 병사가 된--전백록 전백록(?__?)은 온성의 토병이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흰 사슴을 보고 낳았다고 하여 이름을 백록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벼슬길에 올라 옴은 그대로 주고 뜻이 다른 글자로 고쳐 백록이라 하였다. 전백록이 경흥부사로 있을 적에 경성을 지나다가 당시에 북평사(정 6품 무관직. 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임) 이동언(1662__1708)을 만났다. 이동언은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북평사로 온 사람이며 사헌부에 있을 적에 직간으로 이름을 얻은 때였다. 이 때 전백록도 북방 호걸이란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그를 만난 이동언은 단도직입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이곳 북평사로 부임한 이후로 나의 시책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부사에게 듣고 싶소. 들은 것이 있으면 숨김없이 말해 주시오." "이 북쪽지방이 비록 한양에서 멀다고는 하지만 공이 사헌부에 있을 때 보여준 기탄 없는 비판으로 떨친 명성을 못 들을 리 있겠소?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공이 부임한 뒤로부터 날마다 기악을 잡히고 별로 하는 일이 없으니 처음에 떨치던 병마절도사의 위신이 이제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 풍류와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마들기 쉬운 것이오. 공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니 특별히 조심하여 자중하시오. 만약 앞으로 풍류와 여색을 멀리할 자신이 없거든 다시는 전처럼 남의 잘못을 비판하지 마시오. 비웃음을 살 뿐이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비수 같은 날카로운 비판에 이동언은 할말을 잊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옷깃을 여미고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나중에 조정에 돌아온 이동언은 전백록의 당당한 위풍과 과감한 성격 등을 조정에 널리 알리고 그를 크게 등용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전백록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북인도 지방 감사에 써야 한다는 논의만 있을 뿐 아직은 시행되지 않았는데 전백록이 처음으로 충청수사에 발탁되었다. 늦게 글을 배워 출세한 무인--전종영 전종영(?__?)의 본관은 강계다. 무예가 뛰어나 창주진첨사가 되었으나 본시 글을 배운 적이 없어 무식하였다. 첨사로 부임한 뒤에 감영(감사의 집무처)과 병영(병영절도사가 있는 곳)에 올리는 보고서를 쓸 수 없어 늘 아쉬운 소리를 하며 군관의 손을 빌려 작성하는 실정이다. 이런 연유로 후에 전종영은 크게 발분하여 글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향리에서 사략 초권을 빌려다 두고 글을 잘 나는 졸병 한 사람을 불러 선생으로 삼고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글줄 곁에 그 글자의 뜻과 음을 모두 언문으로 써 놓고 부지런히 외고 썼다. 그는 배운 것은 반드시 다 왼 뒤에야 새로 배웠는데 워낙 열심으로 글을 읽은 덕분에 얼마 안 가서 사략 초권을 떼고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사략 전질을 다 뗐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엔 통감을 읽기 시작하여 전질을 다 읽었다. 기간은 불과 1년 남짓하지만 워낙 억척스레 글을 읽고 나니 이제 상부에 보고하는 공문은 더이상 남의 손을 빌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전종영의 이 결심과 끈기는 그가 평소에 불안해 하고 있던 부족한 점을 거뜬히 해결한 셈이다. 이 때 도암 이재가 어사로서 강계를 순시하기에 앞서 먼저 공문을 보내어 전종영을 미리 대기하게 하였는데 막상 와서 그를 접견해 본 이재는 그 풍채와 기상과 언변을 보고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전종영은 어사가 준 지필묵으로 그 지방의 문제점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그 대책도 조목조목 열거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였더니 여사 이재가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뒤이어 조정으로부텨 숨은 문무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어사 이재는 문인에 유생 황순승을 추천하고, 무인에는 서슴없이 전종영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전종영은 일약 벽동군수로 발탁되고 계속 승차하였다. 한 인간의 결심과 끈질긴 노력이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대를 이어 학업을 연마하여 훌륭한 선비가 된--윤거형 윤거형(?__?)의 호는 송파거사다. 만호(종4품 무관직)로서 영변에 살면서 더이상 높은 벼슬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글읽기를 좋아하고 행동을 바로 하여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칭송을 받고 있었다. 당대에 학문과 인품이 높았던 도암 이재가 암행어사로서 그곳을 순회할 적에 인연이 없어 상면하지 못한 것을 일생의 한으로 여겼다. 윤거형의 아들 윤제세도 아버지를 닮아 학업을 이었다. 윤제세에게 참봉 벼슬이 내려졌지만 이를 받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하던 중 도암 이재의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의 원을 아들이 풀어 준 셈이다. 윤제세의 호는 취암이며, 아버지와 함께 평안도 일대에서 선비 중의 선비라는 평을 들었다. 제비를 시제로 하여 대제학에 뽑힌--권유 권유(1633__1704)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퇴보, 호는 하계다. 현종 6년(166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대제학 추천이 있을 때 민점(1614__1680)이 권유를 추천하려고 하였는데 당시의 여론에 이서우(1633__?)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민점은 어느 날 여러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제비를 시제로 하여 운을 내고 말했다. "오늘 제비에 대한 시로써 여러분들의 시재를 시험하겠으니 속히 짓도록 하시오." 다른 선비들이 막 시상에 잠기는데 권유는 벌써 시를 완성하여 좌중을 압도하였다. 부리에 진흙을 물고 두보의 뱃전을 몇 번이나 스친 뒤에 한나라 궁궐에 들어가 우물(뛰어난 미인)이 되었느냐 나도 만약 너처럼 제비나 되었던들 모름지기 이 붓을 던지고 봉후나 찾을텐데 이 시가 나오자 모두 붓을 놓고 일어섰고 민점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권유를 일차로 추천하였다. 남인들은 명기(벼슬자리)를 아끼기 때문에 을사년 이후로 대제학은 오직 권유 한 사람뿐이었는데 서인은 대제학이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바로 이 점이 서인이 남인을 못 따르는 일단이라 할 수 있다. 숨차 헐떡이는 소를 보고 일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은--김주신 김주신(1661__1721)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하경, 호는 수곡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김주신은 아버지가 없는 것을 항상 한으로 여겨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남달리 부지런하였다. 밤이 늦도록 글을 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긴 어머니가 밤늦도록 글 읽는 것을 금하자 김주신은 밤이 늦은 시간엔 목소리를 낮추어 읽어서 어머니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언젠가 김주신은 아버지의 비석을 소등에 싣고 재를 넘은 일이 있었는데 ,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 너무도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면서 결심하였다.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소의 힘을 다 빼앗고 또 그것도 부족해서 그 고기마저 먹어 치우다니 말이 되는가!' 김주신은 그 뒤로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숙종 22년(1969)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자원서별검이 되었는데 딸이 숙종의 계비(인원왕후)가 되자 돈령부도정을 거쳐 영돈령부사에 이르고 경은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장악원 제조와 호위대장을 겸임했다. 시호는 효간이다. 착한 끝은 있는가? 늦팔자가 활짝 핀--김우항과 권 참봉 김우항(1649__1723)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제중, 호는 갑봉이다. 현종 10년(166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7년(1681) 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휘릉별검이 되었다. 이 때 함께 봉직한 참봉은 안동 권씨였다. 권 참봉은 나이 50에 살림은 넉넉했으나 홀아비였다. 김 별검과 권 참봉이 함께 번을 들었는데 마침 능침의 나무를 도벌하다가 잡혀 온 청년을 심문하였다. 잡혀 온 사람은 남루한 복장에 20여 세쯤 되는 청년이었다. 먼저 도끼와 낫, 지게부터 빼앗은 뒤에 매를 치려고 하니 그 청년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저에겐 70세의 노모와 과년한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날씨는 추운데 식량은 없고 눈은 쌓여 나무를 팔아 양식을 사려는 욕심으로 잘못하여 능침을 범했습니다." 권 참봉은 본시 후덕한 사람이어서 청년의 말을 듣고 나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김우항을 돌아보고 말했다. "사정이 딱하니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떻겠소?" 권 참봉의 제의에 김우항도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권 참봉은 청년에게 오히려 엽전 10꿰미를 내어 주고 압수한 연장과 지게를 돌려주면서 단단히 타일렀다. "이 돈으로 양식을 사서 노모와 누이동생을 잘 봉양하고 다음부터는 능침을 침범하여서는 안 되네." 그 청년은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런데 보름이 채 안 되어서 그 청년은 다시 붙들려 왔다. 권 참봉은 화가 많이 났지만 무슨 벌을 줄지는 내일 결정하리라 생각하고 그날 밤에 김 별검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런데 김 별검이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고 권 참봉에게 강요하였다. "동관(동료)께서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연세에 벌써 상처를 하셨습니다. 옛말에 사람이 아내가 없는 것은 대들보 없는 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 그 나무 도둑을 유심히 보았는데 결코 상놈이 아닌 것 같고, 또 그에게 과년한 누이동생이 있다고 했으니 참봉께서 만약 속현(아내가 죽은 사람이 다시 장가 드는 것)할 생각이 아주 없지만 않다면 내가 중매를 서리다. 동관의 의향이 어떻습니까?" 이 말에 권 참봉은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맘에 없는 것은 아니나 내 나이 많다고 거절한다면 봉변만 당하는 것 아니오?" "그 문제는 내게 맡겨 두시고 잠이나 자고 내일 아침에 봅시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김 별검은 하인을 보내어 그 청년을 데려와서 마루 위로 올라오게 한 뒤에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재범에겐 용서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어제 밤이 늦도록 권 참봉과 상의한 결과 너를 용서하기로 했으니 특별히 놓아준다. 그건 그렇고 듣자 하니 너에겐 시집 보낼 누이동생이 있다고 했는데 마침 권 참봉께서 상처하여 홀로 지내고 있으며, 살림 형편도 넉넉하여 두 집이 먹고 살 만할 뿐더러 근력이 아직은 건강하니 너의 의향이 어떠하냐?" 청년은 귀가 번쩍 뜨였지만 침착성을 잃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집에 노모가 계시니 가서 여쭈어 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의를 달 수 없는 대답이니 도리 없지 않은가? 김 별검은 맞장구를 쳤다. "암! 그래야지. 속히 가서 노모의 허락을 얻어 오게나." 김 별검은 청년에게 엽전 5꿰미를 주어서 보냈다. 청년은 가면서 생각하였다. '우리 같은 알거지가 살판나게 생겼는데 들어온 복을 찰 수야 없지. 또 권 참봉이란 분이 후덕한 군자니 얼마나 잘된 일인가!" 청년은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났다. 집에 닿기가 무섭게 노모에게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노모 역시 좋아하기는 아들과 마찬가지였다. 죽기보다 더 싫은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으니 망설일 리가 없다. 청년은 즉시 재실로 돌아가 김 별검에게 노모의 승낙을 전달했다 혼인은 재빨리 이루어졌다. 혼인에 따르는 일체의 비용을 권 참봉이 도맡은 것은 물론이다. 권 참봉은 재임기간이 만료되자 벼슬에 더 이상 생각이 없었다. 그는 새색시를 데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형제가 다 글재주가 있어 나이 겨우 17,8세에 향시에 나란히 합격하고 서울의 회시에 응시하여 형제 모두 합격했다. 한편 별검 김우항은 그 동안 삼사와 이조참판을 거쳐 경상감사로 부임했다. 김 감사가 안동지방을 순시하는 길인데 어떤 사람이 쪽지를 넣고 면회를 요청해서 만나 보니 옛 동관 권 참봉이었다. 김 감사는 옛날 휘릉에 있을 때를 생각하고 급히 만나 주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손을 마주잡고 해묵은 우정을 나누었다. 권 참봉은 김 감사의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 때 공이 아니었던들 이 늙은이는 오늘날까지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난 아들 형제가 진사시에 합격하고 내일이면 금의 환향하는 날입니다. 감사께서는 옛정을 생각하여 내일 그 자리에 왕림해 주신다면 우리 집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요 세상에서 기이한 인연이 될 것입니다." 김 감사는 축하한다는 말을 계속하면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튿날 김 감사는 약속을 지켜 많은 관료들을 대동하고 권 참봉의 집으로 가서 두 사람의 신은(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선배관료에게 하는 신고)을 청해 받고 운집한 손님들과 어울려 온종일 잔치를 즐겼다. 희색이 만면하여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주인 권 참봉은 김 감사에게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공은 이 사람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옛날 우리가 죄를 다스리던 바로 그 나무 도둑이오. 지금은 장가도 들고 아들도 있고 살림도 먹고 살만은 하답니다." 김 감사가 감영으로 돌아갈 뜻을 비추자 주인은 극력 만류하면서 간청했다. "오늘의 이 잔치는 다 공으로 인해서 차려진 잔치이니 제발 하룻밤만 유숙하면서 옛 우정을 나누어 봅시다." 주인의 청이 너무도 간곡하였으므로 김 감사는 그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주안상이 들어와서 술이 한 순배 돌았을 때 권 참봉은 무슨 말인지 할 듯하다가 말고 할 듯하다가 말고 하므로 궁금한 생각이 든 김 감사가 물었다. "주인장은 분명 내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지요? 서슴지 말고 어지 한 번 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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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러면 제가 이야기를 하지요. 저의 아내는 사실 오래 전부터 김공에게 결초보은할 은인이라고 늘 말해 왔지요. 뜻밖에도 김공께서 감사가 되어 이런 누추한 집에 오시게 되었으니...